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

 

 

신선생의 영향을 받으면서 나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제 조국이 해방되면 건국위업에 한몫하기 위해서도 배움의 꿈을 버리지 않고 굳세게 사는것이 보람있게 사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어렵더라도 기어이 내 힘으로 소원을 성취하리라 결심하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명백한 계획도 없었다. 그때 내가 생각한것은 고학을 하자면 대도시로 나가야 한다는것이였다. 나는 서둘러 차비를 갖추고 무턱대고 길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아직은 어린 농촌소년이였던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배움의 열망이 그렇게 열렬했기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길을 걸으며 대도시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또 나가서는 무엇부터 어떻게 할것인가를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인생의 중대한 구상을 나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우선 기차표를 살 돈을 장만해야 하였다. 나는 품팔이를 결심하고 김제군 호남평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우리 집에서 20리가량 가면 둘째누님의 집이 있고 또 60리가량 가면 막내누님이 사는 마을이 있었지만 그리로 가지 않고 동지면에 있는 고모사촌네 집으로 가서 하루밤 잤다. 다음날 김제군으로 가면서 행선지도 말해주지 않았던것을 보면 제딴에는 각오가 대단했던것 같다.

호남평야는 부지런히 걸어도 길이 좀처럼 축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혹시 내가 그냥 제자리걸음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들었다.

끝없는 지평선을 이루고있었지만 바라보고 또 바라볼수록 억울하고 기가 막힌 생각만 끝없이 이어지게 하는 수난당한 대지였다. 김정호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이 나라 방방곡곡을 여러차례나 답사하는 기간 호남평야에 들어설 때마다 이 땅의 생명들에게 기름진 곡식을 안겨주는 풍요한 벌에 무릎꿇고 감사의 절을 하군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땅을 신처럼 여기면서 삼천리의 아름다운 형상을 얻었던 그가 무지하고 어리석은 왕에게 귀중한 목숨을 잃고말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처럼 어리석고 몽매한 봉건통치배들때문에 그 땅마저 빼앗겼으니 통곡할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한참만에야 소달구지를 몰고오는 한 농부와 만나게 되였다. 그 농부는 작은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홀로 길을 걷는 내 모습이 측은해보였던지 《넌 어디로 가는 애냐?》 하고 물었다. 내가 만경벌에서 모품을 팔려 한다고 하자 그는 잠시 생각해보는듯 하더니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하는것이였다. 자기는 일본놈농장의 소작인인데 지금 농장에 일손이 딸린다고 하였다. 알고보니 이곳에서는 농번기, 특히 모내기철마다 품팔이다니는 사람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있었다.

그 농부의 집은 김제군에 있었다. 초가이영을 얹고 토피로 벽을 쌓은 오막살이같은 그 집에는 나이가 나보다 두어살은 더 들어보이는 남동생이 있었다. 나는 이튿날부터 집주인과 꼴도 베고 모내기도 하였으며 보리방아도 찧었다. 다들 모심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아무리 해도 따라가기 어려웠다. 하루정량을 다하면 또 꼴을 한짐 해야 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또 방아를 찧었다. 무거운 공이가 방아확에 쿡 박히며 방아다리가 허궁 들릴 때면 금시 쓰러질것만 같았다.

어느날 밤 허리가 시큰하게 방아를 찧고나서 해변가로 터벌터벌 걸어나갔다. 이마의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서는 달빛에 반짝이며 모래불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축축한 모래불에 털썩 주저앉았다.

검푸른 파도가 달빛에 번뜩이며 쏴- 쏴- 물결쳐왔다. 수평선 저 먼곳으로 우리 고향 변산반도가 희미하게 바라보이였다. 이맘때면 늦도록 장난에 팔려 돌아다니는 나를 찾아나오던 어머니의 모습이며 집안의 막내라고 온갖 사랑을 다 안겨주던 살뜰한 누님들의 모습, 소꿉시절동무들의 모습이 우렷이 떠올랐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어머니-》 하고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그 연약한 목소리는 인차 거친 파도소리에 눌려 어둠속에 잦아들었다.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치며 두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바다기슭에 밀려왔다가는 다시 밀려가는 해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자신이 그 해초의 신세처럼 여겨져 서글픔을 금할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져내렸다. 그바람에 나는 하루종일 휴식하게 되였다. 그러고나니 다음날 아침에는 온몸이 거뜬하고 힘이 솟는것이였다. 차츰 모심는 속도도 빨라져갔다. 거의 7일째 되여서는 앞선 사람들을 따라잡고 10일째부터는 남들처럼 허리펴고 쉴 여유도 생기였다. 사실 이렇게 된것은 두 처녀의 도움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들은 나의 누이벌 되는 처녀들이였는데 나에게 모심는 요령도 가르쳐주고 뒤떨어지면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것은 집떠나 품팔이하는 어린 소년에 대한 동정이였다. 나는 그 처녀들의 모습에서 나라없던 그 시절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눈물겨운 인정의 세계를 엿볼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순간이나마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꼭 성공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다지였다. 나는 그곳에서 김매기가 끝난 다음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집 주인은 얼마 안되지만 로자에 보태라고 돈 5원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추석에 꼭 한번 오너라. 그땐 어떻게든 떡도 쳐주고 쌀밥도 지어주겠다.》고 하며 멀리까지 따라나왔었다. 나는 꼭 다시 올것을 약속하였지만 그후 더는 그곳에 가보지 못하였다.

나는 서울행 기차표를 사려고 며칠간 애썼지만 끝내 사지 못하였다. 차표를 사려면 신원증명서가 있어야 했던것이다. 그렇게 며칠간 있느라니 려비도 다 떨어져갔다. 나는 류랑객의 위구를 느끼며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거리의 한 전보대에 리발소견습생모집광고가 붙은것을 보았다. 나는 호구지책으로 광고를 낸 어느 한 리발소에 취직하였다. 먹여주기만 하고 월급은 한푼도 주지 않았지만 그때 나에겐 딴 도리가 없었다.

새벽부터 물을 긷고 리발소안팎을 청소하고 장작을 패고 때로는 주인녀자를 따라 시장에 나갔다오기도 하면서 눈코뜰새없이 고된 나날을 보내였다.

바로 거기서 나는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다.

수난자들의 대지에 해방의 희열이 차넘치는 격동적인 시기가 닥쳐왔던것이다.

민족의 운명을 구원해주시려 일본제국주의와의 혈전을 벌리시여 나라를 찾아주신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곧 서울로 오신다는 환희로운 소식과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가 조직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하였다. 나는 좀처럼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그무렵 나는 기쁨에 들떠 잠시 고향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고향은 완전히 변모되여가고있었다. 한잠 자고나면 집집의 담벽마다에는 삐라들이 도배지를 붙인것처럼 다닥다닥 나붙군 하였다.

북해도의 《징용》터에서 돌아온 후 한때 타락하여 투전판에 몸을 잠그었던 우리 형님도 새 출발의 길에 들어서고있었다. 일도 성실히 하고 제딴에는 의로운 일을 한다며 삐라찍는 일이며 여러가지 대중사업에 열성적으로 참가하고있었다.

나는 형님에게 그간 공부를 하기 위해 겪어온 일들을 자상히 이야기해주었다. 형님은 가슴이 아픈듯 나를 꼭 껴안아주며 말하였다.

《이젠 그 모든게 끝장이다. 드디여 해방이란 말이다.

이제 김일성장군님께서 오시여 이 땅에 인민의 나라가 서면 너도 마음껏 배울수 있게 된다.》

《형님,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배움의 열망을 누를수 없었던 나는 형님의 일손을 열심히 돕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전라남도 목포는 큰 도시여서 배움의 길이 열릴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막내매부가 알선해준 한 리발소를 찾아갔다.

거기서 주는 월급으로 하숙비를 물고나면 하루 두끼 식사나 겨우 할수 있는 형편이였다. 하숙집 주인은 우리 집과 먼 친척벌 되는 사람이였지만 인정이란 꼬물만큼도 없었다.

한창나이에 배를 곯다나니 보이는것은 온통 먹을것뿐이였다. 토요일이면 자연 기분이 들뜨군 하였다. 한것은 이제 하숙집이 있는 죽동에 가서 밥을 먹고 한잠 자고는 일요일 하루를 쉬게 된다는 흐뭇한 생각에서였다.

해방은 되였지만 생활은 나아지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희망으로 한껏 들떠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다시 컴컴한 그늘이 비끼기 시작하였다. 이윽고는 분노의 빛으로 바뀌여갔다.

《해방자》연하며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미제는 첫날부터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남녘땅은 한갖 점령지역이였고 보이는 조선사람들은 모두 적이였을뿐이였다. 자주독립과 민주의 꿈을 안고 태여났던 모든 민족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정치단체들이 《미군정》의 군화에 짓밟혔다. 잠시 움츠러들었던 친일분자들이 미군의 보호밑에 《주인》으로 변신하여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하였다. 미군과 매국노들의 발밑에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애국적단체들의 간판이 마구 짓밟혔다. 인민의 꿈과 희망이 짓밟히고있었다. 나는 해방조국의 국토를 분렬시킨 미제의 폭정을 체험하면서 그리고 남조선인민들의 모든 애국적인 투쟁들을 진압한 미제의 야수적만행에 대하여 들으면서 진정한 인민의 해방을 이룩하자면 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는것을 통절하게 느끼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도, 그들에 대한 부자들의 천대와 억압도 일제강점시기나 다를바가 없었다.

어느날 주인은 저희들은 쌀밥을 먹으면서 나에게는 몇푼 안되는 돈을 주며 밖에 나가서 아무것이나 사먹으라고 하는것이였다. 이에 심한 모욕을 느낀 나는 그가 쥐여준 돈을 시궁창에 집어던지고 목포를 떠나고말았다.

그후 전라북도 리리(현재의 익산시)로 가서 또다시 리발소에 취직하였다.

리리에는 해방의 바람을 타고 생겨난 자그마한 학교가 하나 있었다. 나는 리발소에 취직할 때 주인과 학교에 갈 시간을 보장받기로 약속하였었다. 하지만 돈벌이에 눈이 어두운 주인이 등교시간이 다되여오도록 일을 시켜 나는 빈번히 지각하군 하였다.

학교에서 사귄 한 동무가 나에게 자기가 일하던 리리기관구 리발소를 소개해주었다. 기관구에서는 로동자들의 리발료를 아주 싸게 받았지만 다른 리발소에서 일할 때보다 수입도 높고 시간도 많았으며 숙식비도 눅었다. 학교는 그후 리리제1중학교로 되면서 주야간으로 운영하게 되였는데 본래 있던 학생들은 야간반에 편입되였다.

나는 이 시기 학우들과 진보적인 교원들을 통하여 날로 변천되여가는 공화국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시여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자고 호소하시였으며 토지개혁, 산업국유화를 비롯한 여러 민주개혁들을 실시하신다는 소식은 실로 충격적이였다.

얼마나 뵙고싶던 장군님이신가. 어린시절 백두산전설을 듣던 그때부터 시작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흠모심은 세차게 불타올랐다. 나의 마음은 장군님계시는 공화국으로 달려가고있었다. 그 품에 안기는 길만이 나의 소원을 실현하는 길이며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는 확신이 용솟음쳤다.

그 시기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결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인민대표선거가 진행되였다.

이미 미제와 리승만괴뢰들이 조작한 《5. 10단선》을 반대하여 피의 항쟁을 벌린 남조선전역의 인민들은 통일적인 중앙정부수립을 위한 서명투표에 나섰다.

이것은 김일성장군님을 민족의 어버이로 높이 모시고 통일된 강토에서 행복하게 살려는 남녘민심의 반영이였다. 그때 나도 자신을 공화국의 첫 공민이라고 생각하며 투표자란에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나갔다. 이때처럼 나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여겨진적이 없었다.

천대받던 소작농의 아들, 천덕꾸러기 류랑소년의 불행한 운명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그 이름이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의 이름으로 새겨지고있었다. 나는 그때 내스스로 선택한 나의 조국을 위해 목숨도 아낌없이 바칠것을 결심하였다.

그후 해주에서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린 소식과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된 소식이 전해졌다. 그무렵 화순탄광 로동자들이 이 회의앞으로 보낸 편지는 나의 가슴에 실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 선렬들이 우리의 선두에서 조국의 민주주의적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가 성스러운 피를 흘리며 마지막으로 부른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남은 동무들이 대리로서 보내오니 모두 같이 불러주십소서.》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국가수반으로 높이 모신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던 력사적인 날 나는 함께 서명투표에 참가했던 동무들과 마음속으로김일성장군 만세!》를 높이 불렀다.

사람들은 내가 전후 공화국에 거주한 그때부터 공화국의 공민이 되였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자신을 영광스러운 공화국의 공민이라고 자부하고있었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그 나라에 거주하여 산다고 공민이 되는것은 아니다. 뜻과 마음으로부터 조국과 운명을 함께 하는 사람이 진정한 공민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고향을 떠난 나는 진정한 삶의 고향을 찾게 되였고 위대한 수령님을 높이 모신 존엄높은 공화국의 공민으로 되였다. 오늘도 나는 때때로 그 시절을 내가 진정한 삶의 품을 향하여 첫걸음떼던 나날, 환희와 랑만의 시절로 즐겁게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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