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천하명산 금강산을 자랑한 명필 양사언

(1517∼1584)
 

 

양사언은 리조 전반기에 활동한 명필가이며 시인이였다.

그가 천하명산 금강산에 얼마나 애정을 기울였는가 하는것은 금강산의 바위들에 명산을 노래한 시와 글을 수많이 새겨놓은것만 봐도 잘 알수 있다.

양사언은 자를 응빙, 호를 봉래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주부라는 벼슬을 지낸 양희수였는데 후처의 아들로 1517년에 출생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비록 후처로 들어갔지만 양사언은 서자가 아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서자로 알게 된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는 유람하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령암군수로 있을 때 한번은 시간을 내여 유람을 하고 돌아오다가 강원도 안변을 지나게 되였다. 때는 점심참이였는데 말에게 먹이도 먹여야겠고 자신도 배가 출출하여 주막집을 찾아갔으나 주인이 자리를 뜨고 없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시내가옆에 어느 한 초가집이 보이였다. 집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니 12살난 소녀가 나오는것이였다. 양희수는 소녀에게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부모님들은 농사지으러 들에 나가고 없는데 자기가 말도 먹이고 점심도 대접하겠다고 상냥스레 대답하였다.

양희수는 떠나면서 친절한 소녀에게 사례를 하려고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며 길손들을 대접하는것은 사람의 응당한 도리라고 하는것이였다. 양희수가 더욱 미안하여 소녀에게 어떻게 하면 감사의 뜻을 남길수 있을가 궁리하다가 《이것은 너에게 례장으로 주는것이니 잘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행장속에서 청색, 홍색부채를 각각 한개씩 꺼내여주니 공손히 받는것이였다.

소녀의 나이 열다섯이 되여 부모들이 시집을 보내려 하였더니 딸은 령암군수에게서 이미 례물을 받았으니 죽어도 다른데는 갈수 없다고 하며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하는수없이 군수를 찾아가서 전날의 사연을 아뢰였다.

마침 양희수는 상처를 당하였던지라 그 처녀를 례를 갖추어 맞아들이였다.

이렇게 되여 그들은 부부로 되였고 그 아들이 바로 양사언이였다.

양사언은 이렇게 양희수의 첩의 아들이 아니라 후처의 자식이였다.

양사언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령리하였는데 글공부에 열중하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모르는것이 없어 비범한 인재라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양사언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후 어머니는 눈을 감으면서 양사언과 본처의 아들들이 친형제처럼 지낼것을 유언으로 남기였다.

어머니를 잃은것으로 하여 양사언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실망하지 않고 부지런히 글씨련습과 공부에 정력을 다 쏟아부었다.

그후 양사언은 29살이 되던 154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평창군수, 안변부사, 함흥부윤, 회양군수 등을 지냈다. 특히 회양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올라 만폭동에 유명한 《봉래풍악 원화동천》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겨놓았다. 이 글을 보고 리조시기의 한 작가는 자기의 기행문집에 《룡이 뒤트는듯, 사자가 할퀴는듯 글씨가 풍악의 기세와 더불어 웅대함을 다투고있다.》고 썼다.

그의 호가 봉래였는데 후세사람들이 금강산을 봉래산이라고 부른것도 양사언이 바위에 이 글을 새겨놓은것과 관련되여있다.

양사언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유명한 시조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사언은 글씨를 잘 쓴 서예가로 더욱 유명하였다. 리조시기 4대명필로 꼽는다면 양사언과 함께 안평대군 리용,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등을 들수 있다. 안평대군은 격조높은 행서체를, 한석봉은 정확하고 또렷한 해서체, 김정희는 추사체라고 불리우는 개성적인 서체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양사언은 거칠것 없고 막힐것 없는 자유분방한 초서체를 잘 쓰는것이 특기였다.

그의 서체에 대하여서는 《청구야담》, 《계서야담》 등 여러 책들에 실려있다.

양사언은 한때 벼슬을 버리고 삼일포에서 지낸적이 있었다. 삼일포 장군대와 연화대사이에 마치 반도처럼 호수가로 나앉은 바위산이 있는데 여기에 앉으면 삼일포가 한눈에 보인다. 여기를 후세사람들은 양봉래(양사언)가 즐겨 올라앉았다고 해서 봉래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봉래대 아래에는 호수가 보이는 작은 굴이 있는데 여기를 봉래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말년에 양사언은 금강산아래쪽에 집 한채를 지은 다음 《비래정》(날아온 루정)이라고 이름을 짓고 여기서 지내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비래정의 현판글씨를 썼는데 《날 비》자는 잘되였지만 《래》자와 《정》자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날 비》자만 족자로 해서 걸어놓았다.

얼마후 양사언은 안변부사로 발탁되였다. 이때가 65살이였다. 그는 비래정을 떠나면서 사람들에게 집을 잘 지켜달라고, 다시 돌아와 살겠노라고 하였다. 그런데 안변에 있는 지릉에 불이 일어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봉건정부에서는 양사언이 지방관으로서 감독을 소홀히 했다는 죄목을 씌워 황해도로 귀양살이를 보냈다. 2년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온 양사언은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오던 길에 로상에서 객사하였다.

한편 양사언의 비래정은 여전히 동네사람이 지키고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금강산의 돌개바람인 금강내기가 불어닥쳐 서재문이 열리면서 바람에 책이며 족자가 사정없이 휩쓸려 날아갔다. 집을 지키던 사람이 황급히 물건들을 주어모았는데 《날 비》자족자만은 바다쪽으로 날려가 종내 찾지 못하였다.

그후 양사언의 친구가 그 《날 비》자를 보고싶어 비래정을 찾아왔다가 《비》자가 사라진 이야기를 듣고 그날이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이에 몇월 며칠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날자를 꼽아보더니 《날 비》자가 없어진 날이 바로 양사언이 죽은 날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야사에 불과한것이였으나 이렇게 양사언은 글씨를 잘 쓴것으로 널리 알려진 서예가였다.

그의 글씨는 금강산뿐아니라 묘향산에도 새겨져있다. 어느해인가 묘향산의 룡연폭포에 이르러 그 장엄한 경치에 격동되여 《신선굴택 운하동천》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힘있고 웅건한 필치로 하여 글은 후세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양사언은 비록 시대적 및 세계관적제한성으로 하여 인민을 위한 서예가로 활동하지 못하였으나 꾸준히 노력하면 어떤 일에서든지 성공할수 있다는 진리와 노력해보지도 않고 주저앉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실천행동으로 보여준 서예가였다. 또한 아름다운 우리 삼천리강산을 끝없이 사랑하고 그 감정을 글씨로써 력사에 남긴 명필가의 한사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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