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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인생은 승부다툼이 아니다
그들은 사흘만에 쌍매골에 도착하였다. 그 사흘동안 세사람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자기 생각들에 잠겨 숲속길을 헤쳤다. 알고싶은 사연, 하고싶은 말이 세사람 다 많았지만 서로 아픈 속을 건드려놓을가봐 자제하였다. 그들은 전방보초소가 있는 쌍매골앞산에서 어두울 때까지 숨어있었다. 방억세가 자기의 도착을 아직은 비밀에 붙여달라고 부탁하였던것이다. 성란희도 대낮에 방억세를 앞세우고 근거지에 들어서기 싫었다. 그는 쌍매골안이 어둑시그레해질무렵까지 숲속에서 지내다가 전방보초소에 방억세를 남기고 정수철과 함께 골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오철규대장은 아침녘에 근거지를 떠났다고 하였다. 멀리 속초경찰서에 여러명의 대원들이 구금되였다는 소식이 와서 한개 중대를 데리고 부랴부랴 근거지를 떠났다는것이였다. 그 소리를 듣자 성란희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일이 틀어질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앞섰다. 성란희는 지금에 와서 방억세를 굳이 믿고있었다. 모든것을 종합하여볼 때 방억세는 무엇인가 자신을 당당히 옹호할수 있는 보다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있는것이 틀림없다. 아무렴!! 성란희는 오철규와 마주세워놓으면 비록 그들이 초면이기는 하지만 빨찌산지휘부의 의심은 풀려질것이고 따라서 결정도 취소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철규가 없으니 방억세를 누구에게 내세워야 할가. 한정상에게… 그 결과는 불보듯 명백하다. 그는 단박에 눈부터 부라리고 당장 결정을 집행하라고 몰아댈것이다. 그리고 방억세도 그와는 만나려고 하지 않을것이며 빨찌산의 운명과도 직결되여있다는 중대통보도 하지 않을것이다. 성란희는 속에 재가 차서 정수철과 오랜 시간을 상론하였다. 정수철도 그 어떤 예감이 있었던지 한정상과 맞세워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손을 내흔들었다. 《대장동지가 올 때까지 도착보고를 하지 맙시다. 기다립시다.》 성란희는 그게 궁여지책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잠시 생각을 굴려보고나서 도리질을 하였다. 오늘 아침에 떠난 대장이 돌아오자면 한주일이 걸릴지 열흘이 걸릴지 모른다. 전우들이 서울에 이송된다는 소식에 급해맞아 서둘러 떠난 길이라고 하니 전투는 지체하지 않고 인차 할수 있겠지만 가는 걸음보다 오는 걸음이 늦어질수 있다. 그런데 그때까지 좁다란 골짜기에서 숨어지낼수는 없다. 전방보초소가 자기들의 도착을 알게 된 조건에서 아무튼 오늘 밤중으로는 도착보고를 해야 한다. 하는수없이 성란희는 정수철과 함께 정치부에 가서 한정상에게 도착보고를 하였다. 예견하였던대로 본인의 강한 요구에 따라 방억세가 함께 왔다고 하자 한정상은 대뜸 그 뱁새눈을 치뜨고 길길이 뛰여올랐다.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부서지라 내리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정신들이 있고 한짓이요? 배신자를 뭣때문에 근거지에 끌고온단 말이요. 본인의 요구라니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요. 상소해보자는거요? 천만에! 반역자에게는 죽음만이 차례질뿐이요. 당장 가서 총살해버리시오. 동무들이 목건사하고 돌아온게 다행이요.》 《끌고온게 아닙니다. 본인은 지휘부에서 자기를 심판하고 처형할것을 강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성란희는 대바람에 찬바람을 일구며 턱자없이 고아대는 한정상의 태도가 예상했던바 그대로였으므로 크게 놀라지 않고 랭담하게 대답하였다. 《한심하구만, 한심해. 동무들이야 오랜 빨찌산인데 명령이 뭐라는걸 알아야 될게 아니요. 더 긴말할게 없소. 오늘 저녁중으로 쏴버리시오. 난 바쁘오. 동무들과 긴말할새가 없소. 명령을 집행한 다음 그 결과를 저녁 10시전으로 보고하시오.》 한정상은 성란희가 더 말을 붙여볼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듯 펴놓고있던 문건을 신경질적으로 넘기기 시작하였다. 《근거지에 구류해놓은 사람인데 처형하는게 급할거야 없지 않습니까. 대장동지가 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뭐요? 명령은 이미 지휘부가 심중한 론의끝에 눌러놓은거요. 흥정할 여지가 없단 말이요! 오철규대장은 명령집행을 나에게 위임하고 떠났소. 대장이 부재중인 지금 결론권은 나에게 있소. 집행하시오.》 한정상은 더럭 화를 내며 고함쳤다. 그러자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한정상을 지켜보던 정수철이 밸머리가 살아오른듯 결이 올라 대꾸하였다. 《저는 성란희소장동지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처형하는것이 뭐가 그리 급합니까. 그 사람이 지금 보초소에 갇혀있는데… 대장동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게 좋을듯싶습니다.》 《그러다가 그놈이 도망치면 어떻게 하겠소. 방억세가 어떤자라는걸 동무들이 몰라서 하는 수작이요? 당신따위는 열이라도 당해내지 못한단 말이요.》 《그는 도망치지 않을겁니다. 저는 그 사람을 잘 압니다.》 《이건 처형하라고 보냈더니 배신자에게 포섭되여왔군.》 《뭐라구요?!》 정수철은 한정상이 그냥 곧은목을 휘두르다가 이제는 자기들에게까지 함부로 루명을 씌우려고 하자 사납게 대들었다. 그는 한정상의 고집이 리해되지 않았다. 방억세의 말이나 거동을 보면 확실히 심중한 문제가 있는것 같다. 그런데 왜 정치부를 림시로 책임졌다는 사람이 이렇게 경솔하게 그를 한번 만나보겠다는 소리도 없이 그저 무턱대고 생나무꺾듯 처형소리만 하면서 안달복달이야. 《만약 그자가 도망치면 어쩔테요?》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정수철은 선듯 대답하였다. 《동무 목을 내놓는다구? … 동무 목 하나로 될것 같은가. 그 후과는 그 무엇으로도 대가를 치를수 없단 말이요.》 한정상이 그를 무시하듯 고개를 떨자 정수철은 더는 자기를 다잡을수 없어 신경질적으로 대거리를 하였다. 《난 정말 리해되지 않습니다. 대장동지 아니, 방억세는 지휘부에 통보할 문제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한번 만나자는 말도 못합니까. 이거야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가 통보하고저 하는 문제는 우리 빨찌산의 운명과도…》 《소대장동무…》 성란희가 정수철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한정상을 만나게 하는것도 께름한 일이지만 자기들에게도 꺼내놓지 않은 《통보》를 방억세가 한정상에게 말해줄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한정상에게 《통보》라는 말을 꺼내놓은것부터 승냥이에게 또 맛스러운 먹이감을 냄새맡게 한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인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가 통보할게 있다는 소리에 한정상의 뱁새눈에 써늘한 빛이 희번쩍거리다가 인차 사라지고 야릇한 미소가 비꼈다. 당장 상대의 가슴팍에 총부리라도 들이댈듯 사납게 날치던 한정상은 쉽게 한발 물러서서 다소 가라앉은 소리로 받아주었다. 《통보할 문제가 있다는거지… 좋소. 그렇다면 여기로 끌고오시오. 내가 이제 만나보겠소.》 《한동지가요? …》 성란희는 의심쩍은 눈매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 … 소장동무의 눈에는 이 정치부 대리책임자가 눈에 차지 않소?》 성란희는 《그래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으나 가까스로 참아내고 여전히 예리한 눈초리로 한정상의 얼굴을 깔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찌된 일이요. 성동무?… 동무는 어째서 빨찌산의 규률과 사업체계를 놓고 저울질을 하오. 대장이 부재중인 지금 지휘부사업을 누가 책임지게 된다는걸 모르고있소, 모르는척 하오? 정동무, 그자를 끌고오시오. 그자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봅시다. 난 동무들이, 특히 정수철소대장동무가 어찌하여 자기 가슴팍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던 배신자를 두둔하는지 모르겠구만.》 한정상은 성란희에게 자기의 지시가 먹어들것 같지 않자 정수철의 가슴에 맺혀있던 한을 슬쩍 긁어주며 부추겼다. 그러나 기대했던바와는 달리 정수철도 록록치 않게 나왔다. 《이건 두둔이 아닙니다. 문제를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만약 본인이 한정상부책임자동지와 만날것을 사절한다면요? …》 《그때는? … 쏴버리고 오시오. 총은 괜히 가지고있소? 만약 동무들이 10시전으로 처형하지 않으면 동무들은 물러나시오. 명령집행은 경비중대에서 하게 될거요. 물론 동무들의 문제도 따로 보게 될거구.》 한정상은 그 뱁새눈을 표독스럽게 굴리며 씹어뱉듯 말을 던져놓았다. 성란희는 한정상의 소리에 또 하나의 위구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한정상이 이제라도 자기들의 어깨너머로 방억세를 없애치우려고 덤빌수 있는것이다. 그래 성란희는 저으기 속이 급해나서 한정상을 한발 앞서 정수철에게 지시하였다. 《됐어요. 소대장동무, 이제 곧 전방보초소에 가서 방억세를 데려오세요.》 《알았습니다.》 정수철은 성란희의 지시에 두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정수철이 초막에서 나가자 한정상이 성란희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란희, 앉소. 고생하고 온 동무를 세워놓고 욕설부터 했는데 미안하오. 정수철이도 있는 자리라 내 체면도 세워야 될게 아니요.》 한정상의 눈과 입가에 그 인상적인 미소가 살살 피여올랐다. 말씨도 속에 젖어들듯 더없이 낙낙해졌다. 《우리가 방억세와 한두해를 살아왔소? 인정으로 보면 안될 일이지만 어쩌겠소. 이건 혁명규률이 아니요. 이렇게밖에 할수 없는 나를 리해하여주오. 방억세에 대한 기소내용은 다 객관적이고 다 론박할 여지가 없단 말이요. 나라고 마음이 편한줄 아오? 지휘부가 그런 결정을 내릴 때 난 하마트면 대장동무에게서 배신자를 변호하는 공범자로 오해를 살번 했소.》 한정상은 굳어진듯 입을 다물고있는 성란희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옹색하게 변명을 하였다. 한정상은 자기의 아량있는 설명에 대한 처녀의 반응을 타진해보았으나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자 열을 내서 넉두리를 이어갔다. 《란희, 이젠 여기 일을 마무리지을 때가 되지 않았소? … 난 대장동무에게 이미 이야기하였소. 이젠 란희동무를 나이도 있고 본인이 힘겨워도 하므로 하산시켜 모금공작을 책임지게 하자고 말이요. 대장동무도 반승낙은 했소. 동무가 동의하면 그렇게 누릅시다. 집의 어머님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소. 오빠들도 물론일거구. 그리고… 동무가 하산한다면 불원간에 나도 산속생활을 정리하구 지하사업에로 다시 돌아설가 하오.…》 성란희는 말마디에 정을 찰찰 고여가지고 섬기는 한정상의 동정어린 권고에 구토감을 느끼였다. 속이 빤드름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다. 방억세까지 모살해버리면 성란희라는 녀자는 올데갈데 없는 제것이라는 흉칙한 속말이 짚이우자 성란희는 발끈해졌다. 그리고도 그 입에 혁명이라는 고귀한 언사를 담는 이 인간이야말로 얼마나 철면피한가. 성란희는 무엇인가 애타는 기대가 반짝거리고있는 뱁새눈을 쏘아보며 싸늘하게 면박을 가하였다. 《한정상동지, 동지는 한시절에는 동지였던 인간을 불행에 빠뜨려놓고 거기서 자기 리속을 챙기고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만해요. 그건 비렬한짓이예요. 그리고 내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어요.》 《차, 이렇다구야. 언제나 바늘끝이로군. 너무 그러지 마오. 난 당신을 기다리기에 지쳤소. 우리가 서로 알게 된게 언제요? 나도 동무도 숱한 세월을 넘기며 늙으신 부모님들에게 죄를 짓고있소. 그간 곡절도 많았지만 하여튼 우리는 남다른 정을 가지고 항상 가까이에서 살아오지 않았소. 내가 해방전에 죽창대에 오른것도, 해방후에 일본에 파견된것도 사실은 동무를 따라갔던것이라는걸 동무도 알지 않소.》 《됐어요!》 성란희는 그냥 지저분하게 쏟아지는 한정상의 넉두리에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어 새된 소리로 가로챘다. 그냥 도깨비바늘처럼 바지가랭이에 묻어다니며 자기의 순결까지 어지럽히는 그가 괘씸하기도 하였다. 그래 성란희는 일부러 심술궂게 대답을 주었다. 《난 한동지를 내 련인이라고 생각해본 일은 한번도 없어요. 도대체 우리가 언제 미래를 약속했다는거예요. 동지는 철없던 소녀시절의 한토막 련애담에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있는것 같은데 그건 소꿉장난에 불과한 어리석은 놀이였어요. 난 지금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봄날에 지나간 어지러운 꿈처럼 느껴질뿐이예요. 거기에는 추억해볼만 한 한푼의 가치도 없어요. 동지는 처자를 가진 남편이고 아버지가 아니예요. 란희라는 녀인이 동지 눈에는 그렇게 비천해보이나요?》 성란희의 분명하고도 독기가 서린 대답에 한정상의 그 뱁새눈이 한번 둥그래지더니 거기에서 소름끼치게 하는 빛발이 번쩍거렸다. 그는 면전에서 당하는 모욕과 수치에 얼굴이 금시 수수떡처럼 벌개가지고 그 뱁새눈으로 성란희를 노려보았다. 성란희도 사내의 그 서슬찬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 쏘아보았다. 《흥!》 미구하여 한정상이 코김을 뿜어던지더니 빈정거리듯 뇌까렸다. 《좋소. 난 당신을 위해 처자까지도 다 버렸소. 두고봅시다. 언젠가는 란희가 내 발밑에 제 몸뚱이를 던질 때가 오지 않는가. 난 정말 당신을 사랑해왔소. 미칠듯이 말이요. 난 포기하지 않을테요. 난 10년이고 20년이고 그때를 기다릴거요.》 《당신이 날 기다려왔다거니, 사랑한다거니, 처자까지 버렸다거니 하는데 대하여서는 난 개의치 않을거예요. 그건 당신의 자유고 당신의 권리사항에 속하니 걷어치우라고 내가 소리칠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당신두 알아둬요. 내가 누굴 좋아하는가, 누구에게 정을 주고싶어 하는가, 누구의 발밑에 제 몸뚱이를 던지는가 하는것은 나의 권리고 자유라는것을 말이예요.》 《흥! 당신에겐 다른 선택이 없을걸. 명백히 말할진대 난 당신에게 내 일생을 투자할 결심이요.》 《흥! 사나이일생이라는게 고작해야 녀자의 몸뚱인가요?… 그리구 명심해요.》 한정상이 배포유하게 지껄이자 성란희는 주저없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였다. 《20년이 아니라 백년이 지나도 성란희는 한씨가문에는 발을 들이밀지 않을거예요. 당신은 차버린 불쌍한 안해나 돌봐주세요. 이건 진심이예요. 정 고집이면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요. 우리 오빠는 적어도 사령관을 해요. 당신 형님은 뭘 해먹는다고 했더라?… 오라, 당신이 말했지요. 산골 장마당을 뚜져먹는 세금징수원…》 그 녀자는 수닭처럼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상대의 비위를 콕콕 찔러대다가 피식 웃었다. 한정상이 녀자의 조롱을 그냥 들어주기가 거북하여 눈을 지릅뜨고 또 뭐라고 냅다 쏘려고 하는데 초막문이 벌컥 열리였다. 그리로 방억세가 성큼 들어섰다. 그뒤로는 정수철이 엉거주춤 따라들어왔다. 서로 가시박힌 조롱으로 상대의 얼굴에 흠집을 만들어주고있던 두사람은 방억세가 바깥의 찬바람을 몰고 들어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억세는 방안가운데 한정상이 앉아있다가 일어나는것을 보자 문어귀에서 우뚝 멈춰섰다. 한정상을 쏘아보던 눈길이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정동무? …》 방안에 한정상과 성란희만 마주하고있다는것을 확인한 방억세는 정수철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그 어떤 상서롭지 않은것을 예감한듯 격분한 어조로 단호하게 요구하였다. 《나를 대장동지 방으로 안내하여주오.》 《대장동지는 출전하였습니다.》 《그러면 정치위원방으로…》 《정치위원?》 정수철은 연방 다그쳐대는 방억세의 물음에 대답을 미처 못하고 성란희에게로 눈을 보냈다. 그러나 성란희도 정수철의 눈길을 외면하여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걸상을 들고 방뒤구석의 어둑한 곳에 가서 자리잡고 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드리웠다. 한정상이 그 침묵에 위압되여있다가 용기를 내여 나섰다. 《가만, … 저자에게 걸상을 가져다주시오.》 이렇게 뇌까리는 한정상의 상판에 승리자연한 미소가 물결쳤다. 정수철이 얼른 방억세에게 걸상을 조심히 놓아주었다. 방억세는 여전히 행여나 하고 방안의 이구석저구석에 눈길을 굴렸으나 그가 찾는 사람들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어찌된 일인가? 한정상이와 마주서다니… 이럴수가 있는가?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은 왜 몸을 사리는가?… 이럴수 있는가? 방억세는 순식간에 가슴을 채우는 분노와 실망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주경남과 정치위원과 마주서면 모든것이 단판으로 풀릴것이라는 생각에 자신만만하게 근거지로 들어왔던것이다. 그런데 어찌되여 한정상과 마주서게 되였는가? 이 무슨 괴이한 운명의 지꿎은 장난이냐?! 한정상이 쓰겁게 웃으며 뱁새눈을 반짝거렸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비꼬듯 뇌까렸다. 《누구를 찾는다고?… 이 방의 주인은 나요. 그리고 당신을 불러들인것도 나요. 당신 명줄은 내 손에 걸려있소.》 《난 주경남대장을 찾아왔소. 그리고 정치위원도 말이요.》 방억세는 무엇인가 사태가 험악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보다 위험한 함정에 제발로 빠졌다는 때늦은 후회가 뒤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하하!》 한정상이 고개를 들더니 천정을 향하여 큰소리로 허풍을 떨며 웃어댔다. 그리고는 정수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기고만장해서 소리쳤다. 《흥… 여보 정동무, 동무네가 주경남대장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서 한마디도 얘기한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활하구만. 당신이 찾고있는 주경남대장동지와 정치위원동지는 잘못되였소. 물론 당신이야 그걸 알고 왔겠지.》 《뭐라구?… 그게 무슨 소리야?!》 방억세가 가슴 섬찍한 비보에 와뜰 놀라며 물었으나 한정상은 랭담하게 말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왜 잘못되였는가?… 그에 대하여서도 이제 당신이 고백해야 할거요. 그건 그거고 통보할것이 있다고 한다는데 그것부터 꺼내놓으시오. 사형수에게도 최후의 발언이 허용된다고 하오. 들어봅시다.》 《한정상… 난 당신에게는 통보해줄것이 없소. 안하겠소. 물러가겠소.》 방억세는 무뚝뚝하게 그러면서도 비타협적으로 대답하였다. 그와는 더 상대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방억세는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의 비보에 접하고보니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 대장과 정치위원이 잘못되였다는 소식은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식과도 같은 무서운 재변이였다. 한점의 빛도 없던 어둠속에서 애오라지 희망의 빛으로 명멸하던 초불마저 꺼져버렸으니 인생의 이 낭떠러지를 어떻게 뛰여넘는단 말인가. 뇌수를 옥죄이는 절망과 비애가 그의 심신을 일시에 녹초가 되게 하였다. 주경남도 정치위원도 어떤 사람들인가.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해방전부터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자기의 인생을 다 바쳐온 사람들, 통일위업의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 푸수한 얼굴이 온통 금빛이 되여 행복으로 빛나던 의로운 동지, 김일성장군님을 찾아 평양으로 함께 가자던 약속은 어떻게 하고 제 먼저 눈을 감을수 있는가. 통일성전에서 승리하고나서 동네방네 소리치며 살아보자고 부인에게 남긴 언약은 어찌하고 그렇게도 일찌기 숨질수 있단 말이냐?! 그 훌륭한 인간들, 그 보배스러운 투사들이 잘못되다니. 그는 잠시 비분의 눈물이 글썽해서 천정을 우두커니 쳐다보다가 침대모서리를 잡고 그우에 주저앉았다. 그 비통한 소식은 그의 머리를 삽시에 요지경속처럼 마구 헝클어놓았다. 무엇보다도 이곳 빨찌산의 존재가 걱정스러웠다. 자기가 위구하던바가 현실로 육박하여왔다는것을 절감하였다. 확실히 이곳에 큼직한 두더지가 박혀가지고 안으로부터 빨찌산을 쑤셔대고 쏠아먹고있는것이다. 틀림없다. 자기에 대한 빨찌산지휘부의 처형소동이 어데서 시작되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제는 앞뒤가 명확하여졌다. 그런데 당장은 자기 운명도 칼도마에 오르게 되였다. 자기를 붉은기앞에 내세워 선서를 시킨 두사람이 다 희생되였으니 그에 대하여 누가 보증할수 있으랴. 죽음의 위험앞에서도 자신을 의연하게 지켜낼수 있었던 마지막 한가닥의 희망의 끈마저 뭉청 끊어져버린것이다. 그는 더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설봉》은 알아내야 한다. 이것은 내가 기어이 해내야 하는 일이다. 그는 이윽고 가슴속에서 걷잡을수 없이 들락날락하는 뭇생각들을 밀어내고 자신을 가까스로 수습하였다. 그는 입가에 쓰거운 웃음을 지으며 비꼬듯 한마디 던져보았다. 《한정상, 당신이 어떻게 되여 나를 취조하고있소?》 《하, 나의 신분을 밝히라는거요? 난 정치부의 선전사업을 맡아보오. 그런데 아직 정치위원이 임명되지 않아 내가 대리하고있소. 정치위원은 며칠후에 이곳에 도착하게 되오. 이것이면 만족하겠소?》 《좋소. 그럼 난 정치위원을 기다리겠소.》 그 소리에 한정상은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철서류함에로 다가갔다. 그는 문을 열고 거기서 꽤 두툼해보이는 문건철을 꺼내가지고 서두름이 없이 여유작작하게 자기 걸상에 와서 앉았다. 그는 문건철을 몇장 번지고나서 거기서 한장의 신문과 몇장의 문건종이를 꺼내 책상우에 펴놓았다. 그리고는 방억세를 향하여 조롱기어린 어조로 말하였다. 《아마도 그렇게는 안될거요. 이미 채택된 결정은 새로 오게 될 정치위원이 개입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요. 그러니 그가 올 때를 기다릴 리유가 없단 말이요. 난 당신에게 마지막호의를 보여 즉결처형을 두어시간 보류하고 여기로 불러들였소. 자, 이리 와서 앉으시오. 이걸 보고 나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오. 성란희동무와 정수철동무는 립회인자격으로 참가하여 지휘부의 판결에 대한 최종합의를 하시오. 자, 가까이 나앉으시오.》 방억세는 기가 막혔다. 한정상의 앞에서 심문을 받다니. 이거야말로 하늘땅이 뒤바뀌우는것 같은 일이 아닌가. 생각 같아서는 상을 뒤집어엎고 한정상의 멱살을 틀어쥐고싶었으나 사태의 본질을 밝혀내고싶어 그의 심문에 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한정상앞에 가서 책상우에 철퇴같은 두주먹을 무겁게 올려놓고 마주앉았다. 그는 잠시 불꽃같은 눈초리로 한정상의 기고만장한 상통을 쏘아보다가 한정상이 턱밑에 내밀어주는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하산한 후 동료들과 만난 사실을 실은 《조선일보》의 짤막한 기사가 눈에 걸려들었다. 이미 보았던 기사다. 방억세가 대수롭지 않게 훑어보고 신문에서 눈길을 떼자 한정상은 이번에는 문건종이를 그우에 펴놓아준다. 그것은 《검찰청》이 자기에게 주었던 《보증서》의 부본이였다. 구청에 가지고갔던 문건이였다. 그게 어떻게 여기에 왔을가? 방억세는 다시금 한정상이 들쓰고있는 허울이 또 한꺼풀 벗겨지는듯싶었다. 《검찰계통에 있는 우리 동지들이 보내온 문건사본이요. 알만 하오?》 한정상이 의심쩍어하는 상대의 속을 넘겨짚고 이렇게 해명해주고 입새로 내뱉듯 묻기까지 하였다. 방억세는 쓰거운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있소. … <좌경세력척결에 도움을 주었다.> … 이에 대하여 내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소.》 《아니, 필요없소. 정수철동무가 이미 내게 다 밝혔소.》 《인정하오?》 《천만에.》 《좋소. 다음문제… 정수철소대장동무, 이야기하시오.》 한정상은 자신만만해서 정수철에게 말고삐를 넘겨주었으나 그는 당황해서 도리질부터 하였다. 《이미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인정하오? 정수철동무에 대한 총살집행을 맡아가지고 방아쇠를 당기던 일이?…》 방억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면서 짤막하게 대꾸하였다. 《방아쇠는 분명 당겼는데 정동무는 살아있구만. 그러니 죄될것도 없지 않소.》 하며 방억세가 소리내여 웃자 한정상은 마치도 참고참았던 자제력과 울분을 터쳐놓기라도 하듯 걸상을 넘겨뜨리며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범죄를 구성하는데서 결과만이 절대적인 증빙자료로 되는건 아니요. 문제의 성격이 얼마든지 범죄를 구성하는 인자로 될수도 있단 말이요.》 한정상은 자기의 가느다란 손부리를 방억세의 이마빡에 찌를듯이 창날처럼 가까이 들이댔다. 그리고는 마치도 법정에서 판결문을 읽는 재판관처럼 장중하고도 으시시한 소리로 선언하였다. 《너, 방억세! 너는 바로 그 한가지만 가지고도 총살을 당하고도 남는다. 빨찌산도피죄, 비밀밀고죄, 게다가 동지총살집행자로 나선 죄, 아니, 방아쇠를 당겼으니 살인죄지.… 뭘 또 해볼 소리가 있다더냐. 당장 끌어가 쏴버려. 아니, 래일 오전중으로 대장동지가 오지 않으면 래일 오후에 처형하오. 자, 다들 물러가시오. 출판소초막이 비여있으니 그곳에 가두고 정동무가 직접 보초를 서야겠소. 래일 아침부터는 경비중대에 보초임무를 넘기시오.》 한정상은 위엄을 차려 엄엄하게 명령하고는 제 먼저 정치부초막에서 빠져나가려고 걸음을 바삐 옮겼다. 세련된 연기로 지금까지는 범죄에 대한 고발과 응징을 세사람앞에서 그리 허물잡힐게 없이 멋들어지게 엮었는데 저지른 죄의식에 등골에 땀줄이 서고 속이 조마조마해서 더는 이 초막에서 버티고있을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상대를 쏘아보고있던 방억세가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을 장승처럼 떡 막아나섰다. 《가만!》 방억세는 자기를 급하게 제거해버리려고 이일저일을 만들어놓은것을 접하면서 이자가 바로 서울《검찰청》 부장검사 서남룡이 얼결에 입밖에 내던졌던 《설봉》이 틀림없다는것을 똑똑히 확인하였다. 분명 이놈은 제놈이 저지른 죄를 자기에게 넘겨씌워 정체를 가리워보려고 이따위 엄청난 계략을 꾸몄을것이다. 《보증서》사본까지 받은것으로 보면 이놈은 적선과 정상적인 련계를 가지고 움직이고있는것이 분명하다. 두사람은 가물거리는 등잔불빛을 받으며 마주섰다. 《<설봉>…》 방억세는 저력있게 불렀다. 그는 한정상이 그 소리에 살에 치운 맹수처럼 와뜰 놀라는것을 똑똑히 가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였다. 그의 얼굴은 다시 천연해졌다. 어룽거리는 등잔불빛으로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아무런 다른 기미를 읽을수 없었다. 그러나 방억세는 여전히 나직하게, 그러나 경멸과 분노의 비수가 번뜩거리는 어조로 비양스럽게 몰아붙였다. 《왜 대답을 못해. 정체를 내놓지… 난 네가 <국방부> 미국고문 하우스맨의 첩자 <설봉>이라는것을 그 감방에서 짐작했다. 그래 나와의 접선은 이런 식으로 할테냐?!》 《뭐야, <설봉>? …》 한정상의 뱁새눈이 거칠게 번뜩거렸다. 두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는 성란희와 정수철의 눈에도 서리발이 어렸다. 그러나 한정상은 인차 랭정을 회복하고 아슬한 고비를 넘겨보내느라고 요술을 부렸다. 처세에 있어서는 한정상은 방억세보다 훨씬 로련하고 수가 높았다. 그리고 지금 방억세가 칼날을 잡고있다면 한정상은 손잡이를 쥐고있다. 방억세의 운명이 한정상의 고개짓에 따라 결단이 날판이였다. 한정상은 승자의 희열에 들떠 기세충천해서 소리질렀다. 《흥, 네가 감히 누굴 모함하려고… 어리석다. 네가 그런 방법으로 빨찌산지휘관을 우롱하고 도주자, 배반자, 살인자로서의 죄과를 가리울수 있다더냐. 정수철동무, 끌어가시오. 반역에는 티끌만 한 인정도 통할수 없다는걸 명심하시오. 만약 저놈을 놓칠 때에는 동무의 말대로 동무자신이 대가를 치르게 될거요. 방억세, 네가 이 한정상을 우습게 보았지. 감히 어디라구 어깨를 겨루어. 우리가 다투어온 인생의 승부는 이제는 가름이 났단 말이야. 당신이 과시 군자라면 패배를 인정하고 거기에 깨끗이 승복해야지. 그게 사나이멋이야.》 한정상은 이렇게 신명이 나서 말끝을 제법 여물지게 맺었다. 방억세는 반들거리는 상대의 이마를 쏘아보다가 웅건한 어조로 경고를 하였다. 《한정상, 똑똑히 명심해. 죄없는 남의 눈에 눈물을 내주면 제눈에 피가 날 때가 꼭 온다는걸.》 방억세가 무겁게 뱉아놓은 말에서 준엄하고도 가혹한 인간세상의 진리를 음미하듯 한정상은 또다시 흠칫거리고는 《흥-》 하고 코소리를 냈다. 그것은 멱에 살을 받은 짐승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였다. 한정상은 꺼풀이 엷은 눈을 할깃거리며 자기앞을 바위처럼 막아나선 방억세를 피해 족제비처럼 빠져나갔다. 그가 초막문을 소리나게 닫아버리고 사라지자 초막안은 한정상이 뿌리고간 싸늘한 랭기와 무시무시한 죽음이라는 중압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힘들어진듯싶었다. 세사람은 일대 격전을 치르고난 사람들처럼 온몸이 활줄처럼 팽팽해있다가 일시에 후줄근해져서 초막을 나섰다. 성란희는 출판소근처에 있는 자기의 귀틀집어귀에 이르자 방억세에게 불쑥 물었다. 《저… <설봉>이란 뭐나요?》 《이곳 빨찌산근거지에 들어박힌 미군첩보대와 련결되여있는 밀정의 대호요. 난 그이상은 모르오. 이건 나를 취조하던 <검찰청> 부장검사놈이 내게서 비밀을 뽑기 위하여 횡설수설하다가 우연히 꺼냈던 소리요. 동무들은 이걸 꼭 새로 온 대장동무에게 보고하시오. 저놈이 <검찰청>에 있다는 동지라는건 분명히 자기와 련결되여있는 첩보대의 정보관일거요. 저놈은 스스로 제놈의 정체를 드러내놓았소.》 《후- 뭐가 뭔지 이제는 어렴풋이 선이 그려집니다. 복잡하구만요. 그러니 대장동진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동지가 흑토골회의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왔습니까?》 《듣지 못했소.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수 있겠소.》 《그분들과 통하는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는것은 왜 내놓지 않았습니까?》 《정동무, 내게서 그건 묻지 말아주오. 그건 내가 무덤으로 갈 때까지 속에 품고있을 이야기요. 그리고 저 한정상이나 신임대장이 내가 그걸 내놓는다고 해서 결심을 달리할상싶은가? 천만이요. 한정상은 원체 이 간계를 꾸며낸 인물이니 코나발을 불거요. 그놈은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만들어놓고 접어들었소. 저놈은 이따위 짓거리는 다반사로 여기는자요. 신임대장동무도 내가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찾아낸 미봉책이라고 쓰거워할거요.… 동무들, 그러나 이것만은 신임대장에게 꼭 전하시오. 이곳 비밀이 다 새나가고있다고. 그리고 <설봉>이 박혀있는데 내 생각에는 서울에 모금공작을 다니는자가 련락선에서 움직이는것 같소. 정수철동무가 바로 그렇게 체포되였는데 회수한 돈이 <경무대>에까지 보고되여 리승만의 손으로 성관호에게 도로 전달되였소. 내가 하산한 바로 그날에 있었던 일이요.》 《그래요? …》 정수철은 짐작되는바가 있는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방억세는 하고싶은 말이 많았으나 이내 정수철이 가리키는 초막안으로 들어갔다. 성란희는 정수철과 헤여져 자기 침실로 향하다가 참모부의 부참모장을 찾아갔다. 방억세를 대신하여 독립지대장으로 사업하다가 지대가 해산되면서 자리를 옮겨앉았는데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지휘관이였다. 부참모장은 밤늦게 찾아온 성란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성란희는 서울에 갔다온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오철규대장이 언제 도착하느냐고 물었다. 대장이 오면 그앞에서 방억세까지 참가하여 제기된 문제를 빠개놓으면 《설봉》의 정체도 드러날것이고 여러모로 문제가 제대로 풀릴것이라는 희망이 보였던것이다. 그런데 부참모장은 아마 빨라서 한주일후에야 도착할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마지막기대마저 허물어졌다. 성란희는 두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한정상의 위험천만한 요술이 이제는 야밤중에 불보듯 명료하게 리해되였다. (나쁜 놈… 그러니 기어이 래일중으로 방억세대장을 없애치우려는거지. 저놈은 분명 오철규대장이 속초로 떠난다는것도 미리 타산한것이 틀림없구나. 간사한 놈. 안될걸!…) 걷잡을수 없는 분노의 강렬한 섬광이 맹렬히 타번지다가 혈관을 따라 온몸으로 뻗어가는듯 하였다. 성란희는 아래입술을 피나게 옥물고 폭포가 있는 골짜기 웃목으로 올라갔다. 무엇인가 오열을 터뜨리고싶은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마음껏 소리쳐 울고나면 갑갑하기 그지없는 속이 시원해지고 뭇생각들이 갈팡질팡 대중없이 붐비는 머리속도 거뿐해질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너럭바위에 주저앉으니 차디찬 랭기가 온몸에 오싹 스며들면서 눈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고 생각이 초롱초롱해왔다. 자그마한 담소에 깔린 화강석암반을 쪼아대는 폭포수가 오히려 고막을 세차게 찌르며 가슴을 물어뜯는듯싶었다. 무엇인가 인생의 결단을 내려야 할 가장 운명적인 작두날밑에 방억세도 그리고 자기도 올랐다는 현실적이고 급박한 고뇌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다시금 방억세가 빨찌산지대장의 임무보다는 비할수 없는 커다란 중임을 안고있다는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중임을 부여한것은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이며 따라서 그들만이 방억세를 보증할수 있다는것도 깨닫게 되였다. 오늘 한정상과 여유작작히 대결하는것을 보면서도 그러한 믿음이 더욱 굳건히 처녀의 가슴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성란희는 그가 분명 한정상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었고 거기에서 솟구치는것이 조련치 않다는것을 절감하고있었다. 그 사람은 도대체 어쩌려는가? 어째서 초막에 들어가 처형을 기다리는가?… 방억세는 이밤이 지나면 끝장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혁명가 방억세도 그리고 한 처녀의 마음을 깡그리 사로잡아온 련인 방억세도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의 이름에는 더럽고도 용렬한 배신과 간계의 배설물들만 퀴퀴한 악취를 풍기며 묻어다니게 될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좋담?… 내 한생이 그 사람의 한생의 거름으로 될수 없을가. 내 한생이 그 사람의 량심과 명예와 인격을 지켜주는 방파제가 될수 없을가. 그럴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내 젊음을 불태울수 있으련만… 어쩌면 좋담?… 성란희는 두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이렇게 입속으로 간간이 안타깝게 되뇌이며 자기의 어제날을 돌이켜보고 미래를 설계하여보았다. 거기에는 행복도 사랑도 있었다. 웃음과 랑만이 있었다. 비애와 슬픔도 있었다. 가물거리는 5월의 아지랑이가 있었고 소용돌이치는 7월의 탁류도 있었다. 처녀는 지나온 날과 달을 구름처럼 날려보내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경멸에 차서 가만히 부르짖었다. 《성란희! 이 천진한 계집애야. 인생은 무지개가 아니다. 너의 철없던 시절과 작별하련다. 처녀시절이여! 떠나가거라. 난… 아마도 고행의 난바다에 이 몸을 던져야 할가봐!》 성란희는 드디여 생각이 정리되고 미래가 확정되자 너럭바위에서 일어났다. 공포에 질려있던 마음속도 차분해졌다. 그는 폭포를 내리며 또 한번 나직이 되뇌였다. 《인생의 난바다에 이 몸을 던지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