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제15장 고목이 될지언정

 

벌써 초생달은 서쪽령너머로 미끄러져내린지가 이슥하다.

쌍매골은 거무틱틱한 어둠과 괴괴한 침묵속에 무겁게 잠겨있었다.

하늘에서 바글거리는 별들만이 달빛마저 스러진 골안에 희미한 빛을 뿌려주며 쉬임없이 아물거리고있었다.

앞산에서는 이따금 알을 품고있는 까투리가 목쉰 소리로 쌍매골의 무거운 밤을 휘저어놓고 캥캥- 짖어대는 여우의 성가신 울음소리와 분명 제 짝을 찾아 슬피 우는 노루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수림속에 서려든 어둠과 정적을 마구 찢어놓는다.

하지만 지금 처녀에게는 깊어가는 밤하늘도, 어둠과 밤의 고요를 물어뜯는 갖가지 음향들도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폭포에서 내리자 자기의 귀틀집을 향하여 넘어질듯 비틀거리며 걸음걸음을 무겁게 옮겨갔다.

우선 당장은 자기의 보금자리에 깃을 펴고 다문 얼마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누워있고싶었다.

서울로 가면서 사흘, 오면서 사흘, 있을수 있는 매복을 경계하면서 쉬임없이 걸은지라 사실 처녀는 온몸이 녹초가 되여버렸다.

거기다가 뼈를 깎아내는 번민으로 하여 지금 그 녀자는 자리에 들면 노그라들어 다시 솟아날것 같지 못하였다. 겹쌓이는 피로와 심장의 아픔에 시달려 이제는 그 누구하고 한바탕 말쌈이라도 후련하게 벌려볼 기력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자기가 이쪽으로 자리를 옮길 때 독립지대 남동무들이 따라와서 든든하고 보기 좋게 만들어준 나무침대우에 몸을 던지듯 반듯이 누워버렸다.

밖에서는 나무가지들이 바람결에 흔들거리고 나무잎이 살랑거리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그러나 방안에는 어둠과 정적뿐이다. 괴괴한 어둠에 처녀는 몸도 마음도 물속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순식간에 잠겨들었다. 한주일이나 방을 비워두어 썰렁하기는 했으나 잠자리에 드니 자기의 체취가 슴배여있는 방이여서 아늑하고 포근하기 이를데 없다. 눕자마자 눈이 내리감기고 소르르 잠이 깃을 내린다.

비몽사몽간에 처녀의 뇌리로는 아릿한 추억의 토막들이 서서히 지나가고있었다.

처녀는 지금 장미빛노을이 곱게 어린 상념의 하늘가에로 너울너울 날아가고있었다.

대숲이 설레이는 소리, 처마에 매단 풍경이 은은한 메아리를 날리는 루각… 아마도 뙤창가에서 쉴새없이 새여드는 나무잎 살랑거리는 소리가 실어온것일가.

그 대숲에 솟아있던 루각에서 장쾌하게 울리던 호걸장부들의 웃음소리…

그 장쾌한 웃음소리가 마치도 소고대가 울리는 경쾌한 장단처럼 귀전을 기분좋게 두드리자 추억의 대문이 활짝 열린듯 순식간에 그의 마음속에 방억세의 바위같이 듬직하고 억센 모습이 꽉 들어찼다.

그러자 알몸으로 마주서야 했던 그 잊을수 없는 저녁이 수집음속에 떠오르고 아낌없이 정을 퍼주던 행군길이며 훈련장이 다가섰다.

두루미같은 아가씨는 죽창대에 오르지 못할것이라고 했지.… 그래도 난 끝내 날아올랐지.

그 사나이의 안팎이 바뀌여지는 여러가지 모습들이 언뜻언뜻 지나갔다. 발바닥에 생긴 물집에 딱총을 놓아주며 이제라도 대궐집에 가라고 타일렀지.… 산악극복훈련때는 또 어찌했더라…

죽창대의 마지막밤. 그 잊을수 없는 불무지에서 자기 이름을 불러주던 그 사람의 목소리는 분명 쓸쓸하게 울렸던가봐.

그때 난 너무도 분해서 그만에야 자기를 잃고 난생처음으로 사나이앞에서 녀자의 인격도 체면도 다 던져버리고말았지.

그러니 난 그때 벌써 그 사나이앞에서 고이 지켜온 나자신을 부끄럼없이 다 드러낸 꼴이 되였어. 하지만 내 속을 깡그리 헤쳐보인것은 나의 꿈이고 나의 행복이였어. 그래, 그건 행복이였어…

그러나 악몽과도 같은 어둠속에서 령롱하게 그려지는것은 결코 그리움으로 하여 보다 따스한 색조로 채색되여 자리잡은 사랑스러운 모습만이 아니였다.

비몽사몽간에 오락가락하던 녀인의 눈앞으로는 불쑥 마음속에 달작지근하게 감겨들던 추억을 차던지며 성난 호랑이처럼 무섭게 격노한 방억세가 그를 노려보며 다가왔다.

우뢰같은 목소리, 온몸을 단박에 바스러버릴듯 하던 웨침…

《동무가 이 허튼수작에 박수를 쳤단 말이요?!》

으르렁거리는 사나이의 고함이 잠자리에서 궁싯거리던 처녀를 마치도 얼음물을 한바가지 들쓴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게 하였다.

일순간 온몸이 졸아들고 땀발이 쭉 뻗친 처녀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앉았다.

둘러보니 사나이는 없고 새까만 어둠속이다.

그러나 그 어둠속에서 형체는 분명치 않으나 여전히 노호한 부르짖음이 그냥 메아리치고있었다.

처녀는 그 목소리에 매달리듯 안타깝게 손을 뻗치며 절망적으로 대답하였다.

《아니, 아니… 아니예요!》

성란희는 또다시 가슴팍을 란도질하는 자책과 괴로움에 시달리며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어둠속에서 두손을 허우적거리다가 침대에서 내렸다. 달고쓴 흘러간 추억에 인생을 다 지나쳐버린 사람처럼 멍청히 자신을 맡기고 웃고울고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돼. 그 사람을 저렇게 놔두고 내가 홀로 침대에서 잠을 청하다니. 시간을 놓치면 그 사람도 우리네 사랑도 끝장이야. 사랑도 행복도 투쟁도 인간의 의지속에서만 빛날수 있는거야. 이건 내가 어데서 배워둔 소리던가.

사랑은 순풍따라 흘러가는 돛배가 아니다. 노를 저어야 한다. 파도도 풍랑도 맞받아나가야 한다.

사랑은… 그래… 그것은 전취해야 한다. 열정으로, 담으로… 혁명동지들이 보증해주고 축복까지 해준 우리의 사랑을 지켜내야 한다.… 나는 목숨까지 서슴지 않으리라.

우리의 사랑으로 그대를 빛낼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위업에 보탬을 준다면 난 사랑마저 기꺼이 바치리라.

나는 이제야 똑똑히 깨닫는다. 그대의 사랑이 타오르지 못함은 내 사랑의 불이 연약했기때문이라는것을!

더없이 순결하고 신성한 자각이 처녀의 담기를 부풀어오르게 하고 힘을 주었다.

처녀는 더는 억제할수 없는 사랑의 힘에 떠밀려 련인을 찾아 용기있게 귀틀집을 나섰다.

인간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지켜 심혼을 불태워가는 삶은 더욱 숭고하다.

인간의 량심, 인간의 성스러운 의미를 지르밟으려는 이 괴이하기 그지없는 살인극을 나는 외면할수가 없다.

그것은 곧 나를 지키는 싸움이요, 인간으로서의 나의 삶을 지키는 의로움이다. 방억세에게 내린 선고는 명백하다. 화는 피할수 없이 눈앞에 와있다. 이미 목표를 향해 살은 시위에서 떠났다. 눈물도 탄식도 이제는 그 살을 돌려세울수도 멈춰세울수도 없다. 사랑에 대한 기대마저 이제는 산산쪼각이 났다.

하지만 무엇인가 딱히 석연치는 않아도 불의와 시커먼 모략임에는 틀림없는 너절한 흉계, 그지없이 믿어마지 않았고 사랑하여마지 않았던 동지이며 벗인 사나이를 모살해버리려는 소름끼치는 행위에 다름아닌 이 성란희가 하수인의 역을 지고 나설수는 없다.

날아오는 살을 막을수 있다면 심장도 기꺼이 바치리라. 아니, 기어이 이 한몸을 던져 그 살을 멈춰세울테다.…

피로에 지치고 기력이 쇠잔해졌던게 언제였더냐싶게 처녀의 온몸에 새로운 투지와 기상이 넘쳐올랐다. 이런 길이라면 천리라도 만리라도 한달음에 갈것 같다.

그는 산생활에 익숙된 재빠른 걸음으로 어둠이 깔린 숲속길을 따라 방억세가 갇혀있는 초막에 갔다.

《누구얏!》

정수철의 고함소리가 어둠속에서 돌멩이처럼 튀여나와 처녀를 멈춰세웠다.

《보초를 교대하자요.》

《일없습니다. 가서 쉬십시오. 제가 그냥 밤을 보내겠습니다.》

정수철이 사위를 휘휘 둘러보며 대답하였다.

그러나 성란희는 정수철을 초막앞에서 떠나보내고싶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어떻게 혼자서 밤을 새겠나요?》

《일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두루 생각이 많아서 졸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는 눈을 붙이겠습니다. 아무렴, 우리 대장동지가 저를 난처하게 만들라구요.》

정수철의 말에 성란희는 마음이 놓이여 속을 털어놓았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난 오늘 저녁에 그 어떤 내부의 움직임이 있지 않겠는지 걱정돼요.》

《예, 저도 그 생각입니다.》

《정동무, 제가 좀 량해를 구할수 있을가요? 전 대장동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싶어요. 이야기를 나누고싶어요.》

이 말을 할 때 성란희는 그도 어쩔새없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행으로 달빛마저 꺼진 뒤라 정수철에게는 처녀의 활랑거리는 가슴속의 방망이질도, 달아오른 얼굴빛도 감촉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철은 성란희가 초막안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겠다는 소리에는 당황해졌다.

《그건…》

그건 규률위반이다. 한정상이 밤중에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란희는 상대가 미처 말끝을 여물구지 못하자 도담하게 속말을 꺼내놓았다. 이제는 정수철에게 기대를 걸어야 했다. 믿음을 주고 량심에 호소하는수밖에 없다.

《저는 저분을 사랑해요. 그지없이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사랑할겁니다.》

《뭐라고요?… 아니?… 그런데 이런 임무를 받았습니까?!》

정수철은 깜짝 놀라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형집행에 나서다니!… 이런 끔찍한 일이라구야.

《바로 그때문에 더구나 제가 선발되였겠지요. 오히려 그게 다행이였어요.》

《그래요?… 소장동무… 저분은 훌륭한분입니다. 소장동무가 사람을 옳게 보았습니다.… 아- 내가 왜 이런 짓거리에 걸려들었을가요?

대장동지의 말을 듣고보니 제가 나쁜 놈들의 간계에 빠져든것 같습니다.

서남룡놈이 저를 대장동지의 총구앞에 내세운건 결국 대장동지에 대한 검토가 아니라 저에게 대장동지의 변절을 확인시키기 위한 연극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탈주하도록 군특무대에 넘겨주는척 한것도 연극이였구요.

저번날에 성동지가 거기에 의문부호를 붙였던것이 옳았습니다.

제가 머저리노릇 했습니다.》

《예, 정동무의 분석과 판단이 그럴듯해요. 이건 다 그놈들이 짜고든 더러운 연극이 분명해요.》

《난 지금까지 자기를 뉘우치고 더러운 놈들을 욕하던중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좋습니까? 도망치라고 하십시오.》

《저분은 우리를 남겨두고는 떠나지 않을거예요.》

《왜요?》

《대장동지를 잘 알면서 그래요?》

《하, 그렇지요. 우리가 피해를 볼가봐 그러겠지요. 그러니 이 일이 장차 어떻게 될가요. 내가 혼맹이가 쭉 빠졌지요. 뭘 알아보지도 않구 대장동지를 모함해서 이렇게 곤경에 빠지게 만들었군요.》

《됐어요. 차후문제는 제가 나온 다음에 토론하자요.

정동무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군요. 고마워요. 그럼…》

성란희는 초조해졌다.

정수철과 때늦은 후회로 시간을 보낼수는 없었다.

《예, 어서 들어가십시오. 마음놓고 이야기하여보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도 초막에 접근시키지 않겠습니다.》

정수철은 호주머니에 있는 권총을 꺼내 손에 잡으며 결연히 대꾸하였다.

《그렇게 해주세요.》

성란희는 초막문을 가벼이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억세는 그때까지 두툼히 깔아놓은 새초속에 들어가 누워 복잡한 심뇌에 갈마들어있었다.

한정상이 끈을 쥐고 연출한것이 분명한 사건의 본질을 대체적으로 파악한 방억세에게 있어서 지금 주되는것은 죽음에 관한 문제가 아니였다.

공포나 고독이나 한탄이 아니였다.

진창에 곤두박힌 명예나 억울한 루명에 관한 문제는 더욱 아니였다.

력사란 공정하다. 력사의 심판관은 언제나 실수를 모른다. 력사의 거울은 편견이 없으며 그 어떤 롱간에도 흐려지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몇년 혹은 몇세기가 지나가더라도 어느때 가서는 사건의 진위는 밝혀진다.

권세의 압력이나 처세군의 사기로 빚어진 혼탁된 진상은 력사에 그대로 그려지기마련이다.

방억세가 지금 뇌심초사를 거듭하고있는것은 붉은기앞에서 다진 선서를 기어이 관철해야 한다는 일념이였다.

붉은기앞에서 다진 선서는 기어이 관철해야 한다!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은 비록 이 세상에 없어도 그들이 통일애국의 이름으로, 인민의 이름으로 부여한 임무는 남아있다.

선서를 지키고 목숨으로 받들어가는것만이 그들에 대한 의리이고 믿음이며 보답이다. 그를 지키자면 지금은 살아나야 한다. 무조건 살아나야 한다. 분명 나쁜 놈이 틀림없는 한정상이 꾸며낸 간계에 목숨을 버리는것은 너무도 허무한 희생이다. 그것은 통일위업앞에서 죄악이고 동지들의 신의에 대한 배신이다.

어떻게 여기서 빠지겠는가?… 그는 지금 이 문제를 띄워놓고 머리를 쓰고있었다. 여기에는 간계의 희생물로 된 성란희, 정수철의 문제도 있다.

그는 한정상에 대하여서도 랭철한 리성의 자대를 가지고 체질분석을 하여보고 평가를 내렸다.

그놈을 눈앞에 떠올려놓고 살펴볼수록 분기가 치밀어올랐다. 한편으로는 의리나 량심이 없는 추악한 배신자가 있었다는것이 서글퍼지기도 하였다.

사람의 탈을 쓰고서야 어쩌면 이렇게도 타락하고 고약해질수 있을가.

그자신이 일찌기 일본에서 공부할 때부터 공산주의사상에 매혹되였다고, 그래서 투쟁의 길에 나섰다고 떠들지 않았는가.

죽창대에서 여러해 고행을 함께 하면서 그리고 해방후에도 줄창 조직원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자신을 안팎으로 수련하여온 혁명가노라고 희떱게도 주절거려온 그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오로지 자기의 리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오랜 나날 사귀여온 동지에게 가장 더러운 루명을 들씌울수 있으며 통일애국위업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감히 도용하여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할수 있느냐.

아니… 아니다.… 그놈은 원체 혁명가도 투사도 아니였다. 혁명가의 탈을 쓴 인간쓰레기였다.

혁명가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리념이 아름다울뿐아니라 도덕도, 량심도, 생활도, 사랑도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혁명가란 아름다움으로부터 시작되는 고결한 리성의 빛이다. 아름다움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는것이 투사들이다.

방억세가 가깝게 지내였던 동지들은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투사이기 전에 정직하고 선량하고 깨끗한 참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요란한 언사나 초혁명적인 구호로 자기를 미화할줄 모르는 사람들이였다. 소리없는 정과 덕과 미와 그리고 묵묵히 자기를 바칠줄 아는 헌신성으로 동지들과 집단과 사회에서 자기의 가치를 빛내여나가는 의로운 사람들이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한정상의 체질을 들여다보면 그 어느 구석에도 투사의 첫째가는 징표로 되는 인간본연의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찾아볼나위가 없다.

그놈에게는 오직 자기만이 있으며 자기의 리해관계만이 그 인간의 모든것을 규정하고 지배하고있을따름이다.

자신의 안락, 자신의 부귀영달, 자신의 미래만이 있을뿐이다.

추악하고 저급한 인생의 목적에 오염되여있는 이런자들이 걸음걸음에 고난이 첩첩 감겨드는 애국의 길을 끝까지 헤쳐나갈수는 없다.

이런자들의 선택이란 달리는 될수 없다.

그것은 저주로운 배신이며 수치스러운 반역이다.

방억세는 이제 와서야 한정상의 실체를 심각히 투시하고 그에게 배신자라는 치욕을 내리는 자신이 어리석게만 생각되였다.

이미전에 이런자들과는 결별하고 애국의 대오에서 추방해버려야 했다.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느라면 어차피 세월의 비바람에 부식되기도 하고 본의든 타의든 얼룩이 질수도 있다.

세상에 순수한것이란 흔치 않다고 하지 않는가.

때묻지 않은 인간, 태여날 때의 말쑥한 본태를 변치 않은 인생이 있을가.

하지만 리유여하 불문하고 인간의 고결함을 스스로 짓밟는 추악한 변질은 절대로 타협도 용납도 하지 말아야 한다.

똑-똑-

또다시 가볍게 울린 문두드리는 소리가 갈래없이 뻗쳐가던 시름겨운 상념에서 헤여나오게 하였다.

인기척에 눈을 뜬 방억세는 누운채로 시들하게 물었다.

《누구요?》

《저예요. 성란희…》

《란희…》

방억세는 뜻하지 않은 성란희의 방문을 받고 서둘러 일어나 앉느라고 들쓰고있던 새초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왜 왔소? 좀 쉴게지. 서울길이 뭐 마실길이요? 가서 눈을 붙이오.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 하는건 아무튼 성란희동무에겐 좋지 않소.》

방억세는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되여버린 이밤에 란희가 불쑥 나타난것이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처녀의 신상이 념려스러워 다심하게 타일렀다.

그러나 처녀는 그 말을 기다리기나 한듯 서슴없이 나직이 부르짖었다.

《두렵잖아요.》

《그래두… 좀 쉬기도 해야지.》

《어디 눈을 붙이게 됐어요? 정수철동무가 후회가 크더군요. 나서지 말아야 할 일에 나섰다구.》

《음… 그래?… 마음이 깨끗한 동무니깐. 난 그를 잘 알아. 란희 못지 않게… 난 맹랑하게도 정동무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있었거던… 그런데 정수철의 맺힌 마음을 풀어주게 되였으니 정말 다행이요. <검찰청>놈들이 그 사람을 교수대에 올려놓았더라면 난 일생토록 그 빚을 물지 못했을거요.… 왜 왔소?… 시간이 있으면 여기 와서 앉소.》

방억세는 그제야 란희가 어둠속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어 건초를 눅잦혀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가 자리를 찾아오도록 손을 내밀었다.

이윽고 어둠속에서 성란희의 손이 더듬어 잡히였다.

작고 부드럽고 따스한 손이 방억세의 크고 억센 손에 꼭 잡혔다.

뭉클 잡히는 부드러운 촉감에 가슴속도 뭉클해올랐다.

이렇게 호젓한 자리에서 두사람이 있어본적도 없었고 이렇게 정감을 담아 손을 잡아본 일도 없었던것 같았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의 비극적인 시각에 이렇게 두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손과 손을 마주잡고있는것이 그들에게는 참으로 가슴을 벅차게 하는 행복이고 또 슬픔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마주잡은채 잠시동안 서로의 맥박을 전해들으며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성란희가 방억세가 꺼내놓은 말꼬리를 더듬어잡고 입을 뗐다.

《그건 무슨 말이나요? 마음의 빚이란것 말이예요.》

성란희는 원체 지휘부의 결정을 받을 때부터 정수철이 격해서 몇마디 토해놓던 사건의 진상을 알고싶었다. 그래서 정수철에게도 지나가는 소리로 물었는데 그가 울컥 밸통을 세우는 바람에 무춤거리고말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방억세에게서 흘러나오니 다행스럽기도 하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성란희도 그 사건에 무엇인가 흐리터분한것이 있다는 판단이 생기고 그것이 드러나면 그게 실마리가 되여 헝클어진 이야기들이 바로잡힐것 같았던것이다.

《자초지종을 밝힌다면 긴 이야기인데 대충 추려 말합시다.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하오.

내가 서울<검찰청>에서 석방되던 날이였소.》

방억세는 그날 부장검사 서남룡놈이 벌린 《연극》에 대하여 그리고 그 과정에 자기가 씹어넘겨야 했던 고뇌와 정수철의 마땅한 분노에 대하여 들려주었다.

《난 지금도 정동무가 쓰러지기 전에 날 쏘아보던 눈이 잊혀지지 않소.

그리고 그 사람이 나더러 배신자라고 욕을 퍼붓던게 지금도 귀에 쟁쟁하오.》

《예- 그렇군요!… 그랬었군요!… 정동무가 이에 대해 말해주면 믿을가요?》

성란희는 자기의 마음을 휘저어놓았던 정수철의 의심이 쉽사리 풀려지자 감개무량한 어조로 물었다.

《글쎄… 그건 자신이 안 가는구만. 그리고 지금은 말하지 마오.

그 사람은 심지바른 사람이니 언젠가는 자기의 옛 대장을 믿게 될거요.》

그때 밖에서 정수철의 격한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전 믿습니다! 믿구말구요!》

아마도 정수철이 문밖에서 오락가락하다가 문득 새여나온 자기 소리에 귀를 강구고있었던 모양이다.

정수철이 목에 힘을 주며 진심을 고여 나직이 부르짖는 소리에 방억세는 속이 화락해져서 즐겁게 웃었다.

《허허 참!… 정동무가 믿는다니 됐소. 내 인생의 큰 빚을 하나 덜어놓았소.… 허허… 됐소!…》

방억세는 한 인간의 신의를 다시 찾은게 흐뭇하고 다행스러워 어둠속에서 얼굴가득히 웃음을 담았다.

칠흑같은 어둠속이라 그의 낯빛이 보일리가 없었지만 성란희는 지금 방억세의 얼굴에 담겨진 표정을 다 읽고있었다.

정의에 넘치는 련인의 그 밝고도 선한 얼굴을 보느라니 성란희는 어쩐지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굳이 믿어마지 않던 귀중한 사람… 방억세는 이런 인간이다!

그는 방억세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사랑하는 련인의 손바닥을 자기 볼에 올려붙이며 살갑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말씀해주세요.》

《뭘 말이요?》

《아무 말이라도… 음, 이 성란희라는 철딱서니없는 계집을 좀 욕을 해주어요. 이런 대장동지를 두고 속만 태워온 이 못난이를…》

《헝… 나때문에… 속을 태웠소?》

《참… 그럼 이 성란희가 방억세가 도주했다는 소릴 듣구 박수를 쳐줄것 같았어요?

그렇게 한마디 귀띔도 없이 사라지는 법이 어디 있어요?!》

성란희가 조금 앵돌아진 어투로 툭 내쏘았다.

《허허, 미안하오. 그러나 우리에겐 규률이 있지 않소.… 그 소리 좀 해보오. 속을 태우던 이야기…》

《됐어요. 지나간 옛말이예요. 그건 악몽과도 같지만 이젠 지나가버린 꿈자리이거든요. 전 대장동지를 믿어요. 대장동지도 절 믿지요?》

《믿구말구.》

《그럼 이야기해봐요. 저를 더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구요. 내가 당신을 그지없이 따르고 사랑해왔다는걸 당신이 알지 않아요.》

《그건 저… 란희…》

《좋아요. 그 말은 더 하지 않겠어요. 난 끝까지 나의 사랑을 지키고싶어요. 고이 지키겠어요. 이제는 당신이 속을 줘요.

내가 그때문에 더이상 실망과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내가 그때문에 더이상 울지 않도록 정녕 믿는다면 내게 속을 주세요.》

《속을 말이요?… 그건… 그러니… 하산한 리유를 말이요?…》

방억세는 성란희의 애끓는 부탁에 한숨부터 길게 내쉬였다.

이건 그 누구에게도 들려주어서는 안되는 비밀이다.

성란희도 례외가 될수 없다. 하지만 그의 애끓는 청을 마다할수도 없게 되였다.

그때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뚜걱뚜걱 울리더니 이어 조금 상거한 곳에서 정수철의 기침소리가 났다.

자기가 들어서는 안되는 이야기같아서 나는 듣지 않겠으니 마음놓고 이야기들을 하시오 하는 정수철의 눈치역은 신호였다.

방억세는 성란희에게 속깊은 곳에 묻고있는 사연을 꺼내놓기로 결심하였다.

아직은 생사기약이 없는 자기 운명이고보면 훌륭한 투사로, 믿음직한 동지로 자라난 성란희에게 자기가 받은 임무를 넘겨줄수도 있다는 생각이 결심을 달리 내리게 한것이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내가 죽으면 성란희동무가 내가 받은 임무를 넘겨받아줄것을 먼저 부탁하겠소.

무언가… 난 근거지를 떠나기 전날 밤에 선서를 하였소. 붉은기앞에서…》

《선서라구요?… 우리야…》

성란희는 의아해서 물었다. 빨찌산대오에 들어서면 누구나 붉은기앞에서 선서부터 다진다. 그런데 그날 선서했다는것은 무엇때문이였을가?

방억세는 그날의 엄숙한 광경이 떠오르자 쓰러진 동지들의 생각부터 밀물처럼 머리속을 채워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귀중한 동지들의 희생에도 분명 《설봉》의 작간이 숨어있은것 같았다.

동지들의 복수를 위하여서도 그놈을 기어이 들장을 내야겠는데 이렇게 갇히고 모해를 받은 몸이 되였으니 속에서는 그냥 울화만 덧쌓아졌다.

《말씀하세요. 그래서요?…》

성란희가 뒤이야기가 궁금해서 재촉하였다.

《거기에는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이 있었소.

그날 그분들이 나를 앉혀놓고 이렇게 밑도끝도 없이 말해주더구만.

<이제부터, 이 시각부터 방억세동무는 태룡산빨찌산성원이 아니요. 조직성원도 물론 아니고… 제명되였소.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야겠소. 다요. 이 결정은 어떤 문서에도 기록하지 않는 특별결정이요. 결정서기안자는 나요. 비준은 여기 정치위원동무와 내가 공동으로 했소.…

대장과 정치위원만 알아야 하는 비밀이요.>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니 두말하지 않고 나에게 신문 한장을 내놓으며 보라는거요.

거기에는 군부요직인물명단이 발표되여있었소.

명단에 바로 성관호매부와 옛 죽창대시절의 우리의 동료들도 두세명 군부의 실력자로 되여있더구만. 성동무도 다 잘 아는 사람들이요. 최병우… 동무 오빠이름도 있구.

난 대뜸 대장과 정치위원의 깊은 의도가 잡히더란 말이요.

주경남대장이 산을 내리기 괴로와하는 나를 위로해주더구만.

<혁명의 길은 여러 갈래요. 통일에로 이어질 길도 여러 갈래요.>

이제부터는 린접도 지원도 없는 단병접전이라는것이요.

임무도, 싸움방법도, 수단도 내가 선택하라는것이요.

그래서 난 그자리에서 임무도 방법도 선택하였고 선서하였소.

나 태룡산빨찌산 지대장이였던 방억세는 남조선군부안의 진보적인물들을 찾아내여 조국통일운동에 합류하도록 하겠다고 말이요.

그분들이 내린 조치는 매우 정당하고 필요하며 시기적절한것이였소. 이 땅의 군부가 통일운동의 변함없는 적이며 철저히 타도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안에 있을수도 있는 애국적인 요소라면 그게 비록 자그마한것이라 해도 찾아내서 통일운동에 합류시켜야 하오.

우리 셋은 붉은기앞에서 굳게 포옹하고 인차 헤여졌소.

그날 새벽에 나는 대장방에서 함께 자다가 소리없이 근거지를 떠났던거요. 그는 내가 근거지를 떠난 후에 내 문제를 정식으로 지휘부회의에서 공개하고 제명하겠다고 했소. 난 아직도 붉은기앞에서 다졌던 선서의 구절구절을 어느 한마디도 잊지 않고있소. 이게 다요. 그러니 난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조국이 통일되기 전에는 죽을 권리가 없단 말이요.》

《대장동지!》

성란희가 방억세의 두손을 펴들고 거기에 얼굴을 묻으며 왈칵 눈물을 쏟아놓았다. 자기를 굳이 믿어 속시원히 털어주는 사랑하는 벗의 고백이 그대로 성란희에게는 해빛이 되여 속안에 아직도 지저분하게 남아있던 얼음버캐들을 삽시에 녹아내리게 하였다.

《난 동무의 오빠에게 이에 대하여 암시하였고 도와줄것을 부탁하였소. 아직은 매부가 적극성을 보이지는 않소. 그러나 내 일을 이모저모로 돕고있소.

내가 <검찰청>에서 석방되고 <보증>을 받게 된것이 다 오빠가 도와주어 된 일이요. 그리고 군부에 물자를 대주는 <용달사>를 설립하도록 도와준것도 오빠의 힘이였소.

그러나 사업은 이제 시작이요. 그러니 내가 만약 숨이 꺼진다면 성란희동무가 나를 대신하여 임무를 맡아주오. 사람의 일을 어찌 알겠소.

오빠를 주축으로 하여 군부의 애국세력을 묶어세워 우리의 반미통일애국세력에 힘을 보태주도록 해주오. 그들의 이름을 조국통일운동사에 새겨넣을수 있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기쁘고 그들을 위하여서도 얼마나 다행스럽겠소.》

《대장동지!… 아, 왜 그 말씀을 이제야 해요.

못난 저를 속 후련하게 때려줘요.

아니아니 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속을 끓여왔던 이 의심많은 계집애를요.

그러나 대장동지, 선서는 선서를 하신 대장동지가 집행해야 합니다.

저도 오늘은 대장동지앞에서 선서를 하겠어요. 저의 평생을 그 선서에 바치겠어요. 저의 선서를 받아주세요.》

성란희는 이렇게 빠른 말씨로 속삭이고는 방억세의 손바닥에 그냥 얼굴을 묻은채 헉헉 흐느껴울었다.

사나이의 손바닥을 적시는 맑은 눈물에 해를 넘겨오며 가슴을 허벼대던 그 녀자의 고통과 설음과 슬픔이 다 씻겨내렸다.

《고맙소!》

방억세도 또 하나 명치에 얹혀있던 마음의 큰 빚이 스르르 풀리는것만 같아 자기의 두손을 성란희에게 맡겨둔채 행복의 미소를 지었다.

자기를 사모하여온 녀인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랭대를 받고 창졸간에 그 사랑의 가치마저 잃는것보다 더 괴롭고 처참한 일이 어데 있으랴.

산을 내릴 때부터 언제나 그의 넋을 괴롭혔던것은 바로 성란희가 자기때문에 고민하고 동요하고 분개하게 될것이라는 번뇌였다.

그러나 그 모든것이 지금 처녀의 깨끗한 눈물에 씻겨내리여 자기의 마음속까지 그지없이 말쑥하게 해주는것이다.

《됐소, 됐다니까. 이젠 눈물을 거두오. 그래서 혁명하는게 쉽지 않다구 하지 않소.

내가 지금 제일 걱정스러운것은 한정상의 정체를 다 해명하지 못한거요.

이 모든것은 한정상의 손끝에서 벌어진 간계가 틀림없소. 그놈이 보다 큰 손탁에 잡혀있는것만 같소.

대장동지와 정치위원동지의 희생도, 정수철동무의 체포와 석방도 다 그놈이 끈을 쥐고 움직인것 같소. 정수철동무를 탈출하도록 한것도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기 정체를 가리우기 위해 그놈이 연출한 기만극이란 말이요.》

《예… 그건 정동무도 같은 생각이예요. 방금전에 정수철동무는 자기가 그놈들의 연극에 리용당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 틀림없소. 그놈은 서남룡과 련결되였을거요.

그리고 근거지에 대한 <토벌>작전이 내가 하산한 후 인차 벌어진것도 다 그놈탓이요. 그놈은 틀림없는 미군첩보대 비밀첩자 <설봉>이요!

그놈이 옛날 미국목사 알론의 소리를 하던게 생각 안나오?

성동무가 죽창대에 가겠다고 할 때 자기가 미국류학을 가도록 줄을 놓겠다고 하던 말이 잊혀지지 않소. 바로 그 줄이 지금도 이어지고있는것 같소.》

방억세는 확고한 어조로 한정상의 정체를 발가놓았다.

방억세의 추리와 분석은 정확하였다.

한정상은 빨찌산대오에 잠입한 미군첩보대의 첩자였다.

미중앙정보국 극동지부에 소속된 고등첩자 알론이 오래전에 선발하여 세월을 넘어오며 품을 들여 장기적이고도 면밀한 작전으로 좌익권에 깊숙이 침투시킨 첩보원이였다.

그러나 지금 방억세는 한정상의 민족배신과 애국에 대한 반역이 얼마나 뿌리깊으며 이 가증스러운 첩자를 키워내기 위하여 미국놈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거슬러오며 품을 들여왔는가 하는것은 다 알수가 없었다.

한정상은 벌써 소년시절부터 미국정탐배들의 눈독을 받고있었다.

학질에 금계랍 얻어먹은 은혜갚음으로 성남교회의 독실한 신자가 되였다가 아예 하느님에게 헌신까지 하여 알론의 정부로 되여버린 한정상의 에미는 자주 그를 데리고 알론의 집에 가군 하였다. 해방되던 날에 남편까지 분노한 면사람들에게 맞아죽자 아예 알론이 자리잡은 성남례배당근처에 이사까지 하고 사흘갈이로 알론의 침방에 드나들었다.

에미가 금계랍으로부터 시작하여 흉칙한 선교사의 이불속에 기여들었다면 한정상은 그가 던져주는 쵸콜레트를 얻어먹는 재미로부터 시작하여 양놈들의 해묵은 밀정으로 굴러떨어졌다.

한정상에게 학비까지 대주며 일본류학을 시킨 알론은 장차 지능지수가 높을것 같은 자기 정부의 아들을 좌익권에 침투시킬 전망목표를 설정하고 한정상이 자기가 그어놓은 주로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오랜 세월 주의깊게 살피고 몰아갔다.

한정상에게 일찌기 제국대학류학시절에 좌익의 독서회에 참가하도록 한것은 알론의 이러한 계략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일본의 패망이 확정적인것으로 되고있을 때 알론이 미국류학을 애걸하는 한정상을 그가 애인이라고 하는 성란희라는 미지의 녀인을 따라서 항일죽창대로 향하도록 한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알론의 정세분석과 조선반도의 정치향방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정확하였다. 알론의 추측대로 해방직후 남조선정세는 확실히 좌익으로 기울어지고있었다. 미군의 진주와 《미군정》만 없었더라면 남조선은 두말할것없이 좌익의 통치를 받게 되였을것이다. 알론의 예상대로 항일죽창대에서 《반일운동자》라는 호신부를 받게 된 한정상은 좌익권의 심부에 깊숙이 틀고앉게 되였다.

알론은 성란희가 좌익계신문인 《해방일보》의 도꾜특파원자격으로 도꾜로 가게 되였을 때 좌익조직의 대표로서 도꾜로 가도록 좌익조직의 중앙에 잠입한 첩자들을 움직이게 하였다. 한정상은 알론의 의사에 따라 도꾜에 옮겨간 후 거기서 재일조선인운동에 뛰여들었다. 한정상은 1946년 3월 1일 맥아더사령부앞에서 치렬하게 벌어진 조선인들의 시위를 주도한 열명의 재일조선인운동의 핵심들과 함께 붙잡혀 여러날 고문을 받았다가 서울로 추방되였다. 한정상은 그 열명의 성원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좌익조직일군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서울에서 좌익권의 심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미군정》의 탄압으로 좌익권조직들이 비법화되자 태룡산일대에 조직된 빨찌산지휘부에 가게 되였다.

그것이 바로 지난해초였다. 그무렵 도꾜에서 돌아와 여전히 좌익에서 활약하던 성란희도 산으로 간다고 했지만 이제는 산에 다시 오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 이 구실 저 구실 내대며 입산을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는데 어느날 에미년이 알론이 찾는다며 가보라고 하였다.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한정상이 한달음에 달려가 미국으로 보내줄것을 애걸하였다. 알론은 그의 청을 받자 한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 지금 군부안에 있는 항일죽창대출신의 장교들의 경력과 정치적동향을 아는껏 써내라고 요구하였다.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써야 하네. 절대로 자네의 감정을 희석해서는 안되네. 더하지도 말구 덜지도 말구 생김새그대로…》

알론은 이렇게 강조하였다.

한정상이 알론의 요구대로 거의 한달에 걸쳐 골방에 들이박혀 동료들의 자료를 아는껏 써가지고 갔다. 그것을 검토하고난 알론은 희색이 만면하여가지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과시 자네는 우리 미국이 창조해낸 또 하나의 기적이요!》

한정상은 1년후에야 자기가 묶어낸 자료에 의하여 항일죽창대에서 우익성향을 보이던 인물들이 군부의 상층권에서 한자리씩 얻게 되고 좌익으로 규정해놓은 방억세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이미 차지한 군부의 고위직책에서 다 쫓겨나거나 체포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를테면 한정상이 묶어낸 죽창대출신 인물동향자료가 미중앙정보국에 보고되고 미제가 남조선의 군부를 편성하는데서 주요기초자료로 리용된것이다.

곧 미군첩보대의 고위장교가 소개되고 그로부터 정식 《설봉》이라는 대호를 받게 되였다.

결국 알론은 한정상을 20년가까이 손때를 묻혀 좌익권의 요진통에 박아놓은 다음에야 정식으로 미국의 직업적인 고용간첩으로 내세운것이였다.

한정상은 알론과 미군첩보대 장교가 보는데서 비밀을 목숨으로 담보한다는 서약서를 쓴 다음에야 자기가 어린시절부터 알론의 손끝에 의하여 움직여왔다는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였다.

알론은 고을아전의 자식인 한정상을 그자신도 어쩔수없이 그리고 아무런 느낌도 받음이 없이 오랜 세월을 넘기며 좌익권의 심부에 틀고앉은 비밀첩자로 둔갑시켜놓은것이다. 참으로 알론으로서는 성공한 창조물이였다. 한정상은 앞으로 빨찌산대오를 무력화시킨 다음 서울법조계의 중핵적인 고위직책을 준다는 확약을 받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쾌히 동의하였다.

그가 받은 임무에는 성란희와의 관계문제도 있었다.

알론이 처음에는 롱조로 그 녀자와의 관계를 먼저 물어왔었다.

한정상은 금시 시무룩해져서 자기는 이미 성란희를 포기하였다고 실토하였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러 한정상은 아이까지 있는 자기 처지에 서울의 일류급미인을 탐내는것은 어리석은 몽상이며 사내의 자존심을 가지고서 더 헛기운을 뽑지 말아야겠다는것을 늦게나마 깨닫고있었다.

한정상의 쓰거운 고백을 들으며 잠시 노랑눈알을 굴리던 알론은 뜻밖에 《천치같은 자식!》 하고 화를 내고는 두말없이 자기를 따라서라고 하였다.

한정상은 그를 따라 반도호텔의 어느 한 방으로 갔다.

흐릿한 불빛속에서 그들을 맞아준것은 요염하게 생긴 계집이였다.

도꾜와 서울의 기생집에 드나들어온 한정상은 그 녀자가 분명히 화류계의 퇴물로서 알론의 노리개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네 처를 쫓아낸지도 여러해 지났은즉 홀아비로 늙을수야 없지. 이건 내가 마련한 자네의 색시감일세. 오늘부터 정을 붙여보라구.》

알론은 혼수감을 마련해주는 경사스러운 일을 아무런 표정도 없는 극히 실무적이면서도 위압적인 어조로 매듭짓고는 그의 등을 밀어 분내가 역겹게 풍기는 방으로 들어서게 하였다.

한정상은 이제는 상관의 명령이라고 할수 있는 알론의 말을 거역할수 없는데다가 달라붙는 계집의 추파와 짓거리에 녹아들어 느끼한 맛이 들기는 했어도 하루밤의 쾌락을 무아경속에 즐기는수밖에 없었다.아침에 눈을 뜨고 자기옆에서 코까지 골며 노그라들어있는 녀자를 보니 환락의 잠자리에서 연지곤지 다 지워져버린 계집의 얼굴은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깨설기》에다가 실주름투성이였다. 한정상은 구역질이 올라와 가까스로 참아냈다.

《이게 내 짝이 될 녀자라는겁니까?》

한정상은 아침녘에 찾아온 알론을 만나자 너무 억울해서 대들었다.

《목사님, 목사님은 어떻게 되여 다 헐어빠진 논다니를 붙여줍니까? 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논다니를…》

《다 헐어빠진 논다니라니, 허.》

한정상이 진저리까지 치자 알론은 엉큼하게도 너털웃음을 터치며 물었다.

《그러면?… 한정상, 자네는?…》

《저요?… 저… 하지만 전 저 계집만은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노, 노… 안돼. 너는 서약서를 쓰지 않았는가.

벌써부터 미국의 지시에 도전하려는가?》

알론은 유들유들한 상판에서 엉큼한 미소를 지우더니 랭엄하게 한정상의 반발을 눌러놓았다.

《그러면 목사님은?…》

《나로 말한다면… 우리는 다같이 미국이라는 거성을 받드는 미국의 노복들이야. 하느님은 곧 미국이라는걸 잊지 말아.》

《그렇지만…》

한정상이 온몸을 옥죄이는 알론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어 허둥거리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고 헛된 뒤발질을 해보이자 알론은 그제야 다시 히물거리며 한정상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었다.

《좋아, 좋아… 저 계집은 첩보대가 자네 색시감으로 문건에 올려놓은 녀자이기는 하지만 빠져나갈수 있는 길은 있다.》

《말씀하여주십시오.》

《성란희, 성란희를 자네것으로 만들어.》

《성란희요?… 그건…》

《왜?… 자신이 없는가? 그렇다면 하는수 없다. 저 녀자와 살아야 한다.》

《아니… 그건…》

《다시 말한다. 성란희를 깔고앉아. 계집 하나 후려내지 못하고서야 무슨 사내야.》

《그런데 그 녀자는…》

《이것도 <설봉>에게 주는 CIA의 특수임무로 접수해. 그 녀자를 징검돌로 해서 붉은 진지에 더 깊숙이 쳐들어가야 한다. 알겠는가? 괜히 너를 성란희를 따라 도꾜에까지 보내준줄 아는가. 이제 와서 물러설수 없어.》

지령을 내리는 알론의 상통에는 더이상 그 어떤 흥정이나 투정을 용납할수 없다는 잔인하고도 랭담한 경고가 서려있었다.

이렇게 되여 한정상이 이미 단념해버리려고 했던 성란희와의 관계는 미정탐계의 집요한 요구에 따라 다시 이어지고 한갖 도락이 아니라 한정상의 공작임무로 설정되였다.

결국 미국이라는 괴물이 끼여들어 이미 서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물러서야 하는 두 운명을 보이지 않는 바줄로 얽어매놓았던것이다.

한정상에게서 이 임무는 그 무엇에도 비할수 없이 달콤한짓이기는 하였지만 《임무수행》을 절대로 락관할수 없는 고달픈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정상은 드디여 방억세를 꺼꾸러뜨릴수 있게 됨으로써 《임무수행》에 막아나선 뿌리깊은 암초를 제거하게 된것이다.…

이렇듯 한정상의 운명은 십자가를 걸고다니는 미중앙정보국의 해묵은 구렝이인 알론에게 쥐여져있었다.

한정상의 이름은 벌써 어린시절부터 그도 모르게 미정탐계의 비밀문서고에 등록되여있었다.

한정상조차 알길없이 말려든 첩자생활이고보니 방억세도 성란희도 그 더러운 인간변질의 뿌리를 알바가 없었다.

따라서 방억세가 지금 말하는것도 그의 분석과 추리와 평가에 불과할뿐이였다.

부지불식간에 방억세는 성란희앞에서 그놈에게 그냥 욕설을 퍼붓고 더러운 락인을 꾹꾹 찍어놓는것이 미안해졌다. 그래 그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급급히 말을 멈추고 량해를 구하였다.

《아, 이거 안됐소. 란희동무,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따름인데 내가 좀 흥분했구만. 아직 나에게는 한정상을 미국의 첩자로 락인찍을수 있는 그 무슨 과학적인 근거는 없소. 그러니 내나름으로의 추측일뿐이요. 이것이 부질없는 한갖 억측이라면 물론 좋은 일이고…》

방억세는 처녀의 심경을 아무런 고려도 없이 마구 건드려놓은것이 때늦게 후회가 되여 변명조로 설명을 붙여놓고는 얼른 입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방억세의 그 알량스러운 례절이 오히려 처녀를 발끈하게 하였다. 성란희는 그때까지도 어둠속에서 꼭 잡고있던 사나이 손목을 허공에 던져버리며 분연히 소리질렀다.

《다시 말해봐요. 안됐다구요?! 한정상때문에? 그 너절한 작자가 내게서 뭐라구?!》

성란희는 매운 소리로 이렇게 쏘아버리고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흐느껴울기 시작하였다.

방억세는 뜻하지 않은 처녀의 세찬 도전에 당황하여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성란희는 몸을 흔들어 그의 손마저 뿌리치고 눈물에 반죽된 설분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아유, 기가 차! 난 왜 이렇게도 부실할가. 난 왜 소녀적 그 더러운 놈이 이름 석자 적어준 종이장에 꽁꽁 묶이워 한평생 속을 썩이며 살가.》

《아, 란희! 진정하오. 그건 무슨 당치않은 소리요.》

방억세는 처녀의 한맺힌 부르짖음에 어쩔줄 몰라 다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으나 성란희는 또다시 닁큼 놀라 몸을 떨어 치워버리였다.

그는 더욱 설음에 겨워 애절하게 소리쳤다.

《아직도 그 빠리식삼각련애예요?! 에, 신물이 나요. 케케 묵은 봉건! 비렬해요. 그 어리석음, 그 소심성…

당신은 한 처녀의 몸은 지켜주었지만 처녀의 마음은 지켜주지 못했어요.

어쩌면 그리도 사람의 진정을 받아주지 못하나요.

내가 정말 당신만을 그리워하고 당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는것을 당신은 모르나요?!

그래 상대는 마음이 걸레짝처럼 돼도 자기만 깨끗하면 다라는거예요?!

왜 나라위해 겨레위해 몸바치겠다고 나선 당신이 처녀 하나의 마음만은 지켜주지 못하나요.

난 당신때문에 온통 마음에 구멍이 숭숭 났어요.

난 벌써 오래전에 당신앞에서 대가집 규수의 자존심따위는 다 버렸어요. 당신은 내게서 뭘 또 바래요? 내가 더 가엾은 꼴로 당신 바지가랭이에 매달리는걸 정히 보고싶어요?!

당신은 한정상을 나쁜 놈이라고 타매하면서도 우야 나를 그놈의 곁에 나란히 세워주고싶어 안달이군요.

그래 이 성란희를 그예 나쁜 놈에게 제물로 바치겠다는거예요?

성란희라는 녀자는 간특한 승냥이의 먹이로 던져져도 당신은 아까울게 없다는거예요?!》

처녀의 속에서 마구 뿜어오르는 피방울같은 절규가 점점 높아가는데 밖에서 기침소리가 나고 발자국소리가 가까와졌다.

정수철이 초막에 대고 나직이 일깨워주었다.

《성동지, 목소리가 지내 높습니다.》

다시 정수철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가고 멀리에서 잦은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성란희는 그냥 가빠오르는 숨소리를 죽이느라고 씨근거렸다.

방억세는 처녀의 타는듯 한 목소리가 커갈수록 심장이 후두둑거렸다.

성란희의 가슴치는 오열이 어느 한 갈래도 그릇됨이 없고 절절해서 반론을 해볼나위도 없다.

때늦은 후회가 비로소 귀전을 때리고 심장을 뒤흔들었다.

나야말로 사랑에서는 눈뜬 소경이였다. 나야말로 처녀의 마음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기보신의 울타리에 갇혀 살아온 리기주의자이고 위선자였다. 내가 어찌 세상에 둘도 없을 란희 같은 처녀의 사랑앞에서 랭담할수 있겠는가.

그는 가슴저미는 속죄를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는지 몰라 그의 어깨에 두손을 얹었다.

그리고 처녀를 슬그머니 끌어당겨 가슴에 안으며 속삭이였다.

《란희, 날 용서하오. 난 정말 어떻게 용서를 빌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구만. 내게는 란희가 너무 과남한 처녀였소. 모든것이 그러했소. 란희와 나란히 있고픈것이 소원이기도 했지만 그건 내게서 바라볼수 없는 신기루와 같게 생각되더란 말이요. 정말이요.

그리고 란희가 내 사람이 되면 뒤날에 후회가 생겨날가봐 두려웠소. 그래 제 욕심만 챙기면 안된다고 란희에게로 달려가는 마음을 다잡군 했소.

당신네 70칸 대가집이 우리 동요를 받아들인것도 쉽지 않은 용단이였는데 당신을 어찌 가난뱅이에다가 나라에 몸바쳐나선 나한테 붙잡아놓을수 있겠소.…

빠리식이요, 한정상이요 하는것도 물론 내 발목을 잡은것은 사실이였지만 그건 당신께로 내달리는 내 마음을 비끄러매기 위하여 내자신이 만들어낸 포승이고 족쇄였소.

결국 난 맹과니였구 자승자박이 되여 란희의 깨끗한 마음에 노상 서리를 치게 하고 란도질만 하여왔소.… 이 불민한 사내를 용서해주오.》

《난 사실 당신을 사랑하라는 빨찌산지휘부의 명령을 받았어요.》

《사랑하라는 명령…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뚱딴지가 아니예요. 주경남대장이 엄숙하게 내린 명령이예요.》

《허…》

《왜 웃어요. 명령이예요. 내가 만약 딴 사내품에 들면 통일위업이 승리한 다음 명령위반죄로 빨찌산심판대에 올려놓겠다는 경고도 받고요.》

《저런!… 어마어마한 경고구만. 언제적 고담이요?》

《고담이라니요?! 정말이예요. 주경남대장동지가 흑토골로 떠나시기 전날 밤이였지요. 제가 찾아가서 방억세의 변절이 정말인가고 따지고드니 그분이 처음에는 떨떨해지더군요. 한정상이 그날 우리 신문에다가 방동지의 배신을 기정사실로 규탄하는 글을 실었거든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니 더구나 떨떨해있다가 느닷없이 그런 명령을 하시는게 아니예요. 내가 뭘 더 알아보고싶어 하자 내쫓으면서 그렇게 엄하게 경고하지 않겠나요.》

《음… 그런 일이 있었구만!… 대장동지!… 참 뜻이 높고 인정이 깊은분이였는데…》

《그게 저와 만난 마지막밤이고 마지막말이였어요.》

《음… 참,… 난 아마도 그런 훌륭한 동지를 다시는 옆에 두고 살지 못할거요! 초당파적으로 무어졌던 태백산항일죽창대가 붉은기를 자기의 표대로 추켜들도록 방향전환에로 이끌어준분은 바로 주경남동지였소.》

《아, 그렇군요.》

《내가 백두산에로 김일성장군님의 지도를 받고싶어 세번째로 파견한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주경남동지가 나를 찾아왔던거요.

그때로부터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사상과 리념을 알게 되였고 조선혁명가의 심장을 지니고 항일혁명과 통일위업의 길을 곧바로 걸어왔던거요.》

《참말로 주경남대장동지는 잊을수 없는분이예요.》

두사람은 이제는 고인이 된 귀중한 동지를 추억하며 잠시 묵상에 잠겨있었다.

《그런데… 이제 당신에게 용서두 빌구 그분들의 명령도 집행하자니 때가 늦었구만.》

방억세가 주경남대장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며 못내 처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나 성란희는 그 소리를 이미 예상하고 기다린듯 인차 받아넘겼다.

《왜 늦었어요? 이제라도 결혼을 하면 되지 않나요.》

《결혼?… 허… 》

《왜 웃어요. 언제? 어디서?… 이것이예요?… 당신은 언제나 이런 일에서는 생각이 나보다 한발 모자라요. 이봐요. 이제 당장 하자요. 여기서요.》

《뭘?… 허…》

《왜 웃기만 해요. 결혼이 별거나요. 우리 서로 백년해로하겠노라 언약하면 그게 결혼이고 부부지요. 우린 벌써 빨찌산지휘부의 명령을 받지 않았나요. 그 의로운분들의 축복을 말이예요.

그분은 우리의 결합을 혁명의 이름으로, 애국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지 않았나요. 난 오늘 이자리에서부터는 당신을 저의 남편으로 섬기고싶어요. 당신네 방씨가문족보에 제 이름을 올리고싶어요. 예, 그렇게 하지요?!》

《안돼, 그렇게 해서는 안돼. 란희가 불쌍해져. 그건 불행이야.》

방억세는 그의 어깨를 흔들며 웅글은 어조로 맺고 짤랐다. 그럴수록 성란희는 모닥불처럼 확 타오른 애욕을 애인에게 끼얹으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런 말 말아요. 불행해도 내 팔자예요! 란희의 운명이예요. 란희는 후회하지 않을거예요. 하루를 살아도 당신과 보냈다면 난 먼 뒤날 눈을 감을 때 일생을 돌아보며 행복해할거예요.》

《안돼. 그래서는 안돼. 란희는 꽃피는 시절이야. 앞날을 봐서도 안돼!》

《방억세가 없는 란희의 앞날은 없어요!》

《안돼! 안돼!》

방억세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처녀의 어깨를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가슴을 통하여 뭉클 전해오는 뜨거운 사랑의 전류가 사나이의 온몸에도 흘러들어 정열의 재무지에 불을 솟구고 무한한 애정의 심연속으로 몰아갔다.

두사람의 마음과 마음은 어둠속으로, 출렁이는 사랑의 바다에로 깊숙이 빨려들어갔다.

란희는 꿈을 꾸고있었다. 달콤하고 행복한 꿈이였다.

안해가 되고 엄마가 되는 꿈이였다.

자기는 귀여운 아들을 안고 푸른 비단을 두른 마차에 올라있었다. 앞에서는 밤빛갈의 호마 세필이 온통 꽃바다인 들길을 경쾌하게 달리고있었다.

《휘여! 어서 가자!》

마부석에 앉은 방억세가 갑옷을 두르고 회초리를 허공에 날리며 유쾌하게 호령한다. 아스란히 뻗어간 들길이 끝나갈무렵 문득 가마마차를 끌던 호마들은 사라지고 마차는 흰구름우에 두둥실 실려가기 시작하였다.

《어데로 가나요?》

귀여운 아들애가 은방울 굴리는듯 한 소리로 물었다.

《이 세상 끝까지… 거기에 아버지의 나라가 있단다!》

《거기에 뭐가 있나요?》

《붉은기가 있단다. 붉은기가 펄펄 날리는 하늘나라다!》

란희는 환희에 넘쳐 즐겁게 대답하였다.

《야, 좋다! 하늘나라에 어서 가자!》

아들애가 환성을 지른다.

《기분이 어떻소?》

방억세가 란희에게서 아들애를 받아안고 버쩍 추켜올리며 묻는다.

《좋아요! 어서 가자요! 빨리 가자요!》

란희가 기쁨에 넘쳐 소리치는데 마차가 흔들렸다. 누가 흔드는가, 어느 놈이 우리 길을 가로막을가. 그런데 마차는 그냥 흔들렸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성동지, 날이 밝습니다.》

그것은 정수철의 목소리였다.

정수철이 초막문을 가볍게 두드리고있었던것이다. 란희는 달콤한 미소를 거두지 못하고 그 감미로운 꿈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싫어 잠자리에서 쉬이 일어나지 않은채 궁싯거렸다.

《성동지, 날이 밝습니다. 이제는 떠나야 합니다.》

정수철은 다시금 도닥도닥 문을 두드리며 약간 급하게 일렀다.

(떠나다니… 어디로…)

란희는 그제야 눈을 떴다. 초막안은 아직도 깜깜하다.

(날이 밝다니… 내가 지내 잤구나.)

란희는 새까만 어둠속에서 눈을 뜨고 천정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간밤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란희는 황홀하고도 상쾌한 기분에 잠겨들었다.

자기가 언제 잠들었고 언제 이렇게 아름다운 꿈나라에 들었는지 기억되지 않았다. 방억세가 잠이 든 다음에는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 내내 그의 머리맡을 지키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칼을 쓸어보며, 수염발이 잡히는 볼을 쓰다듬으며 애무를 즐기고 녀인의 행복에 취해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방억세가 다시 일어나 쪽잠에 든 자기를 자리에 눕혔던 모양이다.

(가만, 날이 밝는다고 했지.… 그러니… 빨리 자리를 뜨게 해야지.)

란희는 이 생각이 들자 금시 달콤하게 젖어들던 뭇생각들이 부신듯이 사라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앉아 흩어진 머리칼부터 손부리로 쓸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이제 시작될 행동방향을 그어보았다.

《이봐요, 일어나세요.》

성란희는 나직이 속삭이며 옆자리를 더듬었다. 그런데 손에 잡히우는것은 새초뿐이였다. 방억세는 자리에 없었다. 그 녀자는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찌된 일인가?…

그는 얼른 어둠속에서 더듬어 겉옷을 주어입고 초막문을 열었다. 과연 수림속이 푸름푸름 해왔다. 그는 초막을 나서자 자기네를 지켜주고저 간밤 지새운 정수철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약간 수집게 얼굴을 붉히며 아침인사를 하였다.

《정동무, 미안해요. 제가 너무…》

《아니, 일없습니다. 대장동지는 먼저 떠났습니다.》

《떠나다니요? 어디로요? 》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떠나면 피차에 좋지 않을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떠난 후 한시간후에 깨워서 근거지에서 떠나게 하라고 일러줍디다.》

정수철은 이렇게 말하며 불안한 얼굴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래요?…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정동무는요?》

《저야 뭐… 대장동지는 큰사람이고 큰일을 맡은분이 분명합니다. 나 정수철은 그 큰일을 위해 기꺼이 고임돌이 되고저 합니다. 이것이 장밤 제가 궁리하던 끝에 내린 결심입니다. 그리고 제 일생의 제일 큰 수치를 씻는 길입니다.》

《정동무… 고마와요. 하지만 자기를 너무 학대하는것도 부질없는 일이예요. 지나간 일이라고, 어지러운 꿈 한번 꾸었다고 속 편히 생각하세요. 우리는 정말 정동무가 고마와요. 이번 일에 정동무가 나서준게 불행중 다행이였어요. 제가 방억세대장의 마음까지 합쳐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성란희는 자기들부부의 은인이 되여준 정수철앞에 곱게 무릎을 꿇고 앉은절을 하였다. 그러자 정수철이 당황해하며 그의 팔소매를 부여잡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 한생에서 다시 없었던 과오를 씻는겁니다. 인사는 대장동지와 성동지에게 제가 드려야 합니다. 제가 맹과니가 돼서 놈들의 롱락물이 되고 그래서 대장동지신변이 이렇게 위험하여졌으니 늦게나마 목숨을 걸고 저를 뉘우치는겁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대장동지는 자기가 한발 먼저 떠나는데 앞뒤의 표적이 되였으니 거처를 잡는 문제는 가면서 심중히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자기를 찾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동지도 당분간 서울에 가지 말고 적당한 곳에 피신하여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성동지 역시 이제는 앞뒤쪽에서 포승줄을 지우자고 벼를것이라는겁니다. 만약 자기를 정 찾을 일이 있으면 오빠에게 물으라고 하였습니다. 떠나면서 이걸 전해주라고 하였습니다.》

정수철은 이렇게 또박또박 방억세의 말을 전해주고 그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성란희는 새벽빛속에서 방억세가 종이에 남긴 글을 눈앞에 가까이 펴들고 눈에 통채로 새겨넣듯 한자한자 더듬어보았다.

거기에는 짤막한 시 한수 적혀있었다.

구절구절에 뜻과 열이 번쩍거리는 시구를 걸탐스럽게 뇌리에 삼켜넣으며 성란희는 다시금 방억세에 대한 자랑과 한없는 애모에 휩싸였다.

성란희는 여러번 곱씹어 읽었다.

읽을수록 그 의미가 새롭고 깊어진다.

짤막한 시구는 그대로 방억세의 목소리요, 얼굴이요, 맥박이였다. 거기에는 붉은기앞에서 선서를 다지는 숭엄한 모습이 있었고 사형을 선고하는 간특한 원쑤앞에서도 허리굽힘이 없던 불굴의 의지가 있었다.

이 장한 뜻, 이 도도한 기개, 이 무한의 정열…

내 그이를 따라서지 못한다면 내 어찌 이 나라의 뜻 가지고 사는 녀인이랴. 성란희는 자기의 가슴에도 사나이의 억세고도 열렬한 기백과 숨결이 세차게 흘러드는듯싶었다.

자기의 작은 심장도 이 고결한 인간의 순결하고 거창한 심장에 이어져 더 힘차게 고동치는것 같았다.

성란희는 방억세의 필적이 담긴 그 소중한 종이를 차곡차곡 접어 주머니에 정히 건사하고 정수철에게로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정동무!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어서 떠나자요!》

《아닙니다. 제가 떠나서는 안됩니다. 난 죽어도 이 대오에서 죽고 살아도 이 대오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동지, 어서 떠나십시오. 더 지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아침바람에 그 뱁새눈이 올수 있습니다. 그게 소동을 벌리기 시작하면 성동지가 빠져나가기 힘들수 있습니다.》

정수철의 대답은 단호하였고 사리정연하였다.

성란희는 장밤 생각한 끝에 내리게 되였다는 정수철의 결심을 돌려세우기 힘들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를 남겨두고서는 차마 발길을 옮길수가 없었다.

한정상이 어제 저녁에 되게 을러멘것이 있다. 《배신자》를 놓아주면 배신자로 벌을 받게 될것이라고 엄포를 놓은것이다.

정수철이 여기에 남는다면 그의 운명은 너무도 뻔하다.

그래 그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간곡하게 권하였다.

《정동무, 함께 떠나요. 여기에 홀로 떨어지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동무도 잘 알지 않나요.》

《각오하고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피는 헛되지 않을것입니다. 나는 그걸 믿습니다. 그리고 내게는 임무가 있습니다.》

《임무라구요? 무슨 임무예요. 누가 준 임무예요?》

《대장동지가 떠나면서 저에게 남긴 부탁입니다. 난 그것을 대장동지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내스스로 내세운 임무이기도 하지요. 저는 우리 빨찌산대오에 박혀있는 그 <설봉>을 잡아내야 하겠습니다. 저까지 사라지면 그놈이 그냥 여기에 틀고앉아 못된짓을 할게 아닙니까. 저도 함께 떠나고싶기는 합니다만 각자에게는 제가 할만 한 소임이 있는 법이지요. 그래서 방억세대장동지와 함께 떠나고싶었지만 남았습니다. 대장동지는 그놈을 꼭 잡아내야 한다고 부탁했습니다.》

《정동무!》

《야, 빨리 떠나십시오. 날이 지내 밝기 전에 한걸음이라도 빨리 근거지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어서요.》

정수철이 다급하게 독촉하였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고 더 어물거릴 형편이 아니였다.

이러니저러니 하는 사이에 숲속에 어둠이 가셔지고 잠을 깨친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성란희는 하는수없이 눈물을 머금고 그의 손을 잡았다.

《하나 부탁해도 될가요?》

정수철이 그의 손을 잡은채 머밋거렸다.

《어서 하세요. 아무거라도 하세요. 다 좋아요. 정동무의 부탁이라면…》

성란희는 정수철의 부탁이라면 이 순간 이 땅 한밑에 있는 보석이라도 파올 심정이 되여 기꺼이 받아주었다.

《저… 인천에 가면 팔미도에 저의 처가가 있습니다. 거기에 두살난 저의 아들이 있습니다. 장인, 장모는 이제는 늙고 병약해서 처형되는이에게 얹혀있을겁니다. 처형살림도 궁하기 그지 없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정동무, 걱정마세요.》

성란희는 정수철의 부탁의 의미를 알아듣고 얼른 받아들였다.

《제가 키우겠습니다. 내가 정 키울수 없는 형편이라면 어머님께 부탁하여 우리 집으로 아예 데려오겠습니다. 제 성의껏 거두어주다가 정동무가 산에서 내려오게 될 때에 정동무앞에 자랑스럽게 내세워주겠습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성동지, 고맙습니다.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정수철은 그에게 손을 들어 빨찌산식으로 인사하였다.

성란희는 그에게 손을 저으며 골짜기를 넘어 앞산의 비탈길을 톺아올랐다.

성란희가 산등성이에 올라 마지막으로 초막을 향하여 손을 젓고있을 때였다.

《땅-》

돌연 그쪽에서 한방의 되알진 권총소리가 울렸다.

성란희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초막쪽을 더듬었다.

방금전까지 자기쪽을 향해 서있던 정수철이 보이지 않았다.

성란희는 삽시에 눈물이 그렁하여졌다.

자결로 혁명앞에 자신의 결백과 량심을 지키고저 한 모양이다!

자결로써 자기 동지들의 앞길을 지켜준것이다. 아니?…

그는 방억세대장에게서 받은 임무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저 총소리는?…

무작정 그를 끌고와야 했다는 후회가 가슴팍을 호되게 때렸다.

성란희는 그쪽을 향하여 잠시 고개를 떨구고있다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릉선을 타고 넘었다.

그는 걸음을 다그치면서 가슴을 에여내는 비분을 짓씹어버리듯 소리내여 방억세가 남기고간 시를 읊었다.

 

세월의 눈바람에

흔들림 있으리오

세월의 단비에

굽힘이 있으리오

 

해와 달 흘러흘러

고목이 될지언정

천년바위 뿌리박고

만년토록 우뚝 서리

 

-> 이 도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적보호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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