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풍경화의 높은 경지를 이룩한 심사정

(1707∼1769)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어느해인가 조선미술박물관을 현지지도하시면서 박물관에 전시된 옛 그림들을 돌아보시다가 심사정이 그린 《여름의 산막》을 보시고 당시 우리 나라 농촌의 풍경을 잘 형상하였다고 평가해주시였다.

화면을 보면 뒤에는 산이 있고 록음우거진 산골짜기를 따라 맑은 물이 감돌아흐르는데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둘러선 아늑한 숲속에 담장을 두른 대문옆 다락우에서 글공부에 여념이 없는 선비가 앉아있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담장안에는 한쌍의 백학이 거닐고 담장밖에서는 나무단을 안은 두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돌층계를 오르고있다.

깊은 산속의 경치가 얼마나 생동한지 마치 돌돌 흐르는 시내물소리와 청아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듯 하다. 이 그림의 웃쪽에는 《흥에 겨워 창가에서 붓을 휘두르다》라는 제화시가 붙어있어 그림의 흥취를 한껏 돋구어준다.

산막주변의 나무들과 산굽이를 에돌아 사라진 길이 정다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데 화가는 체험을 통하여 축적된 생활감정을 이 한폭의 그림에 담았다.

그림에는 아름다운 산천에 대한 화가의 뜨거운 사랑의 감정과 재치있는 묘사능력이 잘 반영되여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 《여름의 산막》은 당시 우리 나라 농촌의 모습을 진실하게 그린 심사정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리조회화사를 돌이켜보면 뚜렷한 개성으로 우리 민족의 화단에서 독자적면모를 보여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심사정도 그 대표적인물들중의 한사람이였다.

1707년에 태여난 그는 자를 이숙, 호를 현재라고 불렀는데 문장과 그림으로 이름났던 아버지 심정주와 포도와 인물을 잘 그린 외할아버지 정유승의 영향하에서 배우면서 그림법을 빨리 터득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장과정에 대하여 《병세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여있다.

심사정은 어릴 때 벌써 스스로 물체를 형상하여 그릴줄 알았고 모난것, 둥근것을 그렸다. 어릴 때 정선의 제자로 되여 수묵산수화를 배웠는데 옛날사람들의 화법을 연구관찰하여 곧잘 해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50년간 붓을 놓은 날이 없었으며 육체가 쇠약하여도 그림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이름이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그렇듯 심사정은 그림에 전생애를 바치였고 그래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였다고 할수 있다. 심사정이 죽었을 때 집이 가난하여 장례도 치르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친구가 여러 사람들로부터 부조금을 모아 장례준비를 하였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그려도 살아움직이는 대상을 그리기 위해 애써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화풍에 대하여 당시 그림평론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던 강세황은 《현재는 그림에 있어서 능숙하지 않은것이 없었으며 그중 화조(꽃과 새), 초충(풀과 벌레) 등을 특출하게 잘 그렸다. 그 다음으로는 령모(짐승)를, 그 다음으로는 산수를 잘 그렸다. 특히 산수화를 그리는데 공을 들였으며 인물화는 그의 장기가 아니였다.》고 평하였다.

현재 심사정이 그린 대표적인 작품들로서는 《여름의 산막》, 《꽃과 나비》, 《매화를 찾아서》, 《겨울경치》 등 30여점이 전해져오고있다.

《겨울경치》는 높이 솟은 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선 골짜기, 폭포처럼 흐르는 시내물, 산길목에 들어앉은 초라한 초가집을 그려 여기에서 산을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독한 감정을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다 자연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있으나 자연의 미에 대한 화가의 감정이 보다 높이 표현되였다.

이에 대하여 어느 한 력사책에서는 《심사정은 산수를 잘 그렸는데 화풍이 매우 묘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와 함께 《꿩과 매》는 수묵담채로서 바위우에는 무엇을 노리는 큰 매를, 아래에는 겁에 질려 웅크리고있는 꿩을, 긴장감을 주기 위하여 화면중간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우로 강하고 률동적인 굵은 선을 이루는 나무줄기와 놀라서 어지럽게 날아가는 참새들을 그리였다.

심사정은 섬세한 필치보다도 자유분방한 필치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필치는 그 어떤 틀에 구속되여있지 않으며 묘사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고있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식의 독자적인 면모를 화단에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독특한 개성으로 일관된 그의 작품은 국내는 물론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본인도 모르게 일부 관료들의 돈벌이수단으로까지 되였다.

어느해인가 우리 나라에 와있던 다른 나라의 사신이 우연한 기회에 심사정이 그린 그림을 보게 되였다.

그림은 화창한 봄날 풀밭과 곤충들의 모양을 생동하게 묘사한것이였다. 화면중심에는 한그루의 휘여진 꽃나무가 보기 좋게 뻗어올랐는데 그 줄기는 물기를 머금은듯 생생하고 풀숲을 향해 방금 뛰여가려는 방아깨비가 그려져있다. 그리고 연한 꽃잎들은 울긋불긋하게 형상되여있고 그 나무잎에 가리워 반쯤 드러난 연분홍꽃도 아릿다운 자태를 뿜고있다. 푸른색계렬이 주색으로 된 화면에 붉게 물든 산딸기의 색채적조화는 아주 매혹적이며 색이 짙은 범나비의 묘사 또한 그것대로 화면의 조형미를 살리고있다. 그림은 몰골기법을 위주로 하여 따사로운 봄날 갖가지 꽃과 풀이 어울린 자연속에서 곤충들의 생태적모양을 생동하게 묘사하고있었다.

사신은 그림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오래동안 들여다보더니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누가 그린 그림인가고 물었다. 통역관이 현재 심사정이 그린 그림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심사정의 그림들을 자기 나라에 가져다 팔면 큰 폭리를 볼수 있다고 타산하였다. 그리하여 동행한 우리 나라 관리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여주면서 심사정의 그림들을 얻어줄것을 부탁하였다. 그의 엉뚱한 속타산을 알리 없었던 관리는 사신이 아마 심사정의 그림에 매혹되여 그것을 구입해가지고 자기 나라로 가려는것으로 생각하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승낙하였다.

며칠후에 심사정을 찾아온 관리는 《외국사신이 자네의 그림을 보고 칭찬이 대단한데 그한테 선물도 할겸 그림을 그려줄수 없겠나?》 하고 물었다. 심사정이 그냥 가만히 앉아있자 또다시 관리는 《자네의 그림을 가지고가서 자랑하려고 그럴걸세.》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심사정은 고향산천의 아름다움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즉시 붓을 들었다. 그는 시간도 없고 그림을 재촉하는 관리의 의견도 있고 해서 그림을 대충 그려주었다.

사신은 그림을 보고 자기의 소망이 실현되였다고 기뻐 어쩔줄 몰라하였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사신은 거리에 심사정이 그려준 두폭의 풍경화를 내다걸었다. 그 나라에서는 당시 권세있고 돈많은자들이 자기의 위세를 뽐내려고 많은 그림들을 사다가 집안을 장식하는 풍조가 돌고있었다.

저자거리에 기묘한 그림이 걸려있다는 소문이 온 시내에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심사정의 그림들은 어느 돈많은 사람이 거액을 주고 사게 되였는데 그는 명화를 손에 쥔것이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고 한다.

후에 다른 사람이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오게 되였는데 그는 심사정의 그림을 얻어다가 팔아먹은 이전 사신을 찾아가 뢰물을 먹이며 그의 그림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하여 캐물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는 자기도 조선에 가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심사정의 그림을 얻으리라고 속다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왔던 사신과 꼭같은 방법으로 심사정의 그림들을 가져다가 거리에 내다팔아 많은 리득을 보았다.

당시 그 나라의 고관대작들과 부자들의 집들에 많이 걸려있는 심사정의 그림들은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넘어가 큰 파문을 일으켰던것이다.

심사정은 그처럼 자연을 사랑하고 생활을 사랑하였을뿐아니라 당시 화단에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꽃피우며 일생을 그림창작에 전심전력하였으나 죽을 때까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것은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짓밟혔던 당시 봉건사회의 불합리한 현실이 낳은 결과였다.

이처럼 심사정은 조화롭고 세련된 필치로써 자기의 독자적인 풍경화의 경지를 이룩해놓은 재능있는 미술가였다. 때문에 력사에서는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을 당대 3재라고 부르며 리조시기 화단을 빛내인 화가들로 자랑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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