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문인화의 화풍에서 벗어난 김명국

(17세기 전반기)
 

 

김명국은 17세기 전반기 우리 나라 회화사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 화가였다. 김명국의 창작활동에서는 술로 인한 일화가 전해져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있다.

늘그막에 그가 취옹이란 호를 많이 썼는데 이것은 《술 취한 늙은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김명국은 항상 술을 마신 다음에야 붓을 들군 하였다.

이것은 임진조국전쟁이후 당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량반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화술로 표현하군 하다가 생긴 버릇이라고 한다.

김명국은 17세기 전반기 우리 나라 회화분야에서 부정적역할을 하고있던 문인화의 경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실주의적발전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화가였다.

김명국은 17세기초에 태여났다.

자는 천여, 호는 련담, 국담 혹은 취옹이라고 불렀다. 도화서 화원이였고 그후 사학교수의 관직에 있었다.

김명국의 부모들이 무엇을 하였으며 또 그가 누구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누구의 추천으로 화원이 되였는가는 알수 없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당대 사회의 부정적현상에 대한 강한 비판정신을 토로했던것을 알수 있으며 따라서 비천한 출신이였다고 짐작할수 있다.

어느 한 력사책에 의하면 김명국은 어렵게 살았지만 성품이 소탈하고 강직하였으며 비관을 모르고 언제나 락천적으로 살면서 항상 유모아와 해학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김명국의 이름은 원래 나라의 밝은 앞날을 기원하여 명국(明國)이라고 지었었는데 왜서인지 《울 명》자를 넣어 명국(鳴國), 혹은 《목숨 명》자를 넣어 명국(命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는 1636년과 1643년 두차례에 걸쳐 대표단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가서 조선사람의 기개와 조선화단의 풍격을 과시하였다.

대표단은 당시 국왕의 편지를 일본에 전달하기 위한 최고급의 사절단이였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화원이 한사람 속하게 되여있었다. 따라서 수행화원은 수준이 높고 이름있는 사람이여야 했다. 그리하여 이에 선발된 김명국은 사절단과 함께 활동하면서 일본사람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척척 그려줌으로써 우리 인민의 재능을 시위하고 일본땅이 들썩하게 이름을 날리였던것이다.

그가 일본에서 그린 대표적인 그림은 《달마도》, 《수로도》, 《신선도》 등이였다.

김명국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우리 나라에서 두차례의 반침략투쟁을 계기로 우리 인민들속에서 민족적자각과 애국심이 한층 높아진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여 회화분야에서도 문인화의 경향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활력이 있는 그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김명국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자각하고 종전에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그림들을 창작하였다.

김명국의 화풍에서 찾아보게 되는 진보적인 측면은 선행시기의 화법들을 완전히 체득한데 기초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묘법을 창조해냈다는데 있다.

특히 인물화분야에서 수묵담채법으로 형상해낸 그림은 다른 그 어느 화가들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것이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박쥐를 날리며》, 《세찬 비바람》, 《그림보는 로인들》, 《바둑을 두다가 싸우다》는 선묘가 활달하고 기법이 원숙하며 기운이 약동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에 구현된 묘법은 함축과 집약화의 원리에 기초하고있어 간결성이 보장되였고 따라서 몇번의 붓질로써 대상의 본질적특징들을 예리하게 밝혀내고있다.

그림 《바둑을 두다가 싸우다》는 당시의 중들을 비판한 그림이다.

화면에는 불교승이 바둑을 놀다가 의가 맞지 않아 바둑판을 둘러메치고 서로 싸움질하는 광경이 묘사되여있다.

김명국이 중을 야유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있다.

어느해 경상도지방에서 살고있던 한 중이 김명국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명사도를 그려줄것을 부탁하였다. 그 값으로 값진 베 수십필을 내놓았다.

김명국은 처음에는 잘 그리지 못한다는 핑게를 대고 질질 끌어오다가 중이 내놓은 베를 보자 안해에게 주어 술을 사오도록 하였다.

그는 안해가 사온 술을 취하도록 마신 다음 곯아떨어져 잠들어버리고말았다.

그 중은 할수없이 김명국이 깨여날 때까지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김명국이 술에서 깨자 중은 정색해서 그림을 그려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명국은 《아직은 좀 그냥 있소. 내 마음이 내킬 때 그려주리다.》라고 하면서 또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이 마셨던지 그날 저녁까지 또 취중에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네번이나 반복하니 중은 그만 억이 막히고 안달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김명국은 술을 량껏 마시고 취한김에 비단을 펴놓고 한동안 구상을 익힌 다음 한참동안 눈을 똑바로 뜨고있다가 닁큼 붓을 들어 단숨에 그림을 그리였다. 그런데 거기에 형상된 모습이 가관이였다.

내용인즉 중들이 지옥에 가서 서로 싸우는 모습이였던것이다.

목뒤덜미를 잡고 끌고오는 중, 끌어다가 형벌을 가하는 중, 칼로 살을 베고 베여낸 살을 기름가마에 지지는 중 등 아비규환의 수라장이였다.

그림이 다되였을 때 중이 방안으로 들어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 《아, 당신은 어찌하여 내 일을 망쳐버립니까.》고 하면서 하소연하였지만 김명국은 그것을 무시해버렸다고 한다.

그는 량반사대부들의 화상그림과 신선그림들도 적지 않게 그렸다. 한것은 그러한 형식을 통하여서라도 사회현실을 반영할수밖에 없었던 사정과도 관련되여있었다.

《달마도》나 《박쥐를 날리며》는 그 대표적인것이라고 볼수 있다.

김명국의 묘법은 이전시기에는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것이였다.

함축과 집약화의 원리에 기초하고있는 몰골기법으로 대상의 외모와 내면심리를 잘 표현하고 본질적인 특징들을 예리하게 밝혀내였다.

그는 꾸준하고 진지한 노력으로 간결한 묘법을 완전히 체득하였으며 몰골기법을 형상창조에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기량을 습득하였다.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그의 10여점의 그림들을 보면 당시까지는 일본에서도 처음 보는 화폭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 그림들은 거의나 간결한 묘법으로 그려졌고 그의 도움으로 몰골기법이 일본에 전파된 사실은 당시 우리 나라 미술이 도달한 높은 수준을 그대로 말해준다.

김명국은 당시 사회현실과 인민들의 지향을 담은 그림들을 많이 그렸으나 《신선도》와 같은 량반들의 요구에 맞는 그림도 그린 약점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당대 사회의 부정적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정신을 가진 사실주의적경향의 진보적인 화가로서 우리 민족의 미술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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