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제1장 바뀌여진 인생항로

 

《선서를 하시오.》

태룡산빨찌산 대장 주경남의 굵은 목소리가 오두막을 엄숙하게 흔들었다.

그 소리에 이끌린듯 오두막의 구름노전에 앉아있던 두사람이 일제히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들중 한 사나이가 주경남을 놀란듯 한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눈길이 마주치자 오두막의 한쪽벽에 걸려있는 붉은기앞으로 무겁게 걸어나갔다.

사나이는 붉은기를 마주하고 서자 이미 준비된 선서문이 머리속에 없었던지 뒤에 선 두사람을 힐끗 돌아보고는 당황해하며 한동안 굳어져있었다.

그는 무슨 말부터 떼며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듯 그냥 기발만 쳐다보며 몇번 헛기침을 컹컹하였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작은 방안에는 납덩이같이 무거운 침묵이 안타깝게 흐르고있었다.

사나이는 태룡산빨찌산에서 독립지대 지대장으로 활약하여온 방억세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가슴이 쩍 벌어지고 목덜미가 실팍하고 코중방이 우뚝 솟은게 무척 든든하고 완력이 드세보이는 사나이였다.

하지만 눈확이 깊고 쌍겹이 진 눈은 무척 다감하고 사려깊고 은근한 멋이 풍겨 첫눈에 정이 끌리게 한다.

그윽한 빛이 서려있던 그 눈이 붉은기앞에서 잠시도록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다가 기발을 우러러 서서히 불타고있었다.

금방 방억세는 빨찌산대장과 정치위원으로부터 빨찌산지휘부의 특별결정을 전달받았다. 그로서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결정이라 한동안은 얼떨떨해있었다.

결정전달에 앞서 주경남대장은 그에게 적구에서 구해들인듯싶은 한장의 신문을 내밀었다.

신문의 1면에 특호활자로 《국방군》이 창설되였다는 소식이 실렸는데 륙해공군실력자들의 직무와 이름, 군사칭호가 쭉 렬거되여있었다.

그 이름들에 듬성듬성 빨간색의 밑줄이 그어져있었다.

신통하게도 방억세가 잘 아는 사람들이 여럿이 되였다. 그가 해방전에 키워냈거나 이러저러하게 맥이 닿고있는 친구들이였다.

주경남이 고불통을 입에 물고 방억세가 신문을 보다가 자못 놀라마지 않아하는 기색을 흡족하게 지켜보며 넌지시 물었다.

《어떻소, 지대장? 뭐 알만 한 친구들이 있소?》

방억세는 신문에 오른 낯익은 이름들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대답하였다.

《예… 우리 죽창대친구들이 희한하게도 군부의 요진통자리에 틀고앉았습니다. 아, 거참 희한한 일인걸.… 그러니 결국 이제부터 이 억세가 자기 옛 부하들과 불질을 하게 됐군. 사생동고친구들하고… 허, 참…》

방억세는 이렇게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일이 맹랑하게 번져진게 유감스러운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흠… 그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사생동고친구들하고야 다툼질해서야 되나. 그것도 총장난해서야 안되지.》

주경남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지나가는 소리로 엉너리를 쳤다.

방억세는 그 소리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였다.

《어쩌겠습니까. 피할 길이 없을 때야…》

《피할 길을 찾는게 도리지.… 아니 애초에 마주서지 말아야지.…》

《하, 참…》

방억세는 싱겁게, 짧게 던지는 주경남의 말에 그 어떤 의미심장한 여운이 있는듯싶어 더 대꾸할 흥심이 없어져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이 왜 밤늦게 자기를 대장오두막에 불러들여 느닷없이 신문부터 보여주는지 궁금해졌다.

방억세는 주경남이 정치위원에게로 눈길을 보내고 그 눈길을 받은 정치위원이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이는것을 얼핏 여겨보았다. 어쩐지 그는 그 어떤 막연한 불안이 그물그물 가슴에 피여오르는것을 느끼였다.

《좋아, 아주 좋아.》

주경남은 이렇게 흐뭇하게 중얼거리며 아직도 가느다란 연기를 실실 피워올리는 고불통을 박달나무로 만든 재털이에 툭툭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대장동무를 부른것은 우리 빨찌산지휘부의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서요.》

대장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다소 근엄한 어조로 지휘부의 결정을 전달하였다.

《이제부터, 이 시각부터 방억세동무는 태룡산빨찌산 성원이 아니요. 조직성원도 물론 아니고… 제명되였소.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야겠소. 다요. 이 결정은 어떤 문서에도 기록하지 않는 특별결정이요. 결정서기안자는 나요. 비준은 여기 정치위원동무와 내가 공동으로 했소.》

방억세는 뜻밖의 소리에 용수철에서 튕겨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부릅뜨고 대장의 말을 가로채며 격렬하게 웨쳤다.

《그게 무슨 결정입니까?! 내가, 이 방억세가 빨찌산도 아니고 조직성원도 아니고… 그럼 도대체 이 방억세는 어찌된다는겁니까?!》

그의 웨침은 그자신도 다잡을길없이 처절하게 오두막을 흔들었다.

방억세는 빨찌산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조직의 소환장을 받고 결사의 맹세를 다지며 이 태백산줄기의 심산유곡에 들어온지 고작해야 달포가 될가말가하다. 아직 큰 싸움도 한번 벌리지 못했는데 자기의 존재를 무시해버리는 특별결정이라니 이야말로 그에게는 청천벽력이였다.

조국이 통일되기 전에는, 이 땅에서 미제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절대로 손에서 무장을 놓지 않으리라고 하늘과 땅에 맹세를 다졌는데 분렬의 원쑤들에게 씨원스럽게 불벼락을 들씌워보지도 못하고 이 성스러운 투쟁대오에서 물러서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주경남대장은 얼굴이 단박에 수수떡빛갈로 검붉게 타든 방억세를 위압적으로 지켜보다가 《앉소. 앉으라니깐.》 하고 엄하게 소리쳤다.

커다란 무게와 위엄이 실린 대장의 명령에 방억세는 불끈거리는 속을 꾹 누르고 도로 제자리에 앉는수밖에 없었다.

주경남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동무자신은 어찌되느냐고?… 모르겠소. 그건 동무가 스스로 찾아낼 일이니 우리인들 알겠소? 애국의 길은 여러 갈래요. 통일에로 이어진 길은 여러 갈래란 말이요.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통일성전에 힘을 보태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오. 무엇을 할것인가. 이건 동무가 찾으시오. 임무는 동무가 자신에게 설정하란 말이요.… 자, 잠간 휴식합시다. 담배를 태우오.》

정치위원이 그에게 담배를 내밀고 자기도 한대 뽑아물었다.

그는 담배불까지 붙여주고는 주경남대장의 엄숙한 어조와는 달리 정을 담아 은근하게 물었다.

《이 신문말이요.… 성관호를 알지요?》

《압니다. 잘 알지요. 내게는 매부가 되는걸요.》

방억세는 저으기 자기의 의사는 아랑곳없이 특별결정을 내린 그들에게 도전이라도 하듯 데설궂은 어조로 툭 내쏘듯 대답하였다.

《저런, 매부라니?… 음 그것까지는 우리는 몰랐지.… 좋구만.… 아주 좋아!》

정치위원은 희색이 만면하여 방억세의 어깨를 툭 치기까지 하였다.

《매부라니?!… 거참 희한해. 희한하거던!…》

주경남도 좋아한다.

성관호-신문에는 그의 직무가 《국방부》 총무국장으로 밝혀져있다.

방억세는 그를 잘 안다. 배속까지 알고있다. 혈연적으로는 처남매부지간이다. 우정으로 보면 종이장사이로 가까워진 사이이다. 서로 사랑과 믿음과 존경으로 취해든 말그대로 사생동고이다.

리념적으로는… 자신이 없다.

성관호는 아직까지 공산주의에는 도리질이다. 접수되지 않는다는것이다. 일본군에서 대대까지 지휘하던 인물이고 고명한 량반가문의 후예다. 붉은 사상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조직적으로는 해방전에 방억세가 대장으로 있은 태백산항일죽창대의 군사교관이였다. 해방후에는 함께 려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소속된 《국군준비대》에서 핵심으로 활약하였다.

그 시절에 성관호는 군건설의 방향과 설계도를 긋는 모사노릇을 하였다.

인간적인 매력과 향기에 끌린 자기 동생을 성관호가 탐낼 때 서슴없이 떠밀어주었다.

《최병우도 알지요?》

정치위원이 신문의 이름자를 손부리로 찍으며 또 물었다.

방억세는 《압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최병우-그도 역시 죽창대의 부대장이였다. 《국군준비대》에서 한몫을 든든히 맡아가지고 뛰여다녔다.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상황실장으로 있을 때에도 그는 방억세의 밑에서 처장으로 복무한 친구다.

신문에는 최병우가 공군의 실력자로 되여있다.

일본군에서 비행사로 복무한 경력이 아마도 이번 인사조치에 영향을 준 모양이다. 약간 기회주의적근성이 있다.

《최병우, 철새놀음 하지 말라.》-이것은 해방후 언젠가 생일에 큼직한 보따리를 안고온 그에게 던진 방억세의 신랄한 충고였다.

그들의 사이가 어지간한 정도였다면 그 씨가 박힌 충고 한마디로 최병우가 시뚝거렸을것이고 좌석도 어수선해지고 그들의 뒤날의 교제에도 기름기가 빠졌을것이다.

하지만 최병우는 그날 자기 상관의 스스럼없는 채찍에 태없이 자기 가슴을 들이대고 《고치겠습니다. 철새노릇 없애겠습니다.》 하고 반죽좋게 응수하여 주변분위기를 더욱 화락하게 하였다.

《장수덕은 어떻소?》

이번에는 주경남이 벙글거리며 물었다.

장수덕은 《륙군참모차장》으로 되여있다. 방억세는 그에 대하여서도 인물평가를 할수 있었다.

《좀 알지요. 경기고등학교 동창이였습니다. 해방후에 <국군준비대>에서 대장으로 있었습니다. 해방전에 일본군에서 조병창 창장으로 복무한바가 있어 해방후에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제가 새로운 출발을 하라고,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자주 고무해주었습니다. 손탁이 세고 방략도 있고 량심적인데도 있어 려운형선생이 그를 용서하여주고 중임을 맡겨주었고 그뒤로 미국놈들과 리승만의 눈에도 들었던것 같습니다.》

방억세는 몸통이 김치독같은 뚱뚱보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려놓고 다소 길게 설명을 하였다.

방억세는 이렇게 친구들을 꼽아내려가려니 참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밖에도 신문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중에는 죽창대의 옛친구들이 여럿이다.

어떻게 되여 신통히도 지나간 시절에 산에서부터 고락을 같이하면서 정으로 통한 친구들이 한두름에 꿰인듯 이렇게 나란히 군부실력자들의 명단에 오르게 되였을가.

하기는 이중에 자기가 리념적으로 벗이라고 부를수 있는 동지는 신통히도 하나도 없다.

그런가 하면 군사리론이나 일정하게 군통솔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군부실력자로 등용된 자기 친구들의 경력을 돌이켜보면서 그들을 천거한 사람들이나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미국놈들과 리승만의 음흉한 속내도 짚어보았다.

이들은 대체로 일본군에 복무하면서 사관학교도 졸업하고 중대나 대대, 련대를 지휘한 일선지휘관경력자들이다. 그런가 하면 그후에 항일의 기치를 든 죽창대나 기타 독립운동단체들에 얼마간이라도 몸을 담은바 있는 경력도 있다. 그러니 미국이나 리승만은 군부의 실력자들을 일본군에서 무예를 닦은 경험자로 꾸리면서도 친일색채가 짙다는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보려고 한것이다. 교활한 놈들.

이제 미제와 리승만이 이 친구들까지 틀어쥐고 지반을 다지려고 할것이다.

이 사람들이 미국놈들과 리승만에게 호락호락 넘어갈가. 민족주의자들임에는 틀림없는 이 친구들이 양놈들의 노복들로 되여줄수 있을가?…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이들을 방임해두어서는 안된다.… 이들모두를 끌어당겨 우리의 진지에 세워놓든지, 아니면 정 끌려오지 않겠다면 중간진지에라도 끌어다놓아야 한다.…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해볼만 한 일이다.

아니, 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통일애국력량의 힘을 가세해주는 일이라면 주저하거나 마다해서는 안된다.

하물며 적진에 통일포대를 쌓는 일인데 지체없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 가만 … 그러니?…)

생각이 예까지 이르렀을 때 방억세의 뇌리에 번개가 번쩍 쳤다.

무엇인가 삭막해지던 사색의 심연을 뚫고 불쑥 떠오른 번개는 인차 사라졌다. 또 한번 번쩍거렸다. 드디여 그것은 령롱한 빛갈로 뇌리를 꽉 채웠다.

방금 자기가 접하고 절망까지 느꼈던 특별결정의 참의미가 마치도 구름을 찢으며 번쩍거리는 벼락같이 명백해졌던것이다.

여러 갈래의 통일의 길… 임무설정은 자기가 할것… 통일성업에 힘을 보태주는 일…

주경남대장의 이상스럽던 일깨움에 이제는 공감이 갔다. 어찌 보면 마땅한 조치인것 같다.

이건 해볼만 한 일이다. 아니 누구든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 미국놈들을 내쫓고 통일위업의 승리에 이바지할수 있다면 우리는 가능성과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세찬 방망이질이 일어나고 두어깨가 천근만근을 떠인듯 무거워졌다.

그러니 그들과의 인맥을 리용하여… 하, 그렇군…

그렇게 되면야 분명 민족과 등진 적진임에 틀림없는, 반동의 아성인 미국놈들의 총알받이무리에 몸을 담게 된 옛친구들의 운명에도 소생의 빛이 될수 있을것이다.

《원체 동무를 더 깊숙이 감춰놓고 연막을 쳐야 하는건데… 쯧쯧… 상황실장자리를 그냥 지키고있었더라면 지금쯤 <합동참모본부의장>이나 <륙군참모총장>자리는 떼놓은 당상인데… 언제나 교훈이란 일이 틀어진 다음에야 찾게 된다니깐.》

주경남대장은 방억세가 《국군》창설을 앞두고 로출되여 조직의 추천을 받아 여기로 들어온것이 못내 아쉬워서 혀를 찼다.

《뭐 생각되는게 있소?》

주경남은 낯빛이 달라진 상대방의 얼굴을 살피다가 웅건한 어조로 물었다.

방억세는 말없이 신문에서 고개를 떼고 대장을 향하여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류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주경남은 활기있게 설명하였다.

《투쟁방법도 수단도 동무가 선택하시오. 그 어떤 구속도 받지 말고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을 택하란 말이요. 이제부터 동무에게는 린접도 없고 지원도 없소. 상급도 없고 하급도 없소. 우리는 능히 방억세동무가 자기의 지혜와 담력과 신념을 가지고 조국의 통일위업에 기여하리라는것을 믿고 특별결정을 가결하였소. 동무가 자기 임무를 찾아냈다면 됐습니다. 모임을 계속합시다.》

주경남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엄숙하게 모임을 사회하였다.

《선서하시오!》

이렇게 되여 정치위원도 방억세도 자리를 차고 일어났고 방억세가 붉은기앞에 엄숙한 얼굴로 나서게 된것이다.

가뜩이나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사명감과 흥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던 방억세는 선서를 하라는 뜻밖의 대장의 말에 붉은기앞에 나서기는 하였으나 한동안 당황하고 얼떠름해져서 쉽게 입을 뗄수 없었다. 그는 지금 조국통일성전이 세워놓은 운명의 새로운 분기점에 나섰다는것을 절감하고있었다.

순간순간에 여러가지 생각들이 번개치듯 엇갈리며 떠올랐다. 임무… 그래 임무부터 선언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 찾아내여 자기의 인생으로, 운명으로 받아들인 임무를 붉은기앞에 엄숙히 선포해야 한다. 임무수행의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 그것은 여기서는 타산하지 말아야 한다.

붉은기앞에서는 오가는 눈빛도, 숨결도 엄숙해야 한다. 붉은기는 우리의 리상이고 표대이다. 우리의 조국이며 민족이며 조직이며 동지들이다.

붉은기앞에서는 시시껄렁하고 구차스러운 변명이나 설명이 가당치 않다.

여기서는 오직 해야 한다는, 할수 있다는 준엄한 서약만이 있을수 있다.

나는 임무를 위해 이곳을 떠나야 한다. 대오를 떠나야 하며 빨찌산투쟁도 포기해야 한다.

창졸간에 온몸으로 쓰라린 비애가 다시 쓸어들었다.

그러나 방억세는 그것이 통일위업의 요구앞에서 너무나도 하잘것없는 감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속깊이 강하게 도리질을 하였다.

아니다, 나는 빨찌산을 떠나는것이 아니다. 조직의 명예도 포기할수 없다.

나는 우리의 위업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빨찌산이며 조직에서 자기의 순번위치가 있는 조직성원이다. 내가 어찌 내 인생의 영광으로 되는 신성한 대오와 그 대오의 순번위치를 버릴수 있는가.

방억세는 고패치는 격정을 가라앉히자 오른주먹을 머리우로 천정을 찌를듯 힘있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가슴을 꽉 메우는 고독과 공허 그리고 서글픔과 비감을 털어버릴듯 자기도 놀랄만치 크고 우렁차게 웨쳤다.

《선서!》

그 소리는 뢰성벽력처럼 웅장하면서도 한없는 비감에 짓눌려 떨고있었다. 돌덩이처럼 틀어쥔 주먹도 머리우에서 부르르 떨었다.

《나, 태룡산빨찌산 독립지대장이였던 방억세는 이 땅에서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투쟁에 남조선군부의 요직인물들도 동참하여나서도록 자신의 힘과 지혜를 다 바치겠다는것을 엄숙히 선서한다!》

방억세는 이렇게 짧게 함축된 몇구절에 순간에 바뀌여진 인생항로와 승부기약을 아직은 예측할수 없는 운명을 다 담고나서 부각상처럼 굳어져 서있었다.

돌연 그는 무릎을 꺾으며 붉은 기폭에 자기의 얼굴을 묻었다.

붉은기에 휘감긴 방억세의 무쇠같이 든든한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쩌면 태룡산빨찌산의 넋이며 상징이기도 한 이 붉은기와의 작별이라는 생각이 그의 가슴을 비감에 젖어들게 하였다. 승리의 날까지 앞으로 다시는 이 신성한 기폭에 감겨들지 못할것이다.

《방억세동지!》

정치위원이 그의 등뒤로 다가와 그의 허리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어려운 임무입니다.》

그리고는 작별을 고하였다.

《승리의 광장에서!》

정치위원은 뒤로 한발 물러서서 짧고 엄숙하게 작별의 인사를 하며 오른주먹을 쳐들었다.

《승리의 광장에서!》

방억세가 저력있게 화답하였다.

정치위원은 특별결정을 집행하기 위하여 투쟁의 길에 오르는 전우를 한동안 놓아주지 못하고 다시 끌어안고있다가 잔등을 두어번 두드려주고 방안을 나섰다.

방안에는 두사람만이 남았다.

그들은 잠시 서로 마주볼뿐 숭엄한 감정에서 헤여나지 못하였다.

주경남은 방억세의 간단명료하고도 기개와 힘과 담이 함축된 선서에 만족하고있었다. 자기들의 의도를 짧은 시간에 정확히 헤아려냈으며 그 투쟁방도와 사업대상들을 명확히 규정한 그의 혜안이 미덥고 놀랍기만 하였다. 하기에 주경남은 통일애국위업을 자기의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상대의 반석같은 정신력과 비상한 두뇌회전과 세련된 조직적수완을 믿어마지 않았기에 보다 복잡다단하고 책임적이며 고도의 애국적량심과 헌신성이 요구되는 극비로 되는 투쟁무대로 서슴지 않고 떠밀어보내는것이였다.

주경남은 해방전부터 방억세와 드문히 상종하여왔다. 해방직후부터는 방억세의 상급으로서 그의 사람됨을 잘 알게 되였다.

주경남이 알고있는 방억세는 벌써 오래전부터 일제에 무장으로 항거하여 죽창대라는 무장조직을 뭇고 이끈 신념이 투철한 애국자였으며 고삐를 당기건 늦추건 애국위업의 승리를 위해 자기 한몸을 스스로 불태우는 헌신적인 투사였으며 그 어떤 준엄한 환경속에서도 승리의 길을 열어나가는 로숙한 지휘관이였다.

피차에 정이 들고 믿음이 가던 전우와 어쩌면 영원히 작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사람을 괴롭히였다.

주경남은 담배쌈지를 꺼내 그에게 권하고 자기도 고불통에 꽁꽁 다져넣고 불을 달았다.

두사람은 잠시도록 담배연기를 풀썩풀썩 피워올리며 리별의 정으로 알알한 가슴을 달래였다.

《오늘 저녁은 여기서 쉬다가 새벽에 떠나시오.》

《예?!… 그러면 지대동무들과…》

방억세는 그 소리에 불만스러운듯 고개를 내저었다. 자기 지대에 가서 빨찌산의 마지막밤을 보내고싶었다.

비록 한달정도이지만 산속에서 사귄 동무들에게 인사도 없이 훌쩍 사라질수 있는가? 그러나 방억세는 주경남이 힐끗 던져오는 눈초리에서 힐난의 의미를 가려내자 더 주장을 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이미 주경남대장은 결심이 되여있는듯싶었다.

그런따위의 잔정을 받아줄리가 만무하다. 그것은 너무도 감상적인짓이다.

주경남이 사랑하는 전우의 마지막부탁을 푸접없이 짜르는것이 미안쩍은듯 설명하였다.

《우린 래일 오전에 방동무의 문제를 심의하는 지휘부회의를 하자고 하오. 이를테면 방억세가 해방전 부상자리가 도져 지대장의 임무를 감당할수 없으니 지하사업에로 되돌아갈것을 제기하여왔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의 직무수행을 일단 정지시키고 여러차례 비판도 하고 검토도 하였다, 그런데 본인과의 담화가 있은 직후 빨찌산지휘부의 조치에 반발하여 대오를 떠나갔다, 물론 그가 떠났다고 하여 우리를 배신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신념이 부족하고 의지가 박약한 부르죠아적사상잔재의 표현이다, 따라서 지휘부는 그를 빨찌산대오에서 제명하며 조직에서도 제명한다,… 뭐 이러루하게 대본이 짜있소.

이건 방동무의 앞으로의 신분위장과 활동을 위하여 필요한것이요. 동무의 깨끗한 경력에 흙칠을 하게 되여 미안하오. 하지만 내 머리로는 다른 수를 생각해낼수 없으니 어쩌겠소. 좋은 생각이 있으면 내놓소만 도랑막고 고래잡을 생각은 애당초 꺼내지 마오. 이 결정은 형식상 지휘관들의 모임에서 결정하려고 하오.》

방억세는 빨찌산대장의 빈틈없는 조직사업에 고맙기도 하고 경탄도 하였지만 그걸 받아들이는것이 베차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은 자기의 인격에 대한 너무도 혹독한 타격이였다. 통일전사로서 지조와 량심과 신념에 충실하여온 자기의 순결한 경력을 어지럽히는 가혹한 형벌이였다. 자기를 사랑하고 신뢰해주고 따르던 수많은 동지들과 친우들,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태룡산빨찌산에는 이미 해방전부터 낯을 익히고 사귀여온 오랜 전우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해방전에는 자기를 항일죽창대 대장으로 받들어주었고 해방후에는 변함없이 자기를 지휘관으로, 스승으로 아껴왔다.

그런데 나 방억세가 지휘부의 조치때문에 비렬한 도주자로 되여버렸다고 하면 그네들이 얼마나 실망해하고 분노할것인가.

그 소식이 바깥에도 미상불 전해지겠는데 내가 어떻게 서울땅에 가서도 머리 들고 다닌단 말인가?

정들은 얼굴들중에서 자별나게, 령롱하게 다가드는 한 녀인이 있다.

성란희… 독립지대의 녀성참모. 벌써 해방전부터 우연한 인연으로 사귀게 된이래 벗으로, 동지로 되여 가까이 지내온 녀동무. 세습적인 봉건의 대궐을 박차고 나와 고행으로 엮어진 험난한 싸움속에서 민족의 사활을 건 애국위업에 젊음을 뿌려가는 뜻높은 처녀다.

《란희, 나때문에 고생살이를 사서 하는구만. 난 동무를 볼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앞서군 한다오.》

언제더라… 그가 죽창대에 입대한지 한해가 지난 어느날 산악극복훈련중 벼랑에서 굴러떨어졌을 때 방억세는 그를 업고 내려오다가 퍼그나도 죄스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그런데 그날 방억세는 그 말 한마디에 묶이워 단단히 졸경을 치르고 땀을 빼야 하였다.

성란희는 방억세의 등에서 쭈르르 미끄러져내리더 나무를 붙잡고 일어서서 야무지게 따지고들었다.

《뭐라구요?! 절 어떻게 보구 하는 말씀이예요! 그래 내가 한 남성을 바라서 이 길에 나섰다는거예요?! 내게는 그보다 더 신성한것이 없다는거예요? 대장동지는 저의 뭘 보고 입대를 보증했나요?!

뭐하러 날 업고다니는거예요?!》

그리고는 업히지 않겠다고, 기여서라도 제팔다리를 놀려 가겠다고 해서 루루이 사죄를 하여야 하였다.

그 란희가 자기의 지대장이 산속에서 직무정지에 불만을 품고 대오에서 리탈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될가? 그 말쑥한 얼굴에 노기를 서리처럼 돋혀가지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경멸에 넘쳐 부르짖을것이다.

《당신은 허위의 보자기를 두른 비렬한이였군요.》

아마도 마주서면 서슴없이 따귀라도 올려붙일것이다. 그리고는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고말것이다.

그 녀자는 그 고운 생김새와 사근사근한 말씨와는 달리 옳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 살찬 일도 서슴지 않는 영악하고 단호한데가 있다.

방억세는 벌써 오래전에 직접 목격한 일이 있었다.

《당신은 비렬한!》

한정상이 바로 그렇게 타매되여 그 녀자의 주위에서 영원히 쫓겨나지 않았던가.

한정상… 그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아마도 코웃음부터 칠게다.

음… 한정상… 한정상은 지금 빨찌산지휘부에서 출판소사업을 맡아보고있다.

너무 똑똑해서 그 이름을 옹근짜리 정상이라고 지었다고 누가 우스개소리를 했지.… 아, 그것도 성란희가 분김에 한 소리였지.…

생활에서는 주는게 없이 밉상이 되여보이는 상대도 있는데 그 인물이 그러하다.

해방전부터 가까이에서 지내오는데 크게 부닥쳐 소리낸적도 없다. 복잡하게 엉키여 마찰을 빚어낸적도 없다. 하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와는 마주서고싶지 않다. 그렇다고 기어이 자기 주위에서 몰아내고싶지도 않은 깔깃깔깃한 인간이다.

뜻하지 않게, 엉뚱하게 가지쳐가는 한 사나이에 대한 생각에 방억세는 쓰거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괴로울테지.》

주경남대장의 측은한 목소리가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복잡한 생각들에 막을 내리게 하였다.

방억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을 하랴.

속썩일 일이 이것뿐이랴. 이것은 새로운 고행의 시작일따름이리라.

졸지에 첩첩 다가들 장애는 얼마랴. 거기서 파생되여 걸음걸음 감겨들 시름거리는 얼마랴.

시련과 고뇌… 고통과 비애… 밟고 넘어서야 할 그 무수한 시련의 징검돌들을 나는 마땅히 각오하고 이겨내야 한다. 첫걸음에서부터 얄팍한 감정의 희롱에 동요한다면 나 홀로 어이 먼길을 걸을수 있으랴.

《자, 자기요. 싸움을 끝내기 전에는 만나지 못할수도 있지.》

주경남대장은 방억세를 구태여 위로해주는것이 이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아린 속을 더 긁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어깨를 정을 담아 툭 건드리며 씩 웃었다.

그는 일어나 잠자리를 펴고 제 먼저 모포를 쓰고 누웠다. 그리고 아직도 고개를 짓수그리고 뚝해서 앉아있는 방억세를 끌어당기며 서글서글하게 말했다.

《뭘 그래? 억세답지 않게… 이제 시름겨운게 그 정도겠소? 여기서 빨찌산하다가 죽는게 동무가 이제부터 할 일보다는 썩 행복한 일이라는걸 난들 모르는줄 아오? 맡은 일이 열배로 고생스러울거요. 암, 그렇구말구.… 헌데 어쩌겠나. 우리야 살아도 죽어도 세상바로잡기를 해야 할 팔자라고 생각하세. 엉, 허허… 내 한마디 더할가. 우리 마누라말일세. 내가 서울에서 쫓기우며 지내다가 산으로 떠나올 때 사실인즉 마누라속을 가볍게 해주고싶어 한마디 싱거운 소릴 했지.

<이보우 마누라, 이제는 령감없는셈 치고 딴 사내 보며 지내도 좋다구.> 했더니 마누라가 내 가슴을 줴박으며 슬프게 울더구만.

<당신은 전생에 무슨 한을 끼친게 있어서 평생토록 숨어사우?!>

그래 그날 마누라를 끌어안고 일장연설을 했지. 미국놈들을 몰아내야 한다, 아무리 여겨봐야 제 소굴로 돌아갈 잡두리가 아니다, 저눔들을 둬두고서는 조선사람들은 또 해방전처럼 망국노가 되고 노예살이를 해야 한다, 해방이 되여 세해가 되지만 이 남녘땅이 돼가는 꼴 봐라, 그런데 라지오를 들어봐라, 북녘땅이 부럽지 않느냐, 난 정말 북녘과 같은 세상에서 한달만 살아봐도 원이 없겠다, 그런데 그늘밑에 누워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려서야 될법이냐, 뭐 이러루하게 한참 교양사업을 했지.

아니 이건 내속에 다시 다져놓은 결심이구, 의지이구, 인생표대였어. 마누라가 울면서 떨어지더라구.

<이봐요, 이번에는 끝장을 보구 돌아와요.>

그래 내 한마디 더했지.

<몇해만 더 기다려주우. 이번에는 당신 부탁대로 꼭 끝장을 보구 동네방네 소리치며 당신 찾아오겠소.>

여보게 억세… 어쩌겠나. 난 마누라가 눈물을 매달구 감겨들던걸 생각하면 속이 얼얼하구 급해진다구.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통일이 돼서 삼천만민중이 김일성장군님의 치하에서 맘편히 살 날을 기다리는게 어찌 나나 마누라뿐이겠나.

통일이 되면 말이야, 자네도 나와 함께 장군님을 찾아 평양으로 갑세.

지금 남조선천지가 돼가는 꼴 보라구. 리승만<정권>이 하는 짓이란 하나에서 열까지 다 미국놈들을 위한것이구 나라의 통일과 민족의 리해관계에 역행하는 짓거리들이란 말이요.

그러니 어서 바삐 우리 남쪽땅도 북녘과 같은 사회로 되여야 할게 아닌가.

그날을 앞당기자구.

난 북녘땅이 변화무쌍하게 좋아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더구나 마음이 급해지네.

그날을 위해 빨찌산에서 보배같은 임자를 아까운대로 떠나 보내는걸세.

군부안에서 애국적인물들을 찾아내여 반미통일위업에 궐기시키는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우리가 자네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고있다는걸 명심하게.

그러니 이젠 이 걱정 저 걱정 털어버리구 푹 잠이나 자보자구.》

방억세는 마디마디에 각근한 정을 담아 들려주는 눅진눅진한 주경남의 소리에 가슴이 화끈해올라 변명조로 그 말을 받았다.

《대장동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내 꼭 걱정만 하는게 아닙니다. 이렇게 살 날려보내듯 끈 하나 달아놓지 않고 보내겠습니까?》

《끈?… 끈은 무슨 끈… 필요없네. 그건 나도 깊이 생각해본거네. 그 끈이 여차직하면 동무의 목에 감겨들 올가미가 될수 있단 말이요.》

《그렇다면 무슨 접선신호라도 조직해주십시오. 련락원을 주든지…》

《련락원… 그것도 끈이나 다름없지. 아직도 자기 임무의 복잡성과 장기성, 그 중요성을 혼돈하고있는게 아닌가, 엉?… 투쟁무대가 어딘가. 반동중에서도 상반동들이 모여드는 곳이야. <국방군>이란 미국놈들 다음가는 우리의 과녁이 아닌가. 거 신문에 오른 군부실력자들이라는걸 살펴보게. 나도 대강 아는 놈들이 있는데 신통히도 악질적인 반통일분자, 인간쓰레기들이야. 아차실수 한번에 당신 목숨은 물론 대사도 망치고말걸세. 그런즉 당신 혼자서 결심하고 집행해야 하는거요. 그래서 린접도 지원도 없다 하지 않았소. 좋소. 비상접선신호를 하나 주지. 이렇게 하기요. 여기가 쌍매골이라고 하니 이렇게 할가? <쌍매골 주첨지가 보내서 왔수다.> 내가 옛적에 주첨지라 불리웠으니깐. 허허… 그러면 <쌍매골 여러분네가 모두 편안하시우.> 이렇게 응답하게.》

《예, 좋을것 같습니다. 주첨지라, 하하…》

《이 접선신호는 1회용이요. 한번밖에 써먹을수 없소. 뭐라고 했더라. 단병접전… 오라, 바로 그거요. 단병접전이요.

다시 강조하건대 혼자서 판단하고 결심하고 조직하고 집행해야 하오. 동무의 싸움에서는 동무의 두뇌 하나만이 필요하오. 재삼 말하건대 동무의 사상, 동무의 지혜, 동무의 담력에만 의거하시오. 그래서 특별결정이 아닌가.

자, 잡시다. 새벽에 동무는 여기를 떠야 하거던. 리별주 한잔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술이야 없으니 어쩌겠소. 자, 들어오오.》

주경남은 너스레를 부리며 모포를 들어주었다.

방억세는 야단스럽게 코를 고는 주경남대장의 옆에서 온밤 뒤치락거리다가 동틀무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천가지 생각이 그냥 파도처럼 밀려들다가 잦아들고 또 밀려들어 종시 잠들수 없었던것이다.

그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어입고 곤히 잠든 주경남을 내려다보았다.

주경남은 해방전부터 련계를 가지고있다가 《국군준비대》시절에 더 친숙해진 사이였다. 자기가 서울에서 더 사업하기 어려워졌을 때 산으로 불러들인것도 주경남이였다.

책략이 있고 굳세고 인정이 있는 지휘관이였다.

어린시절에 의병대의 련락원으로 정의의 총검을 잡은이래 40대가 기울어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장을 놓지 않아온 주경남은 방억세가 진심으로 따르고싶던 정의인이였다.

초당파적인 무장단체로 조직되여 조국해방을 막연히 기다리던 태백산항일죽창대가 붉은 기발을 들게 하고 전민항쟁을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라나서게 한것은 주경남이였다.

그때가 1942년경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를 받기 위하여 파견한 련락원이 세번씩이나 되돌아왔을 때였다. 방억세는 커다란 실망과 좌절감에 휩싸여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어느날 한 장년사나이가 찾아왔다. 그가 바로 주경남이였다.

주경남은 며칠동안 방억세의 귀틀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방억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다음에는 자신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방억세의 사람됨을 파악하게 되자 자신이 벌써 1930년대 중엽부터 조국광복회에 망라되여 싸워왔다는것을 밝히였다.

그리고는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사상에 대하여, 그이께서 지니신 출중한 풍모와 비범한 군사적지략에 대하여 감명깊게 이야기하였다.

주경남은 벌써 오래전부터 조선인민혁명군 국내공작원들과 접촉하면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던것이다.

당면하여서는 태백산항일죽창대가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조국해방을 위한 전민항쟁방침을 받들어나갈데 대하여 함께 의논하였다.

그후로부터 방억세는 주경남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태백산항일죽창대에서 정식으로 붉은기를 추켜들게 하였으며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쳐나갔다.

해방후 방억세는 의연히 서울을 떠나지 않고 반미통일성전에 떨쳐나선 주경남의 지도밑에 지하투쟁을 벌려왔다.

이렇듯 주경남은 방억세를 애국과 통일위업의 한길로 이끌어준 혁명선배였고 참된 전우였다.

방억세는 대장을 깨울가 하다가 피곤에 지쳐 달게 자고있는 그를 깨우기도 미안하고 그리고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것도 피차에 유익할듯싶어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작별인사를 적었다.

《떠나갑니다. 통일 만세!》

그는 수첩장을 떼내서 입속으로 웅얼거려보았다. 가슴으로 비장한 전률이 스쳐갔다.

그것은 빨찌산대오에서 방억세가 마지막으로 다지는 엄숙한 서약이였다.

이제 이 맹세를 안고 떠나게 된다. 이 맹세를 지키는 길에서 넘어야 할 준령과 골짜기는 얼마나 될가. 아직은 그것을 다 예측할수가 없다. 그는 수첩장을 떼서 책상우에 펴놓고 그우에 권총을 올려놓고 일어났다.

그 권총은 죽창대시절부터 늘 애용하여오던 콜트권총이였다.

가져갈가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빨찌산에 하나라도 보탬이 되게 남겨주고싶어 쾌히 꺼내놓았다.

방억세는 오두막문가에서 아직도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코를 골고있는 그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였다.

방억세는 무거운 걸음으로 주경남대장의 방을 나섰다.

그는 빨찌산본부가 자리잡은 쌍매골골짜기를 빠져나와 매바위에 올라섰다.

그는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자기의 인생에 또 하나의 극적인 활무대가 비껴든 골짜기를 점도록 내려다보았다.

태백산줄기의 중간허리에 솟아있는 태룡산의 심산오지에 쌍매골이라는 명쾌한 이름이 붙은것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나섰던 서산대사가 팔도강산을 편답하다가 이 골짜기의 경치가 하도 절묘하여 하루밤 쉬여가다가 골짜기상공을 유유히 감도는 두마리의 매를 보게 되였다.

매란 놈은 대체로 쌍을 짓지 않고 뿔뿔이 날아다니며 꿩사냥을 하는데 분명 쌍인듯싶은것들이 꽤나 다정하게 골짝하늘을 감도는것이 이채로와 서산대사가 한마디 하였다.

《허, 저 바위는 분명 매가 날아가는 생김새를 갖추었는데 저놈들이 이 골짜기 주인들이겠다.

이 골짜기를 쌍매골이라 부르고 저 바위는 매바위로 부르세.》

이렇게 불러놓고 다시 보니 골짜기가 참으로 기묘하게 생겼는데 사면팔방으로 수려한 산발들이 에돌아가고 골짜기에서 풍기는 온갖 꽃향기가 진동하여 저도 모르게 탄사가 튀여나오게 되였다.

서산대사는 골짜기에서 하루밤을 묵으며 다리쉼이나 하자고 했는데 련 사흘을 골짜기풍치에 취해있다가 길을 떠났다.

일후에 그의 제자들이 쌍매골이 한눈으로 굽어보이는 매바위우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쌍법사》라고 불렀다.

《쌍법사》의 주지는 올해 일흔을 넘은 로승이였다. 여기에 빨찌산본부가 자리잡자 자리를 떴다.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이 여러번 만류하였으나 자기들이 거접을 하면 여러분네가 피차에 불편할것이라는것이였다. 지금은 그 암자가 빨찌산의 망루로 리용되고있다.

아직도 희미한 어둠이 깔려있는 골짜기의 여기저기에서 흰 연기가 그물그물 피여오르고있었다. 빨찌산지휘부의 직속중대들과 독립지대식당들에서 아침준비를 하고있는것이다.

그는 이 골안에 찾아들던 때가 생각났다. 그것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격동적인 추억이였다.

서울에 있던 그에게 태룡산빨찌산에 소환되였다는 상급의 지시를 전달해주고 그를 이 쌍매골로 안내하여온 사람은 이곳에 한발 앞서 들어와 빨찌산의 선전사업에 관여하고있던 성란희였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빨찌산지휘부에 들어선 그를 맨 처음 맞아준것은 주경남대장이였다.

《방억세동무, 함께 싸웁시다. 미국놈들을 모조리 두드려패기요. 오랑캐를 내쫓는데는 예나제나 이 쇠붙이이상 없소.》

주경남은 자기의 권총을 꺼내 흔들며 장쾌하게 웃었다.

주경남은 여러 지휘관들과 정치부 일군들앞에서 방억세를 갓 조직된 독립지대 지대장으로 임명하고는 그를 데리고 독립지대가 자리잡은 골짜기로 넘어갔다.

《방억세지대장동무를 알고있는 동무들이 여기도 많을거요.

방억세지대장은 벌써 해방전부터 여기에 진을 친 죽창대대장으로 활약했소. 해방후에도 군부계통에서 활약하여온 우수한 군사지휘관이요. 그러니 이제부터 독립지대가 소리를 크게 낼거요.》

그자리에서 방억세는 콜트권총을 뽑아들고 격동적으로 첫 인사를 하였다.

《동지들! 오랑캐들을 몰아낼 때까지 손에서 이 총을 놓지 맙시다!》

그의 우렁찬 호소에 독립지대의 성원들이 일제히 주먹을 쳐들고 목소리를 합쳤다.

그게 꼭 달포전에 있은 일이다.

그런데 오랑캐들에게 총 한방 울려놓지 못하고 쌍매골을 떠나게 된다.

그 총마저 내놓고 간다.

이제부터의 싸움은 총이 아니라 두뇌로 하는 싸움이다.

새로운 초소, 새로운 임무가 나를 기다리고있다.

임무는 명확했으나 어쩐지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곳에는 반기는 동지도 없다. 태백의 눈보라도 없고 그 눈보라속에서 울리던 빨찌산의 노래도 없다.

그는 속으로 빨찌산대오에서 행진곡처럼 울려퍼지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매바위를 넘었다.

 

출진이다 동무들아

기발을 올려라

고난속에 우리 힘

백배로 뻗나니

섬멸의 총성으로

통일조국 마중간다

 

방억세는 어제 저녁에 주경남대장의 오두막안에서 봐두었던 신문자료가 떠올랐다. 아직도 가능성은 확실치 않고 임무수행을 위한 방법도 딱히 찾아낸게 없다. 명백한것은 임무의 필요성이다. 롱소리처럼 들려주던 주경남이 부인과 작별할 때의 이야기가 다시금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걸음을 다그치게 한다.

《그래, 다그쳐야 한다.》

군부의 요직에 등용된 여러 인물들의 낯익은 모습들이 하나둘 다가들었다.

그들과 자기 사이에 얽혀진 여러가지 만단사연들도 또렷한 회억으로 되살아났다.

그중에서도 제일 가까이 다가서는 미더운 인물은 역시 성관호다.

성관호야말로 앞으로 진척시켜나가야 할 임무수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될것이다.

《성관호… 성관호…》

방억세는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어수선한 감정으로 입속으로 정과 기대를 담아 불러보았다.

성관호와 서리서리 엉켜들게 했던 몇해전의 어느 저녁이 깊은 감회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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