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제8장 들이닥친 역풍

 

쌍매골에 어스름이 깃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서북쪽을 병풍처럼 막고있는 련봉너머로 마가을해가 숨어버리자 기다린듯 골안의 여기저기서 흰 연기가 나무숲에 걸려 그물그물 피여올랐다.

근거지의 안전을 위하여 낮에는 일체 연기를 피우지 못하게 되여있었던것이다.

구수한 된장국끓는 냄새가 숲속생활의 풍미이련듯 골안 가득히 풍기였다.

방금 주경남대장의 방에서 나온 한정상은 출판소가 자리잡은 뒤산기슭으로 허적허적 향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돌아서서 반대켠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남쪽골어귀에는 독립지대지휘부가 자리잡고있었다.

독립지대의 녀성참모로 있는 성란희를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났던것이다. 그를 만나본지가 꼭 이레전인데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한골짜기에 있다고 하여도 워낙 출판소를 책임지고있는 한정상으로서는 자주 만나볼 기회가 없는데다가 모처럼 맞다들 때에도 처녀가 눈길을 내리깔고 바삐 몸을 사리니 말붙여보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지금 성란희에게로 가는 한정상은 기분이 들떠있었다.

속이 깨고소해지고 무엇인가 산너머 멀리에서 가물거리던 무지개가 가까이 다가서는듯도 싶다.

이걸 보면 그 도고한 아가씨얼굴이 어떻게 될가.

그는 제멋에 겨워 휘파람 한곡조를 멋들어지게 불어제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것은 오늘 오후에 입수한 《조선일보》였다.

거기에는 이 쌍매골에서 축출인지 아니면 도주인지 석연치 않은 방억세독립지대장의 하산과 관련한 기사가 실려있었다.

지금까지 이 쌍매골에서는 방억세의 행방불명을 놓고 여러가지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있었다.

방억세는 원래 출세주의자이며 기회주의자이고 배신자였다는 소문이 그중 컸다.

일정시기에 항일죽창대 대장은 명색뿐이고 실상은 일본놈들과 내통하고있었다는것이다. 한달에 한번씩 산에서 내려가 모연공작도 하고 반일조직들과의 련계도 가진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일본특무기관에 정상적으로 공작보고를 하려고 갔다는것이다.

해방후 좌익권에 들어간것도 CIC(미군방첩대)의 지령에 따른것이였고 그에 대한 지명수배령이 내리고 이어 빨찌산에 들어온것도 CIC의 조종에 따르는 일종의 연극이였다는것이다.

그런데 빨찌산생활을 다시 시작하자니 너무 베차서 여러가지 자료를 걷어쥐고 도주했다는것이다.

실지 그가 떠나자 닷새후에 쌍매골근거지가 생긴이래 처음으로 한개 련대병력의 군, 경합동무력이 달려들었던것이다. 그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지지 않았느냐고 떠들었다.

한편 유격대지휘부는 방억세가 쌍매골을 떠난 후 곧 참모부와 정치부의 합동회의를 열고 방억세의 《실종》문제를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주경남이 간단히 보고를 제기하였는데 방억세가 해방전의 부상자리가 도져서 지대장으로 사업하기 힘들다고 제기하여왔다는것, 차라리 산에서 내려가 빨찌산부대에 대한 후방사업을 맡아보겠다고 했다는것, 그래서 대장과 정치위원이 사흘에 걸쳐 지휘부에 불러들여다 비판도 하고 검토도 하였다는것, 방억세가 자기 문제가 엄중하게 검토되는데 불안을 느끼고 산에서 내려갔다는것, 그러나 그 사람이 결코 투항이나 변절할 사람은 아니므로 그를 조직과 빨찌산에서 제명하는것으로 이 사건을 결속하는것이 바람직하다는것, 이와 관련하여 더 소동을 벌리거나 근거지이동 같은것은 일단 보류하고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자는것 등으로 설명하였다.

회의는 대장의 제의대로 방억세를 빨찌산과 조직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하고 이 사건을 결속하였다.

그러나 회의내용은 지휘부성원들은 물론 쌍매골전체를 벌컥 뒤집어놓았다.

특히 방억세와 해방전부터 상종하여온 죽창대출신의 대원들은 커다란 좌절과 실망을 가지고 방억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소식은 성란희에게도 즉시로 전달되여 그를 아연실색하게 하였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후 한정상이 그를 일부러 찾아갔을 때 처녀는 담담한 어조로 분연히 대답하였다.

《난 그 모든것을 믿고싶지 않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 녀자의 얼굴이 차돌처럼 너무도 여무지고 파아랗게 얼어들어 한정상은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야 하였다.

웬만한 녀자라면 정을 주어온 남자에 대한 너무도 어지럽고 혹독한 소문에 까무러쳤을것이련만 그 철석같은 믿음에는 한정상도 아연해질수밖에 없었다.

닷새후에 근거지에 대한 적들의 첫 《토벌》이 벌어진 후에 방억세에 대한 또 한차례의 비난이 골안을 휩쓸었지만 처녀는 여전히 한정상의 앞에서 그에 대한 가지각색의 억측과 추문들에 코웃음을 쳤다.

사실 골안에 지금도 어지럽게 돌아가고있는 소문의 진원은 한정상이였다.

벌어진 사태를 놓고 한정상은 쉽게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주경남의 보고를 접하는 순간에 쾌재를 올렸다.

방억세의 실종을 잘만 내걸면 방억세에게서 성란희를 영원히 떼여놓을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을 채웠던것이다.

성란희는 그 연해보이는 얼굴이나 인상과는 달리 세차기 그지없는 성미다. 부러질지언정 굽혀들지 않는 기질을 가진 흔치 않은 처녀다.

한정상은 사귄지 한해 남짓한 기간에도 자기를 본척도 하지 않던 란희가 그 불쾌한 일을 겪은 후 방억세에게 서슴없이 자기의 마음을 내준것을 보면 확실히 방억세는 정신적으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사람됨으로 보나 자기따위는 견줄수 없는 사나이라는것을 느꼈다.

기실 자기도 만나는 첫 순간부터 그 인간에게 위압되여버렸다.

하지만 분명 방억세에게로 일순간에 달아오른 그 녀자의 감정을 가라앉혀주고 산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고 장광설을 늘어놓고 미국류학이라는 유혹의 미끼도 던지였지만 끝내 그 녀자의 죽창대입대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그 녀자를 놓칠수 없어 자기마저 죽창대를 따라서는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방후에는 성란희가 가는 곳이라면 현해탄도 넘나들었던 한정상은 성란희의 인생관도 죽창대생활과 해방후의 투쟁속에서 몰라보게 달라지는것을 실망에 젖은 눈으로 지켜보아왔다.

목가적인 애상에 잠겨 남성적인 미에 매력을 느끼던 부자집처녀의 이성의 세계가 지워지고있었던것이다.

성란희는 봉건귀족의 부유한 터전에서 돋아나 부르죠아교육과 교양을 받으며 자라난 녀성으로부터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성전에 나선 투사로서의 눈을 가지고 사랑의 세계도 새롭게 펼쳐가고있었다.

따라서 남성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으니 인간 방억세를 사모하고있다.

방억세의 혁명에 대한 신념, 억센 기질, 지휘관으로서의 로숙한 풍모, 조국과 인민에 대한 충실성을 사랑하고있다.

결국 한정상이라는 존재는 방억세가 자기들사이에 쐐기처럼 박혀든 때로부터 성란희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성가시기만 한 부담스러운 물건짝으로만 비쳐들수밖에 없게 되였다.

한정상이 자기를 구태여 자랑할수 있다면 천성으로 타고난 맑은 얼굴빛과 해사하도록 곱게 생긴 얼굴, 법관의 교육을 받은 사람다운 류창한 언변과 해종일이라도 엮어낼수 있는 공산주의리론을 소유하고있다는것이였다.

일찌기 서울에 와있은 미국목사 알론을 사귀게 되고 그의 권고로 배운 공산주의리론이 이렇게 죽창대와 빨찌산에, 그리고 처녀와 사귀는데서도 요긴하게 은을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점도 처녀의 심장을 틀어쥐기에는 너무도 부족하였다.

더구나 지금에 와서 성란희에게 비쳐든 자기 몰골이란 암내를 맡으며 느침을 흘리고있는 뿔난 황소처럼 되여있을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아침새에 이 모든것을 역전시킬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겨난것이다.

혁명가 방억세가 창졸간에 도주자 방억세로 락인이 찍힌것이다.

혁명에 대한 기피인가? 적에 대한 투항인가? 이게 진짜인가? 꿈같은 일이다. 누구도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정상도 아직은 실감이 가지 않는다. 방억세가 부상당한 자리때문에 이따금 고생해온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다. 그때문에 산중생활이 힘들어 지대장자리를 내놓을 소리를 했다는것도 리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여 검토를 받고 그게 두려워 방억세가 빨찌산대오를 그 무슨 정정당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도주할수 있는가? 조직적인 단련과 수양을 쌓은 인물이 일시적인 흥분에 그렇게 처신할수 있겠는가.

정상의 생각에는 이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로서 방억세의 이름과 체질에 어울리지 않는 미지수다.

그러나 지금 한정상은 사건의 진의를 가려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타난 현상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태여 거기에 의심을 붙일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도주자 방억세가 필요할뿐이다. 왜 도주했는가? …

그에 대해서는 개의할바가 아니다.

그에게서 방억세는 벌써 오랜 시절부터 보복을 다짐해온 적수였던것이다.

그래 방억세의 실종을 놓고 쌍매골이 실망과 분노로 설설 끓어번지고있을 때 한정상만은 미칠듯 한 희열에 붕- 떠있었다.

성란희는 혁명가 방억세를 사랑하여왔지 도주자 방억세란 안중에 없을것이다. 이거야말로 하늘이 마련해준 절호의 기회, 행운이 아닐수 없다.

도주자 방억세- 이 말이면 성란희에게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인물의 그림자는 꺼져버리고야말것이다.

첫 타격을 가하였다. 놀랍게도 그 녀자는 끄떡없었다. 자그마한 흔들림도 없었다. 메사해서 물러났다. 그러나 한정상은 그 녀자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그럴수 있다. 믿음을 쉽사리 허물지 못할것이다. 그 녀자의 충격과 고민은 시간을 필요로 할것이다.

달팽이같은 굳건한 갑을 쓰고 옹크리고있는 그 녀자의 마음속에 계속 키질을 해서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한정상은 지금 열심히 키질을 하고있다. 방억세에 대한 갖은 험담을 만들어 그 녀자의 귀에로 흘러들어가게 하고있다.

키질을 하기 바쁘게 골안을 한바퀴 휘익- 돌아가는 바람결이 그 녀자의 귀라고 스쳐지나갈수는 없을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방억세의 투항을 립증할수 있는 자료가 들어왔다. 너무 기뻐 정치위원과 대장을 찾아갔다. 방억세에 대한 격노를 터뜨리고 열렬하게 주장하였다.

이 자료를 걸고 각 중대들에서 방억세를 타매하는 성토모임들을 열어 대원들의 투쟁각오를 굳게 다지게 하자는것이다. 그리고 당장 그 비렬한 도주자에 대한 결석재판을 벌려 사형을 선고하고 현지에서 집행하여 빨찌산대오의 기강을 반석같이 세워야 한다는것이다.

명령을 달라, 내가 떠나겠다.…

방억세를 강도높게 타매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사상의 투철함을 한바탕 시위하는 소리에 정치위원은 시기상조라며 심중하게 손을 내저었다. 주경남대장은 신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막 꾸겨서 던져주며 소리질렀다.

《찢어버렷! <조선일보>는 우익이야! 그눔들 신문쟁이들 말이나 듣고 빨찌산정치를 하겠는가. 이 문제를 놓고서는 이미 지휘부의 결정이 있지 않았는가.》

(그래, 당신 말이 옳다. 신문쟁이들 말이나 듣고 빨찌산정치를 해서야 안되지, 흥… 하지만 대장동지, 난 이걸 이렇게 써먹으려고 하오.)

한정상은 쓰겁게 웃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란희, 네년이 이거야 부인할수 없을테지. 변절자를 사랑한다는것도 변절이란 말이야.》

한정상은 문득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때까지 주경남의 앞에서 막 움켜쥐고 나온채로 있는 신문을 바닥에 반반하게 펴놓고 뱁새눈을 실눈처럼 가늘게 해가지고 다시한번 방억세의 배신을 립증해주는 기사를 흐뭇해서 훑었다.

《좌익에 투철한 빨찌산지대장의 선언》

이것이 기사제목이다.

기사에는 태룡산빨찌산 지대장으로 있던 방억세가 산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이 실려있었다. 그 원인은 아직 법적으로 해명되지 않았는데 주되는 원인은 신병관계상문제라고 썼다. 여기에 일정한 사상상의 문제도 있을것이라는 식으로 기자의 분석과 추리로 일관되여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방억세는 서울에 정착하여 일체 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을것이라고 하면서 동료들의 지지와 협조를 부탁했다는 글도 있었다.

기사의 마감글에는 불원간에 방억세의 《선언》에 대한 법기관의 검토와 평가가 있을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것을 보게 되면 성란희의 립장은 그자리에서 달라질것이다. 분명코 성란희는 부서질지언정 쭈그러들지 않을 녀자다. 그 녀자의 기질로써 인생의 요술을 피우고있는 배신자를 용납할리 만무하다.

성란희가 거처하는 녀성호실은 주경남대장이 골짜기의 양지바른 잠풍한 기슭에 자리를 잡아 잘 지어준 귀틀막이였다.

주경남은 자기를 포함한 지휘부성원들은 다 오두막생활을 하면서도 녀성들의 병실만은 특별히 나무를 찍어 두겹으로 쌓고 그사이에 흙을 다져넣어 보기 좋고 정결하고 송진냄새가 싱그럽게 풍기게 하였다.

그리고 바닥에는 온돌을 놓고 구름나무를 찍어 노전도 만들어 깔아주어 겨울에는 훈훈하고 여름에는 습기가 없도록 하였다.

병실직일병에게 성란희참모를 찾아왔다고 하니 빨래터에 나갔다고 한다.

한정상은 옥계수의 지절거리는 물소리를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병실앞에는 사시장철 마르지 않는 옥계수가 하얗게 깔린 화강암우로 흘러내려 녀성들의 생활에도 편리하였다.

태룡산의 골짜기마다에는 어디 가나 이런 시내물이 흘러내려 예로부터 산중을 찾아든 뭇인생들의 삶을 지켜주는 생명수로 되여온다.

태룡산의 물은 나무뿌리를 적시며 모여든 시내여서 물맛이 좋고 위장에도 좋고 빨래도 잘되여 거친 산생활을 해나가는데서는 더할나위없이 리로왔다.

한정상은 방치소리를 찾아 숲속길을 걸어가다가 웃쪽에서 들려오는 녀자의 청아한 노래소리에 멈춰섰다.

귀에 익은 나직한 노래소리에 한정상은 입귀가 어쩔새없이 벙긋 열리고 가슴속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성란희의 노래는 목청이 워낙 고운데다가 자기의 심혼을 다 실은듯 감정이 절절히 비껴있어 듣는 사람이 쉽게 젖어들게 한다.

그러기에 빨찌산오락회에 한번 나서면 대원들은 세번네번 불러야 놓아주군 한다. 성란희는 거치른 산생활에서 부모처자 다 버리고 피의 싸움을 벌리고있는 전우들을 위하여 쾌히 재청을 받아주군 하였으며 성의를 다하여 노래를 불러주군 한다.

성란희의 그 갸륵한 심정을 알기에 주경남이나 정치위원은 물론 대원들은 성란희를 진심으로 아끼고 고마워한다.

한정상이 해방전에 성란희에게 홀딱 반했던것도 그 미모의 얼굴에 앞서 봄날의 종다리처럼 맑고 쟁쟁하게 북한산의 숲속을 흔들던 유정한 노래소리였다.

일본의 도꾜제국대학 법과 3학년에서 공부하던 한정상이 방학이 되여 서울로 돌아온지 사흘째 되는 여름날이였다.

그날 한정상은 서울의 친구들과 함께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으로 밀려갔다.

그들은 등산로정을 따라 북한산정까지 올라갔다가 녹초가 되여 기슭에 내려섰다.

그곳에서는 리화녀자전문학교 학생들의 야유회가 한창이였다.

한정상은 친우들과 함께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북한강에서 몸을 씻었다.

불현듯 들려온 녀학생의 노래소리에 대뜸 취해버렸다.

녀학생은 처음에는 애조가 짙게 어린 《봉선화》를 불러 한정상의 심금을 처량하게 울려놓았다. 다음에는 《독립군가》의 전진적인 억센 선률로 주먹을 불끈 틀어쥐게 하고 온몸에 약동하는 기운을 돋구어주었다.

그다음에는 다시 잔잔하면서도 애상적인 이딸리아의 노래로 이어졌다.

다 특색이 있고 리듬이나 박자나 성부가 대조를 이루는 노래들을 자기식으로 맵시있게 부를 때마다 청중의 환호소리가 높아지군 하였다.

가수를 보고싶은 충동에 옷을 재빨리 걷어입은 한정상은 동료들이 놀려대는 소리를 뒤전에 남겨놓고 들꽃 한묶음을 재빨리 꺾어안았다. 녀학생들의 야유회가 벌어지고있는 강변의 커다란 정자나무밑은 녀학생들뿐아니라 노래소리에 끌려 모여든 등산객들로 하여 립추의 여지가 없이 빽빽이 들어차있었다.

한정상은 자기도 놀라리만치 담기가 있게 어깨성을 쌓고 그를 막아나서는 녀학생들을 헤치고 이딸리아노래를 넘기고있는 가수에게로 다가갔다.

노래의 세계에 취해들어 새파란 하늘에 눈길을 보내며 맑은 웃소리로 노래의 절정을 장식하는 처녀의 아릿다운 모습이 한정상을 더욱 황홀하게 하였다.

그는 가수가 노래를 다 끝내고 청중의 박수갈채에 파묻혀 인사를 하는 순간에 자기를 걷잡을새가 없이 달려나가 그에게 꽃묶음을 안겨주며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내들었다.

그는 수첩 한장에 제 이름 석자와 학교이름을 써서 뜯어주고는 수첩과 연필을 척 내밀며 큰소리로 웨쳤다.

《자, 난 이런 사람이요. 여기다가 자기소개를 해주오.》

어데서 자기에게 그런 담기가 발동되여 일견 그런 무모한 일에 제몸을 내댔는지 뒤날에도 두고두고 이날의 도담한 행동이 제 생각에도 놀랍고 대견스럽군 하였다.

난데없이 나타난 생면부지의 남학생에게서 꽃다발을 받은데다가 무례하면서도 담력이 엿보이는 청까지 받은 가수는 너무도 당황해서 금시 맑던 얼굴이 딸기빛이 되여 어쩔줄 몰라 쩔쩔맸다.

그런데 장난기많은 시절의 녀학생들인 그의 동료들이 짝짜그르 손벽을 치며 웃고 떠들며 한마디씩 소리쳤다.

《야, 란희야. 멋지게 이름 석자 갈겨주렴!》

《란희, 뭘 그래. 리화망신을 시키지 말아. 맞받아나가라! 용감하라.》

《아니 아니, 그까짓 들꽃 한다발에 넘어가면 안돼. 그건 유혹의 함정이다! 도고해야지.》

녀학생들은 성란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그냥 얼굴이 새빨개서 주밋거리자 더욱 승이 나서 두패로 갈라져 승벽내기로 목청들을 돋구었다.

《받아라. 리화가 뒤걸음쳐서는 안돼!》

《받지 말아. 리화가 가볍게 움직이는게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버티고선 한정상은 그대로 물러서자니 자존심이 허락치 않고 서있자니 찧고 까부는 녀학생들속이라 금방 씻고 나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고있었다.

게다가 뒤미처 달려온 친구들이 소리를 합쳐 녀학생들에게 질세라 그의 의기를 북돋아주고있었다.

《한정상, 그대로 물러서면 비정상이야. 버티고 견디라!》

《옳다. 그건 반정상이다. 공세를 해라. 사각모자값을 눅게 불러서는 안돼!》

종시 성란희는 그에게 손을 척 내밀어 수첩을 받았다.

그러자 찬성, 반대를 주장하는 소리들이 또 왁작 끓어올랐다.

성란희는 자기에게로 쏠린 녀동무들의 눈길을 일별하고는 수첩을 꽃묶음속에 끼워놓고 활달한 달필로 글을 남겨주었다.

《서울방직공장 날염공 오동동.》

성란희가 한정상에게 수첩과 연필을 장난스럽게 척 내밀고 빨간 입술을 조금 비쭉 내밀어보이자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던 녀학생들이 또다시 새벽잠을 깨친 참새떼처럼 떠들어대며 손벽을 쳤다.

돌아오는 길에 성란희는 한강물에 한정상이 넘겨준 종이장을 꽃묶음에 끼워가지고 던져버렸다.

처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은 서울방직공장정문에서 날 찾을거야. 날염공 오동동을 찾아서 말이야. 어때?》

녀학생들은 재간있게 도꾜제국대학 법과생을 골탕먹이고 리화녀자전문학교의 존엄을 떨친 동료를 손벽으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한정상이 다시는 자기를 찾아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성란희의 판단은 인차 깨여지고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수첩에 있는 녀학생의 글을 보고 자기가 속히운것을 알게 된 한정상은 리화녀자전문학교의 교문에서 여러날을 보내다가 끝내 성란희를 찾아내고야말았다.

성란희는 다시 찾아온 한정상를 구면지기처럼 반겨주었다.

뿐더러 수첩에 거짓수표를 남긴 자기의 소행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일후에 그들의 관계는 리화녀자전문학교의 큰 화제거리가 되였다.

그러나 성란희는 비발치듯 날아오는 동료들의 이죽거리는 눈총에는 개의치 않고 그들앞에서 일부러 사내의 팔을 척 끼고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해쭉 웃어보이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여 그들의 인연이 맺어져 련애한다는 풍설까지 돌아가게 되였던것이다.

금방 망울을 터친 양귀비꽃처럼 생기있고 열정적인 처녀에게 삽시에 취해버린 한정상은 안방에서 박색과 무지렁이라는 당찮은 리유로 소박을 받으며 누렇게 시들어가는 안해마저 시골친정으로 쫓아보냈다.

일후에 이것을 알게 된 성란희가 오똘거리며 절교까지 선언하였다.

《어쩌면 그럴수 있나요.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요!》

《왜? 그건 케케묵은 봉건의 해묵은 찌꺼기요. 개명천지에 어울리지 않는건 썩뚝 잘라던지는게 문명개화된 현대사나이의 멋이란 말이요.

낡은것의 청산이 없이 새것의 창조가 있을수 있는가.

이건 20세기 인간들의 세계관적기초로 공인된 변증법적유물론의 진수란 말이요.》

한정상은 이렇게 그 무슨 심오한 철학의 정의마저 거들며 고급한 지성이 풍기는 류창한 열변으로 자기의 부도덕을 합리화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처녀의 마음을 불붙게 하려고 너덜거렸다.

무르녹아갈듯싶던 그들의 사이가 한해를 넘기기도 전에 바로 일본군《위안부》홀치기에 나선 쪽발이들의 망종짓과 그 망종짓을 제압한 방억세라는 외간사내때문에 무서리에 꽃잎지듯 흐무러져내리고말았다.

저만 살겠노라 줄행랑을 놓은 그때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지지벌개지고 쥐구멍이라도 숨어들고싶지만 풀메뚜기 뛰여들듯 그 판에 뛰여들어 자기와 성란희사이를 순식간에 쩍 벌어지게 한 방억세가 얄밉기 그지없다.

죽창대생활부터 시작하면 현해탄까지 넘나들며 고생살이가 이제는 몇해째인가.

더구나 지금의 빨찌산생활은 하루가 한해맞잡이다.

그리고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총탄에 목숨 건지기도 쉽지 않다.

자기 숨통을 노리는 총탄이 앞에서뿐아니라 뒤에서도 날아들지 모른다는 위태위태한 생각을 하면 천길벼랑을 넘어가는 줄타기를 하는듯싶어 언제 한번 마음놓고 깊은 잠에 곯아떨어질수도 없다.

그래 기회만 생기면 성란희를 꾀여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수를 썼다.

이 지긋지긋한 산속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장안에 내려가 보란듯이 살아보자는것이다. 거기서도 조직의 활동은 얼마든지 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때마다 한정상에게 차례진것은 숯불같이 시퍼런 빛을 쏘아대는 처녀의 매운 눈초리였다.

얼마전에는 오히려 이런 말로 훈계하고 경종을 울려놓기까지 하였다.

《한정상동지! 동지는 나를 조용히 만날 때마다 란희씨라고 하는데 그 부름말부터 듣기 역해요. 우리에게는 우리 식의 훌륭한 부름말이 있지 않나요.》

한정상은 늘 호젓한 자리에서는 《란희씨》라고 보다 사이를 좁히는 의미를 붙여 불러주군 했던것이다.

《그리고 우린 빨찌산이라는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차피 이 땅에서 미국놈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무장을 놓치 않을것이라고 선서한 사람들이니 선서대로 살고 싸워야지요.

선서위반자는 곧 배신자라는것을 잊지 마세요.

배신자에게는 빨찌산식의 형벌이 집행된다는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 말을 할 때 한정상은 그 준엄한 의미에 진저리를 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성란희에 대한 집념은 비루하고도 지꿎었다.

한정상은 자기에게 바늘귀만 한 틈새조차 보이지 않는 처녀였지만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성란희와의 관계에는 그의 운명이 걸려있기도 하다.

그 리유가 있다. 그 리유가 떠오를 때면 금시 여러가지 어지러운 몰골들이 일시에 떠올라 속이 서늘해지고 초조해진다.

《성란희를 타고앉으라.》

이것은 권고가 아니였다. 그것은 명령이였다.

꿈결에도 어지럽게 들리는 그 지저분한 소리에 쫓기여 그냥 성란희를 품에 넣고저 로심초사로 낮과 밤을 보내오지만 한걸음의 전진도, 희미한 빛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날을 따라 더 암담해지기만 한다.

그래도 그에게서 물러설수 없는 한정상이였다.

어느날 저녁에는 원고의뢰라는 구실로 출판소소장의 초막에 불러들여 완력으로 처녀를 정복하려고 덤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란희는 크게 성내지 않고 싸늘한 미소를 담은채 점잖은 훈계로 부그그 끓어오른 사내의 정욕을 순식간에 꺼져들게 하였다.

《한정상소장동지, 당신은 지금 처녀의 성부터 문질러버리면 녀자의 마음을 접게 할수 있다고 생각하고있는데 순서가 분명 바뀌였어요. 어리석군요. 이런 식의 접근은 피차에 아름답지 못한 추억만 남길뿐이예요.》

한정상은 상대의 이렇게도 도고하고 이렇게도 사리분명한 리성앞에서 어쩌는수가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정상은 자기가 기어이 꺾어보려는 꽃이야말로 세속에 이지러지지 않으며 거친 탁류에 덞어지지도 않으며 오히려 세월의 비바람에 더 싱싱해지고 더 예뻐지는 천상의 일점명화라는것을 굳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더더구나 물러설수가 없었고 놓쳐버릴수가 없었다.

한정상은 언젠가는 기어이 그를 끌고 서울로 내려가 안방에 들여앉히고 《한정상변호실》을 꾸려놓으리라고 골백번 속을 다지고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보란듯이 소리칠것이다.

《자, 봐라.》

한해라도 십년이라도 기다려보자.

비바람도 눈바람도 참아보자. 누가 이기나 겨루어보자.… 이것이 한정상의 변함없는 야욕이다. 하기는 성란희를 품에 넣지 못하면 이 지긋한 악몽에서 헤여날수도 없게 되여있다.

원래 한정상의 뜻은 법조계에서도 황금거위로 공인된 일류급변호사로 되여 거부로 되는것이였다.

왜정말기에 서울교외의 말단벼슬자리인 리장으로 있다가 반일운동가들을 밀고한 《공로》로 면장자리까지 따냈던 그의 애비는 면의 가난한 주민들에게서 악착하게 긁어모은 돈을 깡그리 외아들인 한정상에게 들이밀었다.

그의 애비가 얼마나 이리처럼 면민들의 피를 빨아냈는지 해방이 되자마자 분노한 면사람들에게 맞아죽었다.

한정상은 다행히도 머리가 비상한 축이였다.

여섯살때는 천자문을 다 떼서 마을에서 신동이로 자자하였다.

그의 애비는 끝내 아들을 도꾜에 보내여 제국대학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한정상은 대학에 입학한 때부터는 성남땅에 교회당을 짓고 목사로 와있은 미국인목사 알론이 보내주는 돈으로 호부자자식들 못지 않게 푼푼히 돈을 날리며 공부를 할수 있었다.

한정상은 언제나 검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아멘을 련발하는 미국의 목사를 어린시절부터 알고있었다.

언제인가 알론이 준 금계랍 몇알을 받아먹고 학질을 떼고난 그의 모친이 성남교회의 독실한 신자가 되여 이따금 그를 데리고 교회당에 갔고 그때부터 알론의 관심속에 있었던것이다.

시세에 밝은 한정상은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일제의 패망이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될 때 제국대학안에 여러개 조직되여있던 맑스주의독서회에 들어갔다.

물론 이것은 알론목사의 권고에 의한것이였다.

알론은 한정상이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어떻게 된 일인지 《하느님의 사도》답지 않게 《현대세계를 알자면 반드시 맑스주의를 알아야 한다.》고 설교하였던것이다. 조선땅우에도 기필코 맑스주의가 지배적인 정치리념으로 될 때가 온다는것이였다.

유신론자가 무신론을 권고하는 수작에 한정상은 사뭇 경건하여지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한정상은 법리론에 못지 않게 맑스주의고전들을 독파하고 한다하는 공산주의리론가들도 무색케 하는 맑스의 《수제자》가 되였다. 그러던중 한정상은 《징병》령장을 받게 되여 서울에 건너와서 알론을 찾아다니다가 방억세를 알게 되였다.

한정상은 그 불미스러운 일에 부딪치게 되고 성란희와의 관계가 결렬된데다가 그 녀자가 방억세를 따라 죽창대입대를 선언하기까지 하자 반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를 만류하느라고 진땀을 뽑았으나 허사였다.

한정상은 성란희의 어머니를 만나 란희를 피신시킬겸 미국에 보내는것이 어떠냐고 말을 떼놓고는 알론을 찾아갔다.

그는 알론에게 처음으로 성란희와의 관계를 고백하고 그와 함께 자기를 미국으로 류학보내줄것을 애걸하였다.

그러나 알론은 한동안 노랑눈알을 굴리고나서 일본사람들이 각종 트집을 걸어 미국인들을 추방하고있으므로 자기는 일본법에 거슬리는 일을 할수 없노라고 딱 잡아뗐다.

차라리 처녀를 따라 죽창대에 가는게 좋겠다고 권하였다.

알론은 이렇게 그 유리점을 설명하였다.

《일본의 패망은 피할수 없게 됐네. 벌써 일본은 몰리기 시작했어. 이러하니 한정상, 당신은 그 처녀를 앞세우고 항일죽창대로 가라구. 그렇게 되면 조선속담에 있듯이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수 있지.

첫째로는 처녀를 가까이에 두니 놓치지 않게 되거던.

처녀란 곁에 두고 늘 살펴주어야지 멀리에 두고 지내면 재미가 덜하지. 그래서 먼곳의 장미보다 가까운 쑥꽃이 곱다 하는게 아닌가.

둘째로는 미래를 위한 경력을 갖추니 좋거던. 이제 일본이 망하면 조선은 공산세력이 지배할수 있단 말이요. 그러면 항일죽창대의 입대가 도약대가 되여 공산지도층의 심부에서 활약할수 있을거요.

셋째로는 홀로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전장터에 나가 개죽음을 당하느니 항일이라는 곳에 호적을 걸어놓고 얼마간 고생을 하는게 얼마나 실리가 있는 일인가.

그렇게 하게. 한두해 지나면 일본이 손을 들겠으니 그때까지 태백산에 들어가 숨어있는게 일석삼조일거요.》

이렇듯 한정상은 철저한 리기심과 미국목사 알론의 꼬드김에 떠밀려 항일죽창대에 들어섰던것이다.

지금 한정상은 또 하나의 결단을 내리고있었다.

더는 산속생활을 할수 없으며 빠른 시일안으로 청산해야 한다는것이였다. 하루하루가 한해맞잡이로 고달프기 그지없고 더는 견디여낼수 없었다.

그래 벌써 여러달전부터 그 준비를 하나, 둘 해가고있다.

서울법조계에는 한정상의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재판소들과 검찰기관들에도 있었고 리승만의 《경무대》 비서실에도 있다.

어떤 날에는 빨찌산지휘부에 수류탄 몇발을 던져넣고 줄행랑을 놓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치밀어오르군 했으나 그의 발목을 붙잡는것은 역시 성란희였다.

그 녀자를 여기에 그대로 두고서는 발을 내짚을수 없었던것이다.

저 금지옥엽같은 계집을 제것으로 만들자구 숱한 세월의 경난을 다 넘어왔는데 이제 허리끈 한금 풀어놓고 기다리면 담쑥 안겨들것 같은걸 이 살벌한 산속에 놔두고 어떻게 물러선단 말이야.

물러서자니 지나간 세월의 고행이 허무하고 그냥 욕심을 챙기자니 기다리는 순간순간이 너무도 고되고 지겹기 이를데 없다.

그것은 빨찌산생활이 나날이 어려워지고 전투가 거듭됨에 따라 더더구나 급하고 속에서는 불이 일었다. 초조해질수록 그 녀자가 미워나고 미워질수록 기어이 품안에 껴들이리라 속을 벼리군 했다.

이제는 그 녀자에게서 물러서는것도 마음내키는대로 할수 없게 되였다.

한정상은 두번째로 산으로 오를 때 알론목사의 손에 떠밀려 호텔에서 보냈던 밤이 잊혀지지 않는다.

노랑꽃이 핀 주름잡힌 얼굴에 연지곤지 바르고 화류계에서 익혀온 지어낸 요설과 간지러운 추파로 자기를 꼬드기며 눅거리향락의 모닥불을 피워올리던 계집이 떠오를 때면 그는 속이 메슥메슥해왔다.

《에잇 알론, 그 계집이 내 색시감이라구…》

그는 이렇게 그 어지러운 몰골들이 떠오를 때면 때없이 소리치군 하였다.

그래 순풍에 돛올린듯싶던 자기의 인생길에 때아닌 풍파를 일으켜놓은 방억세를 천하숙적이라고 저주하였고 궁지에 빠져든 자기의 처지를 건져주기는 고사하고 고행의 낭떠러지에 차던진 알론목사가 미워났다.

알론이야말로 자기의 운명에 감겨든 구렁이였다.

지금도 한정상은 이러루한 생각에 사로잡혀 성란희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그 노래가 한정상에게는 방억세를 그리는 구슬픈 애모를 이겨보려는 처녀의 모지름처럼 측은하게 들려왔다.

《이번에는…》

그는 이발새로 나직이 강단있게 입속말을 뱉았다.

이 신문이 저 란희의 속안에 남아있는 방억세에 대한 미련을 뿌리채 들어내게 될것이다.

방억세에게서 혁명가라는 이름만 떼여던진다면 혁명가 성란희에게서 방억세를 지워버리는것은 문제될것이 없다.

실제로 방억세는 더는 어리석게 싸움에 몸을 내대지 않을것이다.

방억세의 변질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성란희는 자기의 사랑을 되돌아보고 인생설계를 반드시 다시 하게 될것은 명백하다.

영예와 존엄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는 처녀가 창졸간에 혁명가들의 세계에서 추방되고 버림받은 인간을 인생의 반려로 선택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때에는 그를 산에서 내려가도록 구슬리는것은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몇가지 요술을 부리면 가능성이 있다.

가령 배신자를 사랑하고있는 배신자의 애인이라는 추문만 그럴듯하게 만들어가지고 골안에 돌리면 더럽혀진 명예에 수치감을 씻을길 없어 쌍매골에서 방억세가 도주하듯 자취를 감추려고 할것이다.

한정상은 연줄연줄 이어지는 용렬하고 사기적인 자기의 계교에 스스로 도취되여 하늘의 구름이라도 잡을듯이 기세가 올랐다.

그는 마른기침을 몇번 컹컹 하며 그 녀자에게로 다가갔다.

실눈을 한 그의 두눈이 더없이 상냥하고 여낙낙한 빛을 뿜고있었다.

승리자연한 미소가 함뿍 어린 하얀 얼굴은 뭇처녀들이 한번 보면 다시 눈길을 돌리게 할만큼 정이 넘치고 생기가 있었다.

인기척에 그 녀자는 노래를 그치고 빨래방치를 든채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 녀자의 고운 눈이 한정상의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반사적으로 새초롬해졌다. 한정상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빨래터의 뒤쪽에 있는 바위에 기대고서서 자기를 올롱해진 눈으로 지켜보는 성란희의 시틋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나리꽃처럼 곱고 청청한 얼굴에 접하자 한정상은 금시 온몸이 매시시해왔다. 하얀 속옷을 밀고 솟아오른 젖가슴이 이날따라 유별나게 눈길을 끌어 정욕의 불에 풀무질을 급하게 한다.

저 종이장같이 얄팍한 한꺼풀의 옷이 지금 한정상에게는 대포알로써도 뚫을수 없는 만년성벽처럼 보였다.

(가인박명이라더니 너도 결국 얼굴생긴 값을 치르는셈이구나. 흥!…)

《왜 오셨나요?》

성란희는 자기의 가슴에 와박히는 탐욕에 불붙는 사내의 눈길을 의식하자 얼른 돌아앉아 방금 두드려놓은 옷가지를 시내물에 왈랑절랑 헹구며 툭 내쏘듯 물었다.

《왜? 내가 못 올데를 오고 못 만날 사람을 만났소?》

한정상은 처녀의 도전적인 물음이 대번에 흥떠있는 기분을 잡쳐놓자 불쾌한듯 그 뱁새눈을 가늘게 해가지고 쏘아보았다. 만나자바람으로 엇먹고 대드는 처녀앞에서 졸지에 싱숭생숭하던 생각까지 움츠러들고말았다.

《빨찌산의 생활세칙을 우리 지대에서는 어제 오후에 다시 학습했어요. 례외가 있어서는 안되지요.》

빨찌산의 생활세칙에는 저녁시간에 근거지안에서 개별적으로 류동하는것은 엄금되여있다. 여기에는 근거지의 안전과 성원들의 안전상문제가 있고 도덕륜리적인 문제도 깔려있다.

특히 녀성병실에 드나들거나 녀대원들을 불러내는 일은 세칙의 금지사항에 없더라도 호상간에 지켜야 하는 도덕이고 질서이다.

녀성들이 거처하는 여기 골짜기는 금단의 성역으로 인정되여있다.

《좋아요. 하여튼 오셨으니 말씀하세요.》

한정상은 서리찬 모습에 저으기 의기가 상했으나 용기를 가다듬고 찾아온 용건을 꺼내놓았다.

《난 란희씨, 아니, 미안하오. 난 언제나 그렇게만 부르고싶지만…

성란희참모동무, 난 우리 두사람은 물론 우리모두에게 폭탄같은 소식을 가지고왔소.》

한정상은 애써 얼굴에 엄숙한 빛을 띠우고 비장한 선언이라도 하듯 무겁게 말머리를 떼놓았다.

그러자 성란희는 사내의 지어낸듯 한 목소리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여전히 옷가지를 물에 헹구고 두손으로 비틀어 빨래돌우에 올려놓을뿐 대척도 하지 않았다.

한정상은 성란희의 옹골찬 뒤모습을 보면서 입가에 느물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이미 준비하여가지고 온것은 아닌데 말 한마디를 잘 던진것 같다.

폭탄같은 소식이. … 그래 폭탄선언이구말구. 이건 정말 저 녀자에게는 폭탄이 터지는듯 한 소식일것이다. 이제 이 폭탄이 터지면 란희의 태연자약한 꼴이 어떻게 달라질가. 까무러칠지도 모르지.차라리 물가에서 콱 까무라치기라도 했으면… 그러면…

부지불식간에 확 타오른 애욕에 한정상은 이렇게 회심의 미소를 금치 못하며 이번에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바꾸었다.

《이건 우리모두가 존경하여마지 않던분에 대한 소식이요.

이건 돌아가는 험담이 아니라 공개확인된 사실이란 말이요.

<조선일보>가 세상에 대고 공포한 소식이요. 방금전에 난 지휘부에 들렸다 오는 길이요.》

한정상이 예까지 늘어지게 엮어갔을 때 성란희의 두팔이 물에서 건져낸 옷가지를 비틀어짜다가 불시에 굳어졌다.

한정상은 성란희의 거동을 살피다가 그의 몸이 통채로 굳어지자 문득 입을 다물었다. 눈부터 반짝거리며 소리없이 웃고있었다.

처녀는 그냥 옷가지를 잡은채 한정상의 다음말을 기다리고있었다.

한정상은 처녀의 속을 더 비틀어 죄여주고싶어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한참 기다리던 성란희는 사내가 깔깃거리며 자기를 은근히 희롱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자 신경질적으로 빨래돌우에 짜놓은 옷가지들을 다시 물속에 넣고 왈랑절랑 헹구기 시작하였다.

그가 빨래방치를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에야 한정상은 담배불을 비벼끄고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리고는 신문을 보지도 않고 한마디한마디 씹어가며 기사제목을 입에 올렸다.

《<조선일보> 23일부는… 그러니 열흘전이요.

제목은 이렇게 되여있소.

<좌익에 투철한 빨찌산지휘관의 선언>

어느 놈이 달아놓았는지 제목이 참 멋들어지거던. 짧은 한마디로 만장같은 얘기거리를 다 꼬집어내놓았거던.》

한정상이 신명이 나서 큰소리로 떠드는 소리에 성란희가 자리에서 솟아나듯 일어섰다. 그 녀자는 틀어잡고있던 빨래방치를 물가에 홱 던져버리더니 한정상을 향하여 돌아섰다.

그는 서리발이 돋쳐 상대를 쏘아보다가 째지는듯 한 새된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만해요!》

처녀의 비위를 예리한 송곳끝으로 살살 긁어주던 한정상의 뱁새눈이 짐짓 떼꾼해졌다.

《아… 왜 그러오. 란희도 알아야 할 소식이기에 전해주는건데…》

한정상은 마치도 그 녀자의 한서린 소리가 총알처럼 가슴팍에 박혀온듯 전률에 휩싸여 변명하듯 대꾸하였다.

《당신도 빨찌산이예요?! 당신도 조직원이예요?! 어쩌면… 어쩌면… 그럴수 있나요?! 당신은 지금 자기의 옛 상관의 배신을 두고 막 좋아하는군요. 그게 그리도 기뻐요? 그 신문기사가 그리도 재미나요? 비렬해요. 모두가 분개하고 가슴아파하는데… 모두가 다시한번 붉은기앞에서 다진 선서를 외우며 필승을 다짐하고있는데 당신은 그따위를 들고다니며 웃고 떠들면서 부끄럽지 않아요?! 물러가요. 다시는 내앞에 그따위 소식을 들고 나타나지 말아요!》

《차 이런… 제편에서 오히려 떡떡거리누만. 내가 이렇게 찾아온건 그따위 변절자소식이나 전하자고 온게 아니요.

당신 문제가 있기때문이요. 그래서 경고를 해두자고 왔소. 돌아가는 말도 있고…》

한정상은 자기의 검은 속을 바닥채 드러내 여지없이 발가놓고있는 처녀의 반발에 속이 서늘해지기는 했으나 그대로 메사하게 물러설수는 없어 맞고함을 쳤다.

《경고? 흥!》

《그래, 경고요! 배신자를 사랑한다는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동무는 알아야 한단 말이요. 난 동무가 심판대에 오르는걸 수수방관할수가 없단 말이요.》

《소장동지가?… 어째서, 무슨 권리로?》

《권리가 있소. 난 당신을 사랑하기때문이요. 사랑의 권리가 있단 말이요.》

《흥! 고양이 열두번 쥐생각을 해도 물어삼킬 생각만 할거예요.

한정상동지, 돌아가세요. 천지가 변해도 나는 자기 선택을 버리지 않을거예요!》

분노에 차서 오열을 터뜨리고는 처녀는 두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강가에 폴싹 주저앉았다.

배신에 대한 의아함과 분노와 설음 그리고 가증스러운 사내로부터 받은 모멸과 수치감이 눈물에 실려 손가락짬으로 해서 손등으로 흘러내렸다.

한정상은 처녀의 드괄찬 반발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혀튀김소리를 야단스럽게 내다가 《좋소, 여기다 두고가니 읽어보고 잘 생각해보오.》 하고는 신문을 풀섶에 던지고 비탈길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처녀의 흐느낌소리가 그에게는 그의 손끝에서 울려나오던 피아노의 선률처럼 깨고소하게 들려왔다.

고민에 몸부림치고 방황하는 처녀의 터갈라진 속을 확인하게 된 한정상은 속이 후련해져서 이발새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네년이 그 무슨 돌심장이라고 꺼들거려!》

흐느껴울던 성란희는 잠시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치도 정말 폭발전의 시한탄이라도 보듯이 풀섶에 던져진 신문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펴들었다.

신문기사의 매 글줄과 매 언어들에 온 심력을 모아 그 의미를 해득하느라고 애를 썼다. 거기에서 희망적인것, 리해가 되는 여지를 찾아내기 위하여 내리훑고 치훑고 여러번 거듭하였다.

나중에는 글줄사이에서 그 무슨 실오리같은 새로운 의미라도 찾아내고싶어 기사에 눈을 묻은채 애달프게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기사의 어느 글줄에도, 어느 글귀에도 위안을 받을수 있는 곳이란 한군데도 없었다.

기사의 첫머리에서부터 마지막점에 이르기까지 너절한 배신과 타락한 량심이 독뱀처럼 그물거리고있었다.

기사에 비쳐진 방억세의 모습에는 처녀의 마음을 단 한순간에 사로잡았던 사나이의 억셈도 없었고 그를 투쟁의 길로 이끌고 내세워주던 혁명가의 심장도 엿보이지 않았다.

어떤 불의에도 흔들림이 없던 정의로움도 그 어떤 유혹에도 주춤이 없던 순결무구한 넋도 없었다.

세월의 풍화에 부서진 신념, 일신의 안락에 노그라든 인격, 인생의 방향각을 쥐여던진탓으로 빛이 꺼진 운명의 허울만이 너덜거리고있었다.

처녀는 그만 꾸겨진 신문에 얼굴을 박고 섧게 울었다.

이날 저녁 잠자리에 일찌기 든 처녀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그냥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녀동무들이 다들 잠소리를 내자 종시 눈을 붙일수가 없어 밖으로 나왔다.

오만가지 생각이 멀기치듯 떠올랐다가는 지워지고 또 다가서군 하였다.

참말일가? 《조선일보》는 거짓말투성이로 일관된 신문으로 해방직후부터 소문나있지 않는가. 그것들이 펜대를 가지고 애국자도 반역자로, 반역자를 애국자로 만드는 놀음을 적게 벌려왔던가.

미국에 가서 무위도식하던 리승만을 《애국자》로 둔갑시켜놓고 《선거》에서 표를 몰아준것도 신문쟁이들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을 굴려야 믿어지지는 않건만 이렇게 세상은 그것은 기정사실이라고 입을 모아 횡설수설이다.

내가 정말 괜스레 신문의 손바닥만 한 기사에 오똘거리고있는것이 아닐가?

성란희는 뼈를 저미는 번민끝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벼랑턱에서 떨어져내리다가 나무뿌리를 붙잡은듯 한 심정으로 거기에 자기의 온넋을 걸어놓았다.

실낱같은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포기할수가 없는 마지막희망이였다.

성란희는 가까스로 만들어낸 그 마지막미련을 마음에 새겨놓고 마가을의 차거운 밤을 한지에서 꼬박 지새웠다.

그러나 며칠후 빨찌산지휘부에서 발간하는 16절지짜리 대내주간신문이 처녀의 가슴속에서 파들거리고있던 그 가느다란 희망의 실오리마저 썩둑 잘라버리고말았다.

《반역자에게 죽음을!》

대내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였다. 기사에는 방억세를 빨찌산전우들의 이름으로 극렬하게 규탄하는 글이 실려있었다.

성란희는 벌써 세번째로 들이닥친 타격을 받고서는 더는 이겨낼 기력을 잃고말았다.

방억세의 배신을 빨찌산신문에까지 싣고 준엄한 철추를 호소하고있는것은 결국 빨찌산지휘부도 이 사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다.

그는 신문을 받아들고 술렁거리는 전우들속에서 속이 새까매져있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는 믿고 의지하던 마음의 기둥이 허물어지고 자기의 인생도 천길낭떠러지에 굴러떨어지고있는듯싶었다.

세상이 열백번 바뀌여져도 그 사람만은 태룡산봉우리처럼 거연하게 솟아있을것 같았는데 어찌 이럴수 있는가?

그 사람까지 혁명을 포기하고 투쟁을 회피한다면 우리 위업의 참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위업에 나선 이 성란희는 어찌될것이냐.

사나이에게 반하여 나섰던 길, 사나이를 따라서 걸어온 길, 사나이에게 이끌려 몸과 마음을 깡그리 바쳐왔고 바쳐가리라 심혼을 불태워온 길…

바로 그 사나이가 있어 대가집의 큰 울타리를 흔연히 넘어 부귀도 영화도 안락도 다 버리고 드디여 붉은 기발을 안게 되였는데 어쩌면 다름아닌 그 사나이가 자기 삶의 보람도 명예도 해진 넝마 버리듯이 배신이라는 인간패덕의 시궁창에 처박을수 있는가.

그는 아직은 행방없이 허둥지둥 걸어갔다.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해 가는지 자기도 알수 없었다.

병실앞마당을 가로질러 싸리숲을 지나 비탈을 내려 시내를 건넜다.

돌부리에 걸채여 넘어질번 하다가 이깔나무가지를 가까스로 잡고 다시 걸었다.

다리도 휘청거리고 팔도 휘적거리고 정신까지 휘청거렸다.

병실을 나서면 언제나 다정하게 얹혀있던 오각별 빛나는 군모도 없이 마가을 소슬바람에 단발머리가 흐트러지고 막 구겨진 치마자락이 볼품없이 날렸다.

그는 소로길을 따라 쌍매골뒤어귀에 이르렀을 때에야 앞을 막아선 초막들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야 처녀는 자기가 빨찌산대장 주경남에게로 가고싶어 병실을 나섰으며 대장의 오두막앞에 서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대장에게 가서는 뭘 어쩌자는건가?

처녀는 방안에서 두런두런 울려나오는 말소리에 문을 열다말고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그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잠시 숨을 가라앉히고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시를 바로하였다.

허리끈도 바싹 죄여매고 목단추도 채웠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흐트러져있는 정신도 가다듬었다.

방에서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제 주경남을 만나 꺼내놓을 사연부터 생각하였으나 도무지 쓰라린 비애와 환멸만이 온몸을 휩쓸뿐이여서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여러명의 지휘관들과 정치부일군들이 줄레줄레 나왔다.

《성란희참모동무구만. 어서 들어가오.》

부드럽게 권하는 사람은 정치위원이였다.

성란희는 몸집이 체소하고 여윈 정치위원에게 고개를 살풋이 숙여보이고는 그들이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두사람이 있었다.

주경남대장앞에 한정상이 서있었는데 그 자세가 심히 위축되여있는것으로 보아 되게 꾸중을 듣고있는것 같았다.

성란희가 주경남대장에게 고개를 다소곳이 숙여보였다가 한정상을 알아보고 뒤걸음쳐서 나가려고 하는데 대장이 그를 멈춰세웠다.

《아, 다됐소.… 소장동무, 돌아가보시오.》

《비판을 접수합니다. 교훈을 찾겠습니다.》

무엇때문인지 주경남대장의 기색이 뿔난 상이고 한정상의 대답은 목구멍에 기여드는듯싶었다.

《아, 그렇게 하시오. 그런 문제는 심중한 문제거던. 심중한 문제는 정치위원과도 협의하고 필요하면 나하고도 합의를 봐야 한단 말이요. 다 거두어가지고 불살라버리시오.》

대장은 성깔이 돋쳐서 엄하게 소리쳤다.

《알았습니다.》

한정상은 매츨하게 뻗어오른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떨어지기 바쁘게 대답한다.

주경남은 불쾌한 속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손으로 어서 나가라는 시늉을 하였다.

한정상은 거수경례를 하고는 성란희쪽을 힐끔 돌아보고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도망치듯 바삐 나가버렸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어떻게 왔소?》

주경남은 한정상이 나가자 녀성참모앞에서 기분을 바꾸고싶은듯 담배부터 피워물고 련이어 서너모금 빨았다.

그의 눈가에 점차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시켜주는 온화한 미소가 감돌았다.

주경남은 앞에서 움직이기보다 뒤에서 밀어주는 형의 일군이였는데 나라의 통일을 위한 빨찌산운동이 남조선전역에서 벌어지자 용약 그 앞장에 나섰다.

원칙이 강하면서도 사람이 부드럽고 통솔력이 있어 사람들속에서 신망이 높았다.

그는 40대를 벗어나는 나이였지만 늘 전투와 행군의 앞장에 섰으며 청춘도 가정도 사랑도 흔연히 뒤전에 밀어놓고 통일성전에 나선 대원들을 극진히 아끼고 사랑하며 친자식들처럼 돌봐주었다.

원칙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대원들의 일신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꺼이 아량을 보이고 모든 성의를 다해 도와주는것으로 하여 주경남대장의 주위에는 언제나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있었다.

주경남은 대원들이 찾아와 제기하는 문제라면 어떤 문제이건 풀어주느라고 애를 쓰고 성의를 고여주고 잘되지 않으면 그들을 불러 리유도 밝히고 루루이 사죄하기까지 하였다.

지난해 이른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대원이 근거지를 리탈하여 산을 내리다가 뒤쫓아간 전우들에게 체포되여 끌려온적이 있었다.

대원은 즉시에 도주자로 판명되여 빨찌산심판대에 오르고 극형이 결정되였다.

지방공작을 나갔다가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주경남은 그가 갇혀있는 초막에 가서 대원을 만났다.

대원은 얼마전에 자기 집에 들려온 동무들로부터 어머니가 몹시 앓고있는데 자기 아들을 부르며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는 어머니의 말을 전해듣고 여러날을 고민하다가 그렇게 됐노라고 탈출리유를 토설하였다.

집안형편을 물으니 아버지는 해방전에 일제놈들에게 《징용》으로 끌려갔는데 소식이 없고 어머니 혼자서 세명의 올망졸망한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농사를 지어온다는것이였다.

이날 주경남은 골짜기의 시내가에 대원들을 다 모이게 하였다. 그를 집에 돌려보내자고, 집에 갔다가 다시 산에 오르는것은 그의 차후결심에 맡기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처지의 대원들이 있으면 나서라고, 그들에게도 길을 열어주자고 하였다.

주경남의 제의를 모든 대원들이 눈물을 머금고 열렬히 찬성하였다.

주경남은 그 대원과 함께 몇명의 대원들이 떠나갈 때 집에 가서 환자구환부터 하라고 돈도 내주고 산에서 잡은 범의 고기와 웅담이며 록용도 얼마간씩 안겨서 보내주었다.

집안형편에 따라 돌아오지 않아도 탓하지 않겠으니 애국의 초지만은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등을 떠밀었다.

떠나갔던 대원들은 모두가 돌아왔다.

주경남에게는 이러루한 일화가 많다.

주경남의 이러한 품성은 간고무쌍한 빨찌산생활에 뜻품고 나선 대원들을 붉은 기발두리에 굳게 단합시키는 하나의 구심력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주경남은 야밤중에 찾아온 처녀가 송구스러워할세라 정중하게 맞아주고 그가 속이 편하도록 왼심을 썼다.

《앉소, 앉으라니깐. 무슨 긴한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주경남은 처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개를 떨구고 서있자 그 무슨 심중한 문제가 있는가보다 속셈하며 다시한번 각근히 권하였다.

그러자 성란희는 치마를 쓸며 자리에 얌전하게 앉고는 들고온 신문을 반듯하게 펴서 주경남대장이 마주하고있는 자그마한 원탁우에 올려놓았다.

주경남은 신문을 한눈으로 훑어보더니 마치도 보아서는 안될 흉한것을 마주한듯 나무재털이에 서너모금 빨다만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껐다.

《이건?… 어쩌라는거요?》

주경남은 방금까지 밸머리가 꼬여있던지라 또다시 화가 우쩍 동해서 투박하게 물었다.

《이게 옳지 않다고 들구팼는데…》

방금전에 이 방에서는 빨찌산의 대내신문에 방억세를 규탄하는 기사를 실은데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비판되였던것이다.

주경남과 정치위원이 문제의 엄중성을 고려하여 지휘부와 정치부의 일군들을 다 모아놓고 따지고드니 기사를 직접 기안하고 쓴것은 한정상이였다.

《이건 뭐요?! 어떻게 되여 우리 신문에 이런 글을 실었소?》

주경남이 신문을 말아들고 초막이 떠나갈듯 드세게 포문을 열어놓자 한정상의 첫 대답은 너무도 태연하고 랭담하였다.

《이런 행위를 거저 덮어두고 넘어갈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 일을 전체 대원들이 알아야 하며 목소리를 높이게 해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이에 대한 지상토론도 조직하여 빨찌산의 사상이란 무엇이며 선서란 왜 하는가를 지휘관들은 물론 대원들에 이르기까지 더욱 똑똑히 새겨주려고 합니다.》

《좋소, 그건 좋소. 헌데 이 기사를 확인했는가?》

주경남의 어성은 한음계 더 뛰여넘어 초막을 찌렁찌렁 흔들었다.

《어디서 확인한다는겁니까?》

《어디라니, 이 사실을 기사화하자면 적어도 그 사람의 수표가 있는 자술서라도 받아와야지. 출처가 있어야 할게 아닌가.》

《이미 신문에서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까? 그게 출처가 아닙니까?》

《신문? 우익언론의 보스격인 그 놈팽이들의 흑색선전이 출처가 된다 그 말이요… 거, 입 싹 씻고 하는 소리요?!》

주경남이 한발자국 물러서지 않는 한정상의 배틀린 대답에 골이 나서 그냥 고함을 치는데 정치위원이 준절하게 지탄했다.

《적들의 선전을 빨찌산신문에 액면그대로 받아물어서야 되는가?

이런 식의 글은 단언하건대 대오안의 혼란만을 야기시키는 백해무익한거요.》

《동무가 며칠전에 그 신문을 가지고와서 성토모임이요, 결석재판이요 어쩌고저쩌고할 때 신문쟁이들 말이나 듣고 빨찌산정치를 해서는 안된다고 명백히 말해주었단 말이요. 정치위원도 시기상조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제멋대로 소동을 벌려놓아?!…》

주경남의 호된 추궁에 정치위원과 회의참가자들이 이 신문기사는 경솔하게 실었으며 빨찌산대오에서 부정적인 후과만 가져올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비판하였다.

여럿이 격렬하게 쏘아대는 몰사격에 한정상은 더는 어쩔수 없이 기가 질려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노라고 한걸음 비켜섰다.

이번에 도주자가 속출될수 있는 우려때문에 서둘러 기사를 썼는데 앞으로는 심사숙고하겠노라고 뉘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에도 주경남의 앞에서 자기의 《초당적과오》에 대하여 루루이 인정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성란희가 그 신문을 가지고 불쑥 뛰여들어 분명 자기의 옛 지휘관을 걸고들 태세이니 다시 밸머리가 살아오를수밖에 없었다.

성란희는 주경남의 성난 어조에 오히려 속이 진정된듯 그를 향하여 고개를 오연히 들었다.

주경남은 자기에게 곧추 향한 처녀의 눈에 뜻밖에도 정기가 흐려지고 언제나 맑고 시원하던 그 눈에 구슬픈 안개가 짙어있는것을 띄여보고 가슴이 섬찍하여왔다.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방억세지대장이 이런 사람입니까?》

주경남은 명치끝에 사정없이 박혀드는 창날같은 그 소리에 온몸으로 찌르르 한줄금의 거센 전률이 지나가는듯싶었다.

그는 뭐라고 딱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처녀의 파고드는 눈길을 슬며시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문기사를 보고 대원들속에서 여러가지 흉흉한 말이 돌아가고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어도 이렇게 직방 달려든 사람은 성란희가 처음이다.

주경남은 상대가 처녀라는데 더 신경이 곤두섰다.

무척 흥분하고있다. 어찌된 일인가? 무엇때문에 다름아닌 성란희가 자기의 지대장이였던 사람의 《배신》에 이렇게도 자신을 다잡지 못하고 대장방에까지 뛰여든것일가?

주경남은 그 어떤 미묘한 감정을 느끼였다.

그는 성란희를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처녀의 성장을 놓고, 투사의 품격을 굳건히 갖춘 처녀의 오늘을 두고 내심 경탄해마지 않았다.

이 길에 뛰여들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부귀영화에 묻혀 살아갈 녀자이다.

돈이 없는가, 명예가 없는가, 지식이 없는가, 마음씨 또한 이를나위없이 곱고 인물맵시도 예쁘다.

거기에 노래부르는 재주도 상당하고 몸가짐이나 례의범절도 알뜰살뜰하니 서울장안을 뒤져야 견줄이 없는 안팎절색이다.

그래 조직의 소환으로 성란희가 이 골안에 들어왔을 때 첫 담화를 해보고는 주경남은 머리를 흔들기까지 하였었다.

이러한 녀성을 산속에 들여보낸 사람들에 대하여서도 귀먹은 욕설을 퍼부었다.

아무리 본인이 희망한다 하여도 보낼 사람이 따로 있지 어떻게 정승집 손녀딸을 이 험한 산판에 보낼수 있는가.

그 사람들은 이 산속생활을 들놀이같은 랑만적인 무대로 생각하는게 아닌가.

며칠이나 견디여내겠다고 이런 고행을 처녀에게 들씌워주려 하는가.

그때 주경남은 찾아온 사람을 그자리에서 돌려보낼수는 없어 며칠 견디여보다가 힘들게 되면 아무때나 찾아오라는 말미를 달아 녀성중대가 있는 독립지대에 보내주었다. 독립지대에는 해방전의 죽창대성원들이 수십명이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주경남의 걱정은 공연한것이였다.

이미 해방전에 산속생활에 대한 미립이 터있던 처녀는 벌써 며칠후에는 새로운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였으며 오히려 녀대원들의 앞장에 서서 그들을 고무하고 용기를 주고 이끌어주었다.

주경남조차 일상생활이 녀성답게 단정하면서도 품위있게 처신할줄 아는 처녀를 마주설 때면 저도 모르게 정숙해지고 처녀의 수양이 높고 지성미가 풍기는 언행에 끌려들 때가 많았다.

성란희는 인차 소대장으로, 중대장으로, 녀성참모로 제발되였고 방억세가 나간 후에는 비여있는 문화부지대장의 임무까지 대리하고있다.

인차 부지대장으로 정식 임명하기로 이미 정치위원과 합의하여놓았다.

부귀와 안락을 다 버리고 나라의 통일을 위한 빨찌산투쟁에 서슴없이 뛰여들어 만사람의 존경을 받고있는 이 사랑스러운 빨찌산의 꽃을 볼 때면 주경남은 명문대가의 손녀를 통일전사로 내세운 애국위업의 위대성과 정의로움 그리고 인간본연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흥분되고 머리숙이군 한다.

《말씀하여주십시오!》

처녀의 낮고도 간곡한 목소리가 다시 초막을 조용히 흔들었다.

주경남은 그 목소리에서 자기를 걷잡지 못하고있는 성란희의 심정을 가려내고있었다. 어데라 없이 절망에 빠진 비명같기도 하다. 한없는 비애가 비껴든듯싶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란희를 바라보았다.

주경남은 언제나 사려깊던 그 녀자의 눈이 초점을 잃고 허둥지둥거리고있는것을 보자 아직은 영문을 알길 없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떻게 되여 방억세의 소식이 이렇게도 처녀를 격동시키고 수심에 잠기게 할가?

주경남은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처녀는 배나무를 깎아만든 물잔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주경남은 물을 마시는 처녀의 모습을 찬찬히 여겨보았다. 물을 마시는것이 아니라 목구멍에 들이붓는것 같다.

아마도 속이 지지리 타고있는 모양이다. 그 불을 끄고싶어 달려온것이다.

처녀는 원탁에 팔꿈치를 박고 두손바닥으로 턱을 고여들고 벽의 한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만에야 흑- 하고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흐느낌소리가 점차 높아지더니 처녀는 두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내여 울었다. 참고참아오던 오열이 대장의 후더운 인정에 부딪치자 감정의 금선을 헤치고 뿜어오르고야말았던것이다.

경남은 측은한 눈으로 마구 오르내리고있는 처녀의 둥그런 어깨를 지켜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확실히 이것은 례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기들이 존경하던 상관이였다는것만으로는 처녀가 이 방에 뛰여든 리유를 다 설명할수는 없을것 같다.

보다 신중하고 보다 풀기 난해한 문제가 저 울음소리에 뒤섞여있다.

주경남은 처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고있다가 입을 떼였다.

《성란희참모동무, 내가 이렇게 물어도 되겠는지… 하여튼 량해하고 들어주오.》

주경남은 처녀의 인격에 대하여 매우 높은 점수를 매기고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량해부터 구하였다.

《저… 난 지금 성란희참모동무의 흥분이 리해되오. 자기의 오랜 동지였던 사람의 변절행위에 접했으니깐… 우리 신문이 그렇게 락인찍었거던. 그런즉 마땅한 흥분이지.

그런데… 참모동무의 감정을 더 설명하여줄수 없을가?… 나이든 사람앞이니 구애될게 없다고 생각하오. 사적인 비밀이라면 내가 듣는것으로 끝내겠다는것을 약속하지.

거북하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좋소.》

사람들의 속을 쉽게 끌어당기는 대장의 사려깊은 진정과 소박한 말투에 처녀는 고개를 들었다. 주경남은 처녀를 고무해주듯 얼굴 가득히 친아버지와 같은 자애에 겨운 빛을 담으며 고개를 깊이 끄덕여주었다.

처녀는 인정미가 함뿍 풍겨오는 대장의 부탁에 용기가 생겨났는지 속눈섭에 눈물을 매단채 잠시 아래입술을 감쳐물고있다가 또렷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뭐요?!… 방억세를?!》

주경남은 처녀의 분명한 소리에 껑충 놀라 눈이 사발만 해져서 부르짖었다.

《그게 참말이겠소?!》

주경남은 또 한번 따지고들듯 큰소리로 웨쳤다.

처녀의 말없는 대답이 요요한 눈빛에서 울리고있었다.

《참 그렇다구야!… 이런 변이라구야!》

주경남은 여전히 탄식인지 질책인지 료량이 되지 않는 어조로 소리치며 자리에서 솟구치듯 일어나 좁다란 초막안을 분주스럽게 왔다갔다하였다.

그러나 점차 주경남의 안색에는 희색이 점점이 피여올랐다.

믿어마지 않던 귀중한 동지에 대한 처녀의 사랑의 고백이기에, 그 당자가 자기가 녀인으로서뿐아니라 혁명가로서도 정이 가고 존경이 가던 미더운 녀동지이기에 그리고 그 사랑의 고백이 처녀에게서는 가장 고통스럽고 참담한 때에 서슴없이 흘러나온것이기에 주경남은 마치도 자기의 아들딸들의 경사에 접한듯이 더없이 기쁘고 즐겁고 환희에 넘쳐들었다.

주경남은 너무도 마음이 흐뭇해서 오른주먹으로 자기의 앞머리를 툭툭 치며 호걸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처녀에게 자기의 마음속을 활짝 열어보일수는 없어 웃음을 뚝 그치고 제잡담 중얼중얼거렸다.

《그런데 방억세 그 사람은 왜 나에게 그런 말은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을가? 대장이 미덥지 않았던가?… 그래 둘사이에야 다 약조가 돼있겠지?… 그렇다면야 그녀석 볼기를 맞아야 될 일이거던…》

《아니, 아닙니다. 그건… 저… 좀 설명하기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 좋소. 하여튼, 아무튼 좋소. 그건 뭐 뒤날에 동무가 하고싶은 때 말해주오. 사랑이라… 좋거던… 좋구말구… 성참모가 방억세를 사랑한다는거지!》

주경남의 어투며 안면표정에 너무도 후하고 흡족한 정감이 비껴들자 성란희는 어리둥절해졌다.

대오에서 사라진 인간의 사랑담을 두고 왜 기뻐할가?

주경남의 말과 낯빛에 어린 그 정감이란 결국 방억세에 대한 대장의 애정이다.

처녀가 힘들게 꺼낸 고백이여서 아량을 보여주는것일가, 아니 이런 얘기에는 한 인간의 운명이 걸려있는데 가벼운 동정이나 인정으로 받아들일수 없지 않나.

마땅히 당장 걷어치우라고, 마음에 챙겨둘 한푼의 가치도 없노라고 단박에 일축해버려야 할게 아닌가.

설사 뼈를 바스는 아픔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는것이 참사랑이고 원칙이다. 성란희는 그냥 벙싯거리는 주경남의 후더분한 모습에 눈길을 모은채 순식간에 속이 뒤엉켜지고 끝과 시작이 혼미한 종잡을수 없는 사색의 미궁에 빠져들었다.

그는 잠시후에야 자기 마음속을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지금은 어떻다는거요? …》

미처 가무리지 못하는 처녀의 말꼬리를 물어채듯 넘겨받은 주경남의 얼굴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여졌다.

그는 주먹으로 이마를 툭툭 치다가 무엇인가 마뜩지 않은듯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막 괴롭습니다.》

《음… 저것때문에… 뭘하러 저런걸 들구다녀?!》

주경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원탁우에 성란희가 반반하게 펴놓은 신문을 잡았다. 이마살을 찌프리며 막 구겨진 신문을 갈기갈기 찢어 초막 한구석에 던져버렸다.

주경남의 그 충동적인 행동에 성란희는 가슴이 철렁해서 고개를 들었다.

우로 쳐든 주경남의 진한 눈섭머리가 꿈틀거리고있었다.

그는 다시 성란희를 지켜보다가 웅글은 소리로 질책하듯 물었다.

《성란희참모동무, 한두가지만 더 물읍시다.

방억세를 언제부터 사랑하였소?》

《해방전부터… 항일죽창대시절부터입니다.》

성란희가 서슴없이 토설하자 주경남은 다시금 크게 놀라 입이 벌어졌다.

《저런! 력사가 있었구만. 그런데?… 왜 해를 넘기여왔소? 사랑도 한시절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

성란희가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손톱여물을 켜자 주경남은 소탈하게 넘어갔다.

《좋소. 그건 복잡하다고 했지. 후날 대답을 듣자구.

이건 대답해야 하오. 참모동무는 그 사람의 뭘 보고 사랑하여왔소?》

잠시 대답을 찾아내듯 어둠이 실린 창문의 한점에 눈길을 주고있던 성란희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동문서답으로 대답하였다.

《그건… 저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세도집의 딸이였습니다.》

그 소리에 주경남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두세번 끄덕이였다.

《거야, 나도 알지. 그래서 우리는 동무에게 더욱 존경이 가는거요. 흔치 않은 일이거던.》

《저를 이 길에 세워준것이 그 사람이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따라서 이 길에 나섰고 그 사람을 따라서 통일애국의 길을 곧바로 걸어왔습니다.》

성란희는 빠른 말씨로 단숨에 예까지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숨이 가빠왔다. 참말로 나는 그 사람의 뭘 보고 사랑하여왔을가. 세월을 이어온 가지가지 사연들이 눈앞에 밟혀들었다.

서울 뒤골목에서 벌어졌던 왜놈망종들과 있었던 결투장, 그날에 보았던 사나이의 억센 모습… 그것이였던가. 그것때문에 성란희라는 녀자가 해와 달을 넘기며 허위단심 그 사람에 대한 련정의 고뇌에 빠져 사모해왔던가? …

그는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하였다. 그것은 순간의 충동이였고 일시적인 감정의 장난이였을뿐이였다. 만약 그것이 사랑의 리유였다면 이 성란희라는 녀자는 얼마나 가련하고 가소로운 인생일가.

그런데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였고 무엇에 의해 무르익어왔을가?

그의 눈앞에는 그 시절의 잊을수 없는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죽창대의 첫 시기에 있었던 일이 불현듯 어제 겪은 일처럼 떠올랐다. 죽창대의 훈련에서 녀성들이 제일 힘들어한것이 격술과 행군이였다.

성란희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 녀자는 특히 행군훈련이 제일 힘들었다.

격술도 몸에 익히고 죽창대의 고달픈 생활에도 빨리 적응하여갔으나 행군길에서는 언제나 어린 녀동무들보다도 숨이 차서 할딱거리군 하였다.

돌아올 때는 남동무들에게 업히다싶이 해가지고 병영에 들어서군 하였다.

어느날 행군의 쉴참에 물집투성이가 된 성란희의 발바닥에 딱총을 놓아준 방억세가 지나가는 어조로 타일러주는것이였다.

《서울아가씨, 지금이라도 돌아가는게 어떻소? 여긴 사실 내 이미 집떠나올 때 말한것처럼 두루미같은 아가씨가 나설데가 아니요. 내가 당신들에게 들어오는 문도 나가는 문도 다 열어놓겠다고 약속했으니 이제 돌아서더라도 미안할게 없소.》

성란희는 그날 방억세의 말이 다분히 롱말 같았으나 거기에는 진속이 담겨져있다는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자기가 잠자코 있거나 고개 한번 까딱거려도 다음날로 배낭을 둘러메게 할 잡도리가 헨둥하였다.

사실 그날 방억세는 성란희가 자기 말에 기웃거리기만 하여도 병실에 돌아가 성관호와 의논하여 집에 돌려보낼 결심이였다.

그가 왜놈들의 등쌀때문에 서울에 돌아가기 어려워한다면 부모님이 계시는 충청도 바다가마을에 보내줄 생각까지 하고있었다. 어머니가 해방될 때까지 잘 보살펴줄것이다.

성란희는 자기의 인생이 또 한번 굴절될수 있는 운명적인 기로에 자기가 나섰다는 생각에 땅에 잦아들듯이 나른해있던 몸을 도사리고 기가 나서 대들었다.

《대장동지! 한가지 비판부터 드리고싶습니다.

서울아가씨라는 말, 롱말이라도 난 듣기가 좋지 않아요. 항일죽창대의 질서와 규범의 요구대로 제대로 제 이름을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난 엊그제 바로 대장동지가 출연한 정치강의에서도 배웠어요. 타고난 혁명가란 없구 부자라 하여 혁명가가 되지 못할것도 없구 대장쟁이, 산포수의 아들이라 해서 꼭 혁명가가 된다는 법도 없구…》

성란희가 이 말을 꺼낼 때 방억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벙글써해졌다.

대장쟁이, 산포수의 아들이란 바로 자기를 말하는것이다.

언젠가 자기 아버지는 호미, 낫을 벼리던 대장쟁이로서 산포수노릇도 했다고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솜씨있게 꼬집어 써먹을줄을 몰랐다.

성란희는 방억세의 표정변화에는 아랑곳없이 토라진 어조로 들이댔다.

《엥겔스는 공장주의 아들이고 맑스도 레닌도 조상들이 가난뱅이가 돼서 혁명가로 된건 아니지요. 또 유명한 녀성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그도 부자집 딸이고…

대장동지의 말이지요? 그건 고담이였나요? 부자족속들을 얼려보느라고 한 감언리설이였나요?》

성란희가 사개가 딱딱 들어맞게 주어섬기는 공박에 방억세는 말문이 막혀버리였다.

《하하 참… 그래 정말 란희가 꼭 혁명가가 되겠다는거요?》

《그럼요. 되구말구요. 그러면 내가 뭣때문에 배를 곯으며 이렇게 발바닥에 꽈리알같은걸 달구다니겠어요. 난 일본놈들의 노리개가 될가봐 여기로 피난온게 아니예요. 난 대장동지와 같은 멋쟁이혁명가가 될겁니다.》

《멋쟁이혁명가?… 내가 그렇단 말이요?… 그건 그렇구. 성란희동무, 왜 고생스럽게 꼭 혁명가가 되겠다는거요?》

방억세는 즐거움이 뒤섞인 비양조로 물었다.

아직도 이 처녀에게서는 혁명에 대한 표상이 너무도 랑만적인것이고 따라서 그의 대답도 천진하게만 들렸던것이다.

혁명이란 결코 무지개처럼 현란한것이 아니고 꿈도 아니며 리상의 세계에 있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현실이며 죽음을 각오한 성전이다.

따라서 혁명가란 명예가 아니며 인생을 장식해주는 호화스러운 간판도 아니다.

혁명가란 가시덤불길도 헤치는 시대의 선각자이며 고행을 달게 여기고 광명한 래일을 위하여 한생을 불태워가는 투사들이다.

그들에게 있다는 긍지란 애오라지 뭇사람들을 위해 심신을 바쳐간다는것이다.

이것을 성란희가 알고있을가… 단순하면서도 거창한 의미를 리해할수가 있을가.

《그건… 그건…》

성란희도 막상 대답을 하자니 적당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하다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엇인가 여기 와서 보고 듣고 한것들을 굴려보다가 종시 찾아내지 못하고 속눈섭을 살풋이 내리깔며 제잡담 떠오르는대로 대답하였다.

《대장동지가 혁명을 좋아하기때문이지요. 난 대장동지가 좋아하는것이라면 다 좋아하고싶어요.》

대답이 궁해서 뱉아놓은 대답인데 꺼내놓고보니 그럴듯하다. 방억세가 좋아하고 방억세가 나선 길을 따라가느라면 거기에 자기의 리상도 꿈도 행복도 보람도 다 있을듯싶다.

《뭘?… 하하… 이런 제길!… 이 방억세에게 처녀신봉자가 하나 더 늘었군.》

《그럼 나말고도 또 있나요?》

성란희는 우습게 번져진 이야기에 무겁던 속이 개운해져서 눈가에 실웃음을 띠우고 살그머니 입침을 박았다.

《있소. 알고싶소?》

《그만두세요. 전 대장님의 신봉자는 되고싶지만 대장님의 사생활비밀까지 캐묻는 어리석은 녀자는 되고싶지 않아요.》

성란희는 사실 처녀신봉자가 있다는 방억세의 우스개에 자기도 까닭없는 호기심과 질투까지 느끼였으나 처녀다운 교태가 비낀 눈으로 상대의 목구멍을 틔여주며 시치미를 뗐다.

이러한 일에서 눈치무딘것은 역시 남자들이다.

《아니, 비밀될것은 없다오. 그 녀자는… 내 동생 동요요.》

《예? 호호…》

성란희는 쉽게 뱉아버리고만 대장의 대답에 명랑하게 웃었다.

《그애는 오빠가 하는 일이 다 옳은 일 같아서 내 하는 일을 자기도 다한다는거요. 내가 뭐 자기에겐 거울이라나.》

《호호… 동요소대장은 꼭 그렇게 될거예요. 내게는 동요소대장이 거울이예요. 저도 그처럼 될겁니다. 저를 내려보내지 말아주십시오.》

《란희동무, 그건 사실 내가 오늘 듣고싶던 소리요. 난 동무를 줄곧 지켜보아왔소. 난 동무가 훌륭한 투사로, 우리의 훌륭한 동지로 되리라는것을 믿겠소.》

성란희는 그때일이 생각나자 흉중이 따스해왔다. 자기를 지켜보던 방억세의 눈빛은 지금도 그 유정한 빛으로 자기를 더듬고있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주경남대장에게 실토해도 좋다고 고무해주는것 같다.

참말로 나는 방억세의 무엇을 사랑하였던가.

나를 말없이 지켜주던 그의 눈빛이였던가.

언제나 변함없이 엄하고 자심하게 나를 끌어주던 그 눈빛…

그래 그것이였다. 그것은 나의 심장과 나의 온넋을 붉게 물들여준 빛이였다.

나는 그것을 소중히 받아안았다. 그리고 그 빛을 사랑하였다.

그 빛을 따라 영원히 붉게 살리라고, 그 빛이 꺼지면 나도 꺼질것이라고 믿어왔다.

성란희는 고개를 들었다.

주경남대장에게 자기의 사랑이 시작된 옛시절에 대하여, 사랑의 고충에 대하여서도 털어놓고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그러나 곧 처녀는 여기는 엄격한 빨찌산대장의 방이며 자기는 지금 심각하고도 어쩌면 운명적인 문제에 부닥쳐있다는 생각에 애써 감정을 다잡으며 짤막하게 덧붙이였다.

《저는 혁명가 방억세의 심장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붉은 심장을 사랑하였습니다.

저는 그가 어찌되든 끝까지 따르려고 골백번 마음을 다져왔습니다.

그 사람은 절대로 그럴수 없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심장은 절대로 빛이 달라질수 없는데… 그런데…》

열렬하게 자기 심장을 헤쳐놓던 처녀의 사랑의 고백은 여기서 다시 토막이 났다.

《그런데?…》

주경남의 노기돋친 부르짖음이 처녀의 말을 받았다.

성란희는 주경남의 꿈틀거리는 눈섭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느 한 사람은 배신자를 사랑하는건 배신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용서하여주십시오. 흔들리고있습니다. 그러자니 죽어버리고싶습니다.》

주경남은 성란희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눈물에 젖어있는 처녀의 손목을 더듬어잡고 힘을 주었다.

빨찌산생활에서 거칠어진 처녀의 손이 잡히자 그 녀자의 빠른 박동이 전해져왔다.

《성란희동무, 고개를 드오. 나를 보오.》

성란희가 대장의 간곡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괴로움이 실린 눈길에 접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성란희동무에게 할 말이 많소. 하지만 난 지금 말하지 못하겠소. 단 하나만은 명백히 말합시다.

참모동무, 사랑하시오. 난 동무들의 사랑을 지지하오. 끝까지, 끝까지 사랑하시오!》

《사랑하라구요?… 배신자를?… 막 미치겠네. 그게 대장동지의 진심입니까?》

성란희는 대장의 억센 손아귀에서 제손을 뽑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오열이 북받쳐 도전하듯이 부르짖었다.

《진심이요! 사랑하시오! 이건 권고가 아니요. 명령이요! 성란희참모동무! 이건 명령이란 말이요. 알겠소?!》

주경남의 말투가 때없이 근엄하여졌다.

《명령이라구요?!》

《그렇소! 방억세를 말이요! 달리 돼서는 안되오. 명령이란 말이요!》

주경남은 웅글은 어조로 위엄있게 처녀의 반발을 꾹 눌러놓았다.

그는 정말 그 어떤 전투명령을 내리듯 자세를 방정하게 하고 엄숙하게, 그러나 보다 뜨겁게 명령하고있었다.

그자신도 지금 그 무슨 딱히 이름붙일수 없는 고귀하고 신성한 인간아름다움의 절정에 오른듯 크게 감동되고 흥분되여있었다.

얼마나 열렬하고 뜻높은 청춘들인가.

얼마나 결바르고 충직한 투사들의 사랑인가.

이들의 사랑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내 무슨 대장이고 이들의 전우이겠는가.

그러나 주경남은 자기의 가슴을 순식간에 끓어번지게 하는 그 격정을 이겨내야 하였다. 자기의 감정을 터놓지 못하는것이 안타까왔으나 괴로와도 자기의 속을 깡그리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경남은 성란희의 손목을 두세번 크게 흔들어주고나서 다소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난 더 말해줄게 없소. 더 말해줄 권리가 없단 말이요. 방억세를 사랑한다니 내 동무에게 경고할게 있소. 만약 앞으로 성란희동무가 딴 사내품에 든다면 난 혁명이 승리한 다음에 명령위반죄로 빨찌산심판대에 올려세울것이요! 명심하시오!

사랑하오! 끝까지! 이건 명령이요. 명령이란 말이요!》

주경남은 자신도 진속을 빠개놓아주지 못하고 겉층만 빙빙 에돌아야 하는것이 고통스러워 이마살에 잔뜩 주름을 말아세우고 이렇게 안타깝게 중언부언하였다.

《대장동지!》

성란희는 이렇게 열차게 부르짖으며 눈물을 쫘르르 쏟아놓았다.

《아, 아, 이제는 돌아가오. 할 말은 다했소.》

주경남은 무엇인가 이야기를 더 듣고싶어 하는 처녀의 빨개진 얼굴에서 눈길을 떼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 조금만 처녀와 더 마주서있다가는 처녀의 눈물과 애끓는 하소연에 가까스로 버티고있는 심장이 녹아내려 이미 단단히 빗장을 질러놓고있는 비밀의 쪽문을 열어줄것만 같았던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처녀를 밖으로 쫓아냈다.

《자, 돌아가오. 우리 이야기는 옛말로 남겨두자구. 난 이젠 자야겠소. 래일 새벽에 멀리 갔다올 일이 있소. 다시는 눈물을 달고 누구에게도 찾아가지 마시오. 우리의 얘기도 가슴에 묻어두시오. 이것도 명령이요.》

주경남은 처녀를 방에서 내보내고나서 잠자리에 이내 들었으나 어수선한 생각에 잠들수 없었다. 어쩐지 속이 그냥 왈랑왈랑거렸다.

자기가 사람들을 너무도 모르고 대장자리를 지켜왔다는 자책이 컸다. 그보다도 처녀의 순정이 참으로 희한하면서도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죽창대시절부터 방억세를 사모하였다니 이제는 몇해를 넘겨오는가.

그런데 불의에 닥쳐든 새바람을 맞게 되였으니 처녀가 얼마나 속이 쓰릴가? 저들의 순정을 어떻게 해야 지켜줄가? 속수무책으로 보기만 해서는 안될 일 같다. 그는 생각에 골몰하였다.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 성의를 고여야 할것 같다.

이 생각, 저 생각을 굴려보며 궁싯거리던 주경남은 종시 자리에서 일어나 초막을 나섰다. 한쪽이 뭉청 잘라져나간 달이 중천에 걸려 숲속에 색이 바랜 달빛을 늘어뜨리고있었다. 나무가지새로 숨어든 달빛이 숲속에서 어룽어룽 뛰고 그속에서 부엉이의 청승맞은 울음소리가 들려와 가을철의 숲의 서정을 돋구어준다.

명암이 선연한 숲속길을 따라 자그마한 등성이를 넘은 주경남은 정치부초막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지금 성란희가 저렇게 신문의 짤막한 기사에 노호하고 수치에 겨워 몸부림치는데 방억세의 심중은 얼마나 괴로울가 하는 생각에 속이 뻐근하여왔다.

예상하지 않은것은 아니였지만 직접 당하고보니 피멍이 들어있을 방억세의 고뇌가 더욱 념려되였다.

정치위원이 거처하고있는 초막뜨락앞에 이른 주경남은 기침소리부터 크게 하였다.

《정치위원동무, 주무시오?》

그러자 초막안에서 삐끄덕소리가 새여나오고 이어 초막의 뙤창이 밝아졌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말소리가 들리고 정치위원이 급히 군복바지에 한다리를 꿰며 문을 열었다.

《허, 단잠을 깨운게 아니요?》

주경남은 초막안에 들어서면서 서글서글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잠자리에 들기는 했어도 얘기를 하던중입니다.》

《그래요? 음, 좀 할 말이 있어서…》

주경남이 이렇게 말하며 초막안을 휘휘 둘러보자 잠자리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아있던 한정상이 눈썰미있게 늬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치위원은 대장방에서 한바탕 욕을 먹고 찾아와서 자기 잘못을 다시금 루루이 변명하는 한정상을 잠자리에 청해들이고 이야기를 나누고있던중이였다.

《아, 일없소. 그대로 누워있소.》

주경남은 한정상을 보자 다시금 창자가 뒤집어지는것 같았으나 정작 바지를 꿰고 쫓겨나듯 초막을 나서는것이 미안쩍어 한마디 인사치레를 하여보았다.

《말씀을 나누십시오. 저는 출판소병실로 넘어가겠습니다.

제 혼자 자기 검토도 해보렵니다.》

주경남이 껄껄 웃었다.

《허허… 뭘 자꾸 검토요. 한번 되게 얻어맞았으니 교훈을 찾으면 되는거지.》

한정상은 주경남의 걸걸한 소리에 더 대꾸를 하지 않고 급히 허리를 굽석거리며 뒤걸음질로 초막을 나갔다.

《방금전에 말이요…》

주경남은 한정상이 나가자 멀어져가는 그의 발자국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인차 화제를 꺼냈다.

《참, 희한한 일이 생겼소. 거, 우리 독립지대 성참모말이요. 하, 희한하거던.

방억세를 좋아하더구만. 허, 나 참!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이더란 말이요.》

주경남이 제풀에 벙글벙글거리며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꺼내자 정치위원이 눈부터 휘둥그래졌다.

《허허, 놀라는구만. 정치위원도 금시초문일테지… 그 사람들이 의뭉스럽다니깐. 헌데 말이요. 거 성란희참모가 겉보기와는 달리 만만치 않더구만.

한바탕 들이대는데 얼마나 여무진 소리만 하던지 혼쭐이 났소. 허허허… 생각해보니 두사람이 어느 한쪽도 기울어지지 않는 천상배필이야. 그걸 왜 이제야 알았을가.… 그 사람들이 의뭉스럽다니.》

주경남은 이렇게 느글느글한 어조로 말하며 제잡담 흐뭇해서 유쾌하게 웃었다. 정치위원은 더욱 어안이 벙벙해서 대장을 쳐다볼뿐이였다.

주경남은 정치위원의 그 모습이 보기가 좋은듯 책상우에 손을 뻗쳐 정치위원의 담배쌈지를 끌어당겨 담배 한대를 굵게 말아물었다.

그는 서너모금 탐스럽게 빨아올리고나서 자못 흥에 떠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이요. 내 좀 생각되는게 있더구만. 아까운 시절을 놓치고있는 녀자가 아니요. 산에서 고생살이 그냥 시키는것만 해도 뻐근한데 이젠 마련을 보게 하자는거요.》

《가만… 가만 계십시오. 그러니 성란희동무가 방억세동무를 좋아한다는겁니까?》

주경남이보다 열살 남짓하게 젊은 정치위원은 아직도 대장의 이야기가 석연치 않은듯 말꼬리를 길게 달았다.

《그러찮구. 내 소리를 뭘루 듣는거요?》

주경남은 말귀가 어두운것 같은 정치위원의 단단하게 생긴 얼굴을 힐끗 돌아보며 뜨아한 물음이 마뜩지 않아 짜증을 부렸다.

《그러니 그들을 붙여준다는겁니까?》

《그러찮구.》

《그럼 저 한정상동무는 어쩐다는겁니까?》

《한정상이?… 여기에 무슨 한정상이요. 성란희, 방억세가 좋아한다는데…》

주경남은 정치위원이 이날따라 퉁퉁 물어오는게 이상스러워 무슨 객적은 소리냐는듯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아직도 이 사람이 잠자리에 있더니 떨떨해서 자기 말을 헛갈려듣는듯싶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마디한마디를 꽁꽁 씹어서 주를 달았다.

《성란희가 방억세를 좋아한다는거요. 그러니 그 녀자가 오늘 신문을 보고나서 이게 실말이냐고 달려든거요. 그 녀자가 속이 덜컹해서 캐묻는게 기가 막혀 내 해보는 소리인데 한정상은 왜 꺼드는거요? 이제는 뭐 알겠소? 허허… 정치위원도 영 깜깜이였군그래.》

《하하… 대장동지도 영 깜깜이시군요. 한정상소장과 성란희참모는 벌써 해방전부터 언약이 돼있는 사이라던데…》

정치위원은 오히려 주경남이 실없는 소리를 하는듯싶어 소리내여 웃었다.

《뭐요?…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방금 내가 성란희동무한테서 듣고왔는데. 분명히 방억세를 사랑한다고 제입으로 고백했단 말이요. 그것도 해방전부터…》

주경남은 젊은 정치위원이 어데서 헛갈려들은 객담을 꺼내놓는듯싶어 다시금 또박또박 새겨라도 주듯 힘을 주어 설명하여주었다.

그러자 정치위원은 딱한 표정을 지었다.

《하, 내가 들은 소리도 분명 한정상소장동무가 제입으로 고백한 소리인데… 난 벌써 여름철에 들었습니다.》

《그러니… 성란희동무도 좋아한다고 했소?》

《하, 글쎄요. 언약이라는게 한쪽에서 소리내는 일이야 아니지 않습니까?》

《성란희동무하고는 그 문제를 놓고 담화하여보았소?》

《아니요. 그런 말이라는게 바람결같애서 구태여 성란희 당자앞에서 모르쇠를 해왔지요.》

주경남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정치위원은 사람이 몸이 체소해도 속은 만길 물속같은 사람이다. 웅심깊고 속씀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 전우들에게 해되는 일에 한해서는 절대로 부채질하거나 때없이 발설하지 않는다.

《음, 그렇구만. 허, 모를 일이다.… 방금… 내 귀로 들었는데 가만… 뭐가 복잡한 일도 있다고 했지.… 맞았소. 그랬거던.…

정치위원동무, 이런 소리는 녀자의 소리가 기본이거던. 흑토골에 갔다와서 한번 만나보시우. 그다음에 좀 토론해봅시다.…

거, 한정상의 혀바닥롱간이 아니요? 내 이번 일을 겪어보니 거 한정상이 미워진단 말이요. 쯔쯔쯔, 그 인간이 탐탁치 않아.…》

《뭐, 그럴수야 있겠습니까?》

주경남이 혀끝소리를 내자 정치위원은 이렇게 시들하게 대꾸하면서도 잠시 뙤창밖을 내다보며 자기 생각에 골똘히 잠기였다.

《그럼 난 가겠소.》

주경남이 맹랑한 일이라는듯 또 혀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치위원이 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간만… 음… 내 좀 생각되는게 있습니다. 대장동지 이야기까지 듣고보니 속에 짚이는게 있습니다.

한동무가 왜 그렇게도 방억세동무를 허비는 일에 기를 쓰고 덤비는지 알듯 합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정치위원의 이야기에 저으기 기분이 처져있던 주경남의 눈빛이 칼끝같이 날이 섰다. 정치위원의 눈빛도 예리해진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되겠는데…

방억세동무가 떠나간 후 그 사람의 행불을 놓고 여러가지 흉담이 골안을 휘저어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뒤를 캐보니 그 출처가 다 한정상이였지요. 한정상에게는 방억세동무가 해방전부터 상급이였으니 저 사람이 누구 아닌 방억세동무를 놓고 뒤에서 정말 혀바닥장난을 해서는 안될 일이 아닙니까. 한정상이 그래서는 안되는 사람인데 이번 일이 터지자 지금까지 그냥 도수를 넘어 움직여왔습니다. 왜 근거없는 말을 함부로 과장해서 돌리느냐고 따지니 지금까지 하는 대답이 전탕 변명입니다. 쥐여짜면 대원들의 각성을 높여주느라고 그랬다는겁니다.》

《하, 알만 하오. 그러니 이번 글도 그 일과 맥락이 있다는거겠소.》

《아무튼 성동무와 방억세동무를 결합시켜주는가 하는건 더 알아봐야 될것 같습니다.》

《왜?… 한정상때문에?… 마음쓸게 없소. 거야 한정상의 외짝사랑이겠지. 성란희 같은 녀자야 한정상말고도 숱한 사람들이 넘보고있을거요. 그렇다고 거기다가 일일이 사랑이라고 이름붙여줄수야 없지 않소. 성란희 말하는걸 들어보니 한정상이쯤은 눈꼽정도도 아니더구만.》

주경남은 의외로 심중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도로 제자리에 앉으며 담배를 또 한대 말아물었다.

정치위원도 담배를 굵직하게 말아물고 연기를 피워올렸다.

두사람은 잠시 경쟁이라도 할듯 담배연기를 토해놓으며 제가끔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이윽고 먼저 담배를 다 꼬슬리고난 주경남이 담배불을 꺼버리고는 어조에 힘을 주며 말하였다.

《일이 이렇게 된바엔 그 사람들의 일을 빨리 매듭지어줍시다.

이런 일은 명백하게 선을 가르고 될수록 빨리 끝을 내야 한단 말이요.

말을 듣고보니 방억세동무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기 의사를 비쳐놓은게 없는듯싶은데 그 사람으로서야 그럴법한 일이기도 하지요. 방억세는 성란희짝이 될만 하오. 사람이 진국이구 어델 튀겨봐야 곯은데 있는 사람이요?》

《물론이지요. 성란희동무가 해방전에 죽창대에 입대하던 이야기를 합디까?》

《아니… 그런 말 터놓을 계제가 됐소?! 한정상이 재주부린 그 기사를 들고와서 이게 실말이냐고 울며불며 하는데 원 참, 기가 찬 일이요.

아, 지금 방억세 그 사람이 속이 새까매있을거요. 어 참… 혁명이라는게 쉽지 않구만. 엉… 성란희가 지금껏 얼마나 속을 썩여왔겠소. 우리가 너무도 야한 일을 그 사람들에게 강요한게 아닐가.》

주경남이 두사람의 사랑담에 속이 엷어져서 탄식하듯 중얼거리자 정치위원이 위로하였다.

《대장동지, 어쩌겠습니까?! 고정하십시오. 그래서 애국의 길에 눈물도 있고 슬픔도 있고 뼈저린 고통도 있다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겨내야지요. 그 사람들도 이겨낼겁니다.

뒤날에 옛말할 때가 오겠지요.》

《어, 됐소. 누가 누굴 위로할 형편이 됐소? 하긴 내 그 사람 떠나보낼 때 도랑막고 고래잡겠느냐고 희떠운 소리 한마디 했는데 정말 그 사람이 두루두루 베찬 일을 맡아나섰소.》

정치위원이 해방전에 성란희가 입산하던 일을 간단히 들려주었다.

정치위원의 이야기가 끝나자 주경남은 또다시 느닷없이 어성을 높이였다.

《그렇다면 방억세 그 사람도 탈난 사람이야. 녀자의 혼을 빼놓고 저는 시치미를 뚝 떼고있으면 어쩐다는거야. 정치위원한테라도 부탁 한마디 남겨두고 떠난다면 못쓴다던가.

그게 어찌된 인간이야.》

《허, 그래서 방억세지요. 아마도 동지적륜리를 지켜 성동무를 멀리하려는거겠지요.》

《에에, 난 찬성 못하겠소. 이 일은 방억세가 처신을 잘못하였소.

란희동무가 한정상과는 결합하지 않겠는데 그러면 성란희는 그 알량한 방억세의 륜리라는 물건짝때문에 일생 혼자 살아야 되겠는가. 그러다가 방억세도 부처님이 되는걸 보라구요. 허참…

정치위원동무, 웃을 일이 아니요. 그들의 사랑을 아껴주고 지켜줍시다. 그들도 심장이 뛰는 젊은이들이 아닌가. 난 성참모를 만나고나니 마음이 급해지오.

이번 일을 계기로 적당한 구실을 붙여 성동무를 내려보냅시다.》

《예, 저도 대장동지이야기를 듣고나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합시다. 흑토골회의에 갔다와서 내가 성란희동무를 인차 만나보겠습니다.

그다음 대장동지주장대로 무슨 명분을 세워 방억세동무에게로 보내줍시다. 그들이 결합되면야 서로 마음의 의지도 되여 한결 힘이 생길겁니다. 전일에 알았더라면 그렇게 해주었을건데… 성관호와의 사업도 더 잘될거구요.》

《에, 에… 하여튼 랑패요. 그래서 내 방억세가 틀려먹었다구 말하는거요.》

《허, 틀려먹기는요. 뭐 말 못할 사정도 있었겠지요. 흑토골에서 돌아오면 지체말고 짝을 무어줍시다. 적당한 구실은 제가 만들어보겠습니다.》

《좋수다. 정치위원동무의 말대로 그렇게 되면 두루두루 꿩먹고 알먹기요. 벌써 그렇게 했어야 되는건데… 우리도 생각이 모자랐거던. 이런 일도 있을수 있다는걸 예상해야 되는건데. 자, 난 가겠수다.

정치위원동무도 빨리 눈을 붙이오. 왕복 천리길이요. 어뜩새벽에 떠나자면 눈을 붙여야 하오.》

주경남은 성란희의 문제에 정치위원도 선선히 응해나서자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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