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제12장 그 녀자의 비극

 

골짜기에서 조잘조잘 물흐르는 소리가 났다.

산과 골을 꽁꽁 얼구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다가오는 자연의 속삭임이였다. 겨우내 웅크리고있던 얼음장이 소리없이 풀리고 골짜기의 버들개지가 통통히 살지기 시작하였다.

빨찌산은 엄혹했던 겨울을 이겨내고 봄철에 접어들어 새로운 용기와 힘으로 미제와 리승만에 대한 새로운 타격전을 준비하고있었다.

태룡산빨찌산은 새롭게 조성된 정세와 환경에 맞게 대오를 다시 정비하고 지휘부도 다시 조직하였다.

겨울에 벌어진 동기《토벌》에서 태룡산빨찌산은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하였던것이다.

빨찌산의 손실은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의 전사로부터 시작되였다. 그들은 흑토골에서 지리산빨찌산 지휘관들과 상봉하고 경험을 나누고 새로운 단계의 투쟁임무와 전략전술적방침을 협의하고 돌아오던중에 쌍매골로 들어오는 외통길목에 매복하고있던 《토벌대》에 걸려들어 격전끝에 전사하였다.

뒤이어 근거지의 주변에 여기저기 널려있던 련락거점들이 하나둘 기습을 당하여 적지 않은 련락원들과 빨찌산대원들이 희생되였다. 쌍매골은 두차례의 습격을 받아 커다란 손실을 보았다.

독립지대도 절반이상이 《토벌대》와의 치렬한 격전에서 쓰러졌다.

새로 조직된 빨찌산지휘부는 독립지대를 해산하고 지휘부의 직속으로 꾸려진 중대와 소대들을 보강하였다. 성란희는 지휘부에 옮겨앉아 출판소사업을 맡아보게 되였다.

이미 출판소장으로 사업하던 한정상은 정치부의 선전책임자로 등용되여 출판소에서 자리를 뜨고 자기 사업을 성란희에게 인계하였다.

출판소에서는 16절지에 주에 한번씩 발간하는 대내신문과 시기적으로 필요한 교양자료들을 찍어냈는데 종이와 등사용지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 정상화되지 못하고있었다.

성란희는 한정상과 사업상 수시로 코맞대야 할 일이 고통스러워 중대에 평대원으로 돌려달라고 제기하였으나 지휘부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다행으로 한정상은 아직 임명되지 않아 공석으로 되여있는 정치위원사업을 림시로 보고있는 관계로 출판소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불러들이는 일도 없었다.

어느날 성란희는 지휘부의 긴급호출을 받았다.

대장방에 들어서니 새로 대장으로 파견되여온 오철규가 한정상과 함께 기다리고있었다.

서울에서 체포되여 《검찰청》의 심문을 받다가 김창룡의 특무대에 이송되던중에 대담하게 탈출하여온 정수철소대장이 그들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성란희가 들어서자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는지 오철규의 표정이 무겁고 다른 두사람의 낯빛도 어둑시그레하게 보였다.

《여기 와서 앉으시오. 출판소일이 성차지 않아한다는데…》

오철규대장이 성란희의 도착보고를 받자 그에게 앞에 있는 걸상을 가리키며 권하였다.

성란희는 걸상에 스스럼없이 앉으며 《처음 해보는 일이 되여 힘은 들지만 해내겠습니다.》 하고 짤막하게 대답하였다.

《지금 전반적으로 우리 동무들의 사기가 저락되여있습니다.

그들을 정신적으로 굳건히 해주는데서 성란희동무의 책임이 매우 중합니다. 나도 동무들이 일전에 만든 신문을 몇부 가져다가 보았는데 내용도 좋고 볼맛도 있습니다.》

성란희는 오철규의 치하의 말에 한정상을 힐끗 쳐다보았다.

한정상은 그 말을 스쳐보냈는지 덤덤한 표정이다.

사실 오철규는 대장으로 임명되여온 후 한정상에 대한 인물료해를 하면서 그가 직접 쓰고 출판한 신문을 다 가져다놓고 훑어보고 대단히 만족해하였던것이다.

《그건 사실 한정상소장동지와 출판소일군들의 공로입니다.》

성란희는 내키는 말은 아니였으나 오철규의 칭찬을 자기가 대신 받는것이 송구스럽기도 하고 낯이 뜨끈해지는 일이라 한정상을 내세웠다.

《하, 그랬겠지. 난 성란희소장동무 손에서 더 훌륭한 신문이 나오리라는것을 믿소.》

오철규는 성란희의 겸양과 솔직한 대답이 마음에 들어 이렇게 말하며 한장의 종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휘부결정을 전달하겠소.》

오철규는 엄숙하게 시작하였다. 성란희와 다른 두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신자 방억세를 체포처단할데 대하여.

태룡산빨찌산지휘부는 신병관계를 구실로 부대를 리탈, 하산한 후 적들에게 호적보증을 받는 대가로 빨찌산의 기본근거지와 아지트비밀자료, 지하조직원 수백명에 대한 자료 등을 제공하여 애국대오에 엄중한 손실을 주게 하였으며 체포투옥된 자기 동지에게 서슴없이 총탄을 날리려고 한 전 독립지대장 방억세를 애국위업의 이름으로 현장에서 체포처단할것을 명령한다. 명령집행을 성란희소장, 정수철소대장에게 위임한다.

이상이요.》

순간 성란희는 그 어떤 드센 몽둥이에 뒤통수를 후려맞기라도 한듯 정신이 아찔해오고 눈앞에서 불찌가 아물거렸다.

입술이 재빛이 되고 가뜩이나 흰 얼굴의 살갗이 창백해졌다.

심장이 와당탕 놀라서 뛰고 아래턱이 와들와들 떨었다.

내가 헛갈려 들었나, 방억세를 처단하다니… 변절자… 배신자…

그는 절망에 차서 《아- 아-》 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그자리에 무너져내리듯 폭삭 주저앉았다.

《왜 그러시오 엉, 성란희동무?! 어디 아프오?》

오철규가 순식간에 얼이 빠지고 공포에 짓눌려 신음소리를 내지르는 처녀에게로 바삐 다가갔다.

그는 금시 울음이라도 한바탕 터쳐놓을것 같은 성란희를 의아쩍은 눈으로 굽어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아 걸상에 앉도록 부축하여주었다.

한정상이 고뿌에 물을 따라가지고 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진정하시오. 여기는 빨찌산지휘부요.》

한정상은 그 뱁새눈에 차디찬 빛을 담으며 그 어떤 경종을 울려주듯 엄엄하고도 의미심장하게 일깨워주었다.

성란희는 개풀린 눈으로 승리자연한 미소가 언뜻 스쳐가는 뱁새눈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한정상은 그 눈길을 슬그머니 피하여 자기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성란희는 순간에 깨닫는바가 있었다. 이 비렬한 결정은 저 한정상의 손끝에서 기안되였을것이라는것이였다.

이 생각이 뇌리를 때리자 성란희의 눈빛에 다시 정기가 번쩍거리고 흐트러진 몸이 바로잡혔다.

《대장동지, 성란희동무는 방억세의 밑에서 참모로 활동하였고 오래동안 가까이에서 지냈습니다. 성란희동무를 리해하여주십시오. 충격이 클것입니다.》

한정상은 성란희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세라 서둘러 이렇게 간사하게도 그 녀자를 두둔하듯 간단히 설명하였다.

오철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나서 우선우선한 어조로 성란희에게 결정내용을 다시 상기시키고 그 결정이 나오게 된 경위를 보충적으로 설명하여주었다.

《음, 나도 리해가 되오. 우린 배신자의 사건심의를 진지하게 하고 결정하였소. 우리 통일애국조직은 그놈때문에 련이어 피해를 입고있소. 화근은 뿌리채 뽑아버려야 하오. 우리는 설마를 믿다가 시간을 놓쳤소.

바로 그것때문에 숱한 눈물을 뿌리고있소. 동무가 이번 임무수행에서 조장으로 선발된것은 그놈이 동무가 살던 효자동의 어느 구석에 군대의 물자주문조달을 맡아하는 <용달사>를 꾸려놓고 거기 들어박혀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때문이요.

이젠 더는 수수방관할수 없소. 한동무, 동무가 더 설명을 해주시오.》

《좋습니다.… 그런데 정수철소대장의 이야기부터 먼저 들어보는것이 어떻습니까. 이 정동무도 그놈을 해방전부터 잘 알고있습니다. 방억세의 련락병으로도 있었고 그놈이 해방후 <국방경비대>에서 고관으로 있을 때도 부관으로 복무하였습니다.

방억세가 다시 산에 들어왔을 때는 지휘부경비중대에서 소대장으로 있다가 그래도 옛 상관이라고 전 대장 주경남에게 졸라 그밑에 가서 소대장을 하였습니다.》

한정상은 점차 의혹과 놀라움이 가뭇없이 사라진 성란희의 얼굴에 서리발이 어리는것을 느끼자 제가 먼저 나서는것이 께름직하여 슬쩍 옆으로 비켜서고 정수철을 내세웠다.

《에, 그놈이 참 흉악한 놈이 아닌가. 어떻게 그런 부하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길수 있는가. 말하오. 정동무, 동무가 보고들은걸 그대로 이야기하시오.》

오철규가 제김에 울화가 치밀어 크게 떠들었다.

대장의 턱짓에 정수철이 기다린듯 분노에 차서 성토를 하기 시작하였다.

《서울<검찰청> 부장검사 서남룡놈은 방억세를 세워놓고 내앞에서 <보증서>를 읽어주었습니다. 방억세가 좌경세력척결에 공로를 세웠으므로 호적등록보증을 한다는 내용이였습니다.

청원내용을 인정하느냐고 물었을 때 방억세는 두말이 없이 시인합디다.

내가 체포된것은 그놈의 밀고에 의한것이며 군부의 수백명 조직성원들도 그놈의 밀고에 의하여 체포되였다는것을 그후에야 알았습니다. 서남룡이 나를 심문할 때 그놈처럼 적당히 대가를 치르고 시민생활을 할것을 강요하면서 지껄인 말입니다.

저는 그놈이 저에 대한 총살집행에 나서가지고 거리낌없이 방아쇠를 당기는것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후날 눈을 떠보니 구류장이였는데 저에게는 그런 놀음으로 전향공작을 들이댄것이였고 그놈에게는 마지막검토를 위한 연극이였던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임무를 집행하겠습니다. 그런 배신자를 이 하늘아래서 숨을 쉬게 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그 사람 문제를 놓고 생각이 많았습니다. 고민도 크고 이렇게 저렇게 두둔하여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더는 기웃거리지 않겠습니다. 심판을 내리겠습니다.》

정수철은 분노에 치를 떨며 방억세를 단죄하고 복수의 맹세를 다지였다.

한정상이 앉은자리에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임무수행을 위해 떠나는 성란희동무에게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납득시키는 의미에서 명백한 판결이지만 간단히 보충설명을 하겠소.

<보증서>에 명기되여있다는 좌경세력척결에 공로를 세웠다는 의미부터 석연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소.

첫째, 우리 근거지의 비밀과 아지트비밀을 적에게 제공한거요.

전 대장과 정치위원은 흑토골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중에 희생되였소.

그들의 행동방향을 알고있은것은 바로 부대참모장 그리고 방억세밖에 없었소.

방억세가 하산한 후에 부대는 적들의 대규모적인 <토벌>을 받고 참모장을 비롯한 숱한 동지들과 련락아지트들이 련이어 드러나 피해를 보았소. 우연일가, 아니요. 불 안 땐 굴뚝에서 연기날가.

둘째, 방억세의 하산직후에 곧 군부안에 있던 300여명의 조직성원들이 투옥되고 학살되였소. 그들중에는 지난 시기에 죽창대에서부터 활동한 동지들이 많은데 해방후에 방억세가 지도하던 조직성원들이였소. 정수철동무가 직접 목격한 이야기는 방억세의 배신을 확증하는 하나의 자료에 불과할뿐이요. 그러나 그것은 체험자의 증언으로서 엄연한 사실이라는데 그 의미가 중시되오. 이렇게 놓고볼 때 배신자에 대한 징벌은 너무 늦었소.

벌써 우리는 그자가 빨찌산투쟁을 기피하여 이곳을 탈출하였을 때 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기어이 명줄을 끊어버렸어야 했을거요!》

배신자에 대한 한정상의 타매는 극히 실무적이였고 론리정연하였다. 누구도 반론할만 한 빈구석이 없이 말 한마디도 허공에 떠있지 않고 명분이 서고 근거가 철저하다.

그리고 그 론리정연한 자기 주장을 펴나가는 한정상의 반나마 감겨진 뱁새눈에는 배신에 대한 분노가 불꽃처럼 팔팔 끓어오르고 말의 어조에는 칼끝같은 예리하고 매서운 서슬이 번뜩거리고있었다.

얼음장같은 차고 랭엄한 한정상의 론리에는 배신자에 대한 적의와 빨찌산의 안전에 대한 책임적인 인간의 비타협적인 책임의식만이 존재할뿐 그 어떤 사소한 인정이나 더운 감정따위는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지금 오철규대장도, 정수철소대장도 배신자의 죄상을 신랄하게 단죄하는 한정상의 류창한 열변과 그에 알맞도록 가장 랭혹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의 얼굴을 경탄과 함께 두려움이 뒤섞인 신비함에 휩싸여 쳐다보고있었다.

성란희는 한정상이 뿜어던진 최면술에 걸려든듯 순간에 모든 사색도 심장의 고동도 얼어붙은듯싶었다.

그 녀자는 무엇인가 자기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혀를 깨물었으나 오히려 생각이 삼검불처럼 엉켜들어 종잡을수 없었다.

그는 다만 방억세가 한정상이 던져버리고 그악스레 죄여드는 그물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점차 성란희의 놀람과 의혹도 분노로, 적의로 바뀌여져 방억세에게로 세차게 뻗어갔다.

방억세가 이 골안에서 사라진 때로부터 그렇게도 집요하게 뇌리에 감겨들다가는 사랑과 믿음이라는 노한 파도에 밀려 가까스로 사라져버리던 의혹과 불신의 매연이 더는 도전을 받음이 없이 그의 머리에 쓸어들었다.

(아, 이 무슨 무서운 배신인가. 정말 그 사람이…)

머리속에서 불이 일고 가슴에는 눈물이 차들었다.

그것은 이제 더는 고독과 설음, 원망의 눈물이 아니였다. 아직도 그 까닭이 명백치 않은 분노와 저주가 퍼올리는 눈물이고 불이였다.

방억세마저 정의와 량심을 배신한다면 이 세상에서 누굴 믿어야 하는가. 방억세가 던져버리는 붉은기를 상상이나 했던가.

아직도 성란희로서는 방억세의 배신이라는 말이 도무지 실감이 가지 않는다.

무산자의 성스러운 기치를 부호집 딸의 심장에 안겨주느라고 오랜 세월 그렇듯 정을 주고 용기를 주고 힘을 주던 그 의로운 인간마저 그 기발을 걸레짝처럼 꾸겨박고만다면 이 땅의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그 정의를 지켜나선 참다운 인간은 몇이 되랴.

참으로 이제는 현실로, 기정사실로 되여버린 빨찌산의 판결을 접수하자니 하늘이 꺼지고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그는 배신자다! 그는 인간이 되기를 그만두었다.》

이렇게 세상이 하나가 되여 소리치는것만 같았다.

머리칼이 오싹 일어서고 무서운 공포가 가슴을 째며 지나갔다.

그 녀자는 신음소리를 참으려고 아래입술을 옥물었다. 빨간 피가 실실이 내려 턱으로 떨어졌으나 성란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성란희동무, 몸이 불편하면 떠나지 마시오.… 다른 동무를 준비시킵시다.》

오철규가 그 녀자의 터갈라진 모습을 측은한 눈으로 살피였다. 그 어떤 심상치 않은것을 포착하고 한정상에게 단호하게 제의하였다.

그 소리에 그 녀자는 떨구고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러 사람의 동정과 조소어린 표정에 도전하듯 정면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손등으로 흐르는 피를 씻어버렸다.

(차라리 잘되였다. 가자, 내가 가야 한다. 그를 만나자. 우선 만나보자. 방억세! 난 그에게서 다른 대답이 나오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가자! 내가… 내가 가는게 천만다행이다.)

그는 세사람의 예상을 뒤집어엎고 짜랑짜랑한 어조로 오연하게 부르짖었다.

《대장동지! 저는 임무를 접수하였습니다.

옳습니다. 반역은 어디서나 무슨 리유로든 용서받을수 없습니다.

빨찌산에는 배신자에게 반드시 징벌이 차례진다는 법도를 세워놓았으니 례외가 있을수 없습니다. 지휘부의 결정서를 주십시오.》

오철규는 아직도 무엇인가 미덥지 않은듯 매섭게 달라진 성란희를 지켜보다가 그 녀자의 고운 눈에서 빛발쳐나오는 불줄기를 보자 얼른 고개를 들며 그에게 결정서를 내밀었다. 성란희는 결정서를 다시한번 훑어보고는 입술을 다시 옥물며 차곡차곡 접어서 군복웃주머니에 넣었다.

《일없겠소?… 다소라도 의견이 있으면 떠나지 마시오. 난 걱정스럽구만.》

오철규는 그 녀자의 흥분이 그냥 념려스러워 다시 권고하였다.

《믿어주십시오. 배신자를 기어이 끌고와서 빨찌산심판대에 올려세우겠습니다. 그리고…》

성란희의 악마디진 대답에 그때까지 입가에 얄궂은 조소를 띠우고 두사람의 대화에서 물러서있던 한정상이 성란희의 말을 가로챘다.

《명령을 똑똑히 알지 못하고있구만. 필요없소. 쏴버리시오, 체포현장에서. 공연히 끌어오느라고 하다가 동무들이 피해를 입을수 있소.

대상은 날고뛰는 거물이라는걸 명심해야 하오. 다시 강조하건대 그자는 더이상 끌어올 필요가 없소. 밸속은 다 불어먹고 허울만 남은 그놈은 우리에겐 일고의 리용가치도 없는 배신자에 불과하단 말이요.

그러니 현지에서 쏴갈기시오.》

한정상이 물어뜯는듯 마디마디 한을 담아 내뱉는 소리에 성란희가 오철규에게로 고개를 드니 그도 고개를 말없이 끄덕이였다.

급기야 성란희는 짱짱 다져진 어조로 대답하였다.

《알았습니다.》

그러나 심장은 다르게 부르짖고있었다.

《흑백은 갈라질것이다!》

지휘부에서 나온 성란희는 정수철과 갈라지면서 자정시간에 전방보초소에서 만나 출발하자고 약속하고는 시내가를 따라 골짜기 상류에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세길정도 되는 자그마한 폭포가 있다.

물량은 그리 많지 않아 웅장한 멋은 없어도 사시장철 변함없이 산골물이 쏟아져내려 제법 폭포소리가 골안을 장쾌하게 진동시키며 쌍매골절경을 이채롭게 한다.

달빛이 휘늘어져내리는 너럭바위에 오른 성란희는 갑자기 엄습하여온 공포에 짓눌려 참고참아오던 눈물을 쫘르르 쏟으며 아이들처럼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너럭바위에서 쏟아져내려 중턱에 삐져나온 바위를 들이받으며 세길밑에 있는 화강석암반에 부서져내리는 폭포의 소란스러운 울부짖음이 처녀의 피맺힌 곡성까지 삼켜가지고 폭포의 울림을 더 크게 해주는것 같다.

처녀는 절반나마 닳아빠져버린듯 한 달을 쳐다보며 그냥 울었다.

그렇게 믿어지지 않던 련인… 그렇게도 따르고 의지하고싶던 남자, 이 세상 그 어느 사나이도 견줄바 없다고 생각하여온 인간…

아, 어떻게 해, 어떻게 하나. 그 사내에게 정을 주고 정을 받고싶었는데 그 가슴에 다름아닌 내가 총탄을 박아야 하다니…

《달아 달아, 너는 지금 그 사람도 보고있겠지. 그 사람이 지금 뭘하며 있는지 말해다오. 대가집 딸년이 찾아간다고 전해주렴. 총을 가지고간다고, 혁명의 이름으로, 애국의 이름으로 내 살점과도 같은 그 사람을 쓰러뜨리러 간다고 말해주렴.… 멀리 멀리 피해가라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라고 일러주렴아…

아- 어머니… 난 어쩌랍니까?! 이런 때는 어쩌면 좋습니까?!…》

성란희는 피맺힌 어조로 소리질렀다. 마음껏 울고 소리지르며 구름장에 실려 둥실둥실 바삐 떠나가는 달을 보며 애원하고 어머니를 부르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였다. 정말 지휘부의 결정이 옳다면?… 아- 그럴수 있을가.

이제는 피할수 없게 되였다. 어찌 보면 이것은 내가 받은 심판이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벌을 내가 받게 된것이다. 내가 인생의 승부를 걸어두고온 남자를 없애치워야 하는 인간불륜의 징계를 받은것이다. 어째서? … 어째서 이 란희가 그런 징벌을 받게 되였을가.

대궐의 곰팡내나는 담을 뛰여넘은 죄일가, 붉은기를 내 인생의 표대로 날리게 된 죄일가, 오랜 세월 한 남성만을 기다리며 애간장 태워온 죄일가.

이렇게 살아서 뭘해, 자기 애인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야 하는 비참한 녀자, 자기의 사랑마저 제손으로 날려버리고 너는 과연 하늘에 머리들고 살수 있다더냐.

성란희는 순식간에 발밑을 파헤치고 자신의 심혼을 꺼꾸러 뜨린 일격에 의지할 삶의 기둥을 뿌리채 뽑히고 얼없이 부르짖었다.

저 폭포에 이 몸을 콱 던져버릴가!

그는 이를 사려물고 중얼거렸다.

사랑도 꿈도 삶도 다 끌어안고 저 폭포에 몸을 던지면 시원할것 같다. 그러면 다시는 이 모진 번뇌도 아픔도 다 사라져버릴것이 아니냐.

얼핏 떠오른 생각이 성냥을 그어댄듯 온몸을 휩쓸었다.

그는 자기도 어쩔수 없는 무서운 힘에 떠박질려 폭포가 쏟아져내리는 절벽의 끝으로 한걸음 두걸음 비척거리며 걸어갔다.

그는 벼랑끝에 나서자 폭포가 쏟아져내리는 절벽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등줄기를 휙 째며 지나가는 전률에 한번 진저리를 치고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그냥 허연 물줄기가 암반을 짓때리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성란희는 두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천근만근같은 한발을 들었다. 이제 그 발만 옮겨놓으면 만사가 끝이 난다.

그 순간이였다. 별안간 폭포소리마저 짓누르며 골짜기를 벽력같이 흔드는 거센 고함소리에 그는 흠칫 들었던 발을 뒤로 내려놓았다.

《명령이요! 사랑하시오! 끝까지! 끝까지!…》

골안의 모든 음향을 일시에 짓누르며 하늘땅을 가득 채우는 우렁찬 목소리, 마치 그 소리는 저 달에서 쏟아져내리는듯싶다. 누구의 목소리냐?! 달을 가리며 우련히 떠오르는 너부죽한 얼굴… 그는 주경남이였다.

아아, 고마운 대장동지! 태백의 사나운 눈바람과 볕에 그을린 얼굴에서 열차게 뿜어오르던 격정의 메아리.

《만약 앞으로 성란희동무가 딴 사내품에 든다면 난 혁명이 승리한 다음에 명령위반죄로 빨찌산심판대에 올려세울것이요!》

고마운 정, 고마운 목소리, 끝없이 소중한 메아리로 이제껏 가슴속에 울리고있던 그 목소리, 그것은 주경남의 유언이기도 하다. 그 말을 남겨놓고 흑토골에 갔다가 끝내 불귀객이 되고말았다.

그날의 대장의 얼굴은 성난듯 한 모습이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우리의 사랑에 대한 지지와 공감과 따뜻한 정과 기대가 어려있었다. 그 목소리는 이 몇달동안 언제나 처녀의 가슴에서 은은한 메아리로 울리고있었다. 치렬한 싸움이 벌어지던 전호가에서도, 행군길에서도, 깊은 밤 잠자리에서도 그 메아리는 그에게 삶의 희열을 주고 투쟁의 용기를 북돋아주군 하였다.

골짜기에 방억세지대장의 배신에 대한 저주의 목소리가 미친 바람처럼 몰아칠 때 오직 그만이, 대장만이 투박한 목소리에 진정을 고여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때 성란희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아, 방억세! 그대는 보다 큰 위업을 걸머지고 나섰구나! 틀림없구나. 지대장동지, 나는 사랑합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하늘땅 끝까지라도 따라가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주경남대장동지의 명령입니다. 그분은 제가 만약 딴 사내품에 든다면 빨찌산심판대에 올려세우겠다구 하였습니다. 아, 행복한 명령을 꼭 집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의 량심에 내리는 저의 심장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잠시라도 이걸 잊고있었던가.

선과 악과 정의와 불의에 대한 판단은 녀자는 심장으로 하며 남자는 뇌수로써 한다.

심장은 감정의 자양분이요, 뇌수는 리지의 샘이다.

지금 성란희는 소란스럽게 뜀박질하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자 잠시 가슴을 도닥거리며 숨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땀으로 질벅해진 얼굴을 소매로 닦으며 이끼낀 너럭바위에 가서 주저앉았다. 한바탕 더운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버린 그는 제기된 문제를 될수록 랭철한 리성의 눈으로 살펴보았다.

왜 이렇게 되였을가? 어떻게 되여 지휘부는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였을가? 아마도 새로 임명되여온 오철규대장은 주경남대장의 진의도를 알수 없을것이다.

그래, 새로 온 대장은 그것을 알리 없다. 그러니 한정상이 부르는대로 쓸수밖에 없고 그가 원하는대로 말하는거다. 한정상이 사개가 딱딱 물리게 들이대니 그도 덩달아 분개하고 처형놀음에 말려들어 맞장구를 쳤을것이다.

결국 한정상의 간계에 넘어가버렸구나.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간특해서 방억세는 이 간악무도한 간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였구나.

아마도 주경남대장이 살아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것이다.

방억세가 과연 배신자였다면 주경남대장이 자기더러 그를 사랑하라고, 끝까지 사랑하라고, 명령이라고 정을 담아 믿음을 담아 으름장을 놓지 않았을것이다.

전우라는 인식이 없을진대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과 존경과 기대를 가지고 불러주었을가. 그러니 그들사이에는 자기가 알아서는 안될 그 어떤 밀약이 있는것이 분명하다.

《난 더 말해줄게 없소. 더 말해줄 권리가 없단 말이요.》

이것도 주경남대장의 소리였다.

그래, 그분도 그 밀약을 나에게 말해줄 권리가 없었을것이다.

아, 고마운분, 의로운분… 하지만 지금 그분은 고인이 되였다.

그 가까이에서 지내온 정치위원마저 떠나갔다.

누구더러 하소연할 사람도 없다.

그들은 아직도 운무속에 가리워놓은 그 밀약을 가슴에 품은채 눈을 감았다.

오철규대장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니 그런 일을 생각할수 없을것이다.

방억세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니 방억세의 사람됨도 알수 없다.

그러니 여기의 본토배기라고 할수 있고 그리고 그 신문기사를 통하여서나 파악을 한 한정상의 손끝에 따라 놀아날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수철소대장의 말은 어찌된 일일가.

성란희는 정수철을 해방전부터 잘 안다. 자기 련인의 몸가까이에서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인물이라 누구보다도 관심이 되고 가깝게 사귀여왔다. 사람이 무척 진실하고 고지식하고 사심이 없고 입이 무겁던 사람이다.

일상생활에서 롱도 할줄 모르고 그리 웃지도 않으며 남을 허비는 소리도 모르며 거짓말이라고는 아예 배우지 않은 순결무구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터뜨리는 분노여서 의심할나위 없다.

그 사람은 자기가 직접 목격한바를 고백하였다.

자기에게 총부리를 들이댔고 서슴없이 당기더라고 하였다.

검찰의 보증에 대한 부장검사의 뇌까림도 자기 귀로 들었다 한다.

다름아닌 정수철의 말이고보니 그 역시 의심할나위 없다.

이제는 진의를 가려볼수도 없게 되였다.

명령은 명백하다.

《체포처단할것…》

준엄한 그 명령으로 갈래복잡한 의혹도, 미련도 얼어붙고말았다.

빛과 어둠이 뒤바뀌여지듯 생각이 또 뒤집어지고 걷잡을길 없이 뻗어갔다. 다시 가슴이 후두둑 급하게 뛰였다.

함께 도망이라도 칠가… 아니… 그건… 그래서는 안된다.

난 통일애국위업의 최전선에 나선 빨찌산전사다.

혁명의 대하는 나의 삶이다.

무슨 리유이든 그를 떠남은 인생의 변질이요, 죽음이다.

나는 다시는 애수의 노래가락에 잠겨있던 대궐의 담장안으로 붉은기를 버린채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줴던지고 들어설수는 없다. 그것은 내 운명의 빛을 꺼지게 하는 자신에 대한 또 하나의 배신이다.

그러니 어쩌면 좋담.…

성란희는 더는 헤여날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의 함정에 빠져들어 몸부림쳤다.

또다시 자신의 가엾은 처지를 탄식하며 슬프게 울었다.

그는 너럭바위에 주저앉은채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꺼이꺼이 설분을 토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쏟아버려도 속안에 차든 괴롭고 안타깝고 답답한 미련만은 그 눈물로 씻어낼수 없었다.

(하여튼 그이를 만나보자. 만나서 내 눈으로 흑백을 갈라보자.)

끝내 성란희는 마음의 진정을 찾지 못한채 쌍매골에 달빛도 사라진 자정무렵에 정수철과 함께 근거지를 떠났다.

사흘후에 서울에 도착한 그들은 교외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어슬무렵에 장충공원앞 도로에 있는 택시주차장에 가서 택시를 타고 곧장 효자동으로 갔다.

효자동은 서울량반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는 량반동네로 소문나있다.

가난하고 권세에 눌려온 사람들은 도적촌이라고도 불러온다.

성란희는 효자동초입에서 택시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효자동은 아름되는 수양버들이 성벽마냥 빙 둘러서있다.

《좀 앉았다 가요.》

성란희는 수양버들밑에 제 먼저 앉아 다리쉼을 하면서 잠시 어둠이 서린 동네를 둘러보았다.

멀지 않게 자기 집을 둘러싼 키높은 담장이 바라보였다. 아릿한 향수가 속을 후벼냈다.

어머니와 오빠들과 동요의 얼굴이 그립게 떠올랐다.

동요는 뭘하고있을가? … 진이가 이제는 세살이 되였구나.

어머니가 속을 태우고있을거야. 해방전에 방억세를 따라 산으로 떠날 때에는 기꺼이 등을 떠밀어주었는데 해방후에 도꾜에도 갔다오고 다시 산에 오를 때에는 지청구가 많았다.

《네 나이 얼마냐. 해방도 됐는데 어째서 또 산에 간다는거야?

오빠도 골방에 들어앉아있는데 나이찬 계집애가 오지랍도 넓지. 어디루 자꾸 싸다니는거야?! 네 이젠 아이낳이나 하며 안방에 앉아있을 때다.》

(잠간 들려볼가, 정동무와 함께 들려 저녁밥이라도 먹고 나올가? 《용달사》위치도 똑똑히 알아볼겸.)

성란희는 자기 집으로 떠미는 유혹에 잠시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용달사》가 효자동에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똑똑한 위치는 모르고 떠나왔다.

그러나 이내 성란희는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당장 방억세를 만나봐야 한다.

한정상이 부디부디 자기에게 임무를 지워준 속내가 얄밉고 지독하기 그지없으나 어쩌면 천만다행이기도 하였다. 자기의 넋을 송두리채 맡기고있던 인간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싶었던것이다.

골안에 방억세의 행방불명에 관한 추문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할 때부터 더욱 못 견디게 만나고싶던 얼굴… 만나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첫마디로 하고싶던 말…

《난 이 모든걸 믿지 않아요.》

성란희는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정동무, 내 좀 한가지 묻고싶은게 있어요. 솔직히 대답해주세요.》

《뭐입니까? 어서 물어보십시오.》

정수철은 고개를 돌리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성란희의 얼굴에 지어낸듯 한 미소가 어색하게 떠올랐다가 스러져가는것을 본 정수철은 자못 긴장된 기색이였다.

《다른게 아니고 달리 생각하지 마세요. 정수철동무가 <검찰청>에서 어떻게 탈출하였는지 알고싶어요.》

《예?… 그럼?… 저의 탈출을 의심합니까?… 소장동무! 똑똑히 말하시오. 날 의심한다는거지요?!》

사람이 고지식하고 비교적 사고가 단순한 정수철은 대뜸 끓어올라 어성을 높이며 데설궂게 들이댔다.

성란희는 당황해졌다. 정수철이 반발할것이라고 짐작은 하였지만 막상 본인의 거친 표정에 직면하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던 날 저녁 지휘부에서부터 꼭 따져묻고싶던것이여서 말투에 한껏 부드러움을 담아 상냥하게 량해를 구하였다.

《소대장동무, 그렇게 흥분하지 말아요. 동무를 의심해서가 아니예요. 뭐가 좀 생각되는게 있어서 그럽니다.》

《뭐가요? 뭐가 생각되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하여보십시오.》

《저… 난 지금 명령을 받기는 했으나 아직은 얼떨떨합니다.

소대장동무나 나나 방억세지대장을 따라다닌게 한두해였나요.

더구나 정동무야 해방전에는 방억세의 련락병으로 있었구 해방후에도 내내 따라다녔지요. 그러니 우린 그 사람을 알아도 너무 잘 알지 않나요.》

《그러니? … 어떻다는겁니까? 어제는 동지였다가 오늘은 적으로 된 인간들이 있다는걸 소장동무도 잘 알지 않습니까?

저도 믿고싶지 않아요. 그러나 이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정수철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흥분을 앞세우며 말했다.

《난 그 사람에게 반역자라는 말이 아직도… 당치않다는 생각이…》

《거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럼 명령집행을 뒤집자는겁니까? 그러면 왜 떠나왔습니까? 대장동지가 떠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나섰습니까? 소장동무, 어찌된 일입니까?》

정수철은 성란희의 말이 너무도 뜻밖이여서 잡아채듯 말을 중둥무이하며 당장 덤벼들기라도 할것처럼 사납게 걸고들었다.

성란희가 정수철이 성칼지고도 거친 소리로 드세게 반발하자 입가에 떠돌던 미안쩍은 빛을 지우고 랭정하게 되물었다.

《정동무, 무엇을 따지고드는거예요? 난 지휘부가 우리에게 내린 명령을 집행할것입니다. 난 그저 동무가 어떻게 탈출하였는가… 그걸 묻고있는거예요. 거기에 문제점은 없었는가. 우리는 언제나 적들의 모략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있다는것을 명심해야 해요. 경각성을 높여야 합니다. 이건 우리의 임무수행과도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묻는건데 동무는 왜 그렇게 신경질이예요?》

성란희가 맵짜지게 다불러대자 정수철은 한걸음 물러섰다.

《좋아요. 내가 도망쳐나온 리유를 생각나는대로 그려놓겠습니다. 난 이에 대하여 쌍매골근거지에 들어서자 인차 대장동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내가 <검찰청>지하실에서 방억세와 만난지 한달정도 되는 때였지요.

서남룡이가 새벽무렵에 불러내더군요.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귀쌈 몇개 때리더니 군특무대에 넘긴다는겁니다.

군특무대가 어떻게 냄새맡고 넘겨줄것을 요구했다고 하면서 재수없다며 툴툴거리더라구요.

듣건대 그놈은 방억세사건을 잘못 다루어 한달동안 벌감살이하다가 풀려났다고 합디다.

나는 군특무대에서 끌고온 찦차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남산재굽이에서 자동차다이야가 터졌지요.

그래 운전수가 다이야교체를 하느라고 내리고 잠시후에는 호송병을 불러내여 쟈끼를 올리고 다이야를 뽑아내는 일을 거들어달라고 하더군요.

난 기회를 타서 두놈에게 달려들어 수갑을 찬 손으로 바퀴를 들고있는 호송병부터 족치고 운전수도 뻐드러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무작정 남산뒤산으로 올라가 바위에 수갑을 짓쪼아 끊어버리고 다시 시내에 내려가 숨어있었습니다.

아예 방억세를 죽여버리거나 목을 치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더군요.

그러다가 그놈이 <용달사>를 차려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후날을 다짐하고 돌아갔던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성란희는 정수철의 이야기가 끝나자 눈앞에서 흐느적거리는 버들가지를 잡아쥐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물었다.

《소대장동무를 호송하는자들이 군부인물들이 옳았습니까?》

《그럼요.》

《무엇때문에 소대장동무를 군특무대가 요구한다고 <검찰청>것들이 호락호락 그쪽에 넘겼을가요? 그자들은 리승만앞에서 충성경쟁을 하면서 치적놀음에 눈이 빠져있는데요. 서남룡이 김창룡의 앞에서 허리굽힐 놈이 아니잖아요. 호송차의 차번호가 생각나요?…》

《아니… 그걸 볼 경황이 있었습니까?》

《탈출하여올 때는 추격이 없었겠지요?》

《예, 없었지요. 운전수와 호송병이 내 주먹타격에 쓰러졌으니 추격해올 놈들이 없었지요.》

《예- 소대장동무는 그놈들로 보면 중죄인인데 너무 허술하지 않아요. 그리고 군특무대가 륙군본부에 있는데 어떻게 되여 남산재를 달리게 되였을가요?》

《하, 그건 글쎄… 륙군본부가 룡산쪽인데 반대쪽으로 차가 움직인것은… 그건…》

《그리고 그곳에서 다이야가 터지구요? …》

《다이야가 터진거야 우연이겠지요. 백에 한번 있는 일이 나를 도왔겠지요.…》

《우연이라구요? 백에 한번 있은 일이 정동무를 도왔다는 말이군요.》

성란희의 얼굴에 언뜻 조소의 빛갈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자, 갑시다!》

성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정수철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사나이는 밸이 우뚝 살아올라 큰소리로 대들듯 따지고들었다.

《아 소장동무, 이야기하시오. 그러니 어떻다는겁니까? 내가 미덥지 못하다는 결론입니까? 이거 정말 미칠 일이군요. 놈들이 나까지 전향시켜 탈출시키는 놀음을 벌렸다는겁니까? 내가 밀정이 돼서 돌아왔다는겁니까?》

성란희는 자기 이야기를 너무도 비약시켜 걸어채는 정수철에게서 자기 옷자락을 홱 나꾸어챘다. 그리고는 결이 나서 한걸음 크게 내밟았다.

정수철이 그의 앞을 막아나서며 나직이 소리질렀다.

《난 명백히 알고싶습니다. 왜 그걸 묻는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내게 해서는 안되는 대답입니까?!》

정수철은 격분하여 자기를 다잡지 못하고 길길이 뛰여올랐다.

성란희는 격해오른 정수철을 잠시 쏘는듯 한 눈길로 훑다가 기진한듯 가늘고 쓸쓸한 어조로 응답하여주었다.

《정동무에게 못할 소리는 아니지요. 그리고 정동무에 대한 의심이나 원망도 아니구요. 난 솔직히 말한다면… 이번 임무수행이 껄쩍지근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 어떤 보이지 않는 검은손이 움직이는 큰 도박놀이에 걸려든것 같기도 하구요.》

《뭐라구요?! 도박놀이?… 좀더 대가 있게 말해주시오. 알쏭달쏭합니다. 그러니 우린 도박놀이패쪽이라는겁니까? 꼭두각시라는겁니까?》

정수철은 지휘부의 결정과 자신이 지휘부에서 꺼내놓은 체험담에 대한 불신과 도전이 분명한 성란희의 말에 그만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이 사람과 이자리에서 시비를 가를수가 없구나.

리성의 자대가 극도의 흥분으로 헝클어지고 의지조차 박약해졌구나.)

성란희는 어둠속에서 사나이를 경멸에 차서 쏘아보았다.

리해는 가면서도 평소에 고지식하고 인정이 헤프다고 보아왔던 사나이의 성깔사나운 반발이기에 성란희는 더없이 속이 허우룩하고 실망스러웠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도 달라질수 있는가.

그 무슨 맺힌 한이 생겼다한들 오랜 세월 들인 정을 이렇게도 한순간에 저버릴수 있을가? 이것 또한 배신이 아닐가.

사람이란 어차피 정과 정에 얽혀 인간이 된다. 정에 감겨 벗으로 되고 동지로도 되며 혁명의 대하에 뛰여들게도 된다.

정을 쉽게 버리는 인간은 친구도, 전우도, 혁명도 쉽게 버린다. 이것은 인간세계의 순리이다.

《난 예감일따름입니다.… 자, 더 지체하지 말자요. 밤이 깊어지면 그 사람이 퇴근할수가 있어요. 갑시다.…》

성란희가 정수철이 무엇인가 더 캐묻고싶어 바재이자 야멸차게 명령조로 이야기를 끊고는 그를 에돌아 씽하니 앞으로, 어둠속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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