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5세기 문인화가 강희안

(1417∼1464)

 

 

강희안은 직업적인 화가가 아니라 벼슬을 한 사람이였으나 그림과 글씨에 하도 능하여 우리 나라 문인화의 대표적인 화가의 한사람으로 전해지고있다.

강희안은 1417년에 강석덕이라는 량반선비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자를 경우라고 불렀으며 호는 인재라고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24살나던 해인 144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직제학, 인수부윤 등의 벼슬을 하였다.

당시 량반사대부들속에서 갖추어야 할 《자질》의 최고표현은 이른바 《3절》(시, 서, 화)이였다.
강희안은 바로 이러한 품격과 재능을 다 갖춘 인물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강희안은 특히 미술에 재능이 있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미술공부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의 뛰여난 그림솜씨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경상도 진주의 어느 한 시골에서 한 어린 소년이 참새잡이장난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때 그 소년의 집으로 한 량반선비가 찾아왔다.

손님은 집주인의 친구로서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러 나들이를 온것이였다. 손님은 장난에 팔려있는 어린 소년(강희안)을 보더니 끌어다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음, 그놈 참 잘 생겼다. 자네 아들녀석을 잘 두었네그려. 아버지를 닮아 그림도 잘 그리겠구만.》 하고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자고 하였다. 소년은 손님의 손목을 잡아끌고 집뒤뜰안에 돌아가 담벽에 그려놓은 그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였다. 담벽에는 숯검댕이로 쓴 글씨와 그림들이 있었는데 모두 획과 구도가 잘 맞아 제법 격식을 갖추고있었다.

손님은 감탄해마지 않았다.

이것은 강희안의 어릴 때 있었던 한토막의 야사에 불과하다. 그후 강희안은 글씨와 그림, 시와 문장짓기를 열심히 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세종왕때에는 집현전 직제학의 벼슬로 《훈민정음》해석편찬에도 관여하였다.

옛 기록에는 《강희안은 문장과 시에 있어서 정수를 체득하였고 전서, 예서, 해서, 초서를 다 잘 썼으며 지어 그림의 절묘함에서 으뜸이였다.》고 평가하였다.

실지로 강희안의 그림의 특징은 묘사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과 표현수법을 새로운 높이에로 끌어올린것이다.

대표적인 작품들로서는 《생각에 잠겨(산수인물도)》, 《다리우에서(고사도교도)》, 《산수도》를 들수 있다.

그림 《생각에 잠겨》는 팔짱을 끼고 바위에 엎드려 턱을 고인채 잔잔한 맑은 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인물을 화면의 중심에 배치하고 뒤에는 깎아지른듯 한 절벽과 거기에 시원스럽게 드리운 굵직한 넝쿨풀을 간결하고 함축된 필치로 펼쳐보이고있다. 그림은 현실세계와 떨어져 자연속에서 허무한 생활로 해를 보내는 량반의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보여주고있다. 또한 인물의 차림새와 그를 둘러싸고있는 환경과의 대비속에서 시대정신에 뒤떨어진 지배계급의 면모와 그에 대한 비판적경향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림 《다리우에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있다.

그림은 한 량반선비가 심부름군아이에게 책과 거문고를 지워가지고 길을 가다가 돌다리우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중심에 배치된 돌다리, 그우에 있는 두 인물, 돌다리밑으로 소리쳐 흐르는 내물 등은 당시 우리 나라 산촌의 그 어디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자연풍경이다. 그림에서는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기떼를 보면서 생활에 몸을 잠근 소년의 동심세계와 이런 심리와는 배치되게 갈길을 재촉하는 량반선비의 형상을 통하여 몰인정한 량반지배계급에 대해 비난하고있다.

강희안은 량반출신의 세계관적바탕과 높은 관료의 생활적환경으로 하여 근로인민의 다양한 생활과 사회적으로 의의있는 대상들을 자기 화폭에 담아내지 못하였다. 주제내용선택에서 표현된 강희안의 이러한 화풍은 당시 첨예한 현실생활을 외면하고 강이나 호수가 있는 산촌에 숨어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살아가는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생활이라고 생각한 문인량반들의 관점을 반영한것이였다.

옛 문헌에는 강희안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그는 그림의 절묘함에 있어서 당시 그 누구도 그를 따를수 없었지만 자기 재주를 다 감추고 자랑하지 않았다.》고 에둘러 평가하였다. 그리고 강희안자체가 《서화란 천한 재주에 속하는것이니 후세에 류전되면 이름만 더럽힐뿐이다.》라고 하면서 량반사대부들이 그림을 그리는것을 일시적인 유흥과 여기(여가시간에 하는 기교)로 해보는 장난으로 간주하고있는데 대하여 서술하였다.

당시 강희안을 비롯한 문인화가들의 이러한 립장을 반영하여 좌찬성의 벼슬을 하던 강희맹은 자기의 평론에서 그림을 군자의 그림과 소인의 그림으로 갈라놓고 군자들이 그림에 일시 뜻을 두고 유희거리로 그리는 재미는 생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전문적인 화가들의 그림과는 대비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고상》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만 놓고보아도 강희안을 비롯한 량반사대부들의 회화에 대한 관점과 태도가 어떤것이였는가를 가늠할수 있다.

하기에 강희안의 그림들은 다 량반선비들과 그들의 생활을 주요묘사대상으로 하고있는데 이것은 그의 미학관적제한성과 관련되여있다.

여하튼 강희안은 《시, 서, 화》를 잘하여 특히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이름을 날렸다. 그때 그 나라의 이름있는 사람들은 강희안의 그림과 글씨를 보고 놀라면서 그림을 그려줄것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15세기 학자 성현은 자기의 저서 《용재총화》에서 《강인재는 그 타고난 재주가 높고 기묘하여 옛사람들이 이르지 못한 곳까지 깊이 들어갔다.

풍경이건 인물이건 모두 뛰여났는데 일찌기 그가 그린 <미인도>를 보았는데 실물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청학동>과 <청천강>을 그린 두 족자와 <경운도(밭갈이)>가 다 진귀한 작품이였다. 그리고 먹으로 소품그리기를 즐겨하였는데 곤충, 조류, 풍경, 인물 등을 그릴 때 붓질하는것을 보면 날림으로 엉성하게 하는듯 하여도 그가운데는 생동성이 스스로 나타나고있다. 진채색을 써서 화려하게 그리는데 전문화가를 따르지는 못하였지만 시적여운이 떠돌게 하는데서는 전문화가들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고 평가하였다.

한마디로 강희안의 그림들을 보면 대상을 단붓질로 대담하게 집약하고 함축하여 립체적으로 묘사하며 주인공의 형상에 모를 박고 나머지는 거기에 복종시키는 수법들을 썼다.

옛 기록에는 《그의 그림의 정취는 그 맑고 상쾌하기가 마치도 소나무아래서 맞는 바람과도 같아 사람들의 고상한 정서를 한층 돋구어준다.》고 평가한 글이 있다.

강희안은 현실에 대한 관조적이고 보수적인 태도, 회화의 사회적기능에 대한 그릇된 견해 등 자체의 세계관적제한성으로 인한 문인화적요소를 가지고있었으나 리조 초기 우리 나라 회화발전에 좋은 경험을 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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