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제11장 피어린 열매

 

방억세는 아침 8시에 동요가 타고온 택시를 타고 대궐집에 들어섰다.

솟을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있던 성관호의 어머니가 택시에서 내리는 방억세를 눈물속에 맞아주었다.

《이사람, 고생을 했네. 억대우같던 사람이 반쪽이 됐네그려. 어서 들어가세.》

방억세는 김씨의 앞에 엎드려 절부터 하였다.

《어머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오면서 동생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새 옥체건강하시였습니까?》

《그럼, 나야 뭐… 그저 걱정뿐이였지. 어서 일어나게.》

김씨는 마당에 엎드린 방억세를 부축하여 일으켜세우며 목멘 어조로 말하였다.

《언제면 이런 끔찍한 일들이 없어지려나. 왜정때는 왜놈들때문에 어느 하루도 맘편한 날이 없었는데 해방이 되였어도 눈뜨고 볼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김씨는 이렇게 뼈저린 장탄식을 하며 방억세의 팔을 잡고 토방으로 올랐다.

《어머님, 불민한 저때문에 집안이 두루두루 볶이우고 부담거리만 커져서 정말 죄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원, 그런 소린 하지도 말게. 세월이 하두 어수선해진탓이지. 어찌 자네 불민한탓이겠나. 그리고 난 여적 임자를 외간사람으로 한다리너머 생각해본적이 없은즉 그런 섭섭한 소리는 꺼내지 말게.

얘, 진이 에미야, 물덥혀놓았으니 어서 몸을 씻도록 해라.

목욕끝에는 꼭 꿀물 두어종발 마시고 한잠 푹 자면서 땀을 내도록 해라.

허해진 기운이 쉬이 돌아설게다.

옥살이얘기는 그다음에 듣구…》

김씨는 방억세와 며느리를 번갈아보며 자심하게 일깨워주었다.

《예, 어머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동요는 오빠를 각근히 위해주는 시어머니의 다심하고 꾸밈새없는 정이 고마와 눈굽에 눈물을 가랑가랑 매달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한 다음 내 찾아오겠네.》

김씨는 방억세를 측은하게 살피다가 혀를 차며 부엌으로 바삐 나갔다.

부엌문이 열리자 인삼냄새와 어울려 닭고기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다.

김씨는 방억세에게 대접할 닭곰을 풍로불에 올려놓고 불담을 손질하다가 어림짐작으로 며느리가 돌아설 시간에 맞추어 솟을대문을 열게 하고 방억세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동요는 오빠의 손목을 두손으로 꼭 감아쥐고 목욕탕으로 갔다.

그러면서 자동차안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동요는 《경무대》에서 있었던 일과 오늘 아침에 성관호가 경인지역 사령부에 첫 출근을 한 이야기를 개괄해서 들려주었다.

《음, 그거 참 대단했구나! 아무튼 이모저모로 매부가 고맙고 큰 자리를 타고앉은게 기쁘구나.》

방억세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자 눈앞이 시원하게 트이는듯싶어 좋아하였다.

이제 주민등록도 하게 됐으니 일은 일사천리로 밀고가게 된것 같다.

방억세는 따끈따끈한 물속에 들어가 누우니 온몸에 쑤셔들던 고달픔이 스르르 씻겨내리고 잇달아 눈덕이 내리감겼다.

방억세는 자칫하면 욕조물에 아예 노그라들것만 같아 욕조밖으로 나와 물을 끼얹으며 몸을 씻었다.

그가 목욕칸에서 나오니 탈의실에 벗어놓았던 옷가지들은 보이지 않고 눈처럼 하얀 속내의들과 새로 지은듯 한 양복이 포개여져있었다.

누이동생과 사돈집안사람들의 성의가 고여있는 옷을 입으며 방억세는 그들의 고마운 인정에 또 속이 뭉클해졌다.

그는 탈의실에 있는 쏘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안정을 하였다. 악몽같은 한달이였다.

왜정시기에도 두세해 감옥살이를 해본적이 있었으나 지금처럼 속이 파김치처럼 물크러지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때는 아마도 독립운동자로서의 자부심,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투지 그리고 일본놈들에 대한 끓어번지는 적개심이 그의 젊은 심장을 강하게 다져주고 심혼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던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옥살이의 첫날부터 속을 짓이기는 끝없는 심리전이였다.

자기의 넋을 지키면서도 임무를 위해서는 굴욕과 수치를 참아내야 하는 싸움이였다. 그리고 아차 실수하면 교수대의 이슬로 산화할수 있고 혹은 10년이고 20년이고 철창속에 시들어버릴수 있는 아슬아슬한 싸움이였다.

죽음도 두렵지 않고 옥살이도 겁낼게 없었지만 결코 죽어서는 안되는 자기였고 옥살이해서도 안되는 싸움이였다.

그래서 더구나 고달프고 숨을 조여야 했던 심리전이였다.

그의 눈앞으로 다른 또 하나의 가슴을 허벼내는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를 아예 태워버릴듯 불이 황황 일던 두눈, 경멸과 저주로 하여 목이 터갈라진듯 한 고함소리.

아 정수철! 네가 옛 상관의 초들초들 마르는 이 심정의 백분의 하나라도 알수 있겠느냐. 제발 죽지 말아다오. 네 가슴속에 들이박힌 이 방억세의 못난 얼굴을 그냥 품고 그속에서 요절해버린다면 난 어찌하나.

배신자로 된 옛 대장의 추한 몰골을 그대로 새겨넣고 저승으로 오른다면 이 방억세는 너에게서 두번세번 용서받을수 없는 인간이 되는게 아니야. 아 수철아, 제발 살아다오. 붉은 기발아래서 다시금 옛적처럼 나를 대장이라고 불러다오.…

방억세는 이렇게 하염없이 떠오르는 지겹고 뼈아픈 악몽에 시달려 시간을 보내는데 방문을 손부리로 치는 기척이 났다.

《동요야?》

《예, 왜 이리 오래 계세요. 벌써 두시간이 돼오는데…》

《엉?… 어느새…》

방억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멀끔해서 나오는 오빠를 보자 동요의 흐려있던 눈이 초롱처럼 빛났다.

《아유, 속이 덜컹했네.》

《왜?》

《아니글쎄 진이때문에 시간을 보내고오니 열시가 돼오지 않나요. 그런데 오빠는 침실에 계시지 않구… 이렇게 신수가 훤해진걸 가지구…》

동요는 오빠와 단둘이 있는 자리라 마음껏 웃고 떠들고 응석을 부리였다.

방억세는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 무랍없고 사랑스러운 모양이 새삼스러워 즐겁게 웃었다.

동요는 침실로 오빠를 안내하고는 더운물에 진하게 탄 꿀물을 큼직한 놋사발이 철철 넘치게 부어서 내밀었다.

《어서 마시고 한잠 주무세요.》

동요는 오빠가 꿀물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버리는것을 행복한 얼굴로 지켜보고나서 돗자리우에 두툼한 솜포단을 펴주고 빛이 들지 않도록 창가림을 해준 다음 손을 저으며 뒤걸음질로 방에서 나갔다.

방억세는 다음날 점심무렵에야 잠에서 깨여났다.

정말 긴 잠을 푹 자고나니 몸이 거뜬해지고 팔다리에 우쩍우쩍 기운이 뻗치였다.

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머리맡에 동요가 그린듯이 앉아 수심에 잠겨 자기를 내려다보고있다가 그 반듯한 얼굴에 기쁨을 활짝 피워올리는것이였다.

《아유, 오빠는 꿀꿀이야. 스물네시간 넘도록 잠에 곯아있다니. 진이 할매가 닭곰을 해놓고 그게 식어서는 안된다구 그냥 풍로불의 숯을 바꾸어가며 덥혀오시는데 이렇게 잠만 자니 내가 속상해 죽겠더라구요.》

《아, 그래. 그러면 두드려서 깨울게지.》

《그러지 않아도 그 생각두 했지요. 하니 어머님이 <아서라.> 하시잖아요. 이런 잠은 명약과 다를바 없으니 저절로 깨나게 해야 한다나요.》

《사령관님도 들어오셨댔나?》

《그럼요. 오늘 아침에도 깨여나가지고 오빠곁에 앉아 오빠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갔어요. 방금전에도 전화가 왔댔어요.》

《그래… 뭐라고 하더냐?》

《뭐라긴? … 그저 소처럼 웃지요 뭐…》

《허허…》

방억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힘있게 들어올리며 웃었다.

《자, 식당에 가자요.》

《아니, 사돈어머님께 인사올리구…》

《됐어요. 어머님은 방금전까지 여기 계시다가 진이가 자꾸 칭얼거려서 엿가락이라도 물려주어야겠다며 그앨 데리고 밖으로 나가시였어요. 그리구 오빠, 그 사돈어머니라는 말 하지 말아요. 어머님이 들으시면 노염타시겠어요.》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나?》

《거저 어머니라고 하세요. 그렇게 부르기 싫으면 아예 장모님이라고 하던지.》

《하하… 네가 참 엉터리구나.…》

방억세가 롱조로 받으며 껄껄거리자 동요는 눈을 빨며 새침해서 대꾸하였다.

《정말이예요. 어머니라고 불러요.》

《그래, 그러자꾸나.》

방억세는 자기에 대한 김씨와 이 집 식솔들의 남다른 관심과 정에 가슴이 후더워올라 짤막히 대답하고 동생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동요는 부엌에 나가 아직도 이글거리는 풍로의 숯불을 끄고 사기물을 올린 자그마한 오지단지를 다반에 올려놓고 들어왔다.

동요는 넓은 접시를 오빠의 앞에 놓아주고 그우에 오지단지를 놓고 뚜껑을 열었다. 인삼과 닭고기의 향기롭고도 달큰한 냄새가 흘러나와 단번에 텅 비여있는 창자에 폭풍을 일으켜놓았다.

동요는 인삼을 배속에 집어넣은 영계 한마리를 꺼내 손으로 고기를 뜯어 접시우에 올려주며 권하였다.

《어서 잡수세요. 보신으로 하는 닭이니 간을 맞추는게 아니라 했어요.》

동요가 잘게 찢어 넘겨주는 닭고기를 받아들기 급하게 삼켜버리던 방억세는 영계 한마리가 다 없어지게 될 때에야 생각이 나서 《얘, 너도 좀 집으려무나.》 하고 때늦은 인사를 하며 멋적어 씨물거렸다.

《보약으로 잡수는것인데 나누어먹으면 어찌나요. 어서 드세요.》

동요는 오지단지에서 또 한마리 꺼내며 방그레 웃었다.

그는 이번에는 닭다리를 쭉 찢어 종이로 다리끝을 감아서 내밀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자기가 허기져있던지라 덤비며 먹다가 체하기라도 할가봐 잘게 찢어 천천히 씹어넘기도록 한 모양이다.

이제는 고기냄새에 요동을 치던 구복을 달래여놓았으니 마음을 놓는다는 동요다운 약삭바른 심정일것이다.

《오빠가 옥살이 가있는 사이에 아산에서 부모님 오셨다가 내려가시였어요.》

《부모님이?!… 건강하시더냐?》

방억세가 지나가는 소리로 알려주는 동요의 말에 입을 벌린채로 굳어졌다.

동요는 아무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시고 오셨을가?…》

《신문을 보셨다나요. 동네사람들이 알려줘서 신문을 찾아봤다나요.》

《신문을?!…》

방억세는 가슴팍이 쩌릿해왔다. 아버지가 그 문제거리의 신문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가?!

아버지는 해방이 되기 전해에 죽창대에서 내려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돌아갔다.

해방이 되자 군에 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조합장이 되여 농민들의 민주주의적권리와 리익을 옹호하며 《미군정》의 농민수탈과 지주계급의 횡포를 반대하는 싸움의 선두에 나섰다.

아버지도 죽창대의 정치강의와 토론회들에 참가하여 상당한 정도로 정치의식이 높아졌던것이다.

그러한 아버지가 《선언》이요 뭐요 찧고 까불며 자기의 립장을 보수언론의 파렴치한 도마우에 올려놓고 제멋대로 료리하여 세상에 내놓은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가.

아들에 대한 실망과 노여움이 가득해서 서울에 달려왔을것이다.

《아버지가 날 많이 원망하셨겠구나.》

《원망이요?… 왜요?》

동요가 동이 닿지 않는 소리라는듯 물었다.

《왜라니?… 신문을 보고 오셨다지 않았니. 그 신문내용이라는게 어떤거냐.》

그 신문을 받아들었을 때 제일 격노했던것은 사실 동요였었다.

그 더러운 신문기사 한쪼박으로 오빠의 인격을 순간에 진구렁텅이에 처박았다고 하면서 당장 신문사를 명예훼손죄에 걸어 고소하라고 하였다.

오빠가 비켜서면 자기가 나서겠노라면서 발을 구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방억세가 차라리 잘되였다며 달래여주고 성관호까지 그를 해명하는것이 오히려 오빠를 궁지에로 몰아넣을수 있는 자살행위라고 겨우 설득하였다.

《흥… 오빠는 아직도 아버지를 잘 모르시는군요. 아버지가 어떤분이시라구. 우리 집 량반이 아버지가 크게 상심해하실가봐 한마디 위로하더라구요.

<아버님, 처남때문에 너무 괴로와마십시오. 그 사람은 감탕밭에 딩굴어도 때 한점 묻지 않을 사람입니다. 질풍이 태질한다고 락락장송이 제 모습을 달리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으신 아버님 하시는 말씀이 천근만근이였어요. <옳거니, 오가는 잡소리가 오만가지라 해도 난 하나만을 믿고싶네. 대는 불에 타도 휘여들지 않는다네. 그애는 고목이 되여 부스러져내려도 굽어들지는 않을거네.> 글쎄 이러시지 않겠나요.》

《뭘? 불에 타도 휘여들지 않을거라구!!… 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거지! 아버님의 말씀 정말 금언이다!… 고맙구나. 마음이 놓인다.… 후유- 난 참, 괴롭다.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실 이 가슴이 천갈래만갈래로 찢겨져버렸어. 너 정말 정수철을 잘 알지?》

방억세는 동요가 넘겨주는 닭다리를 또 하나 받아들고 우물우물 씹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목구멍이 꺽 메여 닭다리를 접시우에 놓았다.

《정수철?… 생각나구말구요. 아유, 그 싱검둥이… 한번은 피… 아이고 우스워…》

동요는 오빠의 낯빛에 마음을 쓰다가 제풀에 까르르 웃었다.

웃을 때 볼우물이 살그머니 패우기도 하고 도드라져오르기도 하면서 예쁨을 뽐내는듯싶다.

《글쎄, 그 싱검둥이가 나를 찾아왔어요. 뭘 자꾸 어색해하며 이말저말 꺼내는데 손에는 쪽지가 쥐여져있더라구요.… 죽창대때 이야기예요.… 거기에 자꾸 눈이 돌아가 내가 물었지요. 그게 무슨 편지냐구. 그러니 한참 우물거리다가 하는 말이 죽창대에 들어와 글을 배우고나니 녀자친구에게 편지쓸 생각이 나서 써가지고 왔다나요. 무슨 내용이냐고 물으니 한참 또 입속으로 우물거리다가 혀끝에 겨우 올리는 말이 <저 거시기… 녀자에게 쓰는 편지이니 무슨 내용이겠소.> 하고 제편에서 오히려 역증이지요. 그래서 련애편지냐고 툭 내쏘니 뭐 련애편지는 아니고 동무가 자기 마음에 든다는 소리라나요.

난 골이 나서 오똑거려봤지요. 난 시집갈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구. 난 그런 편지는 절대로 받을수 없으니 당장 가지고가서 불태워버리라고 했지요. 호호. 그러니 글쎄 정동무가 얼굴이 당장에 홍당무처럼 빨개가지고 그런게 아니라고 하는데 난 듣기 싫다고 막무가내로 방에서 몰아냈지요.

나중에야 그 싱검둥이 하는 말이 소대장동무가 좋다는 편지가 아니라 예정희동무가 좋다는 편지라나요, 호호…》

동요는 그때일이 떠오르자 즐거운 추억에 소리내여 웃었다.

방억세도 처음으로 들어보는 동화같은 이야기에 어느새 속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예정희동무 알지요? 인천방적에 있다가 온 동무, 정동무와 같이 입대한 동무, 똑똑하구 마음씨가 착한 동무… 생각나세요?》

《생각나구말구… 그 태백산마루의 불무지앞에서 정수철이 예정희동무 이름을 부를 때 수집어하면서도 정수철의 곁에 가서 얌전히 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런 사연도 있었느냐. 그러니 네가 중매군이 된셈이구나.》

《하긴 그렇게 됐지요. 그때는 대원들사이의 련애를 엄격히 문제세우던 때가 아니였나요. 그래 난 정수철동무에게 이 이야기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된다는 다짐부터 받고야 편지를 받았지요.

그리고 물론 난 정수철동무에게도 예정희동무에게도 서로 상대방이 제일 훌륭한 동무라고 말해서 그 불무지까지 그들의 편지가 그냥 이어지게 했지요.》

《원, 훌륭한 소대장이였구나. 규률위반을 눈감아주고 공범자가 되여주고…》

《흥, 녀자들 세계를 오빠 모르는게 한두가지였다구요.… 전달에 한번 모연금 가져가려고 어머님한테 몰래 들린 그 사람을 피끗 만났는데 아이까지 있어요. 이젠 두살이 된다나요.》

《그래, 두살이 된다.… 그 어린걸 처형되는 사람에게 맡기고 다시 총을 잡았지.》

《그럼, 예정희동무도 함께 올랐나요? 그때 정희가 잘 지내냐고 물으니 거저 우물거리며 바쁘게 떠나가더니…》

《아니… 예정희동무는 <5.10단선>반대투쟁을 벌릴 때 경찰에 붙잡혀 학살되였다.》

《예?… 정희가?!… 아, 그래서!… 아 참,… 정희동무가 그렇게 됐군요!》

동요는 이렇게 비명지르듯 소리치며 고개를 떨구었다.

사랑의 꽃을 피우기 바쁘게 스러지고만 전우들의 소식이 애통하여 그 녀자의 맑은 두볼로 팥알같은 눈물이 도르르 굴러내렸다.

동요가 비분에 타는 가슴을 진정하며 다시 고기를 뜯기 시작하자 방억세가 조용히 말하였다.

《됐다. 그만하거라.》

《다 잡수어야 해요. 세마리라 해야 엄지닭 한마리보다 못해요.

어머님이 꼭 영계가 돼야 한다면서 장마당에 가서 깜장닭으로 아홉마리 골라왔는데 오빠한테 세마리씩 련 사흘 고아서 대접해야 한다구 했어요.》

《됐다. 너무 호사스럽다. 더는 못 먹겠다. 깔깔해서 넘어가지 않는구나.》

《오빠!》

오빠의 심중을 리해한 동요가 더는 권하지 못하고 감동에 젖어 나직이 부르짖었다.

《이번에 그 정동무를 만났다.》

《예?… 정동무야 산에서 싸우지 않나요. 참 의젓한 동지였는데.》

《진이 아버지한테서 듣지 못했니?》

《아니요. 그 사람이 그런 소리를 나한테 해주나요.》

《음… 여기 왔다 돌아가다가 체포되였다구 했는데, 내가 그 사람을 만날줄이야… 그 서남룡놈이… 너도 알지… 고 이리같은 놈이 나를 지하실로 데리고가더라.

거기엔 걸상에 묶이운 정수철이 온통 얻어맞아 험상한 얼굴로 앉아있더구나. 그 사람을 쏘라는거다. 그래야 <검찰청>의 <보증서>가 최종적으로 통과될수 있다는거다.》

《예?… 그게 무슨 소리나요.… 그래서요?》

그 녀자는 놀라움에 두눈이 올롱해져서 비명치듯 물었다.

《내게 콜트권총을 주더구나. 생각해봐라. 자기의 동지, 그것도 정수철이야 내게 얼마나 소중한 동무였니. 그 사람을 쏴야 한다는거다. 문제는 내게는 일이 있는거다. 그것만 없다면야 너 죽고 나 죽기이지. 한데 임무를 위해 살자니 동지를 죽여야 하구 동지를 살리고 내가 죽자니 난 임무를 포기해야 하는거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있겠느냐.

그런데… 권총을 잡은 손짐작이 례사롭지 않더구나. 난 왜정때도 콜트를 차고다녔구 해방후에도 이번에 내려올 때까지도 꼭 그걸 차고다녔다. 탄알 한알의 무게가 덧실려도 대뜸 알아내군 했지. 저놈들이 그걸 몰랐지. 거기다가 격발기를 넘기니 총탄이 약통실에 들어가지 않더구나. 그것도 역시 소리와 손맛으로 가늠이 되는거다.》

《오빠야 총에서야 귀신이나 같으니깐요.》

앞뒤가 낭떠러지같은 오빠의 기막힌 처지에 자기도 속이 조여들던 동요는 무엇인가 숨이 나가면서 뒤말을 기다렸다.

《흥… 그래도 그건 모험이기도 하지. 아슬아슬한… 어찌 알겠느냐. 백에 한번 내 감각에 실수가 있다면 어쩌나 말이야. 헌데 그 사람이 내가 격발기까지 잡아채니 눈이 말이 아니더구나. 그뿐이겠니. 배신자라고 고함을 치는데… 후… 정수철의 마음이 온통 누데기가 되였을거다. 자기가 믿어의심치 않던 사람에 대한 신의를 버린다는것이 얼마나 통분하고 가슴아픈 일이겠니.

내 쪽발이들앞에서도 양놈들앞에서도 떨지 않던 심장이 정수철의 눈빛앞에서는 여지없이 흔들리고 가슴이 온통 파렬되고말더라.

아, 그 사람이 죽지 말아야겠는데… 그 사람이 옛 대장에 대한 사무친 한을 풀지 못하고 저승길에 오르면 이 방억세도 죽어버린 놈이 될거야.》

방억세는 쓰라린 비분을 금치 못해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두드리며 눈물을 뿌렸다.

그 처절한 정상에 동요도 방억세의 두손에 얼굴을 묻으며 흑흑 흐느꼈다.

《오빠, 그만해요. 난 오빠를 믿어요. 난 오빠가 하산한 그날에 벌써 오빠가 보다 엄청난 짐을 메고왔다는것을 알았어요. 오빠, 울지 마세요. 그래서 혁명이 아니나요. 비명에 간 숱한 사람들이 오빠를 지켜보고있다고 생각하세요. 가까운분들이 다들 오빠를 리해하여주고 지지하지 않나요. 힘을 내세요. 오빠.》

동요는 처량하게 이어지는 구슬픈 이야기에 자기 속도 여지없이 찢겨지고 아려왔으나 애써 자기를 다잡고 이렇게 살뜰하게 오빠를 위로하였다.

《고맙다. 그런데 실은 너한테 하나 부탁할게 있다. 사실은 그 말 하자고 정수철의 말을 꺼냈는데 이야기가 딴곳으로 흘렀구나. 정수철이 그 철대문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것 같구나. 그러니 말이다. 난 정동무의 아들을 맡아주기로 결심하였다.》

《오빠가요? … 오빠가 홀몸에 어떻게요?》

《그래 지금에야 안되는 소리지.》

《차라리 제가 데려오겠어요.》

《아니, 그러지 말아. 그건 안될 소리다. 집안에 또 하나의 우환을 가져올수 있는 일이니 우리는 절대로 성씨가문에 부담되는 일을 자꾸 만들어내지 말아야 한다. 그래 내가 살림을 차리기 전까지 애를 찾아 양육비라도 보태주었으면 한다.》

《예, 오빠 말대로 하겠어요. 제가 래일이라도 인천으로 가서 그애를 찾겠어요. 그건 걱정마세요. 꼭 그 일은 내가 맡아하겠어요. 오빠, 좀더 들어보세요. 참…》

동요가 얼른 일어나 부엌에 나가더니 보시개를 들고 들어왔다.

《자, 이걸 들어보세요. 잣죽이예요. 어머님이 손수 끓여놓고 나갔어요.》

《원 참,… 사돈어머님두!…》

《오빠는 또 사돈이야요. 이제 그 말 어머님한테 들어갔다간 당장 쫓겨나구마는걸 봐요.》

《하하… 그래 내 잘못했다. 정말 진이 할머니에게 두루 미안한것도 많구, 생각되는게 많다. 내가 이 집안에 풀메뚜기처럼 뛰여들어 평화롭던 집안을 들쑤셔놓은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없다.》

《그건 오빠의 괜한 걱정이예요. 어머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머님은 지내볼수록 존경이 가는분이예요. 현모량처로만 보면 오산이예요. 강직하구 의롭구 리해력있구… 뭐라 할가, 개명한 녀성이지요. 난 어머님이 일찌기 사회주의교육을 받았더라면 조선의 로자가 되였을거라구 생각하군 해요.》

《허허… 그건 다른 문제야. 네 서방이 교육을 받지 않아서 성란희는 쉽게 받아들인 공산주의를 끝내 외면하였겠니. 그러나 어머님이 뜻이 높은분이라는건 옳은 말이야. 야장쟁이의 자식이고 사회주의운동가이기도 한 너를 선뜻 량반종가집 맏며느리로 받아들인거나 성란희동무를 생사기약없는 싸움길에 내세운거나 보통생각으로 상상이나 할수 있는 일이냐.》

《그것뿐인줄 아세요? 슬하에 하나밖에 없는 고명딸의 배필로 야장쟁이의 아들을 찍어놓고있는걸 봐도 그렇지요.》

동요가 화제를 방억세와 성란희의 혼사문제로 끌고와 그들은 마주보며 웃고말았다.

동요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방억세의 결혼문제를 꺼내놓는다. 그때면 의례히 성란희이야기를 곁들여가지고 보채고 졸라댄다.

《이번에 어머니가 왔을 때 누이이야기를 했어요. 사진도 보여주고요.… 오빠, 눈을 흘기지 말아요. 오빠나이 얼마인데… 어머닌 괜히 곁에서 통 관심이 없다고 나만 몰아주는데 어떻게 해요. 그래서 누이와 여사여사한 사이라고 말해주었지요 뭐.

어머닌 누이사진을 보고나서 흠뻑해하더군요. <억세에게 어울린다. 너무 과남하다.> 어머니 말씀이예요.》

《얘, 다시는 그 말을 입밖에 꺼내지 말아.》

방억세는 다소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동요는 방억세의 눈빛에 주눅이 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퐁퐁 튀여올랐다.

《왜요, 오빠는 누이와의 관계에서는 너무 보수적이고 봉건적이예요. 그러다가는 두분이 다 로총각, 로처녀로 늙지 않나 봐요. 무엇때문에 아직도 주저하세요. 또 한정상, 난 그 알량한 인간 보기만 해도 메스껍더라. 아이가 이젠 열살도 넘는다고 했는데 망울같은 우리 누이를 탐내고… 그 시꺼먼 량심이 돼먹었나요.》

《얘, 괜히 턱자없이 사나이 흉보는게 아니다. 그건 봉건의 유물이라고 청산했다지 않아. 리혼까지 했구.… 내 듣기두 좋지 않더라만 리해도 가는 일 아니야.

난 그 문제에서도 깨끗한 인간이 되고싶다. 사람은 안팎이 하나같아야 하는거야. 투쟁도 사랑도 깨끗해야 한다. 량심이라는 말 괜히 있는줄 아느냐. 한정상은 지금 산에서 고생하고있다. 고생하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러루한 일로 마음을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난 달리는 살수 없다.》

방억세가 여전히 엄한 기색을 짓고 무겁게 눌러놓으려고 하였으나 동요는 더욱 열이 나서 오빠를 핀잔하였다. 아마도 한번은 단단히 이 문제 놓고 어거지를 해대고싶어 속을 도사려왔던 모양이다.

《아유, 됐어요. 어서 잣죽이나 드세요. 오빠는 정말 봉건이야. 한정상과 관계란 도대체 뭐나요. 나도 다 알아요. 한해도 넘기지 못한 련애담에 발목이 잡히고… 원, 세상에 오빠 같은 사내들만 있다면 잠시잠간 련애 한번 해본 처녀들이 시집이나 가보겠어요.

나도 쬐꼬말 때 앞집의 만수와 늘쌍 꼬마신랑, 꼬마색시가 되여 소꿉놀이하였는데 그럼 나도 만수를 배반한 바람쟁이가 되겠군요. 뭐 빠리식련애두 되고요.》

《뭐 만수?… 하하하… 너 이젠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같고같지요 뭘…》

방억세는 동생이 소꿉시절의 이웃집 사내까지 거들며 그냥 고집을 부리고 자기를 궁지에로 몰아가자 어이없어 폭소를 터뜨리고야말았다.

동요도 말을 꺼내놓고보니 제 생각에도 우스워 외씨같은 이발을 드러내고 깔깔거리다가 잣죽이 다 식었다며 다시 덥혀오겠노라고 일어섰다.

《아니, 됐다. 인다오.》

방억세가 동요에게 자꾸 수고를 끼치고싶지 않아 그에게서 보시개를 앗아가지고 게눈감추듯 해버렸다.

방억세는 동요가 내미는 물수건으로 입을 닦고는 해솟는 다도해를 화폭에 담은 풍경화를 점도록 바라보고있는데 대문가에서 누르는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어머님이 돌아오시는군요.》

동요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방억세도 동생을 따라 김씨를 마중하려고 토방으로 나갔다.

저녁시간에 성관호가 륙해공군실력자들을 다 데리고 들어왔다.

왕별을 어깨에 무겁게 얹은 장성들이 저마끔 자기 차를 타고 대문안에 들어서자 대가집도 갑자기 작아진것 같았다.

최병우가 방억세와 뜨겁게 포옹하면서 대장님이 저승문턱에서 승천했노라고 진심으로 기뻐서 웃고 시시덕거렸다.

푸짐하게 차린 식탁에 둘러앉아서도 그들은 방억세의 석방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대체로 돌아가고 방억세와 가까웠던 옛 동료들만 남아 밤깊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방억세가 취담중에 이젠 돈을 벌어야 살아가겠으니 《용달사》를 꾸려볼 생각이라고, 그런즉 많이 도와달라고 슬쩍 한소리 띄워놓았다.

그런데 대뜸 장수덕이 몰풍스레 퉁을 놓았다.

《아, 대장! <용달사>는 왜?… 서울장안에 아무렴 죽창대장이 벌어먹을데가 없을라구.》 하면서 겁기가 많아보이는 소눈같이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장수덕의 엉큼한 속내를 넘겨짚은 방억세가 헌헌하게 응수하였다.

《헝, 나야 총쏘고 맑스주의 풀고 하는 일 내놓고야 골라잡을 일 따로 있나. 한데 빨찌산지대장한테 총은 주지 않을게구 맑스주의강의를 강의료 받으며 할 곳은 없을거니 그건 호구지책이 안된단 말이요.

허지만 군부에 두루 이 방억세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쪽으로 장사물곬을 터놓고싶은거지.…

장차장도 뒤날에 이 방억세 돈 갉아먹고싶으면 지레 눈 꾹 감구 인심이라는 투자를 해서 제 몫을 챙겨두는것도 나쁘지 않을걸세.》

방억세가 이렇게 엉너리를 쳐서 장수덕의 말구멍을 틀어막아버리자 장수덕이 벌써 혀꼬부라진 소리로 직방으로 떠들었다.

《아 방형, 그까짓 말 좀 해주소. <용달사> 만들어 뭘 하우?

도대체 하산은 왜 한거요?》

장수덕은 방억세보다 나이가 우였으나 예전에 일본군 소좌였던 자기를 해방후에 가까이 사귀면서 정을 주던 방억세를 지금도 웃사람처럼 깍듯이 대한다.

《물을게 있소. 뭘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거요.

수틀리면 <5. 10정권>(<5. 10단독선거>로 이루어진 <정권>이라는 뜻)을 콱 들부셔버리는거지. 기실 <5. 10정권>은 벌써부터 썩은 내 퀴퀴하기 시작했겠다. 그때면 장수덕이, 성관호들과 나도 대장의 선봉장이 되는거라…

하지만 이보라구, 방대장의 저승길을 돌려세운게 <경무대>령감님이라는걸 잊지 마시우.

그 령감덕에 방대장이 분명 20년 콩밥 먹게 된 팔자 바뀌게 됐다 그걸세.

그런즉 어쩌구저쩌구 할것없이 적어도 10년은 그 령감의 용병살이 해야 될거요. 하하…》

최병우가 이렇게 엮어대는 바람에 좌중에서는 흐아-흐아- 하고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방억세는 속이 뜨끈해왔다.

방억세의 하산리유를 가장 면바로 짚어내고있는 사람은 역시 죽창대의 부대장으로 세해동안 옆에서 고락을 같이하여온 최병우였다.

그는 방억세라는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을것이며 이남쪽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이 사라지더라도 그의 가슴에는 붉은 기발이 평생토록 날릴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방억세가 언젠가는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리승만《정권》을 들부시는 통일운동에 동참하여줄것을 자기에게도 제기하여올것이라는것을 의심치 않았다.

방억세가 빨찌산지대장의 중임까지 내놓았고 하산한이래 줄곧 여러가지로 지저분한 후문과 고생살이를 겪으면서도 《용달사》를 찾는것은 방억세의 인격에 어울리는 일거리가 있기때문일것이다.

《자자, 술들이나 마시세. 무슨 얼토당토치 않은 억측들인가.

<용달사>를 꾸려놓으면 돈벌이야 되지. <국방>에도 리롭구. <검찰>의 <보증>까지 받아놓은 대장에게 무슨 흉흉한 소리들인가.

발없는 말 천리 간다구 뿌리없는 랑설이 날아다닐가봐 걱정일세.》

성관호가 동료들에게 자못 념려스러운 어조로 제때에 함구령을 내렸다.

또다시 처남에게 수갑이 채워진다면 우선 리승만앞에서 재간없는 노죽까지 부려가며 일을 성사시켰는데 면목이 없을것이다.

방억세가 제발 이제는 조용히 살면서 대세를 관망하는것이 그를 위하여서도 자기를 위하여서도 상책일것 같다. 그러다가 정 리승만《정권》이 부실해서 백성들의 요청을 받는다면 그때 가서 움직여도 늦지 않다.

《제길할, 걱정도 팔자다. 여기서 지껄인 말 새나간다면 찾아내서 목을 쳐야지. 대장, 우리를 믿어달라구요.》

최병우가 주먹을 머리우에 불끈 쳐들고 호기있게 떠들었다.

그 의기양양한 너스레에 좌중에서는 가벼운 웃음이 떠돌았다.

《고맙네, 친구들! 앞으로도 이 방대장이 옛 대장답게 살아가도록 채찍질해주게.》

방억세는 그들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하였다.

방억세는 옛 동료들이 속을 터놓아주는것이 고마왔다. 신뢰가 가고 기대도 컸다. 그러나 어쩐지 숨이 가빠지고 답답해지는것을 어찌할길 없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자기의 사업대상가운데서 핵심적인 인물들이다.

반미통일운동의 적이고 미국놈들의 용병무리인 군부안에서 일찌기 정의에 눈을 뜨고 량심의 편린이라도 남아있는 참으로 몇 안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들모두가 지금 미국놈들과 리승만한테서 선사받은 장성별에 만족해있다. 크건작건 보은을 마땅한 미덕과 도리라고 간주하고있다.

그리고 이들은 공산주의리론에 대해 반기를 들지 않았어도 손문의 삼민주의나 김구의 민족주의 혹은 전봉준이 신봉해온 《동학설》이 우리 나라의 리념적기초로 되여야 한다고 력설해온 사람들이다.

그런데다가 몇달전에 리승만으로부터 큼직큼직한 군직들을 하사받았으니 지금 이들의 심정이 하늘우에 떠오른 구름장과 같을것이다.

이들이 이제 리승만에게 환멸과 실망을 느끼고 반미애국통일세력에 합류할 생각까지 한다는것은 먼 미래에나 가져올수 있는 꿈일것이다. 세사람이 다 표현방식은 달라도 그것을 시사하고있는것이다.

방억세는 허망한 생각이 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의 이 정도의 립장이라도 만족해야 한다. 이들은 다 해방후 방억세가 좌익권에 들어설것을 진심으로 권고하였을 때에도 점잖게 그리고 완고하게 도리질하던 사람들이다.

《군인은 순수해야 한다.》-이것이 이들의 공통된 심리이고 이들을 하나의 동아줄에 든든히 결속시키는 리념이기도 하다.

다만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인간의 량심을 귀중히 여기던 이네들의 공통된 지향이 다행스럽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권력이라는 차고 랭담하고 유혹적인 마술에 걸려들어 어떤 색갈로 변색될는지는 지금은 예측할수 없다.

인간이란 세월의 풍화작용을 받아 가변적인 존재라 하지 않는가.

세월의 광풍이 이들이라고 한본새, 한모습으로 굳어져있으라고 스쳐갈수는 없다.

방억세는 이렇게 장마철구름같이 변화무쌍하게 오가는 생각들에 묻혀 술이 쓴지 단지도 모르고 얼근히 취해갔다.

문득 동요가 아까 들려준 아버지가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 그렇구말구. 난 고목이 되더라도 굽혀들지는 않을테다. 때를 기다리리라. 아니 때를 앞당겨오리라.

이렇게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하던 속이 시원히 열리고 볕이 드는것 같았다.

그는 닫아매고있던 입을 열고 여럿의 이야기에 매듭을 지었다.

《다들 나를 걱정하여주고 변치 않은 우정을 듬뿍 안겨주니 고맙기만 하고 힘도 생기네. 나의 장래에 대해서는 너무 마음쓰지들 말아주게. 인생길이 여러 갈래고 마주쳐오는 바람결이 갈팡질팡이여도 난 오직 내 량심이 가리키는 길만을 가려네.

그러니 방억세가 인생의 선택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다들 매질을 해주게. 그리고 힘과 용기를 보태여주게.》

식객들은 방억세의 조용한 이야기에서 강쇠처럼 굳건하고 열렬한 심장의 다짐을 새겨듣고있었다.

최병우가 주기가 올라 벌겋게 타든 이마를 건듯 올리고 잔을 높이 쳐들었다.

《역시 방억세는 방억세야. 우리가 섬긴 대장이 아무렴 박쥐구실할텐가. 항일죽창대 만세!》

그러자 다른 식객들도 일제히 잔을 들었다.

쟁가당!

잔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세상의 다난사를 삼키며 모두의 가슴에 깊은 여운으로 잦아들고 방안을 훈훈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바래워주고 혼자서 초생달이 빛을 거두고있는 뜨락을 거닐며 동료들과 나눈 담화를 돌이켜보던 방억세는 커다란 우려를 느끼게 되였다.

그것은 찾아왔던 옛 동료들이 지금은 하늘의 구름우에 떠오른것처럼 군부의 실세인물이라고 자부하고있지만 그들이 단명으로 끝나리라는 예감이였다.

그들은 예나제나 자기의 민족주의적성향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무엇인가 리념적으로나 군사실무상으로나 나름으로의 주장과 배심이 있고 리성적으로도 사고할줄 아는 인물들이다.

이것이 미국놈들이나 리승만과 장차 투합이 될수 있겠는가.

장수덕이는 아직도 인간의 금새가 묘연하지만 최병우는 절대로 미국놈이나 리승만앞에서 허리를 굽신거리지 않을것이다.

성관호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어찌되여 저들이 군부의 실세로 천거되였을가.

거기에 바로 저들의 비극이 있고 운명적인것이 있다.

미국놈들이 리승만군부의 간판인물로 저들을 골라낸것은 리승만의 《조정》을 가리켜 미국의 주구집단이라고 조롱하는 세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어루쓰다듬어주고 어떻게 하든 민족성이라는 색채로 채색해주려는 정치적제스츄어에 불과하다.

이제 미국놈들과 리승만은 일정하게 자기의 지반을 닦은 다음에는 어차피 저들의 민족주의리념과 충돌하게 될것이다.

결국 저들은 리승만《정권》의 민족성을 과시해주는 일정한 기간의 임무가 끝나면 미국놈들에게는 거치장스러운 존재가 되고 군부에서 제거될것이다.

현단계에서 군부에 대한 미제의 숙청놀음의 과녁이 좌익권이지만 다음단계는 저들이 될것이다.

그러나 래일은 어찌되든 이 땅에서 미국놈들을 쳐부시고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그마한 가능성도, 기회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주경남대장과 정치위원이 빨찌산운동을 더욱 강화하여야 할 형편에서 《특별결정》을 채택한것이 아닌가.

방억세는 한시바삐 신분의 합법을 쟁취하고 사업대상을 넓혀나가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방억세의 이날의 예상은 정확하였다.

미국놈들이 장수덕이는 물론, 특히 최병우 같은 인물을 놔둘리가 만무했다.

다음날 오후에 방억세는 동료와 함께 구청으로 갔다.

구청서기는 서울《검찰청》 청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고 하면서 허리까지 굽신거리며 즉시에 호적등본서류를 내주었다.

서울《검찰청》 청장은 성관호에게도 직접 찾아가서 루루이 사과를 하고 서남룡부장검사에게 벌감형을 내린 사실을 정중하게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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