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금강산을 그대로 풍경화에 담아낸 정선

(1676∼1759)

 

 

금강산을 사랑하고 금강산그림을 많이 남긴 정선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날 그의 집에서 귀한 손님을 맞게 되였는데 그림밖에 모르는 가난한 살림이라 안해는 치마가 없어 할수없이 이웃집에 가서 비단치마를 빌려입게 되였다.

그런데 한창 상을 차려들고 나오던 안해는 그만 문턱에 발이 살짝 걸리는 바람에 국그릇이 기울어져 치마폭에 국물이 튕겨 얼룩지게 되였다.

《아이, 이를 어쩌나. 이 치마는 어찌한담.》

안해의 얼굴은 금시 홍당무로 되였고 손님생각보다도 치마를 더럽힌 걱정이 더욱 컸다.

손님이 돌아가자 안해는 치마를 급히 벗어 행주로 닦아도 보고 물로 씻어도 보는 등 무진 애를 다 썼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치마를 돌려줘야 하겠는데 이를 어쩔가?》

새로 사자고 해도 그럴 살림형편이 못되여 참으로 난처한 일이였다.

안해는 방구석에 앉아 한숨만 짓고있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정선은 안해에게 사연을 물었다.

《어찌된 일이요? 한숨만 짓고있으니.》

《글쎄 이웃집에서 치마를 빌려입었는데 그만 국물을 엎질러서 얼룩이…》

안해의 말을 덤덤히 듣고있던 정선은 이왕 그렇게 된 일이니 치마를 뜯으라고 했다. 녀인은 큰일이나 난것처럼 안된다고 하였지만 남편은 뜯으라고 다시 일렀다.

《장을 먹어도 내가 한독은 더 축냈겠는데 남편의 말을 들어 랑패가 없을게요. 어서 뜯소.》

그리하여 안해는 남편이 속궁리가 있는것으로 알고 그를 쳐다보면서 치마를 뜯어 깨끗이 빨아 말리웠다. 하지만 얼룩자리는 그냥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것을 본 정선은 의미있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며칠 아무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뜨락만 오가는것이였다.

안해는 임자가 치마를 찾을것만 같아 속이 조마조마했으나 정선은 무엇인가 골똘히 사색에만 파묻혀있을뿐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며칠이 지나 해가 밝게 비치고 새들이 정답게 지저귀는 이른아침 정선은 기분이 좋아 푸른 하늘을 넋없이 바라보더니 안해를 찾았다.

《여보, 그 치마를 얼른 가져오오.》

그는 치마폭을 마루에 반듯이 펴고 천천히 붓을 들어 거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드디여 치마폭에는 금강산 1만 2천봉우리가 거연히 솟아오르고 비단필을 늘인듯 한 폭포수들과 그 깊이를 헤아릴수 없는 소들이 잠간사이에 나타났다.

힘을 주어 붓을 당기기만 하여도 그 얼룩자리는 씻은듯 자취를 감추고 천하기암절벽이 하나씩 솟아오르는데 정말 희한한 광경이였다. 옆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안해조차도 넋을 잃었다.

정선은 치마를 뜯어 빨아놓은 후 이 며칠사이에 그림의 구도를 구상하였던것이다.

오늘 바로 머리속에 그려졌던 금강산이 치마폭에 그대로 옮겨졌다. 그후 며칠이 지나 치마를 빌려주었던 옆집 녀인의 남편이 볼일이 있어 정선의 집에 잠시 들리였는데 들어서자바람으로 벽에 걸린 그림에 그만 정신이 온통 팔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금강산을 그대로 옮겨놓은것 같습니다.》

그는 참으로 솜씨가 놀랍다고 칭찬에 칭찬을 거듭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외국의 어떤 사람이 <원컨대 고려국에서 태여나 금강산을 단 한번이라도 보고 죽는다면 한이 없겠다.>고 하였는데 이 그림만 보아도 우리 나라 금강산이 천하명산인줄 알게 될것입니다.》

그러자 정선은 자기의 구차한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사실 금강산을 비단천에 그리고싶었는데 좋은 비단이 없어 그리지 못하고있었지요. 그런데 댁의 부인의 치마가 우리 집에 와있는것을 보고 그림그릴 생각이 간절해 주인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금강산 1만 2천봉우리를 옮겨놓았으니 이 딱한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아니 무슨 말씀을… 그 치마가 이 그림의 비단천이 되였다면 정말로 다행한 일이옵니다.》

정선은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고는 그림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옆집 주인은 굳이 사양하는것이였다.

《비단치마는 내 집의것이라 하더라도 이 그림으로 말하면 천하의 둘도 없는 보물이니 한폭의 비단을 어찌 보배에 비기오리까? 아니됩니다.》

하지만 정선은 좋은 비단에 금강산을 그리고싶던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더 바랄것이 없다고 하면서 기어이 치마를 주인에게 돌려주고야말았다.

그후 정선의 안해가 그와 같은 그림을 또 그려달라고 하자 그림은 그렇게 함부로 그리는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정선은 1676년 몰락한 량반의 아들로 출생하였는데 자를 원백, 호는 겸재, 란곡이라고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다보니 정선은 어릴 때부터 궂은일, 마른일을 가림없이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모든것에 개의치 않고 그림에 뜻을 두고 몰두하였다.

그는 짬나는대로 붓을 들었고 일을 하다가도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을뿐아니라 밤에도 그림에 열중한 나머지 밤을 지새우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림은 그릴수록 더 그리고만싶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을 그리고싶은 마음은 간절하였다.

자기가 나서자란 고향산천을 바라볼 때 이처럼 아름다운 고장에 태여난 긍지로 가슴이 흐뭇해왔다.

《야,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구나!》

이렇게 속으로 말하면서 한생 이 산천만을 그리리라 속다짐하였다.

그 시기 량반선비들의 그림을 보면 술이나 마시면서 제 흥에 겨워 현실에 있지도 않는 추상적인 산수화를 그려놓는것이 하나의 풍류로 되였었다.

그러나 정선은 그들과는 달랐다. 그는 실지 이 나라의 산발을 누비며 정말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는 산천을 그대로 화폭에 재현하기에 힘썼다.

하루종일 일을 하다가도 밤이면 등잔불밑에서 낮에 본 풍경들과 자기가 받은 인상을 더듬으면서 그림을 그리군 하였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재능은 이웃에 살던 김창집이라는 사람의 소개를 받아 도화서에 들어가 화원생활을 할 때 더욱 발휘되였다. 물론 량반출신이 도화서 화원생활을 한다는것은 드문 일이였다. 그것은 전문적인 화가를 천시하는것이 하나의 사회적풍조로 되여있던 이 시기에 량반출신이라면 이런 직업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정선은 당시 이러한 사회적풍조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일생을 그림그리는데 모든 정력을 다 바치였다.

정선은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경치를 보여주는 사실주의적풍경화들을 많이 그렸는데 《박연폭포》, 《로적봉》, 《구룡폭포》, 《옹천의 파도》, 《금강산전도》, 《만폭동》, 《옥류동》, 《너럭바위》, 《인왕산》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17세기이전까지만 하여도 산수화분야에서는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자연풍경을 묘사하는것이 아니라 상상화나 남의 나라 자연풍치를 묘사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그러나 정선은 그런 경향을 따른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민족적정서에 맞는 풍경화를 창작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마침내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던것이다.

당시 정선이 이러한 그림들을 그릴수 있었던것은 자기를 도화서 화원으로 추천해준 김창집의 동생 김창업과 교제하는 과정에 그에게서 실학사상의 영향을 직접 받게 된것과 함께 당시 사실주의그림을 그리는데 앞장섰던 윤두서를 비롯한 진보적인 화가들과 접촉하는 과정에 그들의 사실주의적창작기풍을 그대로 본받았기때문이였다.

그의 사실주의적창작방법은 옛글에 《정선의 화풍은 옛것을 모방하지 않고 자기의 식대로 받아들였으며 그의 필법은 무릇 자기가 체득한것일뿐이라 그 필력이 웅건하였다.》고 한것과 《보지 않은것은 그릴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현실을 충분히 보고 그가운데서 생활을 인식하며 거기에서 화상을 끌어내는것을 자기의 창작원천으로 삼았다.》고 한데서 잘 알수 있다.

정선은 자기의 그림에 당시 아름다운 향토에 대한 사랑, 민족적자부심 등 정신적풍모를 그대로 재현하기에 힘썼다. 그것은 그가 그린 《만폭동》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그림은 근경에 계류가 모이는 점에서 시작하여 서로 어깨를 드러내고 기세좋게 솟아있는 산정에 이르는데 여기서는 원근관계를 은은하게 나타내면서도 깊이와 폭을 알수 있도록 조화시키였다. 그런가 하면 구도의 웅장함에 비하여 매우 안정감을 주며 가운데 흐르는 물결을 통하여 산악과 대조를 주었다. 붓으로 몇개의 선을 그어 물결을 묘사하였지만 그 깊이와 속도감을 알수 있게 한다. 여기에 소나무가 줄지어 서고 부드러운 안개가 산중턱에까지 서리여 련련히 감돌아들며 깊은 골의 정서를 한층 돋구어주었다. 활달한 필치로 방대한 심산유곡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그의 그림에는 이 땅에 대한 화가의 무한한 애정이 맥맥히 흐르고있다.

정선은 특히 금강산에 애착을 가지고 많은 그림들을 그려내였다.

그의 금강산그림들은 조용한 서재에 앉아서 그린것이 아니라 해마다 여기에 올라 곳곳을 살피고 눈비를 맞으며 구석구석을 제발로 답사하면서 그린것이다.

어떤 해에는 몇차례씩 만폭동이며 해금강이며 구룡연 등 여러곳을 돌아보고 그곳에 직접 틀고앉아 해저무는줄 모르고 자기의 심혼을 화폭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눈앞에 선히 떠오르는 그 신비경의 금강산을 재현하기에 온갖 넋을 다 바쳤다. 때문에 그가 그린 금강산풍경만 해도 몇백장이 넘었다고 한다.

실례로 《구룡폭포》는 천하절경 금강산의 중중첩첩한 바위들사이에 뿌리내린 소나무와 폭포의 세찬 물줄기에 어울려 창공높이 솟아있는 층암절벽을 형상함으로써 대자연의 웅장함을 자랑하고있다.

무게있게 누르면서도 속도있는 붓놀림에 의하여 대자연을 실감있게 묘사한 이 그림에서는 독특한 필치와 짙은 먹색으로 그늘진 곳까지 나타낸 바위와 흰 바탕을 그대로 살리면서 연한 선묘로 죽죽 내리그어 산정에서 흘러내려오는 세찬 물줄기를 방불하게 볼수 있다. 또한 붓을 눕혀 옆으로 겹치게 찍었으나 잎과 가지들이 느껴질수 있게 한 소나무수림 등 하나하나의 대상들이 특성에 맞게 다양한 기법으로 형상됨으로써 작은 화폭이지만 구룡폭포의 웅장함을 실감있게 드러내고있다.

하기에 이 그림이 어찌나 실감있었던지 1928년에 출판된 우리 민족의 옛 화가, 서예가들에 대한 문헌자료들을 종합한 도서인 《근역서화징》에서는 《필력이 웅장하여 그림에서 물방울이 튀는듯 할뿐아니라 구름과 서리가 끼여 서늘해지는것만 같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스라쳐 물러나게 한다.》고까지 평가하였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금강산전도》는 1만 2천봉우리가 한눈에 안겨오게 잘 형상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몇자 안되는 종이우에 형상된것이지만 옛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기세가 웅대하고 견실하며 호방하고 광활하며 기이하고 그윽한 맛이 있으며 색채가 짙고 엷은것, 물체의 원근감 등이 절정에 도달하지 않은것이 없다. 그 천변만화는 발로 층암절벽을 밟은듯 하고 눈으로 깊고 넓은 물을 실감으로 보는듯 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선은 금강산뿐아니라 우리 나라의 산과 바다, 들의 이르는 곳마다를 자기의 그림에 담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옹천의 파도》는 지난 임진조국전쟁시기 왜적을 물리친 우리 인민들의 애국적인 전투이야기가 깃들어있는 고장의 하나인 동해바다가 옹천의 벼랑을 사실주의적으로 형상한 작품이다.

정선이 그려낸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인민들이 좋아하는 소재였기때문에 열렬한 애국주의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수 있는것이다.

정선은 순수 자연환경만 그린것이 아니라 풍경화에 인물들을 등장시켜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그들의 모습을 형상한 그림들도 창작하였다.

《가야금타는 로인》, 《봄비》, 《소나무밑에 홀로》, 《물소리를 들으며》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림 《가야금타는 로인》은 정선의 뛰여난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림은 산천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듯 가야금을 타던 손을 멈추고 산천을 쳐다보는 한 로인의 모습을 통하여 조국산천의 수려함을 긍지높이 보여주고있다.

그림에서는 높이 솟은 벼랑을 그 생김새에 따라 부벽준법(도끼로 쳐서 모가 나게 갈라진듯 한 산의 주름을 그리는 조선화의 기법)으로 처리하였다면 좁은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과 지형은 여러가지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화면의 여백과 농담을 충분히 고려하여 선과 면, 대점 등을 대상에 맞게 써서 싱그러운 향기를 자아내는듯 한 울창한 숲속, 거기에 사슴까지 그려놓음으로써 우리 나라 자연의 풍치를 더한층 돋구어주고있다.

화면에 있는 제화시는 그림의 내용을 그대로 말해주고있다.
 

구름속에 락락장송 두그루

그사이에서 사슴은 물마시는데

나무에 부는 바람소리 멀리서 들려오고

그 소리 높은 산에 메아리치도다

가야금타던 손 멈추고 머리를 드니

뭉게구름 눈앞에 서리여라

 

우리 나라의 자연풍치를 우리 인민의 감정정서에 맞게 탐구하여 새로운 조형미를 보여준 정선! 그는 도식적이며 개념적인 종전의 풍경화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사실주의적그림들을 그려낸것으로 하여 다른 나라에까지 소문이 자자하였다.

정선의 능란한 그림솜씨는 이웃나라들에 소문이 났는데 그의 많은 그림들이 봉건군주들이나 관료들에게 줄 《기념품》의 명색으로 다른 나라들에 넘어갔다.

하기에 이웃나라의 한 관리는 자기 나라에서 본 정선의 그림의 진가를 조선땅에 들어와 실지로 그 산천경개를 보고서야 잘 알게 되였다고 하면서 그의 그림재간은 《귀신의 솜씨》라고까지 높이 평가하였다.

정선은 근 60여년간이나 정력적인 창작활동을 벌리였는데 80살까지 하루도 쉬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당시 실학자였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겸재(정선)의 나이는 80여살인데 안경을 2개씩 겹쳐쓰고 등잔불밑에서 … 그렸으나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다.》고 기록되여있다.

또한 다른 문헌기록에서도 그의 필치가 세련되고 능란함은 더 말할것도 없지만 붓이 좋고나쁜것이라든가, 종이의 좋고나쁜것 등은 그에게 있어서 문제로 되지 않으며 어떠한 종이, 어떠한 붓이든지 그의 손끝에서는 완전히 정복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정선이 얼마나 왕성한 정열을 가지고 그림창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는가 하는것을 그대로 말해주고있다.

당시 정선과 가까이 지내던 한 선비는 정선의 집을 떠나면서 그의 열성에 탄복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리저리 서있는 수림사이에

한채의 초막

사립문안 그윽한 곳

주인은 홀로 검은 걸상에

말없이 걸터앉아서

붓으로 청산을 그리고있는데

해는 아직도 반나절이여라

 

비록 짤막한 시지만 여기에서는 걸상에 마주앉아 한창 그림그리기에 열중하고있는 정선의 모습이 생동하게 안겨온다.

하기에 《풍고집》에서는 《중세이후 우리 나라의 제일가는 명화가로서 정선을 추대하여야 마땅할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이렇듯 정선은 17세기말∼18세기 중반기 실경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우리 나라 풍경화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실주의적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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