32. 개성적인 서체로 사람들을 놀래운 김정희

(1786∼1856)
 

 

19세기 실사구시를 위주로 하는 실학사상가의 한사람이였던 김정희는 1786년 충청도 례산에서 판서 김로경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자는 원춘, 호를 추사, 완당이라고 하였으며 병조참판의 벼슬을 지냈다.

김정희에게는 출생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머니 유씨는 첫 해산이라 근심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열달이 훨씬 넘도록 애기는 배속에서만 꿈틀거릴뿐 나올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 두달, 석달… 유씨는 너무 놀랍고 안타까와 남편을 부여잡고 자기의 무거운 마음을 터놓았지만 남편 역시 무엇이라고 할말이 없었다.

《아마도 큰 장수가 태여날 모양이지. 조금만 기다려보기요.》

남편은 안해를 달래는수밖에 없었다.

애기는 14개월만에야 출생하였다. 온 집안이 그대로 경사이고 웃음이였다. 모두가 장수감이라고 좋아하며 야단들이였다.

이렇게 태여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더우기 무엇을 하나 시작하면 끝장을 볼 때까지 기어이 파고드는 직심스러운 성격으로 하여 부모들과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정희는 유학과 문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아버지의 직접적인 교육과 18세기 이름있는 실학자였던 박제가의 제자로 되여 여러 학문들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를 따라 이웃나라로 려행하게 되였는데 거기서 오래동안 련마해온 시와 글씨를 남김없이 보여주어 그곳 선비들과 관리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특히 당시 그 나라의 학자였던 옹방강, 완원 등과 안면을 익혔으며 그들에게 조선학자의 기풍이 어떠한가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옹방강은 김정희의 뛰여난 문장과 글솜씨에 온넋을 잃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있다가 《해동(조선)에도 이런 영특한 인재가 있었던가.》라고 감탄하였다. 그는 자기의 두 아들이 김정희와 친교를 맺게 하고 앞으로 글씨와 문장, 시를 비롯한 여러 면에서 서로 도와줄것을 굳게 약속하게 하였다.

그후 그들은 서면을 통해 자기들의 학문연구성과들을 통보해주었고 족자나 그림, 글씨도 교환하면서 친교를 끊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희는 1836년부터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결코 순탄치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린것을 변호하였다 하여 그리고 친구인 권돈인의 무죄를 나서서 증명해주었다고 하여 1840년부터 1852년까지의 사이에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랜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온 그는 1856년 70살을 일기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정희는 실학, 력학, 천문학, 음악, 지리 등 막히는데가 없이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으나 그가운데서도 서예가 특출하여 당대 우리 나라의 가장 뛰여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였다.

그가 이렇게 이름을 날릴수 있었던것은 력대 유명한 서예가들인 김생과 한석봉 등의 장점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시킨것과 관련된다.

김정희의 필체의 특징은 웅건한 글획과 박력, 자유분방한 필치, 기발한 구사로 예술적품격을 완벽하게 갖춘것이였다.

그가 얼마나 글씨쓰기에 전심전력하였는가 하는것은 《내가 70평생 글을 쓰면서 먹을 갈아 구멍을 뚫어놓은 벼루가 10개나 되였고 붓촉이 닳아 없어진것만 하여도 천자루가 된다.》고 말한데서 잘 나타나고있다.

후세사람들은 김정희의 독특한 필치를 그의 호를 따서 《추사체》라고 명명하였다.

현재 김정희의 《추사체》는 국내외의 여러 박물관들에 많이 전시되여있다.

조선미술박물관에는 《다리목에서 손님을 바라보니 눈이 옷에 가득히 덮였구나》, 《절의 비석을 찾아가니 구름이 짚신밑에 인다》, 《초가삼간도 비바람을 피할수 있구나》 등의 내용으로 된 김정희의 서예작품들이 전시되여있다.

이 글씨들은 어딘가 모르게 안온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가 하면 뢰성과 같은감이 들게 한다.

이런 서예작품을 낸 김정희에 대해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김정희는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으며 많은 서적을 읽었다. 공은 천품이 맑고 부드럽고 … 안정화평하여 남들과 더불어 놀 때는 화기애애하여 모두다 유쾌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으나 일단 정의에 관계되는 문제로 흑백을 가를 때에는 그의 언론이 마치 뢰성이나 칼로 내리치는것 같아 사람들이 떨게 하였으며 몸에 소름이 끼치게 하였다.》

김정희는 글씨도 잘 썼을뿐아니라 고고학과 금석학을 연구하여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에 대한 정확한 고증도 하였다.

김정희는 유명한 진흥왕순수비 4개중에서 북한산비와 황초령비를 발견하였고 북청지방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에는 원시시대의 돌도끼와 돌활촉을 수집하여 그 이름도 지금 부르는것처럼 《돌도끼》, 《돌활촉》으로 새롭게 명명하고 그것이 우리 선조들이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쓰던 생활도구라는것을 밝혀내였다.

그는 또한 전국에 널려있는 많은 금석문자유산을 수집연구하여 《해동금석목록》을 작성하였다. 뿐만아니라 서예창작경험과 선행서예에 대한 깊은 연구에 기초하여 서예의 기초리론과 서예기법에 대한 글을 담은 《완당집》을 내놓았다.

《추사체》를 남긴 김정희는 그림도 잘 그리였다.

조선미술박물관에는 《돌과 란》, 《묵죽도》, 《호수가의 정자》 등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들이 소장되여 전해지고있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던 김정희였지만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자기가 살던 시대적제한성을 극복할수 없었으며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한문으로 된 글자를 많이 남기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 호로 명명된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치를 개척하고 과학연구와 적극적인 문예활동으로 리조후기 과학문화발전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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