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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준엄한 나날에
전쟁의 나날은 승리를 위한 싸움의 나날이였지만 그 시절에 대한 나의 추억속에는 신념과 병사의 량심으로 이겨내야 했던 준엄한 시련의 나날도 뚜렷이 새겨져있다. 1950년 8월 우리 부대는 경상남도 사천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우리는 전선의 최전방에서 싸우게 되였다. 우리는 함안일대에서 낮과 밤이 따로 없는 결전을 벌리였다. 고지 하나를 밤에는 아군이, 낮에는 적들이 점령하는 식으로 적아쌍방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이때 20대 중반의 우리 분대 대원이 전사하였다. 평소에 세계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락천적인 동무였다. 그는 적비행기에서 발사된 로케트탄에 두다리를 잃었다. 《동무들, 모두 승리의 날까지 잘 싸워주오. 나의 고향은 경남…》 그의 마지막말이였다. 우리는 모두 울었다. 이 세상에 태여나 너무도 짧은 생을 마치면서 고향주소조차 못남긴 그것이 가슴아파 슬피 울었다. 우리는 눈물속에 그를 안장하며 승리의 날 다시 찾아올것을 맹세하였다. 승리의 길이란 결코 랑만으로만 가득찬 길이 아니였다. 우리는 승리를 그와 또 쓰러진 전우들의 부탁으로 새겨안았다. 1950년 9월 마산공격전투에서 또 숭문중학교시절부터 나와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던 친구 김교선이 희생되였다. 김교선은 나보다 한살 아래였지만 투쟁경력이 오랜 동무였다. 인민군대에 의해 서울이 해방된 후 내무기관에 들어갔던 김교선은 내가 의용군에 입대한것을 알자 자기도 전선에서 싸우겠다고 하며 그달음으로 달려와 우리 소대에서 련락병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그는 나의 친우일뿐아니라 생명의 은인이였다. 마산공격이 있기 전 함안의 어느 한 고지에서 식사를 하던 나는 미국놈들의 포사격권내에 들게 되였었다. 여기에서 살아남을 가망은 거의 없었다. 나는 적의 박격포탄에 어깨와 목을 상하였다. 포탄은 앞뒤에서 연방 터져올랐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 김교선이 포화속을 뚫고들어와 나를 안전지대까지 후송하였다. 이것은 모험이였다. 그는 나를 련대군의소까지 후송하고 돌아갔다. 그때 침대에 누운채로 그를 바래우던 나의 시선은 그의 신발에서 멎었다. 신발이 형편없이 찢겨져있었던것이다. 그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나는 끝내 그에게 내 신발을 신겨보내였다. 《이거 내 발에 꼭 맞는데.》 그는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성모, 이건 우리가 인생길을 함께 가야 할 운명이란걸 의미하는거야.》 《그거 그럴듯한 말일세.》 우리는 유쾌히 웃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리별이 될줄이야… 그의 비보에 접하였을 때 나에게는 나의 신발을 신고 떠나가던 그의 뒤모습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말이 떠올랐다. 《이건 우리가 인생길을 함께 가야 할 운명이란걸 의미하는거야.》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 나와 함께 추위와 굶주림, 천대와 멸시를 이겨내며 우정을 나누었고 그 정을 못 잊어 전선으로 나를 찾아왔던 그, 그리고는 나의 생명을 위해 죽음의 포화속을 뚫고왔던 진정한 벗이고 동지였다. 김교선이 이제 더는 내곁에 올수 없게 되였다. 그가 두고간 다 찢겨진 신발을 바라보느라니 너무도 짧은 그의 생이 가슴에 마쳐와 억이 막혀 온밤 잠들지 못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마산공격전투에서 나의 첫 전우들이 거의 전부 희생되였다. 상처가 심하였던 나는 다시 렬차를 타고 후방으로 후송되였다. 렬차운행이 복잡한데다가 적의 폭격이 심하여 우리가 탄 렬차는 한 역전에서 몇시간, 때로는 하루종일 머무르군 하였다. 렬차가 리리(당시)에 머물렀을 때 나는 리리기관구를 찾아가 김교선의 형에게 동생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후 리리시당을 찾아갔다가 거기에서 사업하고있는 리동지와 뜻밖의 상봉을 하게 되였다. 그는 목과 어깨에 온통 붕대를 감고 불쑥 나타난 나를 놀라운 눈으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날 나는 리동지의 부축을 받으며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이전에 일본놈들이 쓰던 낡은 관사를 조금 개조한것이였다. 시녀맹일군인 그의 부인은 인민군대원호사업 등으로 몹시 바쁜 몸이였지만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달음으로 달려왔다. 그들부부는 리리에도 인민군병원이 있으니 거기서 치료받고 떠나라고 권고하는것이였다. 리리에서 고향집이 멀지 않은 나로서는 그 요구를 들어주고싶었다. 하지만 소년시절부터 흠모하여오던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으로 한시바삐 가고싶은 열망을 억제할수 없었다. 또 서로 소속이 다른 사람들이긴 해도 함께 가던 부상자대렬에서 말없이 떨어지는것이 그 어떤 배신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나의 말을 들은 그들부부는 그이상 더 요구하지 않았다. 부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하니 고여있었다. 그날 그들부부는 내가 전선으로 떠날 때처럼 역전까지 바래주었다. 《성모, 우리 부끄럽지 않게 잘 싸우자구. 승리의 날 다시 만나자.》 우리는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어스름속에 더는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들부부는 그냥 한자리에 서있었다. 이따금 자동차의 전조등빛에 백양나무밑에서 손을 흔드는 그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드러나군 하였다. 세월은 멀리 흘렀어도 그들은 나의 기억속에 오늘도 그렇게 서있다. 먼 후날 감옥에서 나왔을 때 나는 그들의 행방을 찾으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내가 알게 된것은 다만 그들이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지리산에 들어가 빨찌산지휘관으로 용감히 투쟁하였다는것뿐이였다. 그들과 헤여진 후 나는 며칠동안 서울에 있던 야전병원에 입원해있었다. 이 병원 의사들은 대개 의과대학 학생들이였고 간호원들은 서울시내 여러 대학 학생들이였다. 그들은 부상병들을 온갖 정성을 다하여 치료해주었다. 그후 나는 다시 순안에 자리잡고있던 한 후방병원에 후송되였다. 이 병원은 몇개 병동으로 나뉘여있었는데 나는 5호병동에 들게 되였다. 적들의 폭격이 그칠새없는 속에서도 생활은 계속되고있었다. 호실꾸리기가 경쟁적으로 벌어져 2호실장인 나는 1호실장과 함께 순안읍내를 다니며 화보며 화분들을 얻어다가 호실을 장식하였다. 한편 자체로 공부도 시작하였다. 내가 남조선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겪어온 피눈물나는 생활을 눈물이 글썽하여 듣던 경리간호원동무는 중학교교재를 구해다가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평양의학대학 약학부 학생이였던 그는 교육가적인 자질도 풍부한 동무였다. 그는 내가 숙제를 수행하면 분에 넘친 칭찬을 해주며 학습열의를 부쩍 돋구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공부하기 어려워하는것 같으면 전쟁이 끝나면 페허가 된 조국땅을 더 훌륭하게 일떠세우기 위해서도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는가고 고무도 해주었다. 그러면 나는 나를 사랑해주고 이끌어주는 북녘형제들의 뜨거운 진정에 이끌려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공부에 달라붙군 하였다. 이것은 후날 나의 학습에 큰 밑천이 되였다. 책임간호원도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서 있은 일이다. 우리가 숙천에 이르렀을 때였다. 숙천은 책임간호원의 고향이였다. 나와 동무들은 그에게 오래간만에 오는 고향땅인데 잠간 집에 들려 부모님들을 만나고 오라고 떠밀었다. 하지만 처녀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국이 시련을 겪을 때 어떻게 자기 집부터 생각하겠는가고 하는것이였다. 처녀는 어느 산언덕에 이르러 잠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어려있었다. 나는 평범하게만 여겨온 이 처녀에게서 실로 큰 감동을 받았다. 이때 나에게는 남조선의 서울에 있을 때 보았던 한 처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군병사들의 단골술집이 있는 어느 으슥한 골목길을 지나갈 때마다 보군 하던 처녀였다. 황혼빛을 밀어내며 땅거미가 기여들기 시작하는 저녁이면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술집 문앞에 나와 왁작 떠들며 밀려드는 미군병사들을 맞아들이군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처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꾸며낸듯 한 웃음이며 하나하나의 행동에 분격이 치밀어오르는것을 겨우 억제하군 하였다. 우리 조선녀성들은 예로부터 순결을 목숨처럼 여겨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에게는 녀성의 존엄보다 돈이 더 귀중했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날 그 처녀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한강기슭에 이른 나는 어느 한 바위밑에 숱한 사람들이 몰켜선것을 보았다. 한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어떤 녀자가 자살을 하려고 강물에 뛰여들었다고 하는것이였다. 물속에서 건져내오는 녀인을 바라보던 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다름아닌 내가 그 골목길에서 보군 하던 술집 처녀였던것이다. 나는 그날에야 사람들을 통해 그 처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 충청도의 어느 농촌마을에서 온 처녀였는데 집에는 로부모와 병약한 동생이 있다고 하였다. 《인정많은 미국어른들》에게 봉사만 잘해주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고 하는 뚜쟁이의 말에 속아 그는 골목의 술집에 팔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거만하고 파렴치한 미군을 대상하는 일은 고역이였다. 미군병정들의 추행에 더는 참기 어려워 여러번이나 술집을 도망쳐나왔지만 그때마다 고향의 부모와 동생생각에 되돌아오군 하였다고 한다. 가정을 위해 어떻게 하나 돈을 마련해야 했던 처녀는 모든 고통을 억지로 지은 미소속에 가리우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데 이날 술집에 들어온 여러명의 미군병사들이 다짜고짜 그를 도적이라고 몰아대며 어느 외딴 곳으로 끌고가 욕을 보이려들었다. 처녀는 치욕을 참을수 없어 강물속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까딱않고 누워있는 처녀의 창백한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나의 눈가에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그러니 내가 그리도 미워했던 그 처녀는 가정을 살리기 위해 존엄은 물론 생명까지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불쌍한 인간이였던것이다. 이것은 그 처녀만이 당하는 수치가 아니였다. 《해방자》들의 발길이 닿는 그 어디서나 이러한 참사가 빚어지고있었다. 양키들의 너절한 발굽밑에서 우리 겨레의 존엄과 행복이 무참히 짓밟히고있었다.… 나는 책임간호원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내가 서울의 음침한 골목길에서 보았던 처녀와는 너무도 판이한 모습이였다. 서울의 그 처녀는 가정을 위하여 녀성의 존엄과 생명마저 잃지 않으면 안되였던 불쌍한 인간이였지만 내앞에 선 녀병사는 시련을 겪는 조국과 고향을 위한 투쟁의 길을 걷는 녀성이였다. 나에게는 책임간호원이 더없이 강직한 녀성으로 안겨왔다. 그때 처녀가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조국이 없으면 고향도 없어요. 그러니 조국의 승리를 위한 이 걸음이 고향에로 가는 걸음이 아니겠어요.》 병원에서 퇴원한 나는 1950년 12월말경에 다시 대오에 서게 되였다. 당시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의 탁월한 령도밑에 전전선에서 전면적인 반타격전이 벌어지고있던 시기였다. 그때 우리 중대장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그는 나와 동갑이였지만 인간적으로 존경이 가는 유능한 지휘관이였다. 전라남도 화순군출신인 그는 해방전에 부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는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즉시 조국으로 달려나와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 전투에서는 언제나 용맹한 지휘관이였고 대원들에게는 친근한 맏형이였다. 언제인가 나는 2명의 대원과 함께 먼저 숙영지를 전개하고 중대를 기다리라는 임무를 받은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만 길을 헛갈려 중대보다도 더 늦어서야 숙영지에 도착하였다. 나는 죄책감에 머리도 못 들고 호된 추궁을 기다렸다. 보통사람이라면 격분을 터뜨릴만 한 일이였다. 그러나 중대장은 오히려 고생이 많았겠다고 우리를 위로해주는것이였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하여 중대병사들은 그를 부모처럼 따랐고 명령수행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인정어린 말 한마디는 전사들에게 어떤 고난도 이겨낼수 있는 비상한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그 잊지 못할 중대장의 이름은 오대홍이였다. 그는 후날 통천방어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적폭격기편대의 무차별적인 폭격속에서 대원들을 구원하고 우리곁을 떠났다. 생의 마지막순간조차 조국과 동지들을 위해 바친 아름다운 인간이였다. 우리는 1951년 4월 드디여 전선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선에서 싸웠다. 이것은 물론 전쟁의 준엄한 나날에 대한 나의 단편적인 회상에 불과하다. 가렬한 전쟁의 나날에 우리는 실로 많은것을 알게 되였다. 그 나날에 만났던 그 모든 아름다운 인간들과 그들과 함께 겪어온 모든 체험이 나에게 새겨준것은 시련을 이기는 힘은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혁명승리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라는 진리였다. 그 사랑과 신념이 없었다면 곡절많은 전쟁의 그 모진 고난과 모든 슬픔을 어떻게 추호의 흔들림없이 이겨낼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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