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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물음앞에
나는 1948년 6월 서울로 갔다. 당시는 미제의 부추김밑에 리승만이 강도적이며 사기적인 협잡의 방법으로 망국적인 《5. 10단선》을 강행한 직후였다. 미제에 의해 권력의 자리에 앉은 리승만역도는 인민들의 민주주의적자유와 권리를 말살해버리기 시작하였다. 남녘땅은 삽시에 통일을 바라는 수많은 애국적인민들이 흘린 선혈로 젖어들었다. 비렬한 찬탈로 졸렬한 《승리》를 거둔 친미파, 친일역도들이 흉심이 가득찬 축배를 들고있었다. 그것은 어떤 종말의 예고였으며 또 무엇인가의 시초를 예고하는것이였다. 해방의 환희, 건국의 열의로 들끓던 땅에 소름끼치는 적막이 깃들고있었다. 반역의 력사가 시작되고있었다. 반항의 폭풍이 시작되고있었다. 반역과 반항, 한마디로 온 남녘땅이 피할수 없는 극단을 향해 치달아가고있었다. 바야흐로 력사는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애국이냐 매국이냐 선택을 요구하며 다가오고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가 서울에서 운명의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게 되리라는것을 예상하지 못하고있었다. 나의 눈에 비낀 서울은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속에 날이 밝고 해가 지는 번잡한 대도시에 불과하였다. 나는 난생처음 보는 대도시의 풍경에 얼떨떨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서울의 아침은 닭울음소리가 아니라 골목골목마다를 분주히 누비는 물지게군들의 물통 삐걱거리는 소리로 시작되였다. 그 소리가 뜸해질적에는 각종 장수들이 몰려들며 목청을 뽑았다. 《두- 부- 사료-》 《배- 추- 사료-》 《구- 을젓- 사료-》 설겆이가 끝날 때쯤이면 그릇장수, 천장수, 엿장수, 어물장수, 넝마장수 등 별의별 장수들이 목청을 뽑기 시작하였다. 거리에 나서면 목에 수건을 걸친 로동자며 넥타이맨 양복쟁이신사며 학생들이며 별의별 행색의 사람들이 길을 메우며 바삐 걸어가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차길에서는 인력거군들이 땀을 철철 흘리며 뛰여다니는가 하면 전차가 종을 울리며 느릿느릿 굴러가고있었다. 모두가 세상살이에 넋을 빼앗긴듯싶은 이 거리에 와서 내가 처음 한 일은 목판을 메고 담배와 껌을 파는 일이였다. 창피한 생각도 들었지만 꾹 참고 《담배 사세요.》, 《껌 사세요.》 하고 행인들에게 소리쳤다. 별수없이 그러는것이긴 했지만 그 한마디한마디에서 나는 쓰라린 슬픔을 감수해야 하였다. 더우기 내또래의 말쑥한 사내들이나 처녀들과 맞다들리면 얼굴조차 들수 없었다. 나는 인차 그 일을 걷어치우고 양말짜는 기술을 배웠다. 그후 전북 리리에서 공부할 때 사귄 한 학우로부터 신문배달하는 일을 알선받아 룡산구 리태원일대에서 신문 100여부를 배달하면서 《영수전문학관》에 입학하였다. 여기에서는 1년동안 수학, 영어과목에 한해서 중학교 3학년과정을 취급하여 배워주었다. 이때 룡산구에서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온 국민학교동창생들과 함께 자취를 하였다. 나는 객지생활을 하려면 호신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룡산권투구락부에서 권투도 배웠다. 그러나 변변히 먹지도 못하는 때 그것은 너무도 큰 부담이여서 인차 그만두고말았다. 신문을 배달하는 일은 정말 헐치 않았다. 처음 100부를 받아 돌리던것을 다음부터는 2배이상 늘이였다. 독자는 정해진것이 따로 없었다. 스스로 확보해야 하였다. 그러다나니 직접 집집마다를 찾아다니며 주인에게 신문을 보아달라고 애걸하다싶이 하였다. 어떤 때는 배달부수를 도저히 채울수가 없어 독자의 승인도 받지 않은채 집집마다 매일 신문을 넣고는 보름쯤뒤에 값을 받으면서 계속 보아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그러자 어떤 집들의 유리창에는 《불량배달부》에 대한 엄한 경고장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불법배포금지!》 그렇다고 단념할수는 없었다. 학비를 대자면 어떻게 해서든 신문을 팔아야 했던것이다. 그러던중 어느 한 집에서 일이 터지고야말았다. 그 집에 몇번이나 신문대금을 받으러 갔다가 헛탕치군 하던 나는 그날 단단히 벼르고 길을 떠났다. 집주인은 양복점을 운영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나를 보자 대뜸 《신문불견》이라고 써붙였는데 왜 넣었는가고 꽥 소리치는것이였다. 그래 나는 다음부터는 넣지 않겠으니 지난달의것은 지불해달라고 하였다. 그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 이는것이였다. 그자가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던것이다. 격분한 나는 그에게 지지 않고 대들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왁작 떠들어대자 그자는 창피한듯 슬그머니 사라지고말았다. 나는 그날 온밤 잠들수 없었다. 매맞은 아픔때문이 아니였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없는 세상이 야속했던것이다. 해방은 되였다지만 달라진게 무엇이란 말인가. 일제를 대신하여 미제가 《해방자》로 자처하며 주인노릇을 하는 땅, 친일파들이 뻐젓이 머리쳐들고 거들먹거리는 땅, 돈없고 권세없는 대중은 여전히 아무런 인간적존엄도 가질수 없는 땅이였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나의 마음속에서는 어제날 제 이름 석자도 쓸줄 모르던 로동자, 농민의 자녀들에게 배움의 길을 활짝 열어주는 공화국의 품속에 하루빨리 안기고싶은 열망이 더 세차게 불타올랐다. 그 암담한 시절 공화국은 내 삶의 등대였다. 이 등대가 있었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고 희망의 그날을 그리며 억척같이 살아갈수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숭늉마저 꽁꽁 얼어붙는 하숙방의 이불속에서 쉬임없이 공부하던 그 시절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피타는 노력끝에 《영수전문학관》을 마치고 1949년말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숭문중학교 4학년 야간반에 편입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국민학교 교원자격을 준다고 하였다. 나는 장차 교원을 하면서 대학에 진학하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그 이듬해 4월에 5학년에 진급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 미제가 공화국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학업을 종시 중단하지 않을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후 랭전의 발화점이 된 이 전쟁은 동북아시아, 나아가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미제의 음모와 《반공》광신자이며 민족반역자인 리승만도당의 반통일적정책이 가져온 대재난이였다. 서울은 삽시에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어디서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였다. 차량들이며 땅크들이 먼지를 말아올리며 북으로, 북으로 밀려갔다. 놈들은 아침은 개성,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노라고 기염을 토하였다. 그런데 멀리서 울리던 폭음은 더 멀리가 아니라 차츰 가까이, 가까이 울려오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괴뢰군의 공격은 격퇴당하고 인민군대의 반공격이 시작되였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어제만 해도 《무공》을 장담하던 기세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머리며 팔에 붕대를 감은 부상병들이 잔뜩 기가 죽어 밀려내려오는 가운데 방송들에서는 《서울사수》라는 목갈린 소리가 자못 비장하게 울려나오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갔다가 숙소에 돌아온 나는 방안공기가 어수선한것을 느끼였다. 누군가는 벌써 짐을 꾸리고있었고 누군가는 벌렁 드러누워 천정만 멀뚱멀뚱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우리는 서로 진중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고향으로 떠나자고 하고 또 누군가는 좀더 두고보자고 하였다. 《성모는 어떻게 하려니?》 그냥 자리에 누운채 동무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있던 한 친구가 침묵하고있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서둘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하여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남침》이라는 선전을 믿지 않았다. 국토분렬의 위기가 조성된 첫 시기부터 공화국에서는 조국통일을 위하여 시종일관 주도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4월남북련석회의에서 제시된 통일방안들을 비롯하여 민족분렬을 막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공화국의 시책들은 량심적인 조선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공감과 지지를 받아왔다. 나는 이제 이 전쟁이 미제와 매국노들에게 있어서는 력사앞에 씻을수 없는 죄악으로, 수치스러운 종말로 이어질것이지만 조국수호의 성전에 나선 공화국인민들에게 있어서는 정의의 전쟁, 영광스런 승리로 이어지리라고 확신하였다. 나는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해보기 위해 리리시절 학우인 리동무의 형을 찾아 6월 27일 새벽 서대문구 아현동으로 갔다. 그는 이미 나와 친숙한 사이였다. 이전에 그는 때때로 나를 만나면 최근정세에 대해서와 자기가 중국 동북지방에 있을 때 들은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의 전설적인 투쟁에 대해 이야기해주군 하였다. 그는 리리에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여 군산형무소에서 6개월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후 안해와 함께 서울로 피신해와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생활하고있었다. 거리에 나서니 아비규환의 란장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포소리가 서울공기를 찢으며 꽝꽝 울려오는데 도로에서는 전차대신 패주해오는 괴뢰군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몰켜다니며 아우성치고있었다. 서울함락은 시간문제라는것이 대번에 알리였다. 나는 사람들틈을 빠지며 날듯이 달려갔다. 리동무의 형님은 나를 보자 몹시 반가와하였다. 내가 찾아온 사연을 들은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리승만이 미제를 등에 업고 이 전쟁의 불을 지른것은 반역적인 죄악이며 민족사적수치라고 격분하여 말하였다. 그러면서 하지만 이 불속에 타죽을것은 그놈들자신이며 인민군대에 의하여 조국은 통일될것이라고 확신에 넘쳐 이야기하였다. 그는 나에게 자기와 함께 행동하자고 하였다. 나는 쾌히 응하고 짐을 꾸리기 위해 다시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도중 여러차례 엄격한 검속을 받아야 하였다. 놈들은 곳곳에 가장집물들로 바리케드를 쌓고 시가전을 준비하고있었다. 하숙집에 도착하니 방은 이미 텅 비여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나간 후 한 학생이 동무들에게 남으로 피난가자고 부추기더니 다음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갔다고 하였다. 폭음과 총성은 더 가까이에서 더 자주, 더 크게 울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온밤을 뜬눈으로 새우다가 새벽녘에야 살풋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집이 통채로 흔들리는듯 한 진동과 요란한 소음에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려객을 실어나르는 전차의 소음 같지 않았다. 혹시 인민군대의 땅크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펀뜻 뇌리를 스쳤다. 나는 옷자락을 붙잡으며 마루밑에 숨으라고 수선을 떠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포신을 우뚝 추켜든 땅크들이 람홍색공화국기를 휘날리며 렬을 지어 들어서고있었다. 어느 한 땅크의 웃뚜껑이 벌컥 열리더니 자동총을 멘 인민군병사 한명이 불쑥 몸을 솟구었다. 그는 내가 처음 본 인민군군인이였다. 순간 나는 두손을 쳐들며 《만세!》 하고 소리쳤다. 인민군병사는 벙긋 웃으면서 나를 향해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였던가. 얼마나 많은 애국자들이 피흘리며, 목숨을 바치며 그려온 모습들인가. 나는 성남극장쪽으로 달려갔다. 자동차에 가득 올라탄 중학생들이 구호를 웨치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지를 돌고있었다. 나도 그에 호응하여 얼마나 크게 웨쳤던지 그만 목이 쉬여 며칠동안 아무 말도 할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기쁨에 넘쳐 리동지와 해방된 서울시가지를 거닐었다. 형형색색의 정치인들이 저저마다 목청을 뽑다가 결국은 역도들이 권력을 탈취했던 반역의 도시, 포식한 부자들이 저 하나의 향락을 위해 서로 다투고 서로 속이던 허영의 도시, 그런가 하면 수많은 군중이 두주먹을 부르쥐고 뛰여다녀도 목숨 부지할 한덩이 밥도 내여주기 꺼렸던 린색한 도시, 으시대며 쓸어드는 외풍에 정신착란을 일으키던 빈약한 정신의 도시, 그 모든 허물을 가리울 넝마 한쪼박 걸치지 못하고도 도대체 수치를 몰랐던 무지의 도시였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서울은 그 모든 압제와 파렴치와 가난과 설음을 몰아낸 진정한 해방의 도시로 눈앞에 다가서고있었다. 머리우엔 공화국기가 펄럭이고 인민군대와 서울시민들이 한데 어울려 춤판을 벌리는 거리마다에는 새 삶의 기운이 약동하고있었다. 《중앙청》지붕에서도 공화국기가 휘날리고있었는데 그밑에서 한 인민군군인이 마라초연기를 날리며 땀에 젖은 얼굴을 닦고있었다. 그 모습은 어떤 상징적의미를 지닌 한폭의 그림처럼 안겨왔다. 저 기발과 함께 통일된 조국을 위하여 먼길을 달려왔고 또 그렇게 달려갈 병사의 모습을 나는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리동지는 차에 앉아있는 인민군소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소좌의 몸가짐이며 언행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소박하나 단정한 외모며 사민을 대하는 부드러운 그 태도에서 나는 이 군대는 확실히 괴뢰군과는 다르다는것을 느끼였다. 거만하거나 포악하기는 고사하고 집안의 맏형처럼 친근하게 안겨오는 모습이였다. 그는 총포소리에 인민들이 놀라지 않았는가, 피해를 입은것은 없는가고 진정어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리고 서울은 해방되였다는것, 이제는 한줌도 못되는 놈들의 도시가 아니라 인민의 도시로 되였다고 하면서 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것이 지금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소좌와 헤여지면서 열정적으로 악수를 하였다. 그 큰 손의 억센 감각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리동지는 몹시 흥분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였다. 《인민군대란 바로 저런 사람들이다. 전쟁을 하면서도 인민의 생활부터 걱정하는 군대가 어디 또 있겠니?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되는거다. 저 기발, 저 사람들을 봐라. 이것이 새 력사의 모습이다. 누구나 이 력사의 복판에 뛰여들어 력사앞에 지닌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자기자신에게 달린거지.》 그는 의미있는 웃음을 지어보이였다. 하숙집에서도 나는 이런 물음에 부닥쳤었다. 이제 그것은 타인의 물음이 아니라 나자신의 물음이였고 력사의 물음이였다. 그후 서울운동장에서는 인민군대를 지지하는 서울시내 청년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다. 앞을 다투어 연단에 나선 서울시내 대학생들과 중학교졸업생들을 비롯한 학생청년들은 의용군에 입대하여 미제와의 싸움에 나서자고 호소하였다. 나의 귀전에는 누구나 민족의 력사앞에 지닌 책임을 다해야 한다던 리동지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왔다. 나는 선참으로 군중속을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나의 희망이며 미래인 내 삶의 조국을 지켜 총을 잡는것, 이것은 조국의 력사앞에 지닌 나의 책임이였으며 력사의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였다. 나는 손을 기발처럼 높이 추켜들었다. 돌아보니 또 많은 손과 손들이 군중속을 헤치며 나오고있었다. 그날 저녁 서울시민들의 인민군환영집회가 있었다. 이때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이였던 한 인민군병사의 연설은 나의 심장을 꽉 틀어잡았다. 그는 자신의 대학생활에 대하여 긍지에 넘쳐 이야기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발기하시고 세워주신 대학이라는 사실과 수령님께서 로동자, 농민의 자식들을 새 조선의 역군으로 키우시기 위해 바치신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실로 감동적이였다. 알고보니 김일성장군님의 초청장을 받고 평양으로 간 서울의 명망있는 지식인들이 지금 종합대학의 교단에 서있다는것이였다. 그 병사가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도 평범한 탄부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나는 걷잡을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 그 청년이 부러웠고 나같은 근로인민의 자식들이 대학에서 마음껏 배우며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로 자라나는 공화국이 아름다운 리상천국처럼 그려졌다. 그리고 이 조국을 빼앗기는것은 나의 희망을 빼앗기는것이며 지키는것은 곧 나자신의 삶을 지키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탄원자들과 함께 어느 한 학교건물에서 하루이틀 묵다가 심사를 받고 입대하여 전선으로 떠나게 되였다. 그날 리동지의 부부가 나를 찾아왔었다. 군중속을 뚫고온 그들은 나를 얼싸안으며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부인은 기념으로 나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그것은 내가 난생처음으로 차본 시계였다. 시계에는 이제부터 나의 인생의 매 시간이 새롭게 흐른다는 의미가 담겨져있으며 초침소리는 영원한 조국의 축복으로 울릴것이라고 생각하니 세상에 다시 태여난 기분이였다. 나는 마치 목숨을 내대고 싸워야 하는 전선길이 아니라 려행길을 떠나는듯 한 랑만적인 기분으로 서울을 떠났다. 조국을 위한 싸움의 길에 나선 나의 첫걸음은 이렇듯 랑만으로 시작되였다. 실로 그 시절은 준엄한 력사의 물음앞에서 조국을 선택했던 아름다운 청춘시절이였으며 참된 삶의 첫걸음을 내딛던 고귀한 시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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