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실학자로 화단에 나선 윤두서

(1668∼1715)

 

 

17세기말에 이르러 우리 나라 화단에서는 주관주의적이며 사대주의적인 문인화풍에서 벗어나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하려는 시도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앞장에 선 사람이 선비출신화가 윤두서이다.

윤두서는 윤선도(호 고산)의 증손으로서 자는 효언, 호는 공재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는 증조할아버지 윤선도의 영향밑에서 학문을 배워 높은 학식과 실학적경향을 가지고 과거시험에 나서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했었다.

그러던 1693년에 진사시험에 응하여 높은 성적을 받았으나 당쟁으로 어지러워진 조정에 몸을 담았던 할아버지의 순탄치 않은 인생행로에서 많은것을 깨닫고 벼슬을 포기하였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바렸으니

오는이 가는이 다 흙만 너겼도다

두어라 흙이라 한들 흙일줄이 있으랴

 

윤두서가 지은 이 시조는 그칠새 없는 당쟁으로 하여 인재는 짓밟혀 밀려나고 오히려 공명과 사리에 눈이 어두운 사악의 무리들만 판을 치는 당시의 리조봉건사회에서 때묻지 않고 량심을 고이 지켜가려는 필자의 지향을 비유적수법으로 노래한 작품으로서 널리 애송되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윤선도는 임진조국전쟁과 두차례에 걸치는 외적들의 침입을 다 겪은 량반관리였다.

그는 두차례의 침략을 당하면서도 당파싸움을 계속하는 부패한 봉건통치배들을 직접 목격하며 국력이 쇠약한 원인이 당쟁에 있다는것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봉건정부에 그것을 저지시키기 위한 혁신적인 안들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으로 하여 그는 벼슬이 파직되고 세차례나 되는 귀양살이를 하게 되였다.

이러한 과정에 그는 당쟁을 계속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통탄하면서 항의의 뜻과 감정을 우리 글로 된 수많은 시조와 장시들에 반영하였다.

증조할아버지의 영향속에서 자라며 윤두서는 실학사상을 배우게 되였다.

윤두서가 사실주의적경향의 그림을 그리게 된것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은것과 중요하게 관련된다.

17세기 중엽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사회발전의 합법칙적과정의 산물로서 실학이 발생발전하였으며 이것은 여러 면에서 봉건통치배들의 죄행을 폭로하는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회화도 여기에서 례외로 될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 가문이 처한 환경으로부터 당시 봉건관리들이 《잡학》이라고 천시하던 천문, 지리, 수학, 군사, 음악 등 여러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이러한 열성과 진지한 태도를 돌이켜보며 아들 윤덕희는 자기 아버지가 조선지도, 천문지리책, 수학책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이 과정에 윤두서는 18세기 우리 나라의 이름난 실학자였던 리익과 그의 동생들을 사귀게 되였으며 그들과의 다양한 학문적교제를 통해서 점차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나갔다.

그는 친구들과 량반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가 실학자라는것을 숨기지 않았으며 자식들도 모두 실학을 잘 알도록 하였다. 윤두서의 외증손자 정약용이 19세기 초엽에 우리 나라 실학의 대표자로 될수 있었던것도 결국은 윤두서가 지녔던 세계관의 영향이 크게 미친것과 관련되여있다.

실학의 영향밑에 윤두서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였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봉건탐오관리들의 죄행을 조소한 다음의 시에서 잘 나타나고있다.
 

모기는 일어나고 파리는 잠드니

날이 더울가 두렵고

푸르고 설익은 보리로는 밥을 끓여

먹을수가 없구나

이웃집 개는 짖고 외상술빚은 급한데

고을관리마저 세금을 재촉하러

깊은 밤 문앞에 이르렀구나
 

 

칠언시로 된 이 시와 함께 아들 윤덕희가 어느 한 책에서 자기 아버지가 량반의 신분적특권을 내세우지 않고 《하인들에게 이름을 불러주었고》, 《고향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것을 보고 자기 집에 있던 빚문서까지 불태웠으며》, 《항상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다정하게 대하였다.》고 쓴것을 보면 윤두서가 당시 평민들에 대한 동정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수 있게 한다.

그는 언제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무심히 보지 않았으며 대상의 참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현지체험을 중요시하였다.

어느날 윤두서는 자기 고향마을의 전경을 그리려고 화판을 들고 집을 나섰다.

로상에서 그는 어느 한 마을에 사는 선비와 만나게 되였다. 그 선비로 말하면 그림에서 제노라고 하는 사람으로서 늘 먹으로 사군자(국화, 매화, 란초, 참대)를 그려놓고 자기식의 유식과 기법을 뽐내군 하였다. 그는 산수화를 그리는 경우에도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경치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경치를 그려놓고 제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는 사람이였다.

윤두서는 일부러 그 사람앞에 화판을 펴놓고 주변의 아름다운 산과 경치를 바라보며 구도를 잡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도록 윤두서는 좀처럼 붓을 들지 않았다.

그 선비는 윤두서를 나무람하면서 자기에게 그림그리는 법을 배우러 오라고 훈시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러나 윤두서는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한모양으로 아름다운 산천경개를 완전히 파악하고서야 붓을 들었다고 한다.

하기에 리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윤두서가 《인물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면 반드시 종일토록 그 대상사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주시하며 그 진형(진짜형태)을 완전히 파악하고서야 비로소 붓을 들고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어린아이를 그릴 때면 항상 머슴아이를 본보기로 삼았다.》고 기록되여있다.

그는 옛 화풍은 물론 15세기에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을 날렸던 안견으로부터 17세기 전반기 화가 김명국에 이르기까지의 화가들에 대한 자기식의 평가를 내리고 그림공부를 진행하였다. 특히 그는 그리려는 대상을 현지에 나가 선택하고 시대상과 결부시킴으로써 근로하는 인민들의 로동생활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의 그림들을 내놓았다.

윤두서의 대표적작품들로서는 《말탄 사람》, 《어부와 나무군》, 《백마》, 《자화상》, 《폭포를 바라보며》, 《말을 씻어주며》, 《늙은 중》, 《산수도》, 《강가》, 《호수》, 《낚시배》 등 여러 작품들과 조선지도 등 여러 실경지형그림들을 들수 있다.

그림 《말탄 사람》은 인간의 기상과 숨결이 맥박치고있는것으로 하여 종전의 화단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경향의 작품이다.

그림에는 산천을 벗삼아 은둔생활을 하는 어느 한 선비를 주인공으로 형상하였지만 인간의 성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있는것으로 하여 걸작으로 인정받고있다.

그림에 살찐 말의 동작과 곧은 자세로 앉은 인물의 도고한 모습은 표현성이 강한 색조와 선묘 그리고 탄탄한 소묘력에 의해 안받침되여있다. 이 그림의 강한 표현성은 참신하고 집중적인 구도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있다.

윤두서의 그림 《어부와 나무군》은 17세기 도화서 화원이였던 김명국의 그림과 꼭같은 주제로 된 작품이지만 형상에서 적지 않은 차이점을 나타내고있다.

윤두서의 그림은 현실에 보다 접근한것으로서 당시 근로하는 인민의 모습을 담은것이였지만 김명국의 그림은 은둔생활을 지향하는 량반선비들의 모습을 그린것이였다.

특히 윤두서의 화폭에 반영된 인물들의 개성적인 얼굴과 발달된 근육은 오랜 로동속에서 단련된 모습이며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린 어부의 형상 역시 하루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근면한 모습 그대로이다.

그는 자연묘사에서도 향토적인 정서가 안겨오게 형상하였다. 그림에서는 근로하는 인간의 근면성, 고독감이 없고 생활을 가꾸는 인간의 락천적인 기상이 느껴지며 호탕한 웃음, 씩씩한 걸음, 활달한 몸동작은 로동하는 사람들에게서만 풍기는 약동적인 기백을 보여주고있다.

그의 작품가운데서 《자화상》은 이채로운 걸작이다. 화면에서는 얼굴묘사를 통해 윤두서의 성격적면모가 그대로 느껴지고있다.

장수형의 짙은 수염발, 앞을 바라보는 어글어글한 눈, 치켜올라간 눈섭, 날이 선 코 등은 그가 강직하고 결패있는 성격의 소유자라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뿐만아니라 얼굴묘사만을 통해서도 우람한 체구까지 다 보는듯 하게 그려낸 기교와 수법은 참으로 뛰여난것이였다.

윤두서는 실경지형그림도 아주 세련된 솜씨로 잘 그려 이름이 높았다.

그러한 그림이 《조선도》였다. 이 그림이 아쉽게도 현재 실물이 없어 그 면모를 잘 알수 없지만 외증손자 정약용(호 다산)이 지도를 직접 보고 그 소감에 대하여 서술한 글이 있어 그 실상을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정약용은 당시 지리학자로 이름이 높던 정상기가 그린 《백리척도》와 윤두서의 《조선도》를 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우의 조선지도 한폭은 나의 외증조부(외할아버지) 윤공재(윤두서)가 그린것이다.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흘러 의주에서 바다로 흘러가는데 두 지점간의 북극출지(위도)의 차이는 거의 3∼4로 되는것이다. 그런데 공재의 <조선도>에서는 압록강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굴곡하면서 약간 서남쪽으로 내려앉을뿐이고 그사이는 남북의 큰 차이로 볼수 없게 되여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상기의 <백리척도>에서는 이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공재의 <조선도>는 정상기의 <백리척도>에 비해 손색이 있는것이다. 그러나 다른편으로는 공재의 <조선도>에서는 삼남지역의 크고작은 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히 그려넣었는데 <백리척도>에서는 그것을 대부분 빠뜨려버렸다. 이것은 <백리척도>의 결점인것이다.

다음으로 <백리척도>에서는 여러 산봉우리들을 형상하였는데 봉우리들은 모두 우로 가도록 그렸고 산의 안팎의 방향도 알수 없으며 또 산줄기들이 산만하게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여 그것을 정확히 파악할수 없게 되였다. 그러나 <조선도>에서는 산줄기들을 면면히 이어가면서 그 굴곡상태를 정확히 그려넣었고 특히 명산으로서 특이한것들에 대해서는 채색의 농도를 진하게 하고 산봉우리들을 높였다 낮추었다 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였다.

이것은 바로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볼 때의 형상 그대로인데 그것은 회화의 화법에서 당연히 그렇게 처리하여야 하는것이다.》

정약용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윤두서가 우리 나라의 지도그림을 부감구도형식으로 색채를 써가면서 아주 생동하게 형상한 애국심이 높은 화가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가 얼마나 대상을 생동하게 그려냈는가 하는것은 아래의 일화가 잘 말해준다.

윤두서가 시골에 있을 때 심득경이라는 사람과 매우 친분이 두터웠는데 갑자기 심득경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심득경의 집에서는 제사를 해야겠기에 그의 자식들이 조의를 하러 온 윤두서에게 자기 아버지의 화상을 그려줄것을 부탁하였다.

윤두서는 친구가 죽은것이 가슴이 아파 자식들의 요구대로 심득경의 화상을 잘 그려 그의 집에 보내주었다.

그런데 이 화상을 제상에 올려놓기 바쁘게 온 집안이 울음바다로 되여버렸다. 그것은 이미 돌아간 사람을 너무도 생동하게 그려놓아 가족들의 설음이 터졌기때문이였다.

이 사실을 통해서 윤두서의 묘사능력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는가를 가히 짐작할수 있다.
하기에 당시 화가들에 대한 평가를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어느 한 선비는 윤두서의 그림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모든 사물은 짝이 있기마련인데 화가들에 있어서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한 시대에는 반드시 서로 상대가 될만 한 사람이 나와 명예를 독차지하지 못하는 법이다. 강희안이 있을 때에는 안견, 최경이 나와 서로 상대가 되였고 … 김명국이 나왔을 때에는 리징이 상대가 되였다. 김명국과 리징이 죽은지 근 백년만에 비로소 윤두서 한사람이 나서 상대가 될만 한 사람이 나오지 못하였는데 이것으로 해서 윤두서의 이름은 더욱 빛난다.》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우리 나라 중세회화사를 대표하는 3대인물의 한사람으로 되였으며 특히는 화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물론 윤두서는 문인화의 화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결함은 있었지만 조선화의 사실주의적발전의 길을 열어놓는데 이바지한 공적으로 하여 민족회화사의 한페지를 당당히 차지하는 미술가로 력사에 남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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