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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림《뢰물바리》로 량반통치배들을 조소한 리정 (1578∼1607)
16세기에 이름난 화가들가운데는 리정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자를 공간, 호는 라옹, 라재, 라와, 설악이라고 불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는데 아버지 리숭효와 삼촌인 리홍효도 당시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였다. 리정은 불우하게도 부모를 일찍 여의고 삼촌인 리홍효의 집에서 자라면서 삼촌에게서 그림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가 어릴 때 얼마나 그림에 뛰여난 솜씨를 보여주었던지 5살때 중의 모습을 제법 잘 그려놓았다고 한다. 10살때에 그림그리기가 크게 발전하여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꽃과 새를 그린 그림), 불화(불교관계그림)를 다 잘 그렸고 당시 이름이 높았던 도화서 화원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8살때 리정이 그려 안국사에 걸어놓은 불화는 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그림에 대해서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나 삼촌보다 더 낫다고 리정을 칭찬해주었다. 리정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탓으로 직업적인 화가인 도화서의 화원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린 민간화가였다. 그는 자연의 경치를 그리는것을 무엇보다 좋아하였는데 13살때에 금강산에 있는 장안사의 벽화수복작업에 참가하여 산수화와 여러 천왕상들을 그려냈다. 이때 리정이 그린 그림들이 모두 살아움직이는듯 하여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는데 절의 주지는 이 그림들을 보고 《천고의 명작으로서 세상에서 그 짝이 드물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에 어떤 시인은 이 벽화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넣었다.
예로부터 그 몇사람 불화를 그렸다고 송나라의 명화가로 리공린을 꼽고있지만
우리 나라 리장군이 가장 유명하였더니 그의 손인 정의 그림 더우기나 기이하고 절묘해라
장안사 하얀 벽에 생동한 불화를 리정이 그릴적에 나이는 겨우 열세살
신채가 령롱하니 벽이 오히려 적은듯 해달도 빛나고 구름도 떴구나
어릴 때 정의 수법 어이 그리 뛰여난지 그림의 변화인가 무궁무진하여라
일부 야사에는 리정이 천성이 소탈하고 호탕하며 동정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비록 얻어먹는 신세라 해도 구차스럽게 행동하지 않았으며 특히 세도가 당당한 봉건귀족량반들이라고 하여도 그들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면서 멀리하였다고 한다. 하기에 우리 나라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창작한 허균은 그의 성품에 대하여 《그는 남을 동정하고 제것을 주기 좋아하며 추워서 떠는 사람을 볼적마다 옷을 벗어 입혀주군 하였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는 천대받고 억압받는 근로인민들을 진심으로 동정하면서도 권세있고 놀고먹는 봉건통치배들에 대해서는 야유와 조소, 풍자로 꼴을 먹이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을 반영한것이 《뢰물바리》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현재 전해지고있지 않지만 대신 그에 대한 일화가 전해지고있다. 어느 한 재상이 당시 그림을 잘 그리기로 소문난 리정을 자기 집으로 급히 부른 일이 있었다. 그 재상으로 말하면 날아가던 새도 호령쳐 땅에 떨굴만큼 세도가 당당한 권력가였다. 재상의 부름을 받은 리정은 마음속이 께름하였으나 늘 재상들의 집에 불려가서 그림을 그려주군 하였으므로 군말없이 화구를 챙겨가지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가 으리으리한 솟을대문을 지나 대청마루에 올라서니 재상은 즉시 종을 시켜 술상부터 날라오게 하였다. 리정은 이것이 권세있는자들이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기 앞서 선심을 쓰는 졸렬한 《홀림낚시》인줄을 뻔히 알면서도 짐짓 송구스러운체 하였다. 재상은 술잔을 들기도 전에 무늬가 고운 초사로 꾸민 값진 족자를 내놓고 리정이 그리기 싫어하는 내용의 그림을 그릴것을 요구하며 제 집 하인을 대하듯 하였다. 리정은 대번에 속이 뒤틀렸다. 그리고싶지 않은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것도 당치않은 요구였지만 제가 그리라고 한번 령을 내리기만 하면 보잘것없는 《환쟁이》라 마루우에서 기는 벌레처럼 처신할줄 알고 이러저러하게 호령하는 꼴이 아니꼽기 짝이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하여 처음부터 바위돌에 닭알을 던지듯 대들수 없었다. 그때 리정은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재상은 언제나 《분부대로 하오리다.》라는 소리를 듣는데 습관되여왔는지라 못마땅해하였다. 한동안이 지나 재상은 《으흠.》 하고 짜증섞인 큰기침을 한번 거칠게 하였다. 그 소리에 대청마루에 서있던 심부름하는 아이와 대청아래 허리를 굽히고 분부를 기다리던 청지기는 와뜰 놀라 몸을 떨었다. 18간짜리 대청우에는 얼음같은 랭기가 획 돌았다. 리정도 그 기침소리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지었다. 그것을 본 재상은 그러면 그렇겠지 하는 뜻으로 빙그레 웃은 다음 《그래 이젠 령대로 그릴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리정은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는 분노의 거품이 부글부글 괴여올랐다. 그는 옆에 놓인 술상에서 주전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옆으로 돌아앉아서 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마셨다. 재상은 리정의 그 행동을 만족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한 심정으로 바라보고있었다. 그것은 리정이 령을 받았다는 뜻으로 술 한잔 마신것 같기도 했으나 한편 《네가 감히 내앞에서?》 하는 생각도 들었기때문이였다. 그러는 사이에 리정은 큰 주전자의 술을 다 마시고 취하여 그자리에 쓰러지고말았다. 재상은 성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쓰러진 리정을 도끼눈으로 쏘아보았다. 하지만 취한 사람에게 볼기를 칠수도 없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바치고는 술이 깬 후에 달래여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편이 자기 체면을 세우는데도 나을것 같이 여겨졌다. 그래서 공연히 헛기침을 두어번 깇고 상노를 불러 누더기라도 덮어주라고 이르고나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윽하여 한잠 푹 자고 일어난 리정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앉았다. 그 순간 그는 하나의 묘한 수가 번개같이 떠올랐다. 그는 얼른 붓을 뽑아들고 잘 꾸민 족자우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한번도 붓을 멈춤이 없이 순식간에 멋진 그림을 다 그려놓았다. 그런 다음 리정은 대청마루를 내려 뻐젓하게 재상네 집 솟을대문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얼마후 상노아이가 리정이 어떻게 하고있는지 보려고 왔다가 리정이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소리내여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다가 주인에게 경을 칠가 두려워 웃음을 거두고 재빨리 재상에게 그림을 가져다 바쳤다. 재상은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으흠.》 하고 짓눌린 신음소리를 내였다. 그림이 너무도 뜻밖이였던것이다. 그림에는 활짝 열린 으리으리한 솟을대문과 그 문안으로 산더미같은 뢰물바리를 싣고 들어서는 황소 두마리가 그려져있었는데 신통히도 두마리의 황소는 퉁방울같은 눈을 부릅뜬것이 누가 앞에 나타나면 받아넘길 기상이였다. 그림은 결국 재상을 현장에서 덜미를 잡힌 도적놈이나 다름없이 만들었던것이다. 성이 상투끝까지 오른 재상은 그림족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나서 하인에게 호령했다. 《너희들은 이제 당장 나가서 그 젊은 환쟁이놈을 잡아들이라. 넌 작두를 가져와.》 하인들은 시퍼런 작두날에 생목숨이 날아갈 끔찍한 참경을 생각하며 《예, 예.》 하고 그자리를 급히 물러났다. 그러나 세도재상은 공연히 헛물만 켰을뿐이였다. 리정은 악독한 재상이 자기를 죽이려 하리라는것을 미리 알고 그길로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갔던것이다. 이 한가지 사실만 놓고보아도 리정이 얼마나 봉건통치배들을 미워하였는가 하는것을 가늠할수 있다. 그후 리정은 평양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벗으로 삼아 지내다가 병을 만나 객사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해져오는 작품으로서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범》, 《산수도》 등 여러 작품들이 있다. 그림들은 조선화의 힘있고 간결한 수법에 맞게 대담한 구도설정과 운동감을 통하여 다른 화가들의 그림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상들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리정은 화상도 잘 그렸다. 그가 화상을 그리게 된 동기에 대하여 어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리정이 일찌기 고아가 되여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을 매우 애섧게 여긴 리정은 자기의 생각을 더듬어 한번도 본적이 없는 《아버지》를 그려냈는데 그 그림을 걸어놓고 아버지를 그려보군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리정의 화상솜씨는 매우 뛰여났다고 한다. 그는 일생 불우하게, 그것도 29살밖에 살지 못하였으나 뛰여난 창작적재능으로 하여 당시 이름있던 한석봉, 허균 등과 깊은 우정을 맺고있었고 그들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 리정은 회화적재능과 특기있는 그림으로 봉건통치배들을 조소풍자하여 당대 화단에서 한몫을 한 화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