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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녀성화가로 이름을 남긴 신사임당
우리 민족의 미술사에 녀성화가로 한페지를 차지하고있는 신사임당. 옛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은 그는 16세기 섬세하고 부드러운 정서로 개성적인 화폭을 창조한 당대의 이름있는 녀류화가였다. 신사임당은 그림뿐아니라 글씨와 수예 등에 모두 능하여 널리 이름을 떨치였다. 력사기록인 《근역서화징》에 의하면 사임당 혹은 임사재는 그의 호이고 성은 신씨이다. 평산사람인 신명화의 딸로서 감찰벼슬을 한 리원수의 안해이며 률곡 리이의 어머니였다. 1504년에 출생하여 47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게 된것은 부모들의 좋은 영향과 교육을 받은것과도 관련된다. 신사임당의 고향은 강릉이였다. 아버지 신명화는 고려태조인 왕건이 나라를 세울 때 공헌을 한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이였다. 강릉의 바위처럼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신명화는 1516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뜻이 없어 나서지 않고 일생 진사로 있으면서 오직 자녀교육에만 힘썼다. 우리 나라 력사에서 15세기 말엽이라고 하면 사람을 많이 죽이면서 방탕한 생활로 세월을 보낸 폭군 연산군이 집권하여 폭정을 일삼았고 한편으로는 간신들이 득세하면서 제세상처럼 날치던 때였다. 이것은 성품이 강직하고 고지식한 신명화로 하여금 벼슬을 단념하게 하였다. 그의 안해 리씨도 량반가문의 딸이였으나 남편의 뜻을 따라 시골에서 다섯 딸을 훌륭히 키워냈다. 신사임당은 바로 이 다섯 딸중의 둘째였는데 어릴 때부터 글씨도 남다르게 잘 썼고 바느질, 수놓이를 비롯하여 녀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을 막히는데가 없이 갖추고있었다. 특히 6살부터 부모의 통제와 교육으로 그림그리기를 시작하였는데 인차 그 재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그림그리는 사람을 천시하던 때였으므로 량반집소녀가 그림공부를 내놓고 한다는것은 량반들의 비난과 조소를 받을수 있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고향의 아름다움을 그림에 옮겨보고싶은 신사임당의 지향을 막지 못하였다. 그는 다른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짬나는대로 그림그리기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7살에 벌써 15세기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풍경화의 화법을 터득하였다. 신사임당은 그림뿐아니라 글씨에서도 남달랐고 수놓이나 바느질에서도 그를 따를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여러 색갈로 물들인 골무에 고운 수를 놓아 모아두군 하였는데 어머니는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에게 딸이 만든것이라고 하면서 늘 자랑하군 하였다. 그리고 자기 동생들에게는 누비버선에 수를 놓아주군 하였다. 그 수가 얼마나 고왔던지 동리에 나가면 수많은 녀인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매만져 시끄러울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에는 녀성적인 섬세한 감정과 정서가 잘 표현되여있었다. 그는 웅장한 산발이나 허황한 신선그림보다 포도, 란초, 참대, 매화, 오이, 풀벌레, 나비, 물고기, 잠자리 등 가정의 녀성들이 늘 가까이 대하는 동물들과 식물들을 특별히 잘 그렸다. 특히 옛사람들이 《사임당 신부인의 포도와 풍경그림은 절묘하여 안견의 그림 다음에 간다.》, 《사임당의 화첩을 보니 과연 그의 그림들이 꽃, 오이, 곤충, 나비, 벌 등 모두 살아움직이는듯 하여 그림속에 있는것 같지 않았다.》고 평가한것은 그의 그림의 절묘함과 신비함을 그대로 말해주는것이다. 신사임당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또 그들을 도와주었는데 어느날 그는 먼 친척벌 되는 사람의 집에서 잔치가 있다는 기별을 듣고 거기에 가서 일손을 거들어주었다. 그가 안방과 대청마루에서 잔치음식을 차리고 음식상을 나르느라고 분주히 돌아가고있는데 한 녀인이 방구석에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근심스럽게 바닥만 내려다보면서 자기가 입고있는 치마를 자꾸만 매만지고있는것이였다. 신사임당은 그에게 다가가 무엇때문에 그러느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처음에는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던 녀인은 신사임당의 친절한 물음에 끌리여 자기의 시름겨운 마음의 한끝을 내비쳐보였다. 한것은 이웃집에서 빌려다입은 옷에 고기국물이 튕겨 덞어졌다는것이였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신사임당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너무 걱정마세요. 진작 저에게 말씀하였으면 벌써 새것을 마련해드렸겠는데…》 녀인은 수수한 차림새로 자기앞에 앉아있는 신사임당의 진정어린 말에 그만 불안이 가셔져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신사임당은 곧 녀인을 데리고 조용한 방안으로 가서 치마를 갈아입힌 다음 벗어놓은 치마의 말기를 뜯어 주름살을 정히 폈다. 그리고 채색감을 묻힌 붓을 그우에 가져갔다. 녀인은 그러지 않아도 덞어진 치마에 울긋불긋 색칠까지 해놓으면 영영 돌려줄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그러나 이미 쑤어놓은 죽이라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볼뿐이였다. 신사임당은 만시름을 다 잊어버린듯 그림의 세계에 깊숙이 잠기여 팔과 손목을 유연하게 놀리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가볍게 휘두르는 붓끝이 한고비를 돌면 구슬다발같은 포도 한송이가 생겨나고 또 한번 붓끝을 채여올리면 푸른 잎과 줄기가 뻗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덞어진 자리들이 하나하나 흔적을 감추었다. 그가 그림을 다 그리고 붓을 놓으니 티 한점 없는 바탕에 방금 마당에서 뿌리채 떠다가 심어놓은듯 한 포도나무가 그려져있었다. 싱싱한 줄기와 푸른 잎이며 소담한 열매들을 자랑하는 그 포도나무야말로 청신하기 그지없었다. 신사임당은 그림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녀인에게 그림을 저자(시장)에 내다팔라고 권고하였다. 녀인은 그 권고를 받아들여 곧 그림을 저자에 내다걸었더니 장사군들이 저마다 사겠다고 값을 서로 올려 새 비단치마를 사고도 많은 돈이 남게 되였다. 녀인이 신사임당에게 사례를 하려고 하자 그는 손을 저으면서 《댁에서 기뻐하시니 저도 시름이 놓여요.》라는 한마디 말만 하였다. 녀인은 신사임당에게 거듭 인사를 하면서 《저는 그림이란 잘사는 부자집에서나 쓰이는줄 알았지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에게도 이렇게 좋은줄은 정말 몰랐어요.》라고 말하였다. 그후부터 그 녀인은 신사임당에게서 그림그리는 법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이것은 신사임당의 훌륭한 그림솜씨와 동시에 또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의 인정미를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이기도 하였다. 신사임당은 그 시기 잘사는 량반들이 그리던 심산유곡의 신선이 구부러진 지팽이에 의지하여 걸어가는 이상야릇한 그림이 아니라 백성들이 잘 알고 좋아하는 산수도를 비롯하여 생활가까이에 있는 소재를 골라 녀성다운 섬세성과 침착성으로 획 하나,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 단정하게 그려냈다. 신사임당의 그림이 얼마나 생동하였는가에 대해서 여러 일화들이 전해지고있다.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중의 한폭이 200여년이 지난 18세기까지 어느 한 사람의 집에 보관되여있었다. 그림내용인즉 포도잎대에 벌레가 앉아있는것이였는데 어느해인가 지루하게 내리던 무더기장마비가 멎고 밝은 해빛이 집안에 비쳐들었다. 집주인은 신사임당의 그림에 누기가 찼는지라 그것을 해빛에 말리려고 마당가에 곱게 펴놓았다. 집주인도 늘쌍 보아오던 그림이였지만 정작 펴보니 포도잎사귀에 붙어있는 풀벌레가 신통히도 살아움직이는것만 같았다. 주인은 포도나무시렁을 손질할겸 잠간 자리를 떴다. 이때 마당가에서 돌아치던 장닭이 그림있는데로 가더니 풀벌레를 향해서 부리로 쫏는것이였다. 이때 집주인이 그것을 보고 후닥닥 놀라며 《이놈!》 하고 소리쳤다. 닭을 쫓아보낸 다음 그림에 그려진 풀벌레를 보니 닭의 부리에 천이 좀 해졌다. 닭이 두번만 쪼았더라면 영낙없이 천에 구멍이 났을것은 뻔하였다.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여 그림주인의 친척벌 되는 사람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였다. 그 사람이 송상기라는 사람인데 그는 그 말을 듣고 200년이 지난 그림이 어떻게 색이 퇴색되지 않고 그대로 있을가, 또 얼마나 잘 그렸으면 풀벌레가 진짜인줄 알고 닭이 그림속의 벌레를 쪼았을가 하는 생각에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신사임당의 또 다른 그림을 본 다음에야 그 말이 진실함을 믿었다. 그는 이에 대하여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그 말을 이상히 여기면서도 정작 실물을 보지 못해 유감스럽게 여기던차에 마침 다른 사람이 가지고있는 신사임당의 화첩을 보고… 비로소 전번에 친척벌 되는 사람의 집에 간직되여있다는 그림도 이런것이였으니 내가 들은 말이 빈말이 아니였다는것을 알았다.》 이것을 통해서도 신사임당의 그림이 얼마나 실물에 가깝게 생동하였는가를 잘 알수 있다. 그는 누구의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현실에 들어가 깊이 관찰하며 연구했고 직접 자신이 가꾸어보고 완전히 자기의것이 되여서야 그림에 담았다. 그의 그림들은 다감한 정서와 녀성적인 부드러움이 넘치고있으며 대상에 대한 관찰이 매우 정확하고 필치가 정교하며 색조화가 선명한것이 특징적이다. 특히 조선화 《가지》에서 그의 화풍이 더 잘 드러났다. 신사임당은 아이들에게 과제를 주고 글공부를 지도한 후에는 바깥남새밭으로 나가서 포도넝쿨이나 남새포기들을 손질했다. 어느날 아들애가 일손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옆에 조용히 다가들어 물었다. 《어머니, 그림을 그리려면 이렇게 일해보아야 되나요?》 《응, 그렇다. 이렇게 포도넝쿨이랑 풀잎이랑 만져봐야 포도잎새가 어떻게 생기고 벌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수 있고 그대로 그릴게 아니냐.》 이것이 그림 《가지》에 훌륭히 반영되였다. 그는 여기에서 외형만을 그저 곱게 그린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활적으로 정서있게 형상하였다. 그림은 한여름 뙤약볕아래서 무럭무럭 커가는 가지의 푸르싱싱한 잎사귀, 해를 따라 거침없이 뻗어오르는 줄기와 무겁게 드리운 탐스러운 열매를 생동하게 보여주었다. 이밖에 오늘까지도 사람들의 감탄속에 전해오는 그림들인 《물오리》, 《쏘가리》, 《기러기》, 《포도》, 《련못에 있는 백조》 등에는 사물에 대한 그의 치밀한 관찰력과 풍부한 표현력이 그대로 드러나고있다. 그 시기 신사임당을 따를만 한 화가는 없었다. 그를 신사임당이라고 부르게 된것도 그림을 그리고 그밑에 《신사임당》이라고 쓰기 시작한데서부터 온것이라고 한다. 당시 나라의 유명한 패설작가였던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이렇게 썼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포도나 산수의 그림은 특히 뛰여나서 사람들의 말이 세종때의 화가 안견 다음갈만 하다고 한다. 그 어찌 부인네의 붓이라고 하여 업신여길것이며 또 어찌 그림그리는 일이 녀자에게는 당치않은 일이라 할수 있겠는가?》 또한 다른 한 력사책에서는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있다. 《솜씨가 그윽하고 고우면서도 고상하니 이것은 그린 사람이 녀성인 까닭이고 채색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우니 그의 천재성과 높은 향기를 크게 찬양하지 않는이가 없다.》 신사임당은 훌륭한 화가였을뿐아니라 현숙한 부인으로서 자식들을 훌륭히 키운 어머니의 모범으로 력사에 기록되여있다. 특히 네 아들중에서 셋째아들인 률곡(리이)에 대한 각별한 정성은 후날 그가 나라의 인재로 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률곡이 3살때 말과 글을 함께 가르쳤고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고향과 현실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리치와 고상한 미술의 진미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쳤다. 하여 리률곡은 8살때 훌륭한 시를 써서 당대 학자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9살때에는 《여러 형제가 한집에서 산다》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려 《신동》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리률곡은 13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했고 그후 30년동안 여러 관직을 거쳐 살면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한 《10만양병설》을 비롯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개혁안들을 내놓았으며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이것은 모두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지성과 교육에 의한것이였다. 오늘까지도 그와 관련한 여러가지 일화들이 전해져온다. 신사임당이 서울에서 지내던 어느날 금강산에서 내려왔다는 중이 현룡(리이의 어릴 때 이름)의 관상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어, 이애가 장차 나라의 큰 인물이 될 산림기상을 타고났구만. 그런데 범을 조심해야겠는걸.》 신사임당은 웃었으나 역시 어머니로서 스칠 말이 아니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나이까? 혹시 무슨 방술이라도 없는지요?》 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애의 산림기상을 보태주기 위해서는 어디든지 시골에다가 밤나무 천그루를 심어 그 그늘에서 키우되 십년동안 그 밤나무를 한그루라도 죽여서는 안되겠소.》 중은 신사임당에게 오금까지 박는것이였다. 《어디 량주분의 지성을 보기로 합시다.》 (아무러면 밤나무 천그루가 범에게 물려갈 팔자를 면하게 해줄가? 말짱 허황하기 그지없는 소리지. 그러나 그만큼 밤나무를 공들여 가꿀만 한 지성을 가진 부모래야 장차 크게 성공할 귀한 아들을 가질수 있다는 뜻이라면… 우리 부모가 그만한 일을 할수 있는 정력이 없다면 그러한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이 무슨 큰사람이 될것인가?) 마침내 신사임당은 남편과 의논한 후 현룡이를 데리고 다시 시골집에 내려가기로 하였다. 사임당은 률곡동에 내려가 밤나무모를 마련한 다음 구뎅이를 파고 정성을 다해 천그루의 나무를 줄지어 세웠으며 한그루라도 죽는 일이 없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었다. 후날 《률곡선생》이 될 소년 현룡이와 그의 형제들은 이런 농촌에서 구수한 흙냄새를 맡으며 부모의 근로정신과 온갖 지성속에서 자라났다. 신사임당부부가 얼마나 자식들을 위해 공을 들였는가 하는것은 후날 호랑이가 현룡이를 잡아먹으려고 뒤를 따르다가 이 밤나무들이 집둘레를 빽빽이 둘러막아 그냥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세월이 흐른 뒤 또다시 옛날 그 금강산의 중이 찾아와서 사임당부부의 지성을 시험하기 위해 밤나무를 세여보게 되였는데 아무리 세여보고 또 세여보아도 어찌된 일인지 구백아흔아홉그루밖에 없었다. 이때 그옆에 서있던 굴참나무가 《나도 밤나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웃어넘길수 없는 이야기로 되고있다. 하기에 17세기 리조봉건정부의 한 관료는 《률곡선생이 겨우 말을 옮기던 어린시절 신부인이 <지사부모도>(아들이 부모를 섬기는 그림), <장공구세동거도>(장공이라는 사람이 9대에 걸쳐 수많은 자손을 거느리고 즐겼다는것을 그림으로 그린것)를 그려놓고 자식들을 교양하였다.》고 써놓았는데 이것만 봐도 신사임당이 자식교양에 바친 지성을 알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훌륭한 어머니의 교육과 교양을 받은 네 아들은 모두 자라 당대 유명한 인물들로 자라났는데 막내아들 리우도 어머니의 필법을 이어받아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리률곡은 어머니가 돌아간 후에 금강산에 들어가 1년남짓이 중으로 지냈으나 다시 산에서 내려와 글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침내 당대 유명한 학자로, 리조판사로 되였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정과 정서의 소유자인 신사임당은 이렇듯 중세에 이름난 녀류화가로, 또 자식들을 잘 키운 훌륭한 어머니로 그 이름이 후세에 널리 전해지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