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법륭사의 금당벽화와 담징 (579∼631)
610년 아직도 찬바람이 부는 동해바다가의 어느 한 포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있었다. 떠나는 사람, 바래는 사람으로 흥성이는 포구로 가사를 단정히 입은 젊은이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조용히 들어서고있었다. 옆에서 들썩이는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머나먼 바다건너를 바라보며 발을 옮기는 그의 걸음은 어쩐지 가볍지 않았다. 일행은 몇이 안되였고 차림도 짐도 간소했다. 그들이 오르자 배는 서서히 포구를 벗어났다. 파도를 헤가르며 동쪽으로 미끄러져가는 배전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을 날리며 멀어져가는 조국땅을 바라보며 서있는 홍안의 젊은이! 그가 바로 고구려의 이름난 승려이며 화가인 담징이였다. (아! 나는 과연 언제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것인가! 외적의 준동이 심하여 나라정세도 긴장한데…) 동방의 강대국인 고구려에 대한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있던 주변의 외적들은 598년 10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에 덤벼들었다가 된타격을 받고 쫓겨났으나 아직 교훈을 찾지 못하고 더 큰 침략을 준비하고있었다. 이것을 잘 알고있었던 그였기에 원쑤와의 싸움에 자기 한몸 바치지 못하고 기약할수 없는 이 길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어느덧 눈굽에는 물기가 어렸다. 그러나 아니 갈수 없는 길이였다.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의 초청을 수락하였고 자신은 임금의 어명을 받은 몸이니 달리할수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세나라의 영향으로 아스까문화가 고조기에 이르고있었다. 아스까문화는 적지 않게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나라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발전된 문화를 전파시키면서 창조된것이였다. 여기에서 특히 고구려의 영향은 대단한것이였다. 원래 아스까란 어원은 조선어의 안숙(편안한 보금자리)이라는 말에서 나온것인데 그것은 조선반도에서 일본땅에 진출한 조선사람들이 정착한 지대이름을 의미한다. 579년에 고구려에서 태여난 담징은 어려서부터 여러 학문뿐아니라 남달리 그림에 취미를 가지고 무엇을 하나 보아도 그저 스치지 않고 다시한번 재현해보고야마는 이악한 성품을 지니고있었다. 그는 30살에 불교경전에 정통하였을뿐아니라 유교교리도 꿰뚫었고 미술분야에도 조예가 깊어 고구려에서 인재로 그 이름이 높았다. 그가 일본에 도착하자 야마또왕정에서는 그를 국빈으로 맞이하였다. 당시 야마또왕정의 실권은 성덕태자에게 있었는데 그는 595년에 고구려에서 승려 혜자가 오자 그를 자기의 정치고문, 학술고문으로 등용하고 모든 문제를 그와 론의하였으며 그의 의견을 들어 처리하군 하였다. 610년 담징이 일본에 가게 된것도 바로 혜자의 영향으로 이루어진것이였다. 담징일행을 맞이한 성덕태자는 이미 3년전에 완공된 법륭사가 당신들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절건물에 벽화를 그려줄것을 부탁하였다. 일본의 옛 문헌에 의하면 법륭사는 일본의 집권자였던 성덕태자가 고구려승려 혜자를 스승으로 삼아 불경을 열심히 배워 불교를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지은 절인데 607년에야 완공되였다. 이렇게 건설된 절에 단청을 하지 않으니 절로서의 품위가 살아나지 않았다. 그런데 벽화를 그리자고 해도 당시 일본에서는 그것을 그려본 화가가 없었다. 그리하여 성덕태자는 고구려에 화가를 초청하게 되였고 고구려왕은 담징을 보내주었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담징은 바다를 건너와 이 절의 단청과 벽화들을 맡아 그리게 되였으며 그것이 바로 후세에 전해진 아스까시대미술의 대표작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금당벽화이다. 금당벽화의 그림도 신비롭지만 이 그림에 깃든 담징의 높은 애국심이 유명한 일화로 전해져 더더욱 명화로 빛을 뿌리고있다. 담징은 법륭사에 가서 벽화를 그릴 준비를 끝마친 후에도 인차 그림을 그리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기여 시간만 보내고있었다. 대상만 맡으면 언제나 단숨에 붓을 휘둘러 사람들을 놀래우군 하던 그였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속에서는 의문이 더해갔다. 그러나 그가 오래동안 붓을 들지 못하고있는것은 뒤에 두고온 사랑하는 조국땅 고구려에 대병력의 침략자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기때문이라는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고구려의 참된 아들이였던 그의 생각은 준엄한 시련을 겪고있을 바다건너 조국에로 끝없이 달리고있었다. (조국이 대적과 맞서 어려운 싸움을 하는데 내 어이 여기서 편히 그림을 그릴수 있겠는가! 조국의 운명이 경각에 다달았는데…) 조국에 대한 근심이 그의 머리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조색판을 들어도 조색이 되지 않았고 붓을 들어도 손끝에 힘이 가지 않았다. 담징이 번민으로 속을 태우면서 여러날을 보내고있을 때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법륭사의 중들속에서 비난의 뒤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이 정말 고구려의 유명한 화가가 옳긴 옳은가. 아직도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있는것을 보면 분명 그는 가짜화공인가부다.》 중들의 비난을 들으면서도 담징은 붓을 들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주지가 달려와 소리치는것이였다. 《여보시오, 기뻐하십시오. 고구려에 침입해왔던 외적 300만 대군이 모두 전멸되고말았다오.》 《아, 그게 정말이요?!》 생기를 잃고 누워있던 담징은 벌떡 일어나 다우쳐 물었다. 주지는 대답했다. 《사실이라오.》 그것이 사실이라는것을 알게 된 담징은 기쁨을 금치 못해하더니 다음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맑은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몸차림을 단정히 한 다음 절에 내려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사랑하는 조국인민들이 300만 대군의 침략자들을 쳐물리쳤다는 환희와 긍지에 가슴부풀고 온몸에 열정이 솟구쳐올라 붓을 쥔 그의 손은 학과 봉황이 춤을 추듯, 청룡과 백호가 구름을 헤가르며 하늘을 달리듯이 움직이였다. 그리하여 금당의 12개 벽면과 천정밑의 20개 작은 벽에는 황홀하고 기백있는 그림들이 그려졌다. 금당벽에 그림이 그려졌다는 소식은 삽시에 퍼져 수많은 사람들과 중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벽화를 보고 너무도 황홀하여 《아니, 저것이 사람이 그린것이 맞소?》 하고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 말에 담징은 《이 벽화가 잘된것은 나의 그림솜씨가 신비로와서가 아니라 바로 그림에 고구려의 얼이 깃들어있기때문이요. 그 어떤 대적도 굽힐수 없는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용감하고 강의한 고구려사람들의 얼이 있어 이 벽화가 이렇게 완성될수 있었소.》라고 대답하였다. 이 이야기는 담징이 자기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그대로 말해준다. 담징이 그린 법륭사금당벽화는 4개의 큰 벽면과 8개의 작은 벽면에 그려진 큰 규모의 벽화이다. 12폭의 벽화가운데서 아미타정토상과 협시관음보살상은 가장 우수한 작품들이다. 관음보살상은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부드럽고 소박하게 형상되여있다. 풍만하면서도 균형이 잡힌 몸매와 그우에 휘감은 얇은 옷주름의 부드러운 흐름, 《여의주》를 가볍게 쥐고있는 손의 생동한 모습 등은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여있다. 또한 밝고 부드러운 얼굴에 가볍게 다문 입술, 약간 내리뜬 눈 등은 녀인의 생동감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있다. 그리고 한손에 쟁반을 들고 날개옷자락을 가볍게 날리면서 하늘을 나는 비천의 모습도 볼수 있다. 그림은 능란한 필치와 아름다운 색조화로 하여 매우 화려한감을 준다. 뿐만아니라 그림은 구도가 째이고 매개 인물들의 얼굴세부표정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되여있다. 그 형상수법이 독특하고 세련되여있으며 색채가 선명하고 인물들의 형상이 생동한것으로 하여 그림은 세계중세회화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고구려화가 담징의 이름이 벽화의 대명사로 불리워지고있는바 극장의 면막을 《돈죠(담징)》라고 부르고있는것도 다름아닌 여기서 유래된것이다. 일본에서 보배로, 국보로 전해져온 법륭사금당벽화는 아쉽게도 1949년 화재로 건물과 함께 불에 타 없어지고말았다. 그러나 이 벽화는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운강석굴과 함께 동양의 3대미술작품으로 알려져있다. 그후 일본에서는 금당벽화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사회적목소리가 높아지자 1968년에 금당을 다시 짓고 벽화원본을 찍은 사진에 기초하여 벽화를 《복원》해놓았으나 담징이 그린 원화에는 도저히 견줄수 없는 그림이였다. 이와 같이 담징은 일본에서는 최초로 되는 사원벽화인 법륭사금당벽화와 같은 걸작품을 창작함으로써 고구려벽화미술의 우수성을 남김없이 과시하고 일본의 미술발전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