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제3장 산에 오른 세사람

 

저녁상을 물린 후 방억세와 한정상은 성관호의 안내로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호화스럽게 꾸려진 넓은 방이였다. 성관호는 지난 시기에는 연희나 가무를 감상하던 곳이였는데 지금은 성란희의 음악실로 되여있다고 설명하였다.

천정에 매단 무리등부터 여러가지 색조화가 어울려 신비하고도 현란하게 방안을 밝히는데 창문마다에는 초록색의 휘장이 드리우고 벽들은 미색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여 신선하고도 아늑한감을 준다.

비취색갈의 커다란 화분에는 고무나무가 싱싱하고 새빨간 꽃을 피워 떠이고있는 커다란 선인장이 여기저기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방안의 가운데에는 둘레가 한아름이 될만 한 어항이 놓여있는데 갖가지 진귀한 물고기들이 노닐고있었다.

방억세가 이틀동안 거접하고있던 방이나 식당은 어덴가 모르게 고루한 봉건의 고색이 짙어 곰팡내를 느끼게 했는데 여기에는 현대문명이 무르녹고있는듯싶었다.

방억세는 관청에 들어선 촌닭처럼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듯 호화찬란한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는 한동안 어리어리한 눈으로 생전 처음 보는 방안의 화려한 장식을 둘러보았다.

금시 방으로 어여쁜 무희들이 잠자리날개같은 치마저고리를 너울거리며 쏟아져나올듯싶고 갖가지 악기를 든 악사들이 나타나 가야금을 뚱땅거리고 바이올린활을 멋스럽게 오르내리고 그속에 장고장단이며 건드러진 새납소리가 숨가쁘게 뽑아질것 같다.

성관호는 그들을 중간자리에 앉도록 하고는 앞탁우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방안을 황홀하게 하던 무리등과 벽등들이 일시에 꺼졌다.

그러자 맞은편의 벽이 좌우로 소리없이 열리더니 파르스름한 불빛을 받으며 성란희가 산뜻한 야회복차림으로 나와서 그들을 향하여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그쪽은 벽돌 두어장높이로 꾸려진 실내무대였다.

《방형, 우리 동생의 요청으로 이자리가 마련되였습니다.

피곤하신대로 들어주는것이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성란희의 개인음악회지요.》

성관호는 앞탁에 있는 옥색다반에서 감 두알을 방억세와 한정상에게 쥐여주면서 동의를 구하였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뜻밖에 이런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습니다.

헌데 전 음악에 대하여서는 너무도 무식합니다.

그저 재미있구나, 없구나 하는 정도랍니다.》

《하, 뭐 그렇다면 우리는 음악에서는 같고같은 문외한들입니다. 난 통 무슨 건반두드리는 소리에 숱한 의미를 담는지 아무리 굴려보아야 짚이우지 않지요. 음악이라면 여기 이 친구쯤 돼야 하는건데…》

《아니 나야 뭐… 사실은 저 란희씨의 피아노연주는 전문가들의 뺨을 칠만 한 수준급이지요.》

성관호가 한정상을 내세우자 그는 기다리고있은듯 삽시에 뱁새눈을 번쩍 뜨고 활기를 띠며 대화에 끼여들었다.

요 며칠동안 성관호와 성란희의 가시같은 눈총과 침묵에 기가 죽어 꿔온 보리짝처럼 구석자리만 차지하고있던 한정상은 성관호가 벌을 해제한다는듯 슬쩍 자기를 건드려놓는 바람에 너무도 황송해서 지어낸 겸양을 보이며 손부터 내둘렀다.

사실 그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때로부터 성관호는 로골적인 경멸과 분노를 드러내며 그와의 간격을 썩 넓혀왔던것이다. 더구나 성란희는 들인 정이 있었더냐는듯 곁눈질 한번도 해주지 않고 속을 도사리고있다.

(따귀 한대라도 붙이고 도망가는건데…)

지금도 한정상은 그날 저녁 성란희앞에서 왜놈들의 주먹 한대에 얼쳐서 비겁한 꼴을 보이며 걸음아 날 살려라고 줄행랑을 놓은 자신을 죽어라 하고 저주하고있었다.

아차하다가는 조롱에 무진 애를 말리우며 몰아넣은 봉황새를 놓칠수 있는 아슬아슬한 고비다.

적어도 이마에 꽈리알같은 혹이라도 붙이고 들어섰어야 나도 사내라고 멋부릴수 있는데 긁힌 곳 하나 없이 허둥지둥 달아빼왔으니 결국 이 대궐에 가을메뚜기처럼 난데없이 뛰여든 사나이는 영웅으로 떠받들리우는데 자기는 졸지에 비렬한으로 추락되여 로골적인 수모를 당하게 된것이다.

여차직하면 한정상은 지난해 여름의 시내가에서부터 고이 키워온 외짝사랑마저 일조에 잃어버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그는 아까 정각에서 물러나 성란희를 응접실로 불러내여 정말 산에 들어가겠는가,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아무렴 일본것들이 옛 정승의 따님을 전장터에 기어이 끌어가겠는가, 정 갈데가 없으면 자기가 줄을 놓을테니 미국으로 가서 전쟁 끝나기를 기다리라 하고 엄포도 놓고 달래기도 하고 살아날 구멍도 튀워주기도 하였건만 처녀는 그 고운 눈을 새침하게 내리깔고 입을 옥물고 가타부타 대답을 주지 않았다.

생각끝에 한정상이 찾아낸 기발한 착상이 이른바 피아노연주회였다. 그는 귀한 손님에게 인상적인 저녁을 보내게 하자는 그럴듯한 명분을 세워 마침내 처녀를 무대에 내세우게 되였다.

처음에 성란희는 한정상이 말꺼내기 바쁘게 쓰거운듯 세차게 고개를 가로흔들었다.

이젠 한정상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쓴다 해도 곧이듣지 않게 되였다. 게다가 산에서 내려온 방억세를 따라가겠다면서 구태여 번쩍거리는 피아노앞에서 제 솜씨를 뽐내는것이 경망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던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잠시 그자리에서 속구구를 해보고나서 활기있게 《좋아요!》 하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한정상에게는 흉칙한 계교가 있었다.

그는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워보이는 저 산사람에게 성란희라는 녀인은 부호집의 고명딸로서 손끝에 기름만 발리우며 금지옥엽으로 커왔고 현대판사교계에나 어울리는 부르죠아녀성이라는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시켜 성란희의 입대를 애초에 막아치우도록 유도하려 하였던것이다.

사실 지금 연분홍빛갈의 하르르한 야회복을 입고 이 서울장안에서 보기 드문 그랜드피아노앞에서 단아한 자세로 앉아 곡상을 고르고있는 처녀의 우아한 모습은 그의 흉칙한 착상대로 방억세에게는 이상야릇하면서도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지금 담찬 어조로 자기는 간다면 간다고, 두고보라고 분연히 선언하던 처녀의 말을 되살려보며 어이없는 미소를 그리고있었다.

저것이 바로 저 처녀의 본태일것이다. 더 음미할나위가 없다.

물론 그 산속엔 이처럼 화려한 실내음악실도 번쩍거리는 무리등도 없다. 두드려볼 건반도 이제 아름답게 방안을 울리게 될 음악도 없다.

저렇게 곱게만 키워지고 다듬어진 녀인이 총창을 비껴들고 참호를 파고 제손으로 땀내나는 군복을 기워입으며 그 생활에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찾아낼수 있을가.

죽창대의 생활이란 파들거리는 얄팍한 심장의 유혹에 떠밀려서는 하루도 지탱해낼수 없다.

그 간고하고도 준엄한 생활은 발딱해서 생겨난 감정이나 그 어떤 메마른 론리로써는 도저히 설명할수 없고 자기의것으로 접수할수도 없다.

체내에 두텁게 자리잡은 생활의 풍요와 고행의 자욱자욱마다 가슴에 야릇하게 젖어들 저 음악의 향수를 어떻게 이겨낼수 있으랴.

방억세는 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온몸에 스며드는듯 한 달콤하고 알싸한 향내에 졸음이 사르르 깃을 내리고 혼미한 꿈의 세계에 갈마들면서 자기를 다잡느라고 애를 쓰고 쓰겁게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하 참, 그거 귀신의 조화로구나. 총검을 주무르던 용사도 단번에 녹작해지는걸. 이놈의 방에 더두말고 열흘만 박혀있어도 흐물흐물해지겠어. 흥, 그런데 어쩐다구. 태백산이 너따위 같은 부르죠아지들을 거두어주는 피서지는 아니다. 아씨님 오빠가 신통한 소리를 했지. 등산놀이가 아니라구. 그래 등산놀이가 아니다. 살고죽는 싸움이 준비되고있다. 이제 우리는 본때있게 싸워보자고 한다. 그건 유희가 아니다. 너같은 녀인이 그 싸움판에 뛰여들어?》

방억세의 몽롱하여지는 상념은 방안을 쩌렁 울리는 힘찬 피아노소리에 끊어졌다.

성란희는 두손을 멋스럽게 눈지방까지 들어올리더니 건반을 움켜잡을듯 힘껏 두손을 내리찍었다.

녀인의 애절한 곡성과도 같은 메마르고 째지는듯 한 떨림이 련속 방안을 뒤흔들었다.

첫 소절을 길게 울려놓은 성란희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그 메아리가 방안에 잦아들자 몸을 가벼이 흔들며 건반을 때리기 시작하였다.

방안에는 뽀얀 안개발을 그려보게 하는 가늘고 연한 선률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묽은 안개를 헤치며 출렁이는 물결소리가 들려오고 그 물결소리를 타고 푸른 강반이 나타난다.

강변을 조용히 떠나 푸른 강물우로 미끄러져가는 한척의 매생이,

어기영차 어기영차 노젓는 배사공의 흥타령가락일가.

흥겹고도 잦은 가락이 잠시잠간 튀여나더니 그것은 멀어져가고 다시 음악은 길게 곡상을 그리며 절절한 리듬을 타고 흐른다.

멀어져가는 기슭을 바라보는 녀인의 눈가에 맺힌것은 눈물인가 피방울이런가, 넘실거리던 곡조는 애상에 젖은 호곡으로 넘어가고있었다. 가슴속의 맺힌 한을 뿜어내는 녀인의 구슬픈 눈물이 처녀의 손끝에서 건반을 통해 사나이들의 심장에도 젖어들었다.

성란희는 청중을 자기의 음악의 세계에 깊숙이 심취되게 끌어당기고는 고개를 들고 연주속에 맑고 은근한 저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님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옛 님이 보고싶구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노래가 끝나자 성란희는 다시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며 피아노연주를 이어갔다.

다시금 방안에는 눅눅히 젖은 안개가 흐르고 구슬픈 실향녀인의 눈물이 일렁이는 두만강우에 휘뿌려지는듯싶다.

음악에는 그닥 흥미도 조예도 없던 방억세였지만 처녀가 심장으로 펼쳐가는 애상의 세계에 흠뻑 취해들어 어느새에 가슴이 찌르르해지고 목구멍이 띠끔띠끔해졌다.

연주를 마치고 천천히 피아노건반우에서 고개를 든 성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사람에게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가에는 진주알같은 물방울들이 연푸른 불빛에 반짝거렸다.

《만점이야! 만점짜리입니다!》

한정상이 선참으로 탄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방억세도 성관호도 감사와 고마움의 정을 담아 열정적으로 박수를 보내였다.

성란희는 무대앞으로 걸어나와 그들을 향해 허리를 굽혀보이고나서 다시 피아노앞으로 사뿐사뿐 걸어가서 악보를 몇장 번지였다.

이번에는 애상에 젖어있던 음악과는 대조를 이루는 전진적이고도 억센 리듬의 음악이 방안을 첫 소절부터 움씰움씰거리게 했다.

성란희의 팔과 손에도 힘과 박력이 가해진다.

성란희가 날리는 새로운 음악의 세계에는 돌격하는 대오앞에 힘차게 솟아 펄럭이는 기폭이 있었고 적진을 휩쓰는 병사들의 천지를 진감하는 우렁찬 함성이 있었다. 비발치는 탄우속을 헤쳐가는 준마의 발굽소리가 울렸고 바람을 후려때리는 창검의 서슬비낀 휘파람소리도 귀전을 울린다.

음악의 언어를 대충 알고있는 한정상은 처녀의 피아노연주가 부드러운 감정의 기슭에서 격렬한 절정으로 치달아올라감에 따라 그 실눈이 둥그래지고 입속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성란희를 피아노앞에 곱게 앉혀 그의 산골행을 어떻게 하든지 저지시켜보려고 했던 자기의 당초의 계교가 완전히 뒤집히고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처녀가 휘때려날리는 그 음악의 언어를 통하여 점점 명료하게 갈마들었던것이다.

어찌 보면 성란희는 오늘의 연주회를 자기의 권유가 없었더라도 벌려놓았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이 연주회에서 울린 전반부의 음악이 자기가 태여났고 자라온 생의 터전과 행복이 무르녹던 그 시절과 리별하는 구슬프고 향수에 젖은 심경을 펼쳐주었다면 후반부의 음악에는 거칠고 준엄한 삶의 새로운 주로에 나선 한 인간의 억척의 의지와 맹세가 번뜩이고있었다.

한정상은 지금 화려한 야회복이 아니라 전투복을 차려입고 피아노가 아니라 달리는 전투마차에서 기관총탄을 날리고있는 녀병사를 보고있는듯 한 놀라운 환각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사실 지금 성란희는 한없는 비애와 목가적인 정서속에 자기의 17년세월에 손을 젓고있었다. 아름다운 선률에 실려 호화스럽고 예쁘기만 하던 소녀시절이 멀어져가고있었다. 그는 지금 새 삶의 출발선에서 뛰여넘어야 할 생의 준령과 사품치는 강하를 내다보며 신들메를 조이고있었다.

드디여 성란희는 피아노건반뚜껑을 닫고 잠시 가빠오른 숨결을 가라앉히고나서 넓고 희맑은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은 땀발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성관호가 탁상우의 스위치를 딸깍거리자 방안의 무리등과 벽등이 눈부신 색광을 뿌려 방안을 다시 신비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였다.

성란희는 무대의 중심에 나와서 세사람에게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이번에는 방억세가 선참으로 박수를 보내고 두사람이 따랐다.

한정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 준비해왔는지 꽃 한송이를 쥐고 성란희에게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성란희씨, 당신은 전도가 양양한 피아니스트가 틀림없습니다. <눈물젖은 두만강>은 연주도 노래도 우리 사나이들의 가슴을 구슬프게 적셔주었습니다. 그 베토벤의 피아노쏘나타 <열정>도 참으로 웅장하고 박력있게 작곡가의 감정과 정서를 그대로 재현하여놓았습니다.

두고보십시오. 앞으로 당신은 서울의 극장무대를 독차지하게 될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눈부신 미래를 믿어마지 않습니다. 미국으로 꼭 가십시오. 내가 란희씨가 결심만 내리면 미국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나를 믿어주시오. 난 이미 란희씨 류학문제를 알론목사에게 부탁하여 우호적인 대답을 받아놓았습니다. 여기서는 다 말할수 없으니 내 말대로 하시오.》

한정상은 귀간지러운 요설과 아첨으로 처녀의 환심을 사려고 얼레발을 쳤으나 성란희는 그가 물러서자마자 한정상이 내민 꽃송이를 가지고 방억세앞으로 야회복을 끌며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선생님, 저의 감사의 인사를 미숙하나마 다시 올렸을뿐입니다. 오늘의 무대는 고마운 선생님이 마련해주신 무대입니다.》 하며 처녀는 수집게 얼굴을 붉힌채 꽃을 내밀었다.

《하, 이거…》

방억세는 쑥스러운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저도 모르게 한정상에게로 눈길을 흘끔 보내며 멈짓거렸다. 그가 선사한 꽃송이를 받아주는것이 난처하였던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내세워 한정상을 궁지에 몰아넣는듯싶은 처녀의 얄궂은 처사가 저으기 불쾌해지기도 하였다.

그때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성관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 왜 그러시오, 방형? 산악을 밟고서서 천하무적이라 으시대는 <황군>에 죽창을 뽑아들고 성전을 선포하고 나선 호걸장부가 아녀자의 꽃 한송이에 주접이 들다니… 허허허…》

한정상도 속으로 자기가 마련해온 꽃을 외간사나이에게 넌떡 내미는 성란희가 일부러 자기에게 야료를 부리는듯싶어 얄밉기 그지없었으나 그러루한 분기를 얄팍한 웃음으로 가리워놓고 큰소리로 방억세의 용기를 돋구었다.

《방억세씨, 어서 받으시오. 우리의 성의이고 우리의 고마움이니깐요.》

한정상은 《우리》라는 타산된 말을 곱씹으면서 자기와 성란희의 관계를 슬쩍 공개하고 확인받으려고 왼심을 썼다.

그러나 그의 기민하고 재치있는 너스레가 오히려 사나이들에게는 조소를 자아내고 처녀에게는 심경을 예리하게 건드려놓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성란희는 《흥-》 하고 코방귀를 꿰던지고는 꽃을 방구석에 집어던지고 무대에 올라가 무궁화꽃무늬가 수놓아진 막을 소리나게 드리워놓았다.

《허허… 저렇다니깐…》

성관호가 동생의 발끈거리는 무례한 행동을 눈살을 찌프리고 보고있다가 무대막까지 내리자 어처구니없어 오만상을 풀고 배허벅을 들먹거리며 웃고말았다.

《저런 괄랭이라구야. 한정상, 당신 손탁이 너무 물러. 틀어쥘바엔 꼼짝달싹 못하게 꽈악 죄여놓아야지.… 그러니깐 란희의 눈밖에 밀려났지. 허허…》

성관호는 한정상으로부터 방억세에게로 눈길을 옮기며 시원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한정상의 얼굴이 대뜸 수수떡처럼 지지벌개졌다. 그에게는 성관호의 웃음과 너스레가 네가 아무리 내 동생에게 추파를 던져도 괜한짓이라는, 그래서 구태여 새로 사귀게 된 사나이앞에서 얼뜬 애인의 흉내를 내지 말라는 씨가 박힌 훈계와 조소처럼 들렸던것이다.

《방형, 동생의 음악을 들어주어 감사합니다.… 자, 그럼 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모친께서 오셨는지… 상의할것이 두루 있어서. 그게 끝나면 방형침실로 가리다.》

성관호는 방억세에게 의미심장한 어조로 량해를 구하고는 뚜벅뚜벅 무거운 발자국소리를 내며 방을 나섰다.

지금 그의 가슴속에서는 때없이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운명의 분기점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인생의 판가름을 겨루는 그러한 공방전이였다.

그는 간밤에 한잠도 자지 못하였다. 뜻밖에 맞다든 생면부지의 사나이가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되는 운명적인 회오리를 일으켜놓았던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성관호는 부상자리가 아물고 남방전선으로 돌아갈 날자가 다가옴에 따라 커다란 고민거리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군복무를 선친들의 뜻과 민족적량심을 등진 배신으로 자신을 타매하여왔던 성관호는 또다시 전선으로 가서 일본의 충견으로 분골쇄신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조국땅에서 목숨을 끊어버리는가 하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락가락하는 절망의 기로에서 허우적거리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항일운동자가 하늘에서 내려온듯 눈앞에 불쑥 다가든것이다.

그는 분명 사나이에게 첫눈에 반해버린것이 틀림없는 동생처럼 만나자마자 방억세에게 취하여버렸다.

솔직하면서도 의기충천한 그의 심장이 부러웠다.

래일에 대한 희망찬 신념에 끌려들었다.

그리고 조국과 겨레앞에, 시대와 조상들앞에 부끄럼없는 방억세의 주의주장과 그로 하여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사나이의 삶이 황홀하여졌다.

뿐더러 사나이앞에서 대뜸 입대를 청원해나선 성란희도 부러워졌다.

언제나 성란희는 마음이 움직이면 즉시로 자기의 모양을 바꾸는 영악하고 단호하고 진취적인데가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자리에서 란희와 함께 선뜻 나설수 없었을가.

정작 왜놈의 군복을 벗어버리고 왜놈이 쥐여준 총부리를 왜놈들에게로 돌리자고 하니 오만가지 시름이 그를 집요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방금전에 음악의 언어로 다시금 자기의 인생결단을 선언하는 동생을 보면서도 성관호는 아직도 삶의 분기점에서 방황하고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고 드디여 자기도 동생을 따라 새로운 생의 궤도에 오르리라 굳이 마음을 정리하였던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결심이 새로운 도전에 흔들리기 전에 어머니에게 내비치고 어머니의 지지를 받고싶었던것이다.

방억세도 그를 따라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한정상이 《방형.》 하고 앞을 막아섰다.

한정상은 그를 불러세워놓기는 하였으나 잠시동안 그를 지켜볼뿐 무엇인가 입에 물고 뱉을가 삼킬가 망설이고있었다.

《말하시오. 뭐요?》

방억세는 가늘게 실금이 그어진 한정상의 눈을 지켜보며 이 해사하게 생긴 사나이가 꽤 심중한 말거리를 꺼내놓는가부다 하고 은근히 속끈이 팽팽해졌다.

《저 방형, 미안한데 솔직히 말해주시오. 믿고 부탁드립니다.》

한정상이 재삼 바질거리다가 말을 계속하였다.

《그날에 말입니다. 란희씨가 말입니다.… 그 왜놈군속들에게 혹 당하지나 않았는지요?》

《당하다니? 뭘 당한단 말이요?》

방억세는 상대의 물음이 인차 짚이우지 않아 처음에는 얼떠름해서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러나 이내 상대의 조심스러운 질문의 미묘한 의미를 가려 들었다.

속에서 욱- 분노가 룡틀임처럼 치밀어올랐다. 그 주제에 사내라고… 그 주제에 그것부터 물어… 이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사내야.

방억세는 한바탕 욕사발을 퍼붓고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눌러놓고 신랄하게 뱉아던졌다.

《당신두 사내라면 사나이답게 처신하기 바라오.》

그리고는 쓰디쓴 환멸이 돋쳐 한정상의 실눈을 쏘아보다가 그앞을 휭하니 지나갔다.

한정상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씨엉씨엉 문가를 향해 걸어가는 방억세의 뒤모습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해진 보다 맵짜진 타격은 그뒤에 있었다.

《뭐라구요?… 다시한번 말해봐요. 그 사람에게 물어볼게 있나요. 내게 직접 물어봐요! 그래 당했다면 어쩔테야요?!》

등뒤에서 울린 짱짱 여무지고 한서린 성란희의 목소리였다.

한정상은 흠칫 몸을 떨며 돌아섰다.

분노가 이글거리는 불심지를 돋구고 당장 물어메칠것 같은 맹수처럼 매서워진 처녀의 얼굴을 본 한정상은 금시 아래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아찔하여졌다.

《다시한번 말해봐요.》

그 녀자는 사내의 목을 죄이듯 한걸음한걸음 바투 다가서며 총알처럼 암차게 쏘아붙였다.

며칠동안 참고 또 참아왔던 한정상에 대한 불만과 경멸의 감정이 분화구를 찾아 괴롭게 소용돌이치다가 드디여 터져나왔던것이다.

《아아, 뭘 그러오. 란희… 난 당신의 신상이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한정상이 그 얄팍한 입술에 어색한 미소를 비죽이 담고 낯빛이 졸지에 삶아낸 옷가지처럼 후줄근해져서 한발자국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순간 성란희의 손바닥이 번개같이 허공에서 휘파람소리를 내며 찰싹 사내의 뺨을 후려쳤다. 할끔해진 사내의 볼에 처녀의 야무진 손가락자리가 흉물스럽게 건너갔다.

《비렬한! 당신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구 내 신상 걱정 한다는거예요!》

처녀는 수치와 모멸과 울화로 불붙는 얼굴을 두손으로 싸쥐고 몸을 한쪽으로 넘어질듯 위태롭게 실으며 방억세가 오도가도 못하고 굳어져있는 문가를 앞질러 달려나갔다.

《란희-》

금시 우거지상이 되여버린 한정상은 처녀의 손자리가 남아있는 볼따구니에 손을 올렸다. 그는 혼이 쭉 빠져나간 얼친 상통을 해가지고 달아나는 처녀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볼뿐이였다.

그 얄팍한 입술을 경박하게 벌린탓으로 타산밖의 액운을 몰아온것이다.

《허허허, 뭘 그러시오, 한정상씨. 처녀의 손맛인데 어여쁘게 받아주면 될노릇이지.》

방억세는 상대의 너무도 비참한 꼴을 보는게 멋적기도 하고 남자라는 동성의 련대의식에서인지 측은해보이기도 해서 싱거운 소리로 위로하고는 자리를 뜨고말았다.

 

다음날 새벽이였다.

방억세는 성관호와 함께 아침상을 일찌기 치르고는 성관호의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하려고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녀인의 방에는 이미 성란희가 와서 고개를 다소곳이 떨구고 앉아있었다.

50대 초반을 바라보는 김씨녀인은 첫눈에도 대가집 마님다운 정숙한 몸가짐과 도고한 기품이 엿보이였다.

녀인은 진회색의 비단치마저고리에 마고자를 걸치고 한무릎을 세우고 단정히 앉아 방억세를 맞아주었다.

《어서 들어오게.》

녀인은 잘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젊은 사나이를 반기였다.

아직도 볼이 꺼지지 않은 둥글둥글한 얼굴이 무척 온후하여보이고 눈빛이 무척 맑고 인자하여 쉽게 어머니라는 더없이 귀한 말이 스스럼없이 나가게 한다.

《어머님, 어머님의 보살핌으로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고 떠납니다.》

방억세는 녀인에게 큰절을 올리며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김씨가 방억세의 손을 잡아주며 고마움에 젖은 음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어서 일어나게. 집안의 귀인을 너무 홀대하지 않았는지 념려일세… 너희들은 어서 가서 준비를 해가지고 오너라.》

어머니의 분부에 성관호와 성란희는 자리를 뜨고 방안에는 두사람만이 마주앉았다.

김씨는 자기 딸을 사지판에서 구원하여주었다고 세번네번 곱씹어 인사를 하고는 자기의 성의라고 하면서 두툼한 돈봉투를 내밀었다.

방억세가 두손으로 막으며 이러시면 안된다고 마다하자 녀인은 사뭇 결곡한 어조로 타일렀다.

《젊은이, 내 맏이에게서 이야기를 다 들었다네. 그런즉 이건 내 딸을 구원해주었다고 품값을 계산한 사례금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게. 이를테면 독립의연금이라고 이름을 달아주게.

나도 임자들이 하는 일을 들었지. 장하네. 다들 섬오랑캐한테서 받는 수모에 치를 떨면서도 주먹질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사는데 젊은이 같은 대장부들이 살아있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배달의 얼이 임자들이 잡은 죽창에 시퍼렇게 살아있거늘 이 아니 장한가. 그러한즉 이건 내 나라의 군사들에게 백성이 바치는 군자금이라 생각하고 받아주게.》

《군자금이라구요?》

방억세는 귀가 번쩍 틔였다.

군자금이라는 소리가 뜻밖이였고 신통하였다. 그렇다면 받아들일 명분이 서는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죽창대의 월동준비도 해나가자면 한푼의 돈이라도 귀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다.

딸을 구해준 사례금이라는 명목에는 선뜻 손을 내밀수 없었는데 그 명분을 달리 세워주니 그 성의가 우선 고마왔다.

《자, 받게. 거 뭐 놀라워할건 없네. 이제 알게 되겠지만 우리 어른께서도 일본놈들이 강다짐으로 봉작한 귀족의 작위를 거절한탓으로 그놈들의 눈밖에 나 여러가지로 핍박을 당하다가 병자년 세말에 급사하셨네. 그 어른께서는 해마다 이만한 액수의 돈을 항일을 지원하는 독립의연금이라는 이름을 붙여 여기저기에 보내주군 했다네. 임자가 항일죽창대 대장이라니 그 이름만 들어도 미쁘기 그지없네.》

《어머님, 고맙습니다. 이 귀한 돈을 왜놈들을 족쳐달라는 어머님의 부탁으로 받아들여 정하게 쓰고저 합니다. 어머님, 제 이름을 남길가 합니다.》

인민들로부터 지원물자나 자금을 받을 때에는 그 수량과 액수에 관계없이 반드시 령수증을 남겨주는것은 태백산항일죽창대의 엄격한 규률이였다. 혹 경우에 인민들의 지극한 성의가 항일죽창대의 이름을 도용한 협잡군들에게 우롱당하는 경우가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것은 뒤날에 나라가 독립된 후 나라독립에 바쳐진 인민들의 자그마한 성의까지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항일죽창대성원들의 나름으로서의 소박한 보답이기도 하였다.

김씨는 얼른 다른 방에 가서 흰종이와 필묵을 가져왔다.

방억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녀인의 숙연한 눈길을 느끼며 엄숙하게 붓을 달렸다.

《서기 1942년 8월 20일 독립의연금…》

방억세가 예까지 쓰고 주밋거리자 녀인은 얼른 《오천원일세.》 하고 말해주었다.

방억세의 붓이 다시 천천히 글발을 남겼다.

《서기 1942년 8월 20일 독립의연금 5(오)천원을 정히 인수함.

태백산항일죽창대 대장 방억세.》

방억세는 붓을 놓자 령수증을 엄숙하게 녀인에게 드리였다.

김씨는 정하게 또박또박 적은 방억세의 필적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고맙네.… 또 한가지 부탁이 있네. 왜놈들을 힘자라는껏 족쳐주게. 내 눈에 흙이 덮일 때까지 왜놈들의 행태를 어찌 잊을고. 한데 우리 맏이가 왜병갑옷을 두르게 되여 작고한 선친들에게도 면목이 없었는데 이번 임자의 걸음이 우리 집에도 해빛이 되여주었네.

맏이와 란희가 항일대에 입대하겠노라 하니 수하에 받아주게.》

《예?!… 아드님과 따님을 말입니까?!》

방억세는 김씨녀인의 부탁에 깜짝 놀라 나직이 부르짖었다.

어제 정각에서 무엇인가 막연한 예감은 있었지만 일본군대대장이던 성관호가 태백산에 오른다는것이 막상 듣고나니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그리고 어제 입산을 선포하던 성란희의 말을 하루밤에도 열두꿈을 꾼다는 소녀시절의 랑만적인 허영이나 변덕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들었는데 그마저 따라서겠다니 더구나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들을 받아들인다는것도 쉽게 용단을 내릴수 없는 뻐근한 일이다.

무엇때문에 그네들이 부등부등 산속에 가서 고행을 하겠다는거야. 부러운것없는 보금자리를 버릴 리유가 거기에 습관되여온 이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성관호가 일본군복무에 염증을 느꼈다면 그까짓 돈봉투나 차고 어데 피신해서 살아가면 된다. 성란희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들이 정작 자기 수하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썩 내키지도 않는 기분이였다.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에 담장안에 있던 적지 않은 하인들과 하녀들을 다 내보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도 숱한 구종들과 노복들을 거느리고 살아온 사람들이 간고무쌍한 산중생활에 적응될수 있겠는가 하는것도 큰 두통거리다.

그러고보면 산속에 들어가겠다고, 두고보라고 선언한 성란희의 도담한 소리가 변덕기많은 처녀의 입빠른 수작도 아니고 죽창대에 대하여 꼬치꼬치 물어보던 성관호의 거동도 례사스럽지 않았던것이 틀림없다.

이 늙은이가 고이 키워낸 귀동이들을 생사기약마저 할수 없는 험한 길에 내세우는 그 뜻도 바이 짐작하기 어렵다.

방억세는 한동안 비상한 충격과 감동에 휩싸여있었다.

《얘들아!》

녀인은 방억세가 앉은자리에서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있자 옆방을 향하여 소리쳤다.

그러자 미닫이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길떠날 행장을 꾸려들고 누런색으로 바삐 지은 옷까지 떨쳐입은 남매가 들어왔다.

성란희는 남자옷을 가쯘히 차려입고 모자까지 눌러썼는데 그렇게 차려입으니 더 이뻐보이고 생신해보였다.

그들은 어머니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회를 기다렸다.

《태백산항일죽창대라고 했던가?》

녀인은 엄숙하게 물었다. 이미 알고있었지만 아들딸들의 앞이라 그 자랑스러운 이름을 자기 입에 다시 올리고싶기도 했던것이다.

《예, 그렇게 부릅니다.》

방억세는 방안의 숭엄한 분위기와 녀인의 초연한 모습에 끌려들어 정중하게 대답하였다.

《이름부터 시원스러워 좋구만. 그 뜻도 높구. 태백은 자고로 백두대간의 가운데토막을 이루는 이 나라의 등마루요, 죽창은 이 나라의 슬기와 용맹을 떨쳐온 사나이들의 보검과도 같은 신령스러운 무장이였네. 관호, 란희, 명심해라. 너희 자부께서는 맏이가 이국만리에 가서 일본놈들의 총알받이로 나선 일때문에 늘 괴로워하셨다.

정승까지 지내셨던 조부님께서 을사년에 반기를 들기는 했으나 끝내 섬오랑캐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한채 비명으로 돌아가셨는데 너마저 일본군도를 절거덕거리며 사무라이흉내를 내야 하니 력대로 충신집안으로 불리워오던 성씨가문의 가세가 자기 대에 와서 허물어졌다고 늘 한탄하셨다.

한즉 너희 남매가 귀인을 만나 이제부터는 그 왜놈들과 맞서보겠노라 의기를 떨쳐나섰으니 이젠 나도 선친들의 묘소를 찾아볼 면목이 서는구나.

자, 다들 떠나거라. 독립연에 다시 만나자.

나라독립 이루기 전에는 이 집에 움쩍 나타나지 말거라.》

김씨는 앉음새를 한점 흐트리지 않고 가문의 족보에 가시처럼 박혀든 허물을 헤집어놓으며 마디마디 씨를 꽁꽁 박아넣듯 결곡하게 당부하였다.

성관호가 자리에 엎드려 돗자리우에 이마를 박고 작별을 고하였다.

《어머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관호가 말끝을 마무리 못하자 김씨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정작 제가 왜놈군복을 벗어버리고 슬하를 떠나가니 걱정스러운게 있습니다.》

《걱정스러운게?… 음, 알만 하다. 왜놈들이 우리 집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겠지. 하지만 념려할것 없다. 아무렴 너희들 제갈길을 갔다고 이 어미에게 오라를 지우겠니.

너희 선친들께서도 왜놈들과는 절치부심으로 맞섰지만 성씨가문의 기둥뿌리는 끝내 뽑아내지는 못했다.》

《어머니!》

《자, 일어나거라.》

성관호가 일어나자 그자리에 성란희가 나서며 인사를 드리였다.

그러나 처녀는 《어머니!》 하고는 다음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저 어머니의 무르팍에 폭삭 무너지듯 몸을 실으며 눈물을 쏟았다.

《일어나거라. 네옆에 대장이 굽어보고있느니라.》

김씨의 엄한 질책에 처녀는 얼른 어머니의 무릎우에서 물러났다.

방억세는 그들이 석별의 정을 더 나누도록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대청우에 놓은 괴나리보짐에 김씨로부터 넘겨받은 돈을 정하게 싸넣고 어깨에 질끈 동여맸다. 뜻밖에 맞다든 일에 여러모로 횡재를 한것 같아 방억세는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방오랑캐들에게 짓물릴번 했던 처녀를 구원했으니 자기 생각에도 더없이 대견하다.

그리고 이제 동지가 되겠는지는 두고봐야 알노릇이지만 열렬한 입대청원자를 두명 앞세우고 가게 되였으니 그것 또한 흐뭇한 일이다. 게다가 약차한 수량의 자금까지 어깨가 무겁도록 메고가게 되였으니 올해 겨울날 준비도 순조롭게 할수 있다.

그는 마당에서 잠시 남매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눈앞에 웅장하게 마주선 대가집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이건 집이라기보다 궁전같다. 하긴 이 집은 성관호의 증조부때까지는 당시 왕의 별궁으로 되여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씨가문의 자손인 성관호의 증조부가 부마로 선발되여 공주와 함께 이 대궐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궐집으로 지금도 불리워온다고 한다. 좌우에는 행랑채가 붙어있고 그우에 높이 솟은 고미다락을 떠인 솟을대문부터 야단스럽다.

그 문이 한번 찌구덩소리를 내고 열리면 당장 《여봐라-》하는 거센 호령이 대청을 울리고 구종, 노복들이 쓸어나올듯 을씨년스러운감부터 든다.

마당안에는 자그마한 못이 있고 그 두리에는 잘 다듬은 향나무가 들어차서 마당에 나서기만 하여도 그윽한 향기속에 취하게 된다.

마당으로부터 대청으로는 넓게 쌓아올린 대리석층계가 있고 그우로 본채라고 부르는 큰집이 합각지붕을 떠이고 우뚝 솟아있다.

꼭같은 형식과 규모를 가진 건물이 성곽처럼 여러채 빙 돌아가고 그 중심에는 4개의 아름되는 싸리나무기둥이 푸른 이끼돋은 청기와를 씌운 지붕을 떠받들고 웅장하게 솟아있다.

대청에 드문드문 서있는 기둥과 들보를 울긋불긋 장식한 퇴색한 단청이 대청마루에 깔린 옥색대리석과는 어울리지 않아 마치도 고색과 현대문명이 제가끔 제 자랑 하는듯싶다.

지난해부터 70칸 집에서 열댓칸만 남기고 다 세방으로 넘기고말았다고는 하나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듯싶은 이 대궐에서 고난이 첩첩한 산중에 자손들을 떠미는것이 아직도 기연가미연가싶다.

풍찬로숙이라는 말을 저 사람들이 리해나 할가.

방억세가 아직도 번거로운 상념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있는데 어머니와 작별한 남매가 배낭을 둘러메고 마당으로 나왔다.

《방형… 아니 이젠 대장님이라 불러야 되겠는지… 사전에 합의를 보지 않고 어머니를 통하여 화제에 떠올려 미안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선친들을 욕되게 하는 <황군>복무를 피할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성관호가 방억세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례를 차려 절절하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오빠와는 달리 성란희는 자못 명랑하게 턱밑에 다가든다.

성란희는 남복을 차려입은 자기 모습을 선보이듯 방억세의 눈앞에서 한바퀴 빙그르르 돌아갔다.

《어때요, 선배님? 잘 부탁드려요.》 하며 제 먼저 손을 척 내밀며 악수를 청하고 들까부는품이 꼭 등산놀이 떠나는 애된 소녀의 들뜬 모습이다.

헌데 방억세의 손을 잡고 장난스럽게 지그시 힘을 주는 처녀의 아귀가 예상밖으로 세과지여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 그러시오?》

성관호가 짧은 순간 성란희의 손을 잡다말고 진저리를 치는 방억세를 보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억세가 무방비로 있다가 곤욕을 치른 오른손을 흔들자 성란희는 까르르 웃었다.

영문을 알아차린 성관호가 동생에게 눈을 흘기고는 씩 웃었다.

《음, 네가 또 고까짓 검도자랑이구나. 방형, 우리 동생하구는 이래저래 주의해야 합니다. 꽃인가 쥐다가는 가시에 찔리고 봉황인가 안아주다가는 발톱에 할퀸답니다.》

성관호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며 웃자 성란희는 금시 뾰로통해졌고 방억세는 씨물거렸다.

《오빠는 또… 그럼 어떻게 하나요. 대장님께서 <너따위 부자집 귀동녀가 죽창대야.> 하고 당장 <돌아섯!>구령을 칠 잡도린데. 그래서 한번 아귀자랑 해본건데…》

성란희 소리에 두사람은 마주보며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방억세는 처녀의 활발하고도 적극적인 자세에 오히려 기가 눌리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하기는 지금 내 심정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란희씨가 옳게 보았습니다. 당신들의 입대는 내 혼자서 결심할 문제가 아닙니다. 두분의 입대는… 솔직히 말합시다.… 여러가지 론난이 있을수 있습니다. 우선 성형은… 내가 어제 죽창대는 그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놓고있다고 말한것은…》

방억세는 배낭까지 둘러메고나선 사람에게 돌아서라는것은 도리가 아니고 데리고가자니 그것도 난처해서 쉽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성관호는 상대의 심중을 리해하고 열정적으로 자기의 립장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 역시 동생과 같은 위구심을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방억세가 고개를 가로젓고 딱 잡아떼면 어쩌는수가 없을것 같다.

《나 역시 쉽게 내린 용단이 아닙니다.

저자신의 결심은 정확히 말하면 방형을 만나서 비로소 생각난것이 아니지요. 당신을 만나면서 난 자신의 결심이 옳았다는것을 재확인하였고 마침내 자신의 초지를 받아줄수 있는 대오를 찾았을뿐입니다.

나는 방형의 주저가 리해됩니다. 일본군현역에 복무하고 소좌계급장까지 메고있는 인간이 어떻게 항일전에 나서겠는가? 그리고 력대로 세도집의 자손으로서 당한 수작인가?…

이에 대해 우리 어머니가 말씀이 계셨다 하니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방형, 나의 치욕을 씻게 해주시오. 우리 조부의 치욕을 씻게 해주시오. 내가 민족을 위해 때늦게나마 봉사할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선생님, 저도 받아주십시오. 선생님이 저를 마다할 리유도 오빠에 못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저는 오빠처럼 큰뜻은 아직 없구요, 당장은 일본놈들앞에서 노래부르고 춤추는 일은 하고싶지 않습니다. 어찌 알겠습니까. 전번과 같은 일이 또 없으리라고요.

선생님께서 만약 저의 입대를 거절하시면 저는 <황군>에 끌려가 탕녀가 되고말것입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성란희는 이제 방억세가 고개를 가로저으면 금시 주저앉아 통곡이라도 터쳐놓을듯 눈굽에 눈물이 가랑가랑해가지고 간절하게 빌었다.

방억세는 그들의 입대청원이 예상밖으로 절절하고 그 명분이 더없이 순결하고 고결한것으로 하여 속이 뭉클하였다. 그는 결코 이들의 입대청원을 자기로서는 가로막을수 없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실상 죽창대대원들의 신분은 형형색색이다.

머슴살던 사람도 있고 부자집 자식도 있고 까막눈의 로동자도 있는가 하면 일본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여적 총 한방 쏴보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군의 해군소좌였던 사람도 있고 비행사도 있다.

이미 성관호에게 항일이 입대의 대의명분이라고 밝히기도 했고 죽창대가 초당파적인 집단이라는데 대하여서도 명백히 설명하였다.

그러니 이들이라고 입대를 거부할 구실은 찾을수 없다.

《좋습니다.》

드디여 방억세는 그들의 입대청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금을 박아 다짐을 두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말을 이었다.

《다만 제가 걱정스러운것은 두분이 뒤날에 여러모로 오늘의 결심을 후회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입니다. 특히…》 하며 방억세는 성란희에게로 미타한 눈길을 돌리는데 그 녀자는 제 먼저 시원스럽게 대답하였다.

《운명이지요.》

성란희가 이미 준비해놓았던듯싶게 너무도 쉽게 뱉아놓고 또 그 대답이라는게 너무도 옹골차 방억세는 무색해져서 피씩 웃고말았다.

성관호도 동생의 다기찬 대답이 미궁에 빠져들었던 자기마저 구출해준것 같아 유쾌하게 웃었다.

당자들이 너무도 배심있게 나오니 방억세도 구태여 더 구구하게 늘어놓고싶지 않았다. 당장은 이들의 결심을 지지하고 믿어주는수밖에 없을것 같다.

도를 넘는 로파심은 불신으로 해석되여 의심을 주고 불안을 낳게 한다. 더구나 대부호집의 높은 담장을 넘어 고행의 난바다에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심경이 겉으로는 태연자약해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복잡하고 조심스러울것이다.

정말 이 호부자자식들이 추위에 떨고 뱀을 잡아먹는것을 운명으로 감수한다면 받아들여보자. 모험투자라는것도 있지 않는가.

저들 모친의 말을 들어보나 저들의 이야기들에는 진실이 있고 진정이 있고 남다른 의기가 엿보인다.

좋다. 마음대로 하라. 들어가는 문도 나오는 문도 당신들에게 언제나 열려져있을것이다.

설사 산에서 버티지 못한다 하여도 이 나라 사람이라는 량심만 굳건히 되찾아가진다면 저들을 위하여서도 나라를 위하여서도 유익할것이다.

《자! 떠납시다!》

방억세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제 먼저 요란한 소리를 내는 솟을대문을 열었다.

성관호와 성란희도 대문가에 이르러 자기의 어머니가 지금 뙤창문으로 자기네를 내다보고있을 방을 향하여 절을 하고 방억세를 총총히 따라섰다.

그들이 구리장식이 번쩍거리는 대문을 벗어나 골목길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한정상이 역시 배낭을 둘러메고 그들의 앞을 막아나섰다.

아마도 집에 가서 행장을 꾸려가지고 어뜩새벽에 대문가에서 새벽이슬을 맞고있었던 모양이였다.

《나도 죽창대에 받아주시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학도병>으로 끌려가느니 죽창대에 가서 왜놈 모가지 하나라도 비틀어보는게 썩 낫지요. 난 후회하지 않을겁니다.》

한정상은 이미 준비해두었던 대답인지 묻기 바쁘게 척척 둘러맞춘다.

방억세는 한정상의 입대리유에 더 머리 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설된 과일처럼 떫다는 판단이 갔지만 방금 짤막하게 꺼내놓은 말이면 입대의 명분으로서는 충분하다. 어찌 알랴. 땡감은 떫어도 홍시되면 달지 않느냐.

《갑시다.》

이렇게 되여 세사람은 방억세를 따라 태백산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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