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을 그대로 그려낸 조영석

(1686∼1761)
 

 

조영석은 우리 나라 중세회화사에서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한 사실주의화풍의 선구자로 이름떨친 화가였다.

그는 자를 종보, 호는 관아재, 석계산인이라고 불렀으며 벼슬은 도정을 지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매우 도도하였을뿐아니라 사리에도 밝았다. 그리고 생활에서도 항상 깨끗하고 단정하였다.

특히 그림그리기에서 특기를 발휘하였는데 그의 창작활동에서 특징적인것은 량반사대부들의 고습적인 화풍에서 대담하게 벗어나 시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것이였다.

그가 자기의 화폭에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을 담아낼수 있었던것은 자신이 체험한 곡절많은 당쟁의 력사와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조영석이 출생하던 17세기말은 우리 나라 력사에서 당쟁이라고 불리우는 봉건통치배들의 추악한 권력싸움이 그 어느때보다도 격렬하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리조 5백년사에 당쟁이 그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중의 한 파벌에 속했던 조영석은 일시 유리한 기회가 조성되여 중앙정부에 쉽게 진출할수가 있었지만 그칠줄 모르는 당파싸움에 불만을 가지게 되였으며 결국 시와 그림에 취미를 붙이고 문예활동에 참가하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서울에는 선비들이 모인 문예단체가 조직되여있었는데 정계에서 소외되거나 그에 불만을 품은 량반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것과 같은 문예활동을 벌리고있었다. 그 단체는 서울 인왕산밑에 자리잡고있었다.

조영석은 바로 이 문예단체에 들어가 문예활동을 벌리는 과정에 당시 우리 나라에서 사실주의풍경화의 일인자였던 정선과의 친분을 두터이 하면서 자기의 그림에서 산 인간들의 형상을 묘사하는데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침략자들을 쳐물리친 우리 인민의 임진조국전쟁, 1627년, 1636년의 두차례에 걸치는 외적들을 쳐물리치는 투쟁과 진보적인 사상조류인 실학이 발생발전하고있던 당시의 현실은 조영석으로 하여금 시대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주제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이 시기 회화에서는 인물주제화가 회화의 한 분야로 확고히 등장하여 자기의 지위를 날로 뚜렷이 하면서 인간의 다양한 생활을 폭넓게 담아나가고있었다.

이러한 그림을 일명 풍속화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다양한 생활을 직접 묘사대상으로 한 그림이다.

조영석은 관료생활을 하는 과정에 불합리한 봉건사회에 대한 쓰디쓴 환멸을 느끼게 되였으며 이러한 감정은 그로 하여금 근로인민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생활을 회화의 기본주제로 삼아 창작활동을 벌려나갈수 있게 하였다.

조영석이 사실주의화풍의 선구자로 될수 있은것은 윤두서, 정선의 좋은 영향을 받은것과도 중요하게 관련되여있었다. 특히 윤두서는 우리 나라 회화분야에서 사실주의그림의 출현에 커다란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18살이나 아래인 조영석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였다.

이와 함께 조영석은 문예단체에서 정선과 창작활동을 벌리는 과정에 산 인간들의 생활을 반영한 작품들을 그릴 확고한 결심을 굳히였다.

이에 대하여 조영석은 후날 《산수화에서는 정선이 나보다 한수 우에 있었지만 정교하고 생동하게 묘사한 인물화의 경우에는 내가 더 낫다.》고 긍지에 넘쳐 말할 정도로 인간생활묘사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높았다.

하기에 옛 력사책인 《송천필담》에 의하면 《관아재가 그린 인물화는 준엄하고 륜곽이 뚜렷하며 깨끗하고 맑으며 황홀하다.》고 평가하였으며 또 다른 책에서는 《본래 인물을 잘 그렸고 겸하여 산수를 잘 그렸다. 그가 금강산에서 돌아온 후부터 그 화법이 더욱 새로운 경지에 들어갔으며 명작도 많았다는 소식이 있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집을 백악산아래에 정하고 시인 자천 리병연, 화가 겸재 정선과 이웃하고 살면서 옛 그림평가하기를 즐겼으며 날마다 시와 그림을 주고받고 하였는데 그들의 문체와 풍류는 당시에 두각을 나타내였다.

지금까지 조영석이 그린 인물주제화로는 수십여점이 알려져있다. 여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것이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모습을 반영한것들인데 조영석은 이러한 그림들을 하나로 묶어 《사제첩》이라고 명명하였다.

《사제첩》이란 말그대로 사향노루향기냄새가 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로서는 《절구질하는 녀인》, 《새참》, 《말징박기》, 《그림보는 로인들》 등을 들수 있다.

그림 《절구질하는 녀인》은 저고리에 쪽치마를 입고 절구질하는 녀인을 화폭의 중심에 놓고 그 뒤배경에 나무와 집의 한 모퉁이를 그려넣었으며 벼짚이영을 올린 부엌과 나무의 일부만을 묘사하고 그옆의 빨래줄에 저고리를 걸어놓았는데 이것은 화면에 등장시킨 녀성이 바쁜 집안일로 허리펼 사이가 없다는것을 더욱 부각시키고있다.

그림은 당시 우리 나라 농촌 그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 녀성의 모습 그대로이며 절구질하는 자세와 모양도 로동에 숙련된 모습 그대로이다. 간결한 화면이지만 인물들의 형상에 적절한 채색을 배합한것으로 하여 로동에서 단련된 근로녀성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안겨오고있다.

조영석이 자기의 화폭에 녀성을 등장시키고 그의 근면한 로동생활을 사실그대로 보여준것은 그가 산 인간형상을 매우 중요시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림 《그림보는 로인들》은 크지 않은 화폭이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여러명의 인물들을 평범한 구성속에서 드러내보이고있다.

조영석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그가 정선, 윤두서와 함께 백악산아래서 그림그리기를 한창 하고있을 때 이미전부터 안면이 있던 로인나이에 이른 서울의 선비들을 잠간 만나게 되였다.

그들은 정선, 조영석이 그린 여러점의 작품들을 보면서 서로 제나름대로의 주장을 펴보이며 그 우단점을 력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조영석이 정력을 다 바쳐 그린 근로인민의 생활을 반영한 한폭의 그림앞에서는 서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영석이 그들에게 어서 의견을 줄것을 부탁하였지만 다른데서는 말을 많이 하던 그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 있었다. 몇시간이 지나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야 선비들은 그 그림을 놓고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조영석은 이 선비들이 왜 그림을 보고 아무말없이 돌아갔는지 알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영석은 선비들의 이러한 모습을 머리에 새겨넣었다가 그림을 그리게 되였던것이다.

그림에는 그림을 펴놓고 서로 감상하며 의견을 주고받는 로인들을 형상하였는데 거침없이 죽죽 그어내린 긴 옷자락들은 형태묘사가 진실하고 얼굴모양도 산 인간모습 그대로여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품게 하고있다.

이 그림은 《다섯 늙은이가 그림을 보고 관아재가 글씨를 쓰네》라는 자필주석까지 붙어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집중시키고있다.

조영석은 또한 《농경도》와 같이 우리 인민의 민족적생활풍습을 반영한 그림들도 창작하였다.

그림 《농경도》에서 조영석은 봄에 땅을 뚜지는 근면한 농민과 지붕우에 올라가 집수리를 하는 농민,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서 등에 지고 마을앞 개울가의 돌다리를 건느는 여러명의 농민 등을 형상하여 예로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민속적인 생활풍습을 사실그대로 보여주고있다.

그림에는 근로하는 인민들의 모습과 함께 나무그늘밑에 앉아서 농민들의 일을 감독하고있는 량반지주의 모습도 그려져있다. 그림에 그려진 량반지주의 모습은 뒤에 그의 시중을 드는 두명의 시동을 등장시킨것으로 하여 그의 착취적본성을 더욱 뚜렷이 부각하고있다.

한마디로 조영석의 그림들은 근면하고 성실한 로동생활을 벌려나가는 인민들의 모습을 형상대상으로 선택하고 화폭에 옮긴것이 특징적이다. 물론 조영석의 그림들에는 량반사대부들의 감정을 반영한 그림들도 있다.

이것은 그가 량반출신으로서 어디까지나 《량반으로서의 체면》을 가지고있은것과 관련되여있다.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선비였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그가 의녕에 있을 때 봉건정부에서는 왕의 화상을 그리는 중요한 일에 조영석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조영석은 예로부터 지켜오는 선비의 《지조》때문에 갈수 없다고 이를 거절해버렸다.

당시 왕의 어명을 거절하는것은 사형까지도 받을수 있는 어마어마한 일이였으나 조영석은 이를 거절함으로써 량반사대부들의 미움을 샀을뿐아니라 벼슬까지 박탈당하였다.

그후 1748년에 숙종의 화상을 그리는 작업이 제기되였을 때에도 봉건정부는 조영석을 대궐에 불러들여 그림그리는 일을 감독할데 대한 일을 맡겼다. 그때 대궐에 들어간 조영석은 화필을 직접 잡고 그림을 그리라고 한 영조의 요구를 또다시 거절해버렸다.

이 사실만 놓고봐도 당시 조영석이 옛글에도 있는것처럼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어떤 사람의 요구라도 끝내 거절》해버리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것을 알수 있다.

자존심이 강하였던 그였지만 소심한 측면도 있었던지 아니면 무엇때문인지 《사제첩》에 들어있는 인민들의 다양한 생활을 묘사한 소묘풍의 풍속화들을 남에게 보이기 매우 꺼려하였다. 그가 얼마나 이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않았던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을 때까지도 자기 자식들에게 《이 그림을 남에게 보이지 말라! 이것을 어긴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훈시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다는 알수 없지만 이러한 소심성은 조영석으로 하여금 봉건통치배들의 가혹한 억압과 착취상을 보여주는 그림들을 그려내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조영석이 량반출신으로서의 세계관적제한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영석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량반선비들의 관념론적이며 현실도피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생활을 중요시하였다.

하기에 그의 그림을 본 옛사람들은 《화면전체의 묘사기능을 갖추고 선비그림의 우아함을 떨쳐내였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식견이 높고 형상표현의 정확성이 뛰여나 천지자연의 조화에 비길만 하다. 또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는데 그 대상을 보면 어느것이 진짜인지 알수 없을 정도이다.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이라든지, 사람들의 표정도 신비스러울 정도로 생동하게 드러냈는데 터럭(털) 하나 틀림이 없다.》고 하면서 《그의 인물주제화는 당시 그림의 표본으로 될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을뿐아니라 그림평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어느해인가 조영석은 이웃나라의 이름있는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단지 이 그림은 옛 명화를 그대로 옮겨 그려놓았을뿐이다. 오직 현실속에서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만 살아있는 그림으로 된다.》고 평하였다.

조영석은 인민들의 다양한 생활을 인물주제화에 담아냄으로써 18세기 중엽 우리 나라 사실주의화풍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홍도, 김두량에 의하여 창작된 인민들의 다양한 생활과 봉건통치배들의 억압과 착취상을 보여주는 인물주제화들은 다 조영석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것이였다.

강한 자존심과 함께 특이한 소심성도 겸비했던 사실주의화가 조영석은 인물화분야에서의 독특한 개성으로 하여 우리 나라 중세회화사에서 당당한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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