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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꿈에 본 동산을 그대로 재현한 안견
(1418∼?)
꿈이란 참으로 이상하고 묘연한것이다. 손으로 잡을수 없고 깨여나면 안개처럼 사라지는것이 꿈이다. 지난 시기 꿈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생동하게 형상해낸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안견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화는 동양화의 고유한 미술형식으로서 힘있고 아름답고 고상한것이 특징입니다. 리조시기 화가 안견이나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하였을뿐아니라 필치가 힘있고 아름답습니다.》 15세기에 유명한 화가로 이름을 떨친 안견은 조선화의 전통적인 화법을 훌륭하게 구현했을뿐아니라 그 내용에서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한 화가였다. 안견은 당시 문인화(직업적인 화가가 아닌 봉건통치배들이나 선비들 같은 문인들이 그린 그림)의 화풍에 빠져 사군자(매화, 국화, 란초, 참대)와 같은 그림만을 숭배하던 봉건통치배들의 도식적이고 고루한 미학관을 배척하고 현실에서 직접 볼수 있는 대상들을 자기의 화폭들에 많이 구현하였다. 안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전하는것은 없고 다만 《룡천담적기》, 《용재총화》, 《리조실록》(세종∼단종)들에 나오는 자료를 통해서 그의 활동을 엿볼수 있다. 그가 누구에게서 그림을 배웠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당시 매우 유명한 화가였던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가 《꿈에 본 동산(몽유도원도)》을 창작한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오고있다. 어느날 밤 세종왕의 셋째아들 리용(안평대군)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였다. 그 꿈인즉 박팽년(사륙신의 한사람)과 함께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아름다운 동산을 구경하는 모습이였다. 꿈속에서 그려본 그 모습은 현실에서는 볼수 없는 희한한 광경이였다. 그것은 온갖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뒤에 있는 산에서는 폭포가 흘러내리는데 발밑에는 꽃들과 산삼, 불로초들이 자라나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고있는 그야말로 인간세상에서는 볼수 없는 신선의 세계였다. 그는 자기가 간밤에 꿈속에서 본 광경을 다시 생동하게 보고싶었다. 안평대군도 그림을 몹시 좋아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당시 도화서 화원으로 있던 안견과 친하게 지내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꿈속에서 본 광경을 재현하고싶어 안견을 불러다놓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림으로 그릴수 있는가고 물었다. 안견은 안평대군에게 《예, 얼마든지 그릴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는 즉시 붓을 들었다. 안견은 자기가 나서자란 아름다운 고향산천을 머리속에 그려보며 실안개가 낀 산골짜기와 온갖 꽃들이 피여나고 복숭아꽃들이 만발한 풍경을 자기 화폭에 담았다. 그림은 며칠만에 완성되였다. 그림을 받아본 안평대군은 너무 기뻐 어쩔바를 몰라하면서 안견의 그림솜씨를 두고 연방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그림이 《꿈에 본 동산》이라는 제목으로서 현재까지 남아있어 안견의 뛰여난 재능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그림에서는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왼쪽 아래켠의 현실세계로부터 높고 괴이하게 생긴 바위돌로 이루어진 오른쪽의 환상적인 세계로 가면서 꿈세계가 이어져있다. 산골짜기를 따라 오불꼬불한 오솔길을 톺아오르면 굽이굽이 개울이 흐르고 개울을 건너가면 흰 물보라를 날리며 떨어지는 폭포가 멀리 보인다. 그옆에는 연분홍꽃 만발한 복숭아동산을 에워싸고 병풍처럼 둘러선 천만봉우리들과 폭포수가 내가에서 피여오른 물안개에 솟는듯 잦는듯싶다. 이 그림이 얼마나 걸작이였는가 하는것은 옛 기록에서 《<꿈에 본 동산>은 천만봉우리가 키돋움하고 그사이에는 계곡에 날리는 폭포가 보일듯말듯 하며, 복숭아수림속에는 꽃봉오리가 비치게 하는 등 그림이 자못 섬세한 수법으로 되여있어 안평대군의 글외에 박팽년, 최항, 신숙주, 성삼문과 같은 당대의 이름있는 학자 20여명의 이름이 바다우에 꽃을 수놓은것처럼 씌여져있다.》고 전하고있는 사실만을 놓고보아도 잘 알수 있다. 그림은 소재자체가 환상적이고 추상적인것으로서 량반사대부들이 동경하는 신선세계의 리상향을 담은 제한성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그림에 그려져있는 풍경들은 우리 나라의 그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 아름다운 산천경개 그대로이다. 그림에는 삼천리강산의 아름다움을 우리 민족의 념원과 생활감정에 맞게 형상한 화가의 사실주의적창작경향이 시대의 지향과 함께 구현되여있다. 그림은 형상면에서도 대담한 전개식구성수법을 적용한 화면구성, 내려다본 부감구도, 자신만만한 필치, 농담에 의한 아름답고 풍부한 색채리용과 공간처리, 정교한 세부묘사 등으로 산천의 아름다움과 숭엄한 기상을 잘 살리였으며 인간의 랑만적지향과 정서를 생동하게 반영하고있다. 안견이 이러한 그림을 그릴수 있게 된것은 어려서부터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것과 관련되여있다. 안견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려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가 그림에 얼마나 신통한 재간이 있었던지 옛 그림들을 많이 보면서 잘되고 못된 점을 잘 갈라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견이 앞으로 큰 화가가 될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후에 안견은 호를 현동자라고 부르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의 그림재주가 어릴 때부터 보통수준이 아니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안견은 그림을 잘 그렸을뿐아니라 그림평가를 잘하기로 또한 유명하였다. 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옛날부터 명화로 일러오는 한폭의 그림이 있었다. 푸르싱싱한 가지를 길게 뻗친 한그루 소나무, 그 나무밑에 고개를 젖히고 서있는 사람, 그의 매혹된 눈길이며 감탄하는 표정은 산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사람은 이제라도 돌아서면서 《이 소나무가 얼마나 장하고 훌륭한가요. 눈서리에도 변함없는 저 푸른 기상을 보시오.》라고 혀를 차며 말하는것 같았다. 그림은 값비싼 보물로 인정되여왔다. 그런데 그러한 명화의 가치가 하루아침에 뚝 떨어지는 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안견이 그림의 치명적인 결함을 론박할 여지없이 간단명료하게 지적하였기때문이였다. 《이 그림은 과연 묘한 솜씨로 그린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잘못된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우를 바라보게 되면 반드시 목뒤덜미에 주름살이 잡히기마련인데 그림의 저 사람은 우를 올려다보는데도 목뒤에 주름살 한오리 없습니다. 아차 큰 실수를 하여 화가는 그림에서 뜻을 놓치고말았습니다. 참으로 아까운 일입니다.》 안견이 이런 평가를 내린 이후 오래전부터 전해져내려오던 값진 그 명화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버림받는 그림이 되고말았다. 이 이야기는 기성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생활의 진실에 기초하여 주견있게 그림을 평한 안견의 미술가다운 태도와 그림에서 뜻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대로 전하고있다. 리조시기의 문인 류몽인은 자기의 저서 《어우야담》에서 안견이 그림을 평가한 그 이야기를 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림이나 문장이나 다를것이 무엇이랴. 본뜻을 한번 잃기만 하면 비록 비단같은 문장과 수놓은듯 아름다운 어구라 할지라도 식견이 있는 사람은 취하려고 하지 않으니 안목을 구비하면 이를 능히 알수 있다.》 이것은 당시 안견의 식견이 매우 높았다는것을 웅변적으로 시사하고있는것이다. 안견의 작품들중에는 대체로 세종∼문종시기에 그린 그림들이 많은데 우리 나라는 물론 이웃나라들에까지 알려져 그의 명성은 더 높아졌다. 류몽인은 자기의 저서 《어우야담》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있다. 성종왕때 참대를 잘 그린다는 이웃나라의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와서 지난 시기에 그린 참대그림들을 다 보고나서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림이 하나도 없다고 한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안견에게 참대를 그려보도록 하였다. 안견은 원포(관상용나무, 꽃 등을 자래우는 곳)에서 왕의 어명을 받고 가져온 참대화분 한그루를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때는 석양노을이 지는 저녁무렵이였다. 참대잎사귀에 노을이 비쳐드는 모습을 보고 안견은 그 모습을 생동하게 형상한 그림을 사신에게 보이도록 하였다. 그림을 들여다보는 순간 사신은 마침내 깜짝 놀라면서 《이야말로 진짜참대입니다. 우리 나라의 명화가들도 이 그림에 맞설자가 드물것입니다.》라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안견의 작품들은 일본의 미술계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그 나라의 일류급미술가들은 안견의 절묘한 그림을 높이 평가하면서 안견이 그린 그림이라면 그 가격을 묻지 않고 앞을 다투어 구입하였다. 후에 일본의 어느 유명한 미술평론가는 안견의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 시대에 모두 남송화원 화풍이 류행되고있었는데 조선에서는 같은 시대에 안견과 같은 화가가 있었다는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림의 영향을 가지고 보더라도 소우본(일본화가로서 다른 나라에서 류행한 절파풍의 풍경화가)보다 우수하고 셋슈(1420∼1506,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풍경화가)라면 혹시 대상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셋슈는 … 절파풍의 화풍을 이어받은것으로서 품격으로 보면 아마 셋슈가 안견앞에 한걸음 물러서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안견이 당시 우리 나라 화단을 대표하는 거장이였을뿐아니라 일본의 대표적화가 셋슈보다도 훨씬 격이 높은 화가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안견이 당시 다른 나라들의 제노라고 하는 화가들을 눌러놓을수 있었던것은 그가 조선화의 우수성을 적극 살려 사물현상을 진실하고 생동하게 그려냈기때문이였다. 하기에 옛사람들도 《안견이 자연의 진실을 그대로 그려내니 화필을 잡고 그릴 때 애초부터 자기 솜씨를 대상물의 움직임에 맡길뿐이다.》라고 정확히 평가하였다. 안견의 화풍에서 좋은 점이라 보는것은 주제내용에서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하고있는것이다. 그림 《어부》는 경치수려한 호수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없이 앉아있는 량반선비의 모습이 아니라 고생속에 주름지고 땀내가 몸에 배인 어부의 인물화이다. 또한 안견의 화풍에서 우수한 점은 조형적형상에서 필치가 힘있고 아름다운것이다. 그의 풍경그림에서 표현되고있는 산이나 바위는 버섯이 돋아나는 모양의 상징적인 묘사가 대부분을 이루고있는데 이러한 형태묘사는 당시 풍경그림들에서 널리 쓰인 수법이였다. 그리고 공간배치가 간결하여 불필요한것과 조잡한것을 피하고 전반적인 조형중심을 살리는데 기본을 둠으로써 기본적인것과 본질적인것을 골라 조화롭게 통일시키고있다. 안견의 화풍의 특성은 또한 색채가 연하면서도 선명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게 표현되고있는것이다. 그의 그림들에서는 복잡하게 나타나는 대상의 색갈은 본색을 위주로 돋구어내였고 수시로 변화되는 색갈은 대담하게 생략하여 전반적인 색채를 통일적으로 조화시켰다. 그리하여 부드럽고 산뜻하고 아름답고 선명한 색채를 살렸을뿐아니라 묘사대상의 생동성과 선명성을 보장하였다. 한마디로 안견의 그림은 깊은 사색을 하게 하며 회화적인 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용재총화》에서 성현은 안견의 그림가운데서 제일 잘된 작품은 《청산의 흰구름(청산백운도)》이라고 하면서 최고의 걸작이라고 높이 평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그림은 안견이 한평생 정력을 들여 그린것이라고 하였다. 성현이 그처럼 높이 평가한 《청산의 흰구름》은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지 않아 그 모습을 볼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잘된 작품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하기에 안견의 특출한 회화적재능에 대하여 세종왕은 《안견은 으뜸가는 화가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안견의 이러한 개성적이며 독자적인 화풍은 15세기는 물론 그 이후 화가들이였던 신사임당, 리정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물론 안견이 그린 일부 그림들은 왕을 비롯한 지배계급들의 요구를 반영한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하려는 화가의 고심어린 노력이 그림마다에 력력히 남아있다. 꿈을 그린 화가 안견이였지만 그의 인생은 꿈이나 그가 그려낸 그림들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장식되지 못했다. 세종왕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권을 차지한 후 안견의 가장 가까운 후원자였던 안평대군 리용(수양대군의 동생)마저 강화도에 정배보내고 뒤따라 《사약》(왕이 내려보낸 독약)을 내려보내여 죽이였다. 그리고 그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박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견은 미술가답게 자기의 심정을 반영한 그림들을 계속 창작하였다. 그는 독특한 필치로 조선화화법의 기초를 쌓는데 전념함으로써 우리 나라 중세미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