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대궐집 규수
일본사무라이들이 벌려놓은 태평양전쟁의 피비린 열풍이 조선반도에도 휘몰아치던 시기였다. 일본놈들은 어벌통이 크게도 태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는 중국, 몽골, 이전 쏘련지경으로, 남쪽으로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서남쪽으로는 타이와 먄마, 윁남, 싱가포르, 남동쪽으로는 미국으로 전선을 벌려놓았다. 이 광대한 류역에서 벌어지는 류혈적인 작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사무라이들은 일본본토는 물론, 조선에서도 마구잡이로 《징병》, 《징용》을 감행하고 쌀을 비롯한 전략물자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하여갔다. 그무렵 일본에 가서 고학으로 게이오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반일운동조직을 뭇고 그 조직책임자로 활동하였다는 죄로 일본 도꾜의 한 류치장에 감금되여 고문을 당하던 방억세는 《징병》장을 받고서야 석방되였다. 그러나 방억세는 결코 시대의 거친 물결에 인생의 돛을 올리는 무능한 인간이 되기 싫었다. 이미전에 방억세는 겨레를 위해 인생의 역풍을 맞받아 도전하는 시대의 반항아로 되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벌써 그 길에 한걸음 내밟고있었던것이다. 결코 항일의 신념을 굽힐수 없었고 일본놈의 총알받이로 《천황》을 위해 어리석은 개죽음을 당할수도 없었다. 방억세는 남방전선으로 떠나는 날 도꾜를 탈출하여 부사산의 온천에 숨어 고문에 어혈진 몸을 추세우고는 충청도 아산군 바다가에 있는 고향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고향에 도착하니 여기서도 온통 란가였다. 벌써 방억세가 일본에서 도망쳤다는 소식이 전해져 일본경찰놈들이 체포장을 가지고와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있었다. 게다가 다섯살아래인 녀동생 동요가 서울에 가서 녀자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일본군《위안부》에 뽑혀 당장 며칠안으로 끌려가게 되여 집에 내려와 울며불며 하루하루를 눈물속에 보내고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덮쳐든 가정의 비극에 그의 어머니는 그만 몸져누워버렸다. 평소에 절친하게 지냈던 동네의 소꿉시절 친구집에 숨어서 이러루한 집안사정을 들은 방억세는 어느날 은밀히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네가 도망쳐오기를 잘했다면서 당장 태백산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구한국 말기의 무장으로서 일제가 조선군대를 강제해산시킨 후 13도의병 총대장 류린석의 수하에서 싸우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돌아왔던 방억세의 아버지는 정신력이 대처럼 곧고 굳은 사람이였다. 그는 거의 10년간이나 왜놈들의 눈을 피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태백산에 은거하여 화전을 뚜지고 사냥을 하면서 살아온 경험도 가지고있어 자신만만해서 태백산입산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어느날 밤 방억세는 몸져누워서 앓음소리를 내고있는 어머니만 고향에 남겨두고 아버지와 녀동생과 함께 태백산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태백산에 자리를 잡은 방억세는 산속에서 자기와 같은 처지의 청춘남녀들이 삼삼오오 떼를 짓고 다니는것을 목격하자 이들을 조직화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방억세는 어느날 기맥이 통하는 청년들을 스무나문명 모여놓고 흩어져다니다가 일제놈들에게 각개격파되지 말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생존에 필요한 물자도 구하고 힘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자고 호소하였다. 서로 의지할 기둥을 찾고있던 류랑청년들은 하나같이 지지하였다. 이렇게 되여 태백산의 험한 산속에서 방억세를 중심으로 청년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졌다. 집단생활에 필요한 귀틀집부터 일떠세우고 소박한 생활세칙과 규정도 만들어졌다. 사냥과 자위를 위해서 대나무를 꺾어 거기다가 칼날을 박아 메고다녔다. 거기에 죽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짐승을 잡는데도 좋고 검술을 익히는데도 좋았다. 방억세는 대오가 점차 늘어나고 모든 청년들이 반일에로 지향되고있다는것이 파악되자 《결사항일》이라는 구호를 들었다. 생존을 위해 무어진 자연발생적인 집단이 미구하여 《태백산항일죽창대》라는 멋스럽고 존재명분이 뚜렷한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였다. 방억세는 《죽창대》의 투쟁구호를 이렇게 내걸었다. 《태백산항일죽창대는 장차 백두산에서 조선민족의 기개를 떨치고있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성전을 펼 때 이에 호응하여 일제격멸에 나설것이다.》 방억세는 구호에 맞게 군사훈련을 맹렬히 진행하였다. 대원들중에는 일본군대에서 장교나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이런저런 리유로 도망쳐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대체로 교관으로 선발되였다. 방억세의 아버지도 검술교관이 되여 청년들에게 몸에 익힌 택견과 무술을 가르쳤다. 당시 설악산과 지리산일대에도 일제놈들의 《징병》과 《징용》, 일본군《위안부》를 거부한 남녀청년들로 무어진 이러루한 무장대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경기도 포천군의 백운계곡에는 그때 항간에서 《김종백부대》라고 불리운 무장대가 있었는데 로동자출신인 김종백이 조직한 부대였다. 이들도 경기도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정하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화약을 구하여 폭탄을 제조하고 밤에는 악질친일분자들과 왜놈형사들을 처단하였다. 일제의 대륙침략의 기본보급선이던 경의선철도를 마비시키는 대담한 활동도 벌려 놈들을 혼비백산하게 하였다. 이들도 《장차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합류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때를 기다리며 대오를 늘이고 군사훈련을 벌렸다. 1942년말에 이르러 《태백산항일죽창대》 대오는 80명을 넘어섰다. 점차 죽창대의 무장도 생존을 위한 원시적인 무기인 죽창으로부터 투쟁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보총과 권총, 수류탄으로 현대화되여갔다. 지휘체계도 정예화되였다. 참모부가 생겨나고 그밑에 중대와 소대들이 생겨났다. 정치학습도 하루에 두시간정도 진행하였다. 방억세는 대원들의 지식정도에 따라 세개의 학습반을 짜가지고 문맹자들에게는 우선 우리 글과 산수를 가르치고 그밖의 대원들에게는 보다 높은 수준의 정치강의를 진행하였다. 우리 나라 력사와 지리도 가르치고 근대의 세계적판도에서의 정치조류들과 정치발전추이도 알려주었다. 방억세는 대오가 늘어나고 무장조직으로서의 기틀이 단단히 다져지자 백두산에 세차례에 걸쳐 련락원을 파견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를 받는 국내의 무장조직으로 싸우고싶은 열망은 방억세와 죽창대 모든 성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였다. 그러나 련락원들은 다들 조선인민혁명군의 소재를 찾지 못한채 만주광야를 헤매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은 조국해방의 혁명적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중국경내에서 일단 철수하여 원동기지에 가있었던것이다. 방억세는 백두산과의 련계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자 서울에 있는 반일지하조직들과 손을 잡았다. 이 시기 방억세가 동지적뉴대를 맺은 사람들속에는 뒤날 태룡산빨찌산 대장의 중임을 맡아나선 주경남도 있었다. 그의 영향을 받으며 《죽창대》의 반일적인 색채가 더욱 짙어졌으며 군사작전도 가열화되고 후방사업도 개선되였다. 성관호와 운명의 다난사가 얽히게 된것도 이무렵이였다. 1942년도의 여름에 있은 일이였다. 이날 방억세는 서울의 한 지하조직의 아지트에서 주경남을 만나 시급히 처단해야 할 왜놈형사들과 악질주구들의 자료를 넘겨받아가지고 돌아가고있었다. 방억세가 서울의 번화가에서 벗어나 북한산의 산자락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멀지 않은 으슥진 곳에서 《사람 살려요!》 하는 명주필찢는듯 한 녀자의 비명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방억세는 구원을 청하는 녀자의 그 애처로운 비명을 피해넘길수가 없었다. 그는 주먹을 부르쥐고 비명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렸다. 한 녀성이 왜놈군속이 틀림없는 누런 군복을 걸친 여러놈의 쪽발이들에게 에워싸여있었다. 방억세가 그놈들의 뒤에 달려갔을 때는 녀인이 희희덕거리는 쪽발이들에게 속옷까지 벗기우고있을 때였다. 그 녀자는 구석진 곳에 틀어박힌채 가슴만을 두손으로 싸안고 비명을 지르며 떨고있었다. 방억세는 벌어진 광경앞에서 치를 떨었다. 서울의 골목에서 드문하게 벌어지군 하는 섬오랑캐불량배들의 야만적인 패륜패덕에 접하자 그의 눈에서는 불이 일었다. 전후사연은 알바 없었으나 그를 구태여 캐묻거나 후과에 대하여 머리 굴려볼 겨를이 없었다. 방억세는 《이 더러운 쪽발이들아!》 하고 일본말로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무작정 뛰여들었다. 그는 녀인의 가슴에 손을 대려고 하는 놈팽이의 목덜미에 무쇠같은 주먹을 날렸다. 그놈은 불의에 뒤에서 가해진 주먹타격에 《허억-》 하고 짐승의 멱따는듯 한 괴성을 내지르며 뒤로 벌렁 자빠졌다. 방억세는 쓰러진 그놈이 움켜쥐고있던 녀인의 옷가지를 나꿔채서 그 녀자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나머지놈들이 《우와-》 하고 소리치며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방억세는 이놈들과 벌리는 싸움이 한개 집단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모험이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아직도 가슴을 두손으로 가리운채 그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떨고있는 연약한 녀인을 오랑캐무리속에 남겨놓고 달아뺄수도 없어 그놈들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일단 포악한 이리떼와 맞다든 이상 이겨야 했다. 이 더러운 족속들에게 패하여 명이 끊긴다면 너무도 허무하고 값없는 죽음이라는 생각이 방억세의 피를 설설 끓어오르게 하였다. 방억세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가지고 일본말로 준절하게 웨쳤다. 《물러가라. 싸움을 해야 피차에 병신꼴밖에 차례질게 없다. 뭣때문에 허물자리 남기고 더럽게 명을 끊겠는가. 암컷때문에 피투성이쌈을 벌리는건 문명치 못한 짐승들이나 하는짓이다. 이 녀인을 돌려보내라. 그리고 우리도 더이상 티각거리지 말고 물러가자.》 방억세는 알몸이나 다름없이 되고만 녀인를 막아서며 마디마디에 힘을 넣어 담차게 훈계하였다. 달려들던 왜놈들이 범같은 기상과 자신만만한 제의에 압도되여 주춤거리다가 비실비실 피해섰다. 그런데 그 찰나에 자빠져서 신음소리를 지르고있던 놈이 비칠거리며 일어나더니 《반편같은 시라소니들!》 하고 소리지르며 제 동료들을 방억세에게로 힘껏 밀쳤다. 패당들을 싸움에로 부추기는 수작이였다. 그놈이 아마도 패당의 두목쯤 되는 모양이였다. 그놈은 방억세를 향하여 기고만장해서 고함을 질렀다. 《요시, 조센징새끼. 우리는 공무집행중이다. <황군>의 공무집행을 방해하는자는 엄벌에 처한다!》 《공무집행? 녀자의 옷을 벗기고 짐승처럼 놀아대는것도 공무집행이야?!》 《뭘?… 우린 <황군>의 무공을 위로해줄 <위안부>모집중이란 말이다. 한데 계집이 너무 태가락 부려서 한번 혼뜨검을 주는거다. 그리고 우리도 한번 개평을 떼보자는거다. 이를테면 <위안부>훈련이다. 히히…》 그놈은 한바탕 시누런 이발을 드러내고 게접스럽게 웃고나서 《야, 이놈도 발가벗겨 차에 실어라.》 하며 길가에 세워놓은 풍친 차를 가리켰다. 그러자 달아빼려고 기회를 노리던 놈팽이들이 제딴에도 그 무슨 수치감을 느끼고 오기가 발동되였던지 그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위안부>?! 좋다!》 방억세는 전후사연을 인차 알아차렸다. 근래에 와서 일본군부는 조선북부국경지대와 태평양전선에서 만신창이 되여가는 사무라이들의 사기를 돋구어주기 위하여 성노리개모집책동을 더욱 악랄하고도 강도적으로 벌리고있었다. 이 더러운 인륜대범죄에 동원된 일본군속들은 실적을 높이라는 도꾜《대본영》의 독촉지령에 따라 때없이 차를 타고 도시와 마을을 싸다니면서 젊은 녀자라면 처녀이건 약혼녀이건 부녀자이건 닥치는대로 차에 실어 일본군《위안부》로 끌어갔다. 그따위 홀치기추행에 저 처녀가 걸려든것이다. 처녀를 강다짐으로 자동차에 태우려고 하다가 필사적인 반항에 부닥치게 되자 그 분풀이로 백주에 그를 희롱하고있는 모양이다. 《물러서지 못할가!》 방억세는 처녀사냥에 이골이 난 색골망종들이지만 그 무슨 직업적인 훈련은 받은게 아니고 검도깨나 익힌 떨거지들이라는 판단이 생기자 자신만만하게 웨쳤다. 《하, 이건 정말 미련한 송아지 백정을 모른다더니. 죽어볼테야?!》 《좋다, 네놈들 숨통이 끊어진다 해도 탓하지 말라. 조선사람이 다 죽은줄 아느냐! 이 주먹이 애호박같지 않다는걸 보여주마!》 방억세는 사납게 경종을 다시 울려놓고는 뒤에서 싸움을 걸지 못해 발광을 하고있는 놈팽이에게로 벼락같이 몸을 날려 그놈의 목줄을 팔에 감아 허공에 넌떡 들어올렸다. 그는 두다리를 버둥거리는 두목놈을 몇바퀴 돌림시키다가 돌로 포장한 길바닥에 둘러메쳤다. 그놈은 선지피를 뿌리며 뻐드럭거리다가 아예 그자리에 굳어졌다. 왜놈군속들은 제놈들의 두목이 피를 쏟고 너부러지는것을 보자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하다가 젊은 혈기와 수적인 우세를 믿고 그냥 달려들었다. 불량배들도 점차 솜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 맹물들은 아니였다. 그놈들은 방억세의 급소를 노리면서 사방에서 련속적인 타격을 들이댔다. 방억세는 이 판에서 일단 넘어지기만 하면 끝장이며 그러면 전우들앞에도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모한 혈투를 피하고 싶었으나 그 녀자가 그냥 얼이 빠져 굳어져있으니 달아날수도 없었다. 치렬한 격투로 상대방은 세놈이 쓰러지고 방억세도 더는 지탱할 기운이 없어졌다. 그런데 아직은 두놈이 그냥 살기가 등등하여 왝왝 고아대면서 주먹과 발을 날리고있었다. 이제는 끝장이로구나 하고 또다시 날아온 주먹에 명치를 맞아 비칠거리는데 다행스럽게도 골목으로 여럿의 다급한 발자욱소리가 가까와왔다. 《뭐야, 이놈들!》 골목을 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소리에 방억세와 맞붙은 두놈이 홱 돌아서더니 달아났다. 방억세는 어깨에 수실이 달린 누런 일본군복을 차려입은 사나이가 군도를 손에 거머쥐고 다가서자 그만 온몸을 지탱하고있던 기운이 땅속에 잦아드는것을 느끼며 그자리에 쓰러지고말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것은 그때로부터 여러 시간이 지난 뒤였다. 눈을 뜨니 여러명의 근심어린 눈들이 자기를 내려다보고있었다. 《됐구만!》 기쁨어린 목소리에 이어 녀인의 탄성이 뒤따랐다. 《제가 보여요?!》 방억세의 뿌옇던 망막이 점차 맑아지고 두리두리한 얼굴의 동년배 젊은이와 이마에 붕대를 감은 귀염성스럽게 생긴 처녀의 기쁨에 넘친 얼굴이 첫눈에 비껴들었다. 방억세는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하얀 창호지를 정하게 바른 미닫이문만 보아도 기름기도는 집안이라는것이 대번에 헨둥하게 느껴졌다. 머리맡에 돌아간 병풍을 보니 자기가 지금 돈량이 푼푼히 돌아가는 부자집에 누워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어제 저녁에 일본장교옷을 입은 사나이가 피끗 자기앞에 나타나던 생각이 곁묻어나왔다. (그러면… 이 집은 왜놈고관네 집인가?…) 속으로 쓰디쓴 열물같은것이 올라왔다. (일본족속의 녀인을 내가 구제하였구나!) 그러나 방억세는 그 생각을 이내 털어버렸다. 상대가 누구인들 어떻다는건가… 원쑤가 아닌 이상 불행에 빠진 약한자를 도와주는건 어쨌든 의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음… 내가 지금…》 방억세는 허리를 일으켜세우려고 하다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베개에 뒤통수를 붙였다. 아직도 온몸이 저릿저릿하였다. 《누워계세요. 여기는 저희 집이랍니다. 아무 걱정도 마세요. 이분은 저희 오빠이구요.》 녀인의 삽삽한 목소리가 서울특유의 요요한 어조에 실려 꿈결처럼 정신을 혼미하게 파고들었다. 방억세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마음이 놓이여 다시 잠에 취해들었다. 방억세는 그때로부터 옹근 하루가 지나서야 일어날수가 있었다. 집은 어림잡아 몇십칸짜리 대가였다. 그들은 대나무와 전나무가 꽉 들어차고 련못이 있는 후원에 둥실하게 솟아있는 정각에서 첫인사를 나누었다. 처녀가 처음으로 방억세앞에 나서서 앉은절을 곱게 하였다. 처녀는 은근한 미소를 물고 살풋이 고개를 숙인채 감사의 정에 끓어넘쳐 자기를 소개하였다. 《저는 성란희라고 합니다. 리화녀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잠시 쉬고있습니다.… 그날 저녁에… 참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그 말씨가 요요하면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종다리의 봄노래처럼 맑고 랑랑하여 둥근달처럼 밝고 시원한 둥글납작한 얼굴에 어울려 여간 우아한 멋을 풍기지 않아 방억세의 마음을 일시에 혼미하게 만들었다. 성란희는 자기가 당한 봉변이 상기되는듯 부끄러움에 수삽해져 말끝을 맺지 못하고 푹 고개를 떨구었다. 그통에 드러난 백설같던 목덜미가 발그대대하게 물들어올랐다. 사르르 날리는 웃음꽃이 살갗에 슴배여드는듯싶다. 처녀의 그 숫저운 인사에 방억세도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받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러지 마시오. 어서 일어나십시오. 저는 그날에 그 부랑배놈들을 봤던 생각만 납니다. 난 정말 아가씨의 목소리만 들었지 아가씨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방억세가 이렇게 처녀의 부끄러운 속을 위안하느라고 객적은 인사말을 어줍게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양복입은 사나이가 호탕하게 웃었다. 《야 란희야, 이젠 일어나거라. 아무리 은혜입은 몸이라도 제 홀로 복판에 녹아붙어있으니 그 어디 인사법도가 됐느냐. 다른 사람들에게도 례를 차릴 기회를 줘야 할게 아니야.》 사나이의 롱조어린 헌헌한 소리에 성란희는 몸처신이 난감하기 그지없는 자리에서 구원되고 좌중에 서렸던 어색한 분위기도 바뀌여졌다. 성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억세와 마주보이는 자리에 가서 고개를 약간 떨구고 앉았다. 그다음에는 사나이가 대나무걸상에서 허우대큰 몸을 일쿼세워가지고 방억세의 앞으로 와서 자못 정중하게 허리를 깊이 꺾었다. 《저는 란희의 오빠 성관호라고 합니다. 남방전선에서 일군대대를 지휘하다가 부상을 입고 치료차로 집에 온지 두달이 되여옵니다. 그 왜나라 부랑배들에게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어 통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성관호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수집음을 또 보여주고싶지 않아서 동생을 구원했다는 소리는 피하고 상대방의 무훈을 강조하고 격찬해마지 않았다. 성관호의 속내는 인차 방억세에게로 전달되였다. 방억세는 씩 웃는것으로 화답하고는 몸집이 우람지고 목소리도 그에 어울리게 북소리처럼 웅건하고 볕에 그을어 검붉으면서도 이목구비가 뭐든지 큼직큼직하게 생긴 상대를 스스럼없이 마주보았다. 몸매가 대나무처럼 매츨하고 눈과 입술이며 코마루까지 예쁘게 그려지고 애교가 감도는 사근사근한 녀동생과는 대조되게 체통이 큼직하고 강직한 기개와 굽힘이 없는 사나이의 힘이 첫눈에 느껴지는 대장부의 모습이다. 하지만 짤막한 인사말에는 일본군대대를 손아귀에서 주무르는 일선지휘관의 위엄과 우월감이 선듯거려 방억세의 의기를 저으기 상하게 하였다. 헝, 왜놈들에게 붙어사는 놈이군.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것을 밝히면 이놈의 건방진 코대가 어떻게 될가. 그래도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어 통쾌하다구… 네 누이가 바로 네놈들의 성노리개로 끌려갈판인데. 그러니 나도 조선사람이다, 이거로군… 방억세가 이렇게 속구구를 하며 자리에 앉자 성관호도 제자리에 돌아가 앉고 그자리에 세번째 인물이 나섰다. 《나는 성란희씨의 동료인 한정상입니다.… 도꾜제국대학 법과 졸업반인데 <학도병>으로 징집되여 요즈음 조선에 건너왔댔습니다. 그저께 일은 저의 불찰로 생겨난것입니다. 제가 그쪽으로 란희씨를 데리고가다가 그만 <위안부>모집을 다니는 그 불량배들에게 걸려들었지요. 내가 성란희씨는 이미 연예대로 가게 된다고 사정했는데 그 무지막지한것들이…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의 친구인 란희씨 이름으로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까지 성란희의 뒤에서 죄인꼴로 엉거주춤거리고있던 사나이는 례의바르게 자기를 소개하고 자신을 속죄하며 처녀의 보호자인양 심심히 사의를 표시하였다. 짤막한 인사말에 묻힌 의미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표현하는 그 능란한 달변이 놀랍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러루한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그 어조부터 방억세에게는 불쾌하였다. 억양에 고조가 없고 극히 메마르고 실무적인데다가 곤청색의 값진 양복에 넥타이를 바싹 죄여맨 사나이의 산뜻하고도 례의바른듯 하여보이는 용모는 그와 반대로 너무나 대조되여 안팎이 따로 있는 2중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직감이 들었던것이다. 호리호리한 몸에 희맑은 볼에 엷은 눈까풀이 무척 해사해보이였다. 눈살에는 십상 녀인들의 비위나 간지럽혀줄 웃음이 살살 발리운게 가느스름하게 치째진 뱁새눈조차 어쩐지 기분을 잡쳐놓는다. 그때 예상치 않은 싸움을 벌려놓게 한것이 바로 저 작자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속이 울컥해졌다. 방억세는 가슴이 후련하게 그에게 욕지거리라도 들씌워주고싶은 얄궂은 심사를 금할수 없었다. 분명 둘이 가까운 사이인것 같은데 비바람에 쉽게 흐무러져내릴 련꽃같은 녀인을 호랑이밥으로 던져놓고 저만 살겠다고 줄행랑을 놓다니. 하마트면 아예 왜병들 노리개로 끌려갈번 하지 않았는가. 그러고도 사내야? 사내라면 호랑이밥이 될지라도 맞서야 될게 아닌가. 그 주제에 이자리에 나서다니, 도대체 사내의 체면이나 자존심은 어디 구겨박고 사는 놈팽이야. 방억세는 욱-해오르는 분기를 가까스로 누르고 고개만 건성 끄덕여 인사치레를 하였다. 성란희가 일어나 돌아가면서 꿀물을 한사발씩 권하고는 짤막하게 벌어진 일을 설명하였다. 한정상은 인차 《학도병》으로 나가게 된다. 지난해 여름철의 어느날 애들 장난같은 일로 그와 사귀였던 성란희는 이날 한정상의 끈덕진 청에 못이겨 집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산보를 하다가 왜놈군속들과 마주치게 되였다. 한정상은 우르르 달려드는 놈들을 보자 넋을 잃고 달아나고 성란희만 솔개의 발톱에 덮치운 병아리가 되여 반항하다가 으슥진 골목에 끌려가서 행패를 당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성란희를 남겨두고 허둥지둥 달려온 한정상의 말을 들은 성관호가 급기야 번쩍거리는 《제국》장교의 제복을 차려입고 권총에 군도까지 차고 현장에 달려왔다. 이제는 방억세의 차례다. 이들에게 어떻게 자기소개를 해야 될가?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인사소개를 기다리고있는 세사람은 다 부자집 자식들이다. 그리고 일본놈들에게 붙어사는 족속들이다. 이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밝히는것이 께름직하기도 하고 달갑지도 않았다. 구태여 이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밝힐 리유도 없다. 그렇다고 일본놈들의 턱밑에 기생하여 사는 노복주제의 구차스러운 인생들앞에서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싶지도 않았다. 당당하게 자기를 선포하는것, 자기는 친일이 아니라 항일전장터에 나선 항일용사라는것을 선포하는것으로서 이들의 친일적인 신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싶은 오기가 속안에서 꿈틀거렸다. 이놈들이 그런 소개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가. 아마도 벼락맞은 놈들처럼 기절초풍해질것이다. 그렇다고 자기를 감히 해치지는 못할것이다. 덤벼들테면 덤벼들어보라. 호부자자식 서넛은 헛기운 뽑을것도 없다. 방억세는 조소와 경멸의 빛이 다분히 비쳐든 도고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채 떡심좋게 야유조로 자기를 소개하였다. 《나는 방억세라는 산골사람이올시다.》 방억세는 그 말을 하고는 벙긋 웃었다. 여유작작한 그 웃음이 좌중을 묘하게 자극하였다. 성관호는 분명 큰뜻과 억센 체취가 물씬 풍겨오는 사람에게서 그 정도의 린색한 소개말을 듣는것이 불만스러워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무엇인가 속주머니를 더 헤쳐놓으라는 뜻이였다. 그런가 하면 방억세라는 인물을 신비하게 바라보고있던 한정상은 다행스러운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리저었다. 성란희는 다소 실망이 어리면서도 무엇인가 기대를 가지고 더 기다려보자는듯 한 얼굴이다. 방억세는 상대의 얼굴속에 떠오른 여러 빛갈의 감정을 읽으면서 그들의 뒤잔등에 회초리를 내리는 심정으로 시원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 직업은 그대로 밝힌다면… 에, 난 항일죽창대에서 일을 보는 사람이올시다.》 그는 나는 당신들과 같은 친일분자들도 포함한 일본제국주의세력을 박멸할 때까지 싸우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는 말이 혀끝에서 뱅글뱅글 맴도는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항일죽창대?!》 세사람의 입에서 마치나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터져나온 소리였다. 방억세는 후련하게 자기를 소개하는 말을 뱉아놓고는 그 말이 던진 야릇한 파문을 음미해보듯 세사람의 표정을 느슨한 웃음을 머금고 둘러보았다. 이번에도 세사람의 반응은 각각이였다. 성관호는 그럴상싶었다는듯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왕방울같이 번쩍거리던 눈망울에서 광채가 스러지고 의미심장한 빛으로 상대를 탐미하듯 예리하게 지켜보고있었다. 그 뿌리가 헤아릴수 없이 굵고 깊은 거목과 마주선듯 신선하고도 두려운 감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인가 기다리는듯 한 빛이 어려있다. 짧은 몇마디로는 성차지 않는다는 불만스러운 빛이다. 성란희는 충격적인듯 가슴에 두손바닥을 붙이고 마치도 달나라에서 온 신비의 인물을 만난듯 자못 공경스러우면서도 경탄과 호기심이 어린 올롱해진 눈으로 상대를 조심스레 쳐다본다. 서울항간에서도 《항일죽창대》라는 말이 간간이 돌아가고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해지면서 너무 윤색되여 전설같은 이야기로, 그 옛날 홍길동의 《활빈당》이나 림꺽정의 의형제들과 같은 존재로 전해져 듣는 사람들의 실감을 자아내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설속의 한 인물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였을뿐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구원되였고 바로 자기 눈으로 그 인물의 용맹과 도술과 의기를 확인하였으니 대뜸 반해버린것이다. 그리하여 사나이를 쳐다보는 처녀의 아름다운 눈은 더욱 황홀한 기쁨으로 반짝이기 시작하고 가슴속은 열일곱살 되는 이제까지 고즈넉이 잠들어있던 이성에 대한 짜릿한 매혹과 동경으로 충만되여 처녀의 전체 모습을 더욱 활력과 생기에 넘치게 하는것이였다. 이자리에서 두사람과는 대조되게 크게 놀라고 당황해하는것은 한정상이였다. 그 얄팍한 입술이 대경실색해서 쩍 벌어진채 아예 굳어지고 종이장처럼 엷어보이던 해사한 눈까풀이 우로 말리운채 그 역시 굳어져버린것이다. 그렇게 보니 한정상의 눈도 과히 돌피에 베진듯싶던 실눈은 아닌것 같다. 한정상은 지금 방억세보다 성관호의 눈치에 신경이 쏠려있다. 성관호가 자기 신분에 맞는 처신을 할것 같으면 당장 방에 들어가 권총을 들고와서 저 무엄하기 그지없는 오만한 작자의 가슴팍에 들이대야 한다. 그는 적어도 《천황》만세를 부르며 사꾸라처럼 스러질 각오가 되여있던 일선 일본군장교다. 그러고보면 이 《산골량반》이 경솔하기 그지없고 그게 필시 배짱이라면 무지하기가 이를데 없다. 이거야말로 타죽을줄 모르고 기를 쓰고 날아드는 부나비 한가지 아닌가. 한정상은 이제 이자리에서 벌어지게 될 무자비한 피의 란포한 결투를 그려보며 크게 벌어진채 굳어졌던 두눈을 스르륵 감아버렸다. (그까짓 될대로 되라. 어느 놈이 부서지건 이 한정상이 밑질거란 한푼도 없다. 어서 붙어봐라. 대갈통이 박살이 나건 팔다리가 부러지건 난 박수를 쳐줄테다.) 한정상이 속으로 늘어지게 중얼거리는데 그에 대답하듯 방억세의 너털웃음이 터졌다. 방억세는 좌중의 놀라움과 당혹감을 일소하려는듯 거리낌없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용기를 얻은듯 성관호가 진중하게 물었다. 《미안합니다. 방억세씨, 좀더 자세히 설명하여주실수 없을가요?… 혹 비밀이라면…》 방억세는 다소 소심한감이 느껴지는 성관호의 기대어린 부탁을 접하자 괜한 로파심이라는듯 벙긋 웃어보이고는 흔연하게 응수하였다. 《예, 뭐 크게 비밀이랄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미 공개되였고 우리의 투쟁도 공개적입니다. 우리 항일죽창대의 강령이라 할가. 강령이라 부르기는 너무 어마어마한감이 듭니다만 아량을 가지고 들어주기 바랍니다.》 방억세가 량해부터 구하자 성관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 죽창대는 말그대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죽창을 들고 무어진 집단입니다. 물론 지금은 죽창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창립초기의 항일의 기개가 어린 이름에 애착이 가서 그대로 부르고있습니다. 당면하게는 힘을 키우고있습니다. 무장을 현대화하고 종국적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해방진공작전을 벌릴 때 그에 호응하여 중부산악지방을 타고앉을 결심입니다.》 방억세가 길고 복잡하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를 이렇게 툭툭 건너뛰며 골자를 퉁겨놓자 성관호는 그 일목료연한 방략과 상대의 자신만만한 담력에 크게 감심이 된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가 다우쳐물었다. 《당신들은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전역에서 승전을 거듭하고있는 오늘의 전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성관호가 마치도 상대의 담기를 떠보듯 이렇게 슬그머니 입침을 쿡 찔러들자 방억세는 입가에 쓰거운 조소를 담고 잠시 상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의 대답에 호기심을 보이고있는 한정상의 가느다란 눈에서 깨고소해하는 빛을 가려내자 허리를 쭉 펴며 일격을 가하듯 큰소리로 대답을 주었다. 《하루살이는 죽기 전에 번성합니다. 력사를 돌이켜보십시오. 세계를 알렉산드리아도시로 뒤덮으려고 꿈꾸었던 마께도니아의 황제 알렉산드로스는 그 꿈에 깔려 망해버렸습니다. 칭기스한은 유럽까지 말을 타고갔다가 끝장이 났지요. 나뽈레옹은 어떻게 망했습니까. 지금 히틀러는 쏘도전선에서 밀려나고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류력사는 번영과 쇠퇴의 끝없는 반복이였습니다. 일본도 <번영>의 시대는 지나갔고 그 종말이 다가오고있습니다. 이건 더 설명을 할것이 없는 력사발전의 필연입니다.》 방억세는 대원들앞에서 자주 하여오는 이야기라 어렵지 않게 청산류수처럼 내리엮었다. 일본제국의 패망의 불가피성을 론한다면 한나절도 풀어나갈수 있다. 방억세가 입을 다물자 성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길게 숨을 내그었다. 《당신은 아마도 바른소리를 하는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일본은 이제 망할것입니다. 이건 피할수 없습니다. 력사의 필연이라는 당신의 견해가 맞을듯싶습니다.》 《그렇다면?…》 성관호가 말끝에 또 한번 긴 한숨을 이어놓자 방억세가 그 말꼬리를 물어채듯 날카로운 어조로 되받아넘겼다. 말에도 낯빛에도 상대의 어기를 찔러드는 다기차고도 엄한 타매의 빛이 선듯거렸다. 《하, 거기에… 슬픔이 있는것입니다. 그래 죽창대의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아니, 그건 비밀이겠지요?》 성관호는 그 세찬 빛에 휩싸이자 고뇌에 젖어든 소리로 변명하듯 가까스로 대답을 하고는 이내 묶이운 사슬에서 빠져나가듯 제가 꺼내놓은 화제에서 벗어났다. 《성관호씨, 그것도 비밀이랄게 없습니다. 지금은 80에 가까운 정도의 소수입니다. 그러나 날을 따라 그 대오는 늘어나고있습니다. 왜놈들이 벌리고있는 <징병>이나 <징용>, 일본군<위안부>를 기피한 수많은 청년들이 입대를 청원하여 오고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있습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서울과 남도의 청년들에게 항일성전에 동참할것을 호소하려고 합니다. 아직은 자체의 준비가 취약하여 자제하고있습니다. 우리는 믿고있습니다. 료원을 휩쓰는 불길은 한점의 불꽃에서 시작됩니다.》 《산속생활이 쉽지 않겠지요?》 성관호가 다시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을 때 방억세는 경멸에 가까운 미소를 머금고 마치도 학생의 질문을 받은 선생다운 배포와 아량을 가지고 이미 준비하여온듯 한 답변을 즉시에 던져주었다. 《힘들지요. 식량문제부터 쉽지 않습니다. 무장준비도 쉽지 않구요. 정치리론가가 부족하고 교관이 적어 훈련과 정신무장에 애를 먹고있지요. 하지만 점점 기틀이 잡혀갑니다.》 《그러니 죽창대에 녀자들도 있겠군요?》 주의주장에 힘과 기대와 담력이 번쩍이고 자기 신념에 대한 락관과 미래에 대한 확신에 넘친 사나이의 억센 기상에 완전히 매혹되여버린 성란희가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물론이지요, 녀동무들도 있습니다. 자그만치 한개 소대가 되지요.》 방억세의 입에서 흔쾌한 대답이 튕겨나오자 그 녀자는 환성을 올렸다. 《그래요?!…》 그 녀자의 맑은 눈이 방억세를 향하여 환희에 넘쳐 빛났다. 그 녀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뭇 즐겁게 웨쳤다. 《선생님, 저도 따라갈래요!》 《예?…》 처녀는 서슴없이 자기 말을 확인하였다. 《그래요. 난 죽창대대원이 되겠어요. 절 대장님께 안내해줘요.》 성란희는 분명한 어조로 부탁하였다. 아니, 그것은 당당한 선언이였다. 그는 자기가 뱉은 말은 끝까지 자기가 책임진다는듯 지금껏 연연한 얼굴에 수집은 미소를 짓고있던게 언제였더냐싶게 차돌같이 단단하고 차거운 얼굴로 방억세를 대담하게 마주보고있었다. 《하, 아가씨가 그 산중에?! 하, 참…》 방억세는 그 녀자의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그 담차고도 영악한 눈총을 피하며 김빠진 웃음을 짧게 터쳤다. 성관호도 큰 몸을 들썩거리며 쾌차스럽게 웃어댔다. 《하하하, 죽창대에 오르는 길이 너희 리화시절의 등산놀이인줄 알아?… 란희가 죽창대대원이라. 그 모양이 그럴듯하겠는걸. 죽창을 메고 앞으로!… 하하하… 웃기지 말아.》 그는 동생의 말이 당돌하면서도 어줍잖아 이렇게 놀려주듯 시까슬렀다. 《왜요?》 성란희는 오빠의 웃음에 도전하듯 눈을 올롱히 해가지고 다시금 고집스럽게 되뇌이였다. 《두고보라요!》 그것은 자기의 결심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버리려는 방억세에게 던지는 대답이기도 하였다. 《헝, 란희씨가 산에 오르다니… 제정신 가지고 하는 소리요?!》 한정상의 뱁새눈도 단박에 휘딱해졌다. 사실 좌중에서 제일 커다란 충격을 받아안은것은 한정상이였다. 한정상은 처녀의 되알진 선언에 기겁해있었다. 실눈이 또다시 뗑그렁해질만도 하였다. 성란희의 말은 롱담이 아니다. 그는 좌중에서 누구보다도 성란희의 맑은 살결과 수집음을 잘 타는듯 한 교태에 가리워져있는 옹골차고도 고집스러움을 잘 알고있다. 언젠가 한정상은 그 실눈으로 성씨가문의 오누이의 성격적대조를 살구와 호두에 비유하여 신통하게 밝혀놓은적이 있었다. 성관호가 까부시기 힘들 정도로 굳고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만문한 속살이 있는 호두알이라면 성란희는 연하고 부드럽고 빛갈고운 겉살을 두르고있는 살구씨라는것이다. 그때 성란희는 한정상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손벽을 쳤고 성관호도 피씩 웃었다. 그런데 지금 좀체로 손으로도 이발로도 깨버릴수 없는 살구속씨가 불쑥 튀여오른것이다. 한정상은 제때에 강한 자극으로 처녀의 속씨를 깨버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성관호나 이 귀치 않은 《산골손님》의 우려에 더 짙은 색조를 먹이는것으로 처녀의 속을 껑충 놀라게 하고싶었다. 《성형의 말이 맞지요. 등산놀이가 아니지요. 내가 듣건대 산사람들은 뱀도 잡아먹고 산다는데 죽창대는 어떠한지요?》 《예?… 뱀을 잡아먹어요?!》 처녀가 깜짝 놀라 비명처럼 내지른다. 한정상이 정확히 과녁을 맞힌셈이다. 처녀의 낯빛이 한여름 버들잎처럼 새파래졌다. 처녀는 겁질린 눈으로 방억세를 쳐다보았다. 방억세는 자기의 이마에 와 박히는 처녀의 불안한 눈길과 닦은 깨라도 씹은듯 고소한 표정을 짓고있는 한정상의 눈빛을 감각으로 느끼며 성관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항간에서 의롭고도 신비롭게 전해지고있는 죽창대의 영상에 어지러운 허물을 만들어내고싶어 하는 한정상의 얄망궂은 심보를 대뜸 간파했으나 배심있게 껄껄 웃어넘기였다. 처녀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싫었다. 오히려 산중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진실한 표상을 주어 어쩌면 천진란만한 공상에 붕- 떠있는듯싶은 처녀에게 되게 혼겁을 주고싶은 아기뚱한 심술까지 생겨났다. 《한정상씨가 어디서 신통한 말을 들었군요. 옳습니다. 식량보탬도 되지만 보다는 만약의 경우를 가상하여 훈련과제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산속에서 살아가는 법, 단독임무수행시에 주림을 이겨내기 위한 생존법을 미리미리 익히는것이 필요합니다. 나도 죽창대로 가는 길이 등산놀이길이 아니라는 성형의 말에 공감입니다. 누구도 아닌 성란희씨 같은… 용서하십시오. 이것은 거 뭐 다른 의미에서, 이를테면 죽창대원의 질적인 지표를 두고 하는 말로 들어주시오… 성란희씨 같은 녀성은 나설데가 아닙니다.》 《왜요?!》 성란희가 방억세마저 두사람의 주장을 긍정해나서자 모욕을 느낀듯 발끈해져서 반발조로 튀여올랐다. 《대답해봐요. 그러면 죽창대대원의 질적지표라는것은 무엇이나요? 전 명백히 저의 부탁을 사절하는 리유를 알고싶습니다.》 성란희는 대담하게 방억세의 얼굴을 쏘아보며 깔끔하게 따져물었다. 방억세는 처녀가 겉보기와는 달리 꽤나 대차고 발그라진데가 있어보여 다소 불쾌해서 대답을 피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말 손톱에 봉선화물을 들이고 서양향수내까지 풍기는 분꽃같이 곱게 생긴 대가집 규수가 죽창대의 거친 문턱을 넘어서면 얼마나 견딜가? 산해진미에 습관되고 비단필에 휘감겨 손끝으로 물을 튕기며 살아왔을 저 처녀가 참으로 풀뿌리를 씹으며 구렁이도 고아먹으며 하늘의 별들이 쳐다보이는 귀틀집에서 하루인들 견뎌낼수 있을가? 죽창대라는 말이 옛말속의 활극처럼 전해져서 저도 한번 그 랑만적인 전설의 녀걸이 되고픈 모양이다. 어랍쇼! 우리의 생활은 전설이 아니다. 우리의 녀동무들은 녀걸이 되고파 뛰여든 사람은 하나도 없다. 피할수 없는 운명이 그 길에로 몰아간것이다. 강도 일제에게 짓밟히고 쫓겨온 삶이 더는 물러설수 없는 막바지벼랑턱에 밀리여 죽창을 잡게 한것이다. 그곳에는 랑만적인 노래나 시가 아니라 고행이 앞서고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고난과 전민항쟁을 준비하기 위한 피어린 투쟁이 간단없이 벌어지고있다. 방억세의 눈에는 불현듯 자기 동생인 동요의 볕에 그을은 감실감실한 얼굴이 떠올랐다. 동요도 범가죽이요, 곰의 열이요, 산삼뿌리요 하는 등속의 돈가치가 높은 산중의 보화를 다루어온 아버지의 덕으로 보통학교까지 마치였다. 큰 고생없이 자랐는데 조금 고된것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태백산에 은거하여 살 때부터 방억세의 옆에 나란히 세워놓고 주먹과 발을 휘두르고 창을 쓰는 법을 가르쳐준것이였다. 주먹이 약하면 그 주먹으로 눈물을 씻어야 한다는것이 아버지의 소박하면서도 웅심이 깊은 인생철리였다. 방억세는 뒤날에 사회에 눈이 트고 투쟁리론과 전술을 터득할 때 아버지의 이 소박한 가훈이야말로 나라가 자기 체통을 지켜가고 사람이 자기 인생을 엮어가는데서 심오한 진리라는 생각을 늘 하군 하였다. 아버지는 녀동생이 힘이 든다고, 하지 않겠다고 앙앙 소리내여 찔찔 눈물을 짤 때에는 사정을 두지 않고 때려몰았다. 《계집이라 안방살이로 끝내는 때가 아니다. 오랑캐가 이 나라 지경에 틀고앉았는데 세상사는데 어찌 남녀귀천이 따로 있다더냐. 호신부가 따로 있는줄 아느냐. 제주먹이 호신부인줄 알아라.》 아버지는 어머니가 팔에 매달려 만류함에도 아랑곳없이 동요를 열두살까지 무예를 닦게 하고 그다음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케케묵은 봉건을 깨고 남복을 입혀 야학에 보내고 보통학교까지 마치게 하였다. 아버지의 이렇듯 뜻높고도 굳센 의지에 떠받들렸기에 동요는 기꺼이 죽창대에 뛰여들었고 인차 그 생활에 적응될수 있었다. 무슨 일에서나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다기차고 고집스러운 동요는 나무에 기여오르는 재주를 익히려고 스무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떨어지면 다시 오르고 기여오르다가는 떨어지고… 이제는 그 어떤 나무도 다람쥐같이 날렵하게 올라 나무꼭대기에서 망을 보기도 한다. 자기뿐이랴. 자기의 녀성소대를 그렇게 이악하게 키워내고있다. 하지만… 이 나긋나긋한 량반집 따님이 그렇게 될수 있을가. 《거기도 녀자들이 있다지 않았나요?》 성란희는 뱀소리에 깜짝 놀란 자신을 쓰겁게 비웃으며 기어코 방억세에게서 대답을 받아내고야말겠다는듯 깔끔하게 따지고들었다. 《있지요.… 거기 녀자들은…》 다시금 방억세의 눈에는 동요와 그의 녀대원들이 떠올랐다. 살차게 다가드는 이 녀인을 그들속에 세워보았다. 동요가 이 녀자를 다루어낼가? 아니 동요가 대궐집 규수를 자기 휘하에 받자고 할가. 까치무리에 껴든 두루미. 방억세는 뜻하지 않게 떠오른 생각이 신통해서 제 홀로 씨익- 웃었다. 두루미는 열번 고쳐만들어놔도 까치흉내는 내겠는지는 몰라도 까치소리는 낼수 없다. 괜히 두루미를 달고갔다가 까치동네에 두루미가 안팎으로 류행이 되면 랑패다. 《왜 웃으세요? 거기 녀자들은 어떻다는거예요?》 성란희가 상대의 웃음과 침묵에 더욱 안달아서 그냥 깔끔하게 몰아댔다. 《예… 거기 녀동무들은 까치들입니다!》 방억세의 입에서는 그도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왕청같은 대답이 불쑥 튀여나갔다. 그러자 정각이 흔들릴만치 폭소가 터졌다. 성란희만은 웃지 않았다. 그 녀자는 방억세를 이상스러운 눈길로 빤드름히 쳐다보며 얼른 말꼬리를 붙잡았다. 《그럼 저는요?》 《거기는… 두루미지요.》 또다시 방억세의 거침없는 대답에 폭소가 터졌다. 성란희는 한번 살짝 웃었을뿐이였다. 여전히 그 고운 눈에 차디찬 랭기를 돋쳐가지고 방억세의 서글서글한 낯을 곧바로 쏘아보는것이였다. 생전처음으로 아녀자에게서 이렇듯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보는 방억세는 제가 먼저 주접이 들어 눈길을 슬그머니 접고말았다. 그러나 나리꽃같이 연연하던 그 녀자의 두볼은 발갛게 상기되고 입술은 도툼하게 내불린채 불만스럽게 꼭 다물려있었다. 처녀는 그만에야 모욕을 느낀듯 성이 나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흥, 당신도 70칸 기와집에 들어서니 속이 한줌만 해지는가 보죠. 장수로 보았더니 같고같은 잠뱅이들이군요. 사내들은 염통이 망짝만 하다고 으시대지만 헤쳐보면 콩알만 하다고 하더니…》 처녀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서더니 세 사나이들에게 경멸과 조소가 어린 눈총을 쏘며 되알지게 선언하였다. 《두고봐요! 난 한다면 해요! 간다면 가고!》 하며 처녀는 굽높은 구두로 반들거리는 대리석바닥을 콩콩 찧으며 정각을 내렸다. 그러자 정각의 처마끝에 매달린 풍경이 처녀의 뒤틀려진 치마바람을 쐬인듯 은은하게 울리였다. 《하하 방억세씨, 노여워마시오. 우리 동생이 사실인즉 두루미가 아니라 솔개미쯤 된다우. 그러니 우리 란희 얼굴 헛짚고 만만히 접어들다간 코를 상한답니다. 봉건이라면 서울장안에서 완고하기로 손꼽혀온 이 대궐에서 어떻게 저런 부르죠아괄랭이가 삐져나왔는지. 오빠라는건 왜놈편에서 군도를 잡고있는데 저건 그 반대서렬에서 섬오랑캐는 물러가라고 시위대의 제일 앞장에 곧잘 나선다오. 하하…》 하며 성관호는 웃집이 좋은 몸을 들썩거리며 너털웃음을 쳤다. 방억세도 큰소리로 마주 웃었다. 그러나 한정상만은 의연히 불편한 심기를 풀지 못한채 안절부절하였다. 《그러나저러나 란희씨가 탈났군. 정말 방형을 따라설라는게 아니요? 아무리 처지가 각박해지기로서 거기가 어디라구. 정말 죽창대에 들어가려나… 참, 죽창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만은 비밀입니다. 아직은…》 방억세는 미소를 지은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 그렇겠지요. 이거 죄송합니다. 사실인즉 야단이군. 성형, 거 어디 웃어넘길 일이요? 동생에게 뱀잡아먹는 법을 꼭 익히도록 해야겠소?》 한정상이 이렇게 사뭇 념려스럽고 랑패스러운듯 이 소리 저 소리 떠오르는대로 마구 내질렀다. 한정상은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던지 서둘러 성란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중턱에서 돌아보며 소리쳤다. 《방형, 부탁이요. 란희씨를 더 든장질하지 마시오. 물감을 들이면 물감따라 색갈이 달라지는 시절이 아니요. 물은 트는대로 흐른다는 속담도 있지 않소.》 《하하… 걱정마우. 물곬을 째볼새도 없소. 난 이제 곧장 떠나겠소.》 《하, 그렇소. 잘 가시오. 그저께 일은 정말 고마왔소.》 한정상이 기분이 홱 달라져가지고 말떨어지기 바쁘게 작별을 고하는데 사실인즉 어서 씨원히 자리를 뜨라는 독촉이다. 한정상이 정각에서 사라지자 성관호가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뒤말을 달았다. 《저 사람들도 참 딱하게 되였습니다. 저 사람은 이제 곧 <학도병>으로 나가게 되고 우리 동생은 <총독부>의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연예대>를 무어가지고 지나전선으로 떠나라는겁니다. 지금 우리 모친이 나서서 그걸 철회시키느라고 뛰여다니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리화녀자전문학교에서 반일시위에 자주 나가군 했는데 얼마전에 란희가 참가했던 학교안의 반일조직까지 들짱이 나서 그 핵심들을 모조리 일본군<위안부>요, <연예대>요 하면서 끌어가는 판입니다. <위안부>라는게 뭐요? 그건 왜군 성노리개가 아니요. 원체 우리 집안이 정승가문으로 서울장안에서 창씨개명도 제일 늦게야 하고 헌금이요, 군량미요 하는걸 쥐눈꼽만치 해서 일본것들한테 덧나있는탓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아마 우리 란희가 더구나 방형 따라설 생각을 한것 같소. 그건 그렇구… 이제 곧 떠나셔야 하겠소? 래일 새벽에 떠나면 안되겠소?》 《래일 새벽?… 왜 그러시오?》 방억세는 슬그머니 죄여드는 속을 누르며 물었다. 《별거 아니구. 우리 모친이 당신에게 꼭 사례해야 한다며 은행에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청도 있는데 좀더 굴려보구 모친과도 상론하고 래일 아침에 당신에게 말씀드리고싶습니다. 당신 대답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성관호의 말투나 눈빛에 가볍게 뿌리칠수 없는 간곡한것이 얼씬거리는듯싶어 방억세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성관호의 개인적인 청이라는것은 무엇일가? 이자리에서 꺼내놓으면 될노릇인데 왜 부디 래일 아침으로 미루는것일가. 그러나 방억세는 성관호의 지꿎은 눈길에 쫓겨 더 생각을 굴려보지 못하고 결심을 바꾸었다. 《그래요? 좋습니다. 래일 새벽에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그저께 일에 대한 사례라면 난 받지 않겠습니다. 저에게 사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조선사람입니다. 제 나라 동포가 이방인들에게 성노리개로 욕보이는건 결코 남의 수치가 아니지요. 당신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달리 행동할수가 있겠습니까.》 방억세는 자기의 행동을 돈으로 갚음하려는 처사가 은근히 불쾌해서 다소 랭담하게 자기 의사를 밝히였다. 그리고 일본군복을 두르고있는 성관호에게 그리고 일본군에 복무하게 된 그들에게 은근히 경종을 울려놓는것도 잊지 않았다. 성관호는 상대방의 사리분명하면서도 질책이 담겨져있는 말을 례사롭지 않게 씹어보며 얼굴을 붉히였다. 그는 상대의 준수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안팎이 바위처럼 든든한 사나이와 더 깊이 사귀고싶은 욕망과 뜨거운 뉴대의 감정이 가슴속에 차들었다. 무엇인가 자기의 진정을 터놓고싶어 진 성관호는 다시 격해오른 소리로 말하였다. 《우리 모친께 방억세씨의 말을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번날 그런 자리에서 누구나 방형처럼 나서는것도 아니였습니다. 우리 란희의 친구라고 자처하던 저 사람도 거기서 도주해오지 않았습니까. 저 친구 버리고온게 어찌 우리 동생뿐이겠습니까. 사나이의 자존심도 조선사람의 얼도 그리고 그 무슨 남녀간의 정이라 불러야 할지, 애들 소꿉장난이기는 해도… 허, 그것도 다 버렸지요. 난 수하졸병이였다면 당장 대렬앞에서 저 비렬한 도주자를 총살하였을겁니다. 그 주제에 여기 나타나 우리 동생 귀해주는게 제 이상 없는듯 너덜거리고 요사를 떨거던. 에 에…》 성관호는 말끝에 고개를 홱홱 내둘렀다. 말투는 점잖고 부드러웠으나 거기에는 커다란 환멸과 적의마저 느껴졌다. 방억세는 상대의 분노가 십분 리해되였다. 그는 한정상의 해사한 상통을 마주한 그때부터 심한 염증을 금할수가 없었다. 성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억세의 옆자리에 바투 붙어앉으며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방형, 죽창대에 대하여 더 알고싶습니다. 달리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성관호는 이렇게 화제를 돌리고는 상대방의 의심이 념려된듯 자기소개를 다시 하였다. 《나는 며칠후에는 먄마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내가 지휘하던 대대가 있습니다. 일본이라면 죽기내기로 싫어하던 부친의 피를 물려받은 내가 어떻게 되여 일본군의 소좌가 되고 일선대대를 지휘하게 되였는지 나도 모를 일입니다. 정말 일본을 위함이라면 광목 한필도, 쌀 한되박도 내지 말아야 한다는 선친의 유지를 페부에 새겨넣은 이 성관호가 무슨 망녕이 들어 피까지 바치는지 참 운명의 장난이란 꼭 요지경속이라니깐요. 우리 부친이 날 사관학교에 밀어보낸것도 이런것이 아니였는데… 결국은 이렇게 됐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이번에는 뼈다귀나 부러져 귀향했댔지만 다음번에는 <옥쇄>하여 유골함에 한줌의 가루로 들어 귀향할는지요. 운명이지요. 더럽게 꼬여든 운명. 그걸 펴보자고 하니 그럴수도 없구… 하지만 내 동생의 은인이 되여준 당신을 물어메칠 패덕한은 아니니 나에게 당신과 당신네 죽창대에 대하여 더 설명하여주기 바랍니다. 난 방형과 어차피 친구인연을 맺게 될것 같습니다.》 성관호는 자기소개를 간추려 다시 하고 진정을 루루이 털어놓으면서 방억세로 하여금 속대문을 열어놓도록 왼심을 썼다. 방억세는 친근감과 동정을 자아내게 하는 상대의 기대와 청을 받아주기로 결심하였다. 방억세는 성관호의 이야기를 일종의 속죄로 접수하였던것이다. 리유여하 불문하고 속죄란 인간의 갱신의지를 보여주는 처사가 틀림없다. 저지른 과실의 경중에 관계없이 속죄에는 아름다와지려는 그 인간의 량심과 번민, 의지가 고여있고 새 모습이 비껴있는것이다. 하기에 속죄하는 인간을 받아들이는것도 인간의 미덕이다. 방억세는 상대의 신뢰에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진지하게 다시 이야기를 펴놓았다. 우선 자기가 입산한 경위와 산에서 동료들을 모아 죽창대를 뭇던 이야기부터 시작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손을 잡으려고 애쓰던 이야기며 지금은 국내반일조직들의 지지성원을 받으며 조국해방성전에 동참할 준비를 하고있는데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제부터 우리 항일죽창대는 적극적인 군사활동에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왜놈들의 후방을 교란하고 악질왜놈들과 주구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성관호씨도 이곳을 한시바삐 떠나는것이 좋겠습니다. 조선사람들가운데서 일본군대대장이라면 거물급친일도배에 속하므로 첫번째 처단대상이 될수 있으니깐요. 결국 우리는 지금 맞서고있는 적아지요. 성관호씨는 일본을 위해 피흘리고있고 우리는 그놈들의 멸망을 위하여 피흘리고… 우린 이렇게 마주앉지 말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방억세의 마지막말들은 롱조가 다분하였으나 거기에는 시대의 준엄한 경종이 울리고있었다. 방억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어떤 뢰성벽력에도 눈섭오리 하나 흔들릴것 같지 않던 성관호의 크고 든든한 몸통이 흠칫흠칫 떨었다. 손이 자주 비지땀이 즐벅하게 돋고있는 목덜미에 올라가군 하였다. 잠간이면 된다던 성관호의 량해와는 달리 그들의 이야기는 저녁상을 차렸다는 성란희의 말이 들릴 때까지 계속되였다. 주로 방억세가 이야기하고 성관호는 도간도간 조심스럽게 묻군 하였다. 방억세는 성관호가 여적 자기의 처지와 신분과 인격의 무게에 맞게 처신하느라고 툭 빠개놓고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인생기로에서 고민하고 방황하고있다는것을 똑똑히 투시하고있었다. 그래서 어찌하면 이 인간도 자기의 대오에 세워줄수 있다는, 그러면 그자신에게도 그의 선친들앞에서도 성란희에게도 그리고 우리의 항일전선에도 도움이 될수 있다는 기대감이 막연하게나마 생겨났다. 방억세는 정각에서 일어나면서 엄숙하게 이야기를 결속하였다. 《우리 항일죽창대는 당신들에게도 피신처를 제공할수 있습니다. 왜놈들의 총알받이로 개죽음을 당하느니 입산이 떳떳할것입니다. 우리 죽창대는 물론 붉은기를 들고있지만 신앙과 정견, 출신과 재산의 유무에는 관계없는 말그대로 초당파적인 조직체입니다. 물론 항일지향은 우리 공동체 매 성원들의 몸무게를 재이게 하는 공통분모로 되여있습니다. 따라서 항일은 입대의 대의명분이고 그에 따르는 엄격한 규률과 규범과 선서가 있습니다.》 《방형, 미안합니다. 하나만 더 물읍시다. 난 당신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방형이 내놓은 그 훌륭한… 그렇지요. 난 감히 그 훌륭하다는 표현으로 내 인생을 부정하게 되였군요. 그까짓 후회하지 않을겁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바람따라 흘러가는 구름같은것이였으니깐요. 인생의 좌표가 없었던것입니다. 헌데 그 훌륭한 이야기들에 대한 담보가 필요됩니다. 그래서 묻는것인데… 방형이 죽창대에서 차지한 지위에 대하여 알고싶습니다. 비밀이라면 구태여 더 묻지 않겠습니다.》 《나의 지위요? 하, 글쎄 그것도 비밀이 되겠는지…》 방억세는 말을 길게 끌다가 잠시 생각에 묻혔다. 자기의 정체를 다 드러내주는것이 옳을가?… 이것은 사실상 조직규률의 견지에서 볼 때는 불문에 붙여지는 일이다. 그러나 만사에는 례외가 있는 법이다. 여차직하면 방황하는 고달픈 한 넋을 포용하는 일로 될수도 있다. 하기는 지금까지 이 인간앞에서 나는 속깊이 묻어두어야 할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한발 물러나 실망을 줄 리유가 크게 없지 않는가. 방억세는 입가에 미소를 담고 나직이 자기를 밝혔다. 《나는 항일죽창대에서 대장으로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난 첫눈에 당신을 거목으로 보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이 성관호가 난생처음으로 한 인간앞에 무릎을 꿇으렵니다.》 성관호는 방억세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앉으며 절을 덥석 하였다. 그 거동이 사뭇 장중하고 근엄하기까지 하여 방억세는 거북해졌다. 《아아, 이 무슨 짓이요. 성형! 어서 일어나시오.》 방억세는 성관호가 자기 발부리에 무릎을 꿇고 앉자 아연실색해서 그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정각이 들썩하게 호걸웃음을 터쳐놓았다. 《허허… <천황페하>의 적자가 항일용사앞에 무릎꿇는걸 도죠가 알았다간 당장 염라국에 추방하겠소.》 《허허… 대의명분만 고결하다면 저승길이 두렵겠소?》 《허허허…》 두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쾌남장부들답게 호탕하게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