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대명필》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떨친 한호

(1543∼1605)

 

예로부터 훌륭한 사람의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하였거늘 바로 명필로 유명한 한호(한석봉)를 두고 한 말인것 같다.

그는 훌륭한 어머니로 하여 명성을 떨친 서예가로 후세에 전해지게 되였다.

한석봉이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데는 어머니의 높은 요구성과 끊임없는 교양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한석봉은 1543년에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출생후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슬하에서 자랐다. 자를 경홍, 호는 석봉, 청사라고 하였다.

석봉은 어릴 때 먹적골에서 자랐는데 5살때부터 싸리꼬챙이로 모래판에 글을 써 사람들을 놀래웠다.

그는 하도 집이 가난하여 종이나 붓을 살수 없어 가랑잎이나 모래우에 글씨쓰는 련습을 하군 하였다. 그래서 비가 오면 가랑잎에 쓴 글자가 비물에 씻기여 흘러내리는 물이 시꺼멓게 되군 하였다. 하여 이 골짜기를 후세사람들이 먹적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석봉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잃은 어린 그를 어떻게 하면 훌륭한 서예가로 키우겠는가 하고 늘 마음을 써왔다.

특히 밖에 나가서 모래판에 글씨쓰는 련습을 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군 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를 잘 시켜 아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리라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석봉은 9살에 10년을 기약하고 외가켠으로 친척벌 되는 글방훈장댁으로 멀리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울 일념으로 늙어가는것도 힘든것도 잊어버리고 부지런히 일하였다. 특히 석봉의 어머니는 떡만드는 일을 특별히 잘하였다.

한편 어린 석봉은 어머니가 고생하는것을 생각하면서 글씨공부를 꾸준히 하였다.

7년째 되던 해에 자기의 글씨솜씨가 어느 명필한테도 지지 않을것이라고 자부한 석봉은 이만하면 어머님의 소원을 풀어드릴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래간만에 아들을 만난 어머니는 기뻤으나 아들의 글씨수준을 검열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밤 석봉의 어머니는 등불을 끄고 어둠속에서 아들에게 글을 쓰게 하고 자기는 떡을 썰어 누가 익숙한가를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이윽고 불을 밝히고 서로 비교하여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어느것이나 차이가 없이 크기가 고른데 석봉의 글씨는 획이 고르지 않을뿐더러 크기도 같지 않았다. 이것을 보게 된 석봉은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해준 학비를 가지고 성실하게 노력하지 못한 잘못을 깊이 뉘우치는 한편 자신의 글씨쓰기능력이 모자라는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석봉은 집에서 하루이틀 지체하면서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글씨공부를 하자면 집을 떠나야 한다. 그럴바에는 전날의 스승을 다시 찾아갈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이름난 명필을 찾아가자. 글씨를 더 배워 품어온 소원을 한번 풀어보자.)

이렇게 생각한 그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글씨 잘 쓰기로 소문난 한 사람을 찾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로 말하면 병조참의라는 벼슬에 있으면서 리률곡과 뜻을 같이하고 친근하게 지내는 결백한 인물로서 벼슬로보다 서예가로 더 널리 알려져있었다.

석봉은 어머니가 꺼내여주는 명주 한필을 받아가지고 로자로 쓰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병조참의는 자기를 찾아온 당돌한 소년에게 글씨를 씌워보이고는 여간만 기뻐하지 않았으며 그를 제자로 받아줄것을 쾌히 응낙하고 자기 집 사랑방에 묵게 하였다. 석봉의 글씨재주를 알게 된 그는 중요한 문서는 오히려 제자에게 대신 씌웠다.

진짜제자는 스승을 앞서라 하였거늘 그에게서 글씨를 배운지 3년이 되여올무렵 한석봉이라는 이름은 궁중에도 알려지게 되였다.

선조왕까지도 자기 방의 병풍과 장지(방에 칸을 막거나 방안을 장식하는데 쓰이는 큰 문짝같은 장식품)에는 석봉의 글씨를 붙이게 하고 그가 쓴 문서류가 눈에 띄우면 책상서랍에 고이 간수하면서 《한석봉의 글씨는 오묘하고 장쾌하다.》고 칭찬하였다 하니 가히 그의 글씨에 대해 짐작할만 하다.

이렇게 한석봉이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된것은 자신의 노력과 함께 떡장사이기는 하나 더없이 부지런하고 뜻이 강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의 힘이 크게 미쳤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궁중에서 글을 쓰게 된지 몇년이 지나 한석봉은 25살에 과거급제를 하고 이어 군수로 임명되였다가 다시 사자관(외교관계의 문서를 정리하는 벼슬)이 되였다. 지위가 낮고 가난한 집에서 태여난 그가 이러한 벼슬길에 오르게 된것은 갓 왕위에 오른 선조왕이 그의 글씨재주에 너무 감탄하여 《오묘한 손, 신선의 조화인듯》이라는 글월을 써보내면서 관직에 추천하였기때문이였다.

한석봉은 그 당시 이웃나라에 사신이 갈 때마다 글쓰는 직책을 가지고 따라가군 한것으로 하여 해외에도 그의 글씨가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의 글씨가 얼마나 이름났는가 하는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서 잘 알수 있다.

어느해인가 한석봉이 다른 나라에 보내는 공문을 쓰게 되였는데 마치 매 획과 글자가 살아움직이는듯 하였다.

조선에서 보내온 공문을 본 다른 나라의 대신은 글씨를 보고 《성난 고래가 바위를 떠받는듯, 목마른 룡마들이 샘터로 달리는듯 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웃나라의 학자로, 서화가로서 유명하던 주지번도 한석봉의 글씨를 보고 여간 놀라와하지 않았다.

그가 놀라게 된 사연은 대개 이러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이 끝나고 석봉의 나이 50을 훨씬 넘겼을 때였다.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오게 된 주지번은 공무보다는 자신의 글재주를 자랑하는데 더 마음을 썼는지 아니면 우리의 산천경개와 명승고적에 심취되여서인지 이르는 곳마다, 묵는 곳마다에서 풍월을 지었다. 그에 따라 영접하는 대신도 그에 화답하는 풍월을 자꾸만 지어야 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접반사로 당대의 문장가였던 리정구를 정하고 수행원들도 리동악 같은 이름있던 선비들을 추려 꾸리도록 하였다.

그러다나니 의주에서 평양까지 사신과 우리측 쌍방간에 절로 이루어진 글재주내기는 어슷비슷 별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바로 일행이 평양에 와닿은 날 저녁 외국사신을 맞는 잔치도 거의 끝날무렵이였다.

주지번은 갑자기 언제 장만하였는지는 모르나 커다란 두루마리를 옆에 앉은 리정구앞에 큰 선물을 안기듯 공손히 내놓았는데 얼핏 보니 《평양은 좋을시구》라는 제목의 장편시였다.
리정구가 펼치는쪽으로 거꾸로 말면서 대충 훑어보니 읽어만 보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오언백운시(운자가 백구에 달하는 시)였다.

그는 하인을 불러 《우리도 다시 돌려보고 조정에도 바쳐야 할 훌륭한 글이니 잘 간수하라.》고 이르면서 넘겨주었다.

《웬걸요, 웬걸요!》 하고 사양하던 주지번은 신중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여직껏 함께 오는 동안 당신네 글재주가 우리를 앞서던데 이에 대한 화답시는 래일 아침에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우린 그걸 큰 선물로 알고 가지고 돌아갈터인데 이십여첩의 병풍글씨가 되도록 하여주십시오. 래일 아침에 우리 수원들중 본국에 돌아가는 인편이 있어서 그럽니다.》

리정구는 속으로 아뜩하였다. 봄철밤이 짧은데다 거의 자정이 되였는데 백운시를 그것도 병풍용으로 써서 내놓기란 아무리 생각해도 매우 어려운것이였으나 못하겠다고는 할수 없었다. 못하겠다는것이 례의가 아닌것은 둘째치고 그들에게 손을 드는것은 창피한노릇이였다. 마치도 그것이 나라의 망신같이 느껴졌다.

잔치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리정구는 부랴부랴 동료들을 모아놓고 사유를 말하였다.

모두들 《자정이 가까왔는데 그럴 사이가 있겠습니까? 여럿이 달라붙어 몇구절씩 지어붙이면 되기는 되겠지만 시상이 흐트러져 신통한 시는 못되겠고 한사람에게 맡겨야…》 하다가 장편의 화답시를 차천로가 짓기로 락착이 되였다.

그러자 차천로가 울상을 하며 거절하였다.

《정 지으라면 글은 지을수 있으나 글씨까지 쓰라면 모레 아침까지도 쓸수 없습니다. 더구나 나의 글씨야 어데 내놓겠소이까?》

차천로의 근심은 십분 타당한것이였다.

글도 잘 지어야 하지만 글씨도 잘 써야 하되 빨리 써야만 하였다. 그것도 외국에 선물로 보내는 글씨이므로 사흘이 걸려도 가망이 없을것 같았다.

그가 난감해하자 모두들 그럴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누구인가 《아하, 한석봉을 데려옵시다. 요즘 평양에 와서 비문을 쓰고있다니 오산(차천로의 호)이 읊고 석봉이 쓰면 될게 아니요!》하고 소리쳤다.

아닌게아니라 한석봉이 평양에 와서 어떤 유명한 비석에 새길 글씨를 쓰고있었다. 외딴 객사에 묵고있던 석봉이 리정구의 부름을 받고 즉시 달려왔는데도 벌써 자정이 퍽 넘었다.

대충 사연을 듣고난 석봉은 누가 읊든 시가 쏟아지는대로 쓸테니 걱정말라고 하면서 병풍밖에 좋은 종이 10장을 쭉 잇대여 한폭으로 만들어 펴놓게 하고는 한폭한폭 써내려가는 차제로 잠간잠간 잡았다가 놓으라고 하였다.

길다랗게 벌려세운 병풍을 사이에 두고 차천로는 저쪽에서 읊고 석봉은 이쪽에서 써내려갔다.

한다하는 명필도 밤낮 하루가 걸려도 못다 쓸 긴 시를 석봉의 붓은 청산류수로 내리엮는 차천로의 입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 입과 함께 멎었다. 차천로의 시는 주지번의 시보다 더 긴 칠언백운시였다.

리정구를 비롯한 접반사일행은 큰일을 치르고나서 안도의 숨도 숨이지만 석봉이 이렇게까지 명필이고 속필인데는 입을 딱 벌리지 않을수 없었다.

더더욱 놀란것은 주지번이였다.

빨라야 모레 아침일것이고 땀을 좀 뽑을것이라고 흐뭇해하던 그는 이튿날 어김없이 이른아침에 화답시를 받아들자 흠집부터 골라잡으려고 하였으나 글도 글씨도 나무랄데가 없었다. 글귀도 잘되였지만 약간 흘려서 하나같이 써박은 글씨는 보는 사람마다 과시 놀랄만 하였다.

주지번은 명주보우에서 한폭한폭 넘기면서 여간만 감탄하여마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번은 한석봉이 우리 사신들을 따라 이웃나라에 갔을 때였다.

역관(통역원)의 말을 들으니 이 나라 조정의 한 유명한 재상이 자기 집 대청에 장식할 큰 장지에 글씨를 써줄 명필을 후한 상을 걸고 두루 물색을 한다는것이였다.

역관의 권고에 못이겨 그 재상집에 따라가보니 호화로운 꽃무늬비단장지를 한가운데 두고 수십명이 둘러앉아있는데 장지짝옆에는 사치한 유리잔에 금가루먹이 풀려있고 또한 그우에는 팔뚝만 한 서수필(쥐의 코수염을 모아 만든 붓)이 가로걸려있었다.

둘러앉은 수십명의 명필들은 그냥 웅크리고 앉아서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나서지를 않았다.
이 광경을 둘러본 석봉은 오금이 쑤셔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짓으로 여럿에게 권고해보다가 할수 없다는듯이 일어서서 팔소매를 걷어올리며 장지짝앞으로 다가들었다.

좌석의 모든 사람들이 저게 누구냐고 수군거리며 술렁거렸다.

그래서 한석봉은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는 어디 좀 봐라 하는듯이 붓을 쳐들었다.

그는 큼직한 붓자루를 들어 금가루먹이 담긴 유리잔에 콱 잠그었다. 붓에다 새노란 금가루먹을 흠뻑 묻혀든 그는 먼저 장지짝우에 붓끝을 옮기였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옮겨지는 붓끝에서 금가루물이 맺혀 뚤렁뚤렁 그것도 여러 방울 떨어졌다. 온 장지짝에는 크고작은 금자갈을 뿌려놓은듯 하였다.

곁에서는 《아, 아, 아!》 하고 황급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봉은 그만 마음이 너무 격하였던탓에 붓에 금분물이 괴여묻힌것을 미처 가늠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석봉은 당황하였으나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짐짓 몇방울을 한귀퉁이에 우정 튕겨서 더 떨구었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잡고 점잖게 고개를 들며 히죽이 웃음을 머금었다.

수십명의 명필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여있었고 역관은 더욱 말이 아니게 낯이 백지장같이 질려 눈을 감고있었다. 주인인 재상은 성이 독같이 나서 당장 소래기를 지를듯이 길다란 채수염을 푸들거리고있었다.

이러한 때 석봉은 얼른 붓자루끝을 입에 물고 두손으로 허리에 차고다니던 두루마리를 풀어 그 끝을 펼쳐들고 주인앞에 다가가 《이렇게 하고 써야 획이 제대로 뻗습니다.》 하고 입으로 써보이였다. 두눈을 부라리고 석봉의 글을 한자한자 쫓아가던 주인은 느닷없이 씨물하고 웃었다.

입으로 쓴 글씨가 하도 신통해서인지, 그 뜻이 그럴사해서인지 아니면 하는 수작이 너무 엉뚱해서인지 하여튼 속이 풀린 웃음을 짓는것이였다. 석봉은 함께 웃어보이고나서 이번에는 붓자루를 단단히 틀어쥐고 단숨에 휘갈겨내려갔다. 생겨나는 글자의 획과 점속에는 아까 절로 떨어지고 우정 튕겨 떨군 금가루먹방울들이 하나하나 남김없이 파묻혀들어가버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였다. 주인인 그 나라의 늙은 재상은 완성된 장지짝을 눕혀놓고도 보고 세워보기도 하면서 못내 기쁨을 금치 못해하였다.

《과시 명필이시구만!》

석봉의 글씨에 감탄해마지 않던 그는 역관더러 석봉의 허리에 달린 두루마리 한끝도 베여놓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후 석봉의 이름은 국내외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우리 나라에 왔던 이웃나라의 한 유명한 장수도 한석봉의 글씨를 얻어가지고 제 나라로 가서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글자랑을 하였다고 한다.

한석봉은 1605년 62살로 세상을 떠났다.

한석봉의 글씨를 찬양하여 옛 시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잔 글자는 신묘하고

큰 글자는 기이해

긴 창과 날선 검

삼엄하게 벽에 찼네

 

금시라도 벼락내려

적장을 내려칠듯

이를 보신 군왕은

만면에 기쁨일세

 

이처럼 한석봉은 우리 나라 서예의 새로운 장을 새겨놓았다.

현재 그의 필적으로서 개성의 선죽교비, 서경덕의 신도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승전비 등에 적지 않은 글자들이 전해져온다.

이러한 그의 글씨를 후세사람들은 《석봉체》라고 부르고있다.

한석봉은 지난 시기 우리 나라에서 김생, 김정희와 더불어 《3대명필》로 불리우고있는 뛰여난 서예가이다.

개성에 있는 한석봉의 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있다.

《…그는 송도에서 출생하였는데 처음 낳을 때 점치는 사람이 <옥토끼가 동방(조선)에서 나왔으니 락양(중국)의 종이값이 오를것이고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로 이름 날릴것이다.>고 하였다.

…그는 타고난 천재로서 또 공부에도 꾸준히 힘을 쓴 결과로 하여 해서, 액자 어느것이나 다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지 않은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쓴 한쪼각의 필적이라도 얻게 되면 수후의 구슬과 곤산의 옥에 비기였다.…》

후세에 추사체로 이름났던 김정희는 《완당집》에서 《석봉은 옛날의 필법을 깨닫고 좇았다. 그가 공을 들인것을 보면 산이라도 허물고 바다라도 메울만 한 기세가 엿보이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다는 모른다.》라고 썼다.

이것은 그의 성공이 바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라는것을 보여준다.

한석봉! 그는 우리 민족이 낳은 유능한 서예가였다.

그의 유명한 글씨와 관련하여 《월사집》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한호는 고요히

글씨에 정신 모아

늙은 주먹 붓을 쥐니

하늘이 힘을 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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