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에 비쳐온 희망의 빛

 

나의 어린시절이 흘러간 1930년대는 폭풍전야의 시절이였다.

다 아는바와 같이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추동해온 서방의 근대사상이 현대의 문어구에서 절망적인 위기를 맞이한 시절이였으며 로동대중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로 부를 축적해온 자본주의세계전반이 자기 발전의 한계에 다달은 시절이였다.

한계앞에서 리성을 잃은자들은 방황하는 사회에 파괴적인 민족배타주의사상과 《반공》사상을 류포시키며 정치적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고있었다.

침략전쟁을 위기의 출로로 본 파쑈도이췰란드의 나치스도배들과 일본군국주의자들은 파쑈체제를 강화하고 진보세력과 무고한 인민들에 대한 야만적인 폭압과 략탈을 감행해나섰다.

일제의 만주침공의 포성은 인류의 머리우에 울린 재난의 전주곡에 불과한것이였다.

실로 1930년대는 행복에 대한 인류의 온갖 희망이 부정의의 새로운 도전에 부닥친 엄혹한 시절이였다.

민족이 존망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그 엄혹한 시절에 식민지소년의 불행한 운명이 시작되였다.

나는 1930년 1월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여났다. 우리 고향은 산과 바다, 평야가 어울려있는 경치좋은 곳이였다.

원래 우리 손씨문중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살았는데 무슨 일로 해서인지 아버지(손낙중)가 그곳을 떠나 변산반도의 바다가 농촌마을에 뿌리내렸다고 한다.

아마 이곳에 오면 좀 잘살수 있지 않을가 하는 한가닥의 희망때문이였던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이 소원을 이룰수 없었다.

당시 우리 집은 지주 정락철의 밭과 일본놈이 경영하는 농장의 논을 소작하고있었다.

꼭두새벽부터 땅거미가 질무렵까지 허리펼새없이 일하여도 가을에 소작료를 물고나면 할머니와 형님, 누나를 비롯한 여덟식구의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부자놈들의 멸시와 착취속에 등뼈가 휘도록 일하면서도 자식들을 위하여 그 모진 고생을 묵묵히 이겨나갔다.

특히 아버지나이가 예순이 되던 해에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여난 나에 대한 애정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어머니는 내가 태여나기 전날 밤에 무지개꿈을 꾸었다고 한다.

푸르청청한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비쳐오더니 칠색령롱한 무지개가 어머니를 향해 내려오더라는것이였다.

어머니가 그 무지개를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무지개는 간 곳없고 복스럽게 생긴 아이가 웃음짓고 서있더라는것이였다.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그 소년이 바로 나였다는것이다. 무지개꿈을 꾼 뒤 내가 태여난것은 우리 집안의 큰 경사였다.

동네로인의 해몽을 들은 어머니는 늘 나를 보고 《너는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군 하였다.

여기에는 한생 인간다운 꿈이 없이 살아온 우리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비껴있었다.

그 꿈때문인지 아버지는 나에게 누구보다 뜨거운 애정을 기울이였다.

너무도 가난하여 엽초에 가랑잎을 섞어 피우던것도 말년에는 끊어버린 아버지였지만 나를 어떻게든 공부시키려고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언제 어떻게 배운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아버지의 한문지식수준은 상당한 정도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내가 5살이 되도록 늘 업고다니며 《까치 작》, 《사슴 록》 하며 글을 가르쳐주시던 모습이다.

《목숨 수》는 《사일공일구촌》이 모인것이라고 배워주던것이 오늘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전날 배운 글을 잊지 않고 외울 때면 아버지의 수심깊던 눈에 기쁨이 넘실거리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에게 기쁨을 더해주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더 잘하리라 마음다지군 하였다.

나를 공부시키려는 아버지의 열망은 나날이 더 커갔다.

나는 8살때 마을의 서당에서 공부하고 9살때는 격포리 간이학교에 입학하였다.

첫 등교날 나의 손목을 잡고 학교로 가며 아버지가 하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성모야, 이제 왜놈이 망하고 잘살 날이 꼭 온다. 어려워도 희망을 잃지 말고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그러면 난 죽어도 한이 없겠다.》

아버지는 웃어보였지만 나는 그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어쩌면 그리도 순박하고 인정깊은 눈이였던지 나는 평생 잊을수 없다.

소년시절 누구보다 강했던 나의 향학열은 어버지의 소원에서 시작된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아버지의 꿈이자 나의 꿈이였고 나의 꿈이자 아버지의 꿈이였다.

하지만 그때 우리 집 살림은 참으로 어려운 형편이였다.

나는 차츰 아버지의 눈에 어리던 기쁨뒤에 어떤 근심이 있는것인지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들의 모습에서 잠시나마 인생의 고뇌를 잊어보려는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였다.

장정으로서 부모님의 일손을 덜어주던 형님이 일본의 북해도 탄광으로 끌려간 뒤여서 가정의 큰짐은 다 년로한 아버지의 두어깨에 지워져있었다.

때이르게 철들기 시작한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논에 나가 아버지를 도와 드레의 네귀에 새끼를 매고 물푸는 일을 하군 하였다. 500번씩 하고야 쉬군 하였는데 일이 얼마나 힘든지 눈물이 절로 났지만 아버지 몰래 훔치군 하였다.

우리 가정의 애타는 심정에도 불구하고 그해 가을은 절망적인 계절로 찾아왔다.

농사는 흉작인데 마름이 인부들을 데리고와서는 북데기만 남기고 몽땅 걷어가버렸다. 아버지는 로모와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생각해서 보리 몇가마니만이라도 남겨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마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안타까이 땅을 허비는데 1년내내 그 땅을 걸구어온 마디굵은 손가락들사이에선 메마른 짚오리가 부르르 떨고있었다. 나는 늙으신 아버지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흘리는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 정기없는 그 눈에 솟구쳐흐르는 눈물은 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인정없는 무리들에 대한 증오가 타올랐다.

내가 간이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였다. 아버지는 70대 고령의 몸으로 추운 겨울 먼곳에 가서 땔나무를 한짐 해지고 오신 후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리 집 형편이 어찌나 궁했던지 약 한첩 살 돈도 없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림종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생각해본적 없는 나로서 그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기도 하였다. 어려운 대가정의 온갖 짐을 앙상한 두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온 아버지, 어린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무척 애를 많이 쓰신 아버지, 우리 가정의 기둥이였던 아버지가 더는 없게 되고 내가 이 거친 세상을 아버지없이 살게 된다는것은 실로 억이 막히는 일이였다.

나는 읍에 가서 전보를 치면 형님이 올수 있다는 동네어른들의 말에 둘째매부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때 처음 2층짜리 집과 전기불을 보았고 라지오라는것에서 사람의 말이 울려나오는것을 들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였지만 그때는 모든것이 다 무의미하게 안겨왔다. 전보를 치려면 경찰서장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기에 매부는 그 지방 유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내세워 나와 경찰서장과의 면담을 주선해주었다.

칼찬 경찰들이 득실거리는 경찰서는 처음부터 나를 위압하였다. 나는 경찰서장에게 찾아온 용무를 말하였다. 의자에 제빠듬히 앉아 내 말을 듣는둥마는둥하던 놈은 갑자기 꽥 소리치며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나 전보를 치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이런 때는 참을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형님은 장남이니 부친의 림종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는가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놈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운운하면서 더욱 광적으로 날뛰였다. 그리고는 나를 방에서 쫓아버리였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천황》이라고 하면 그 미친 경찰서장의 눈이 련상되군 하였다.

미쳐버린 세상을 저주하며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나를 애타게 부르다가 눈도 못 감은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동네어른들이 아버지의 눈을 감겨주었다고 했다. 고생속에 살아오면서도 이 아들에게서 희망을 보려 했던 그 눈이였다. 아버지는 끝내 그 눈에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안고간것이였다.

아버지의 초점흐린 그 눈을 감겨드릴 때 주름많은 눈귀에는 송진처럼 진득한 눈물이 맺혀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70평생을 마치며 남긴것이 그 눈물이고 한이였다. 나는 아버지의 시신곁에서 울고울며 온밤을 새웠다. 3일째 되는 날 나는 상제로서 상여를 따라 산소까지 갔다. 남자들은 참대지팽이를 짚고 녀자들은 소나무로 깎은 지팽이를 짚었던것 같다. 녀자는 산소까지 가지 못하게 되여있어서 나 혼자 상여를 따라가며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하였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땅파는 소리와 아버지의 관널우에 흙덩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크지 않은 봉분 하나가 솟아난것이 어렴풋이 안겨왔다. 나는 봉분우에 엎드려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머리우에서 누군가가 혀를 차며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린것이 이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고…》

정말이지 억이 막히고 앞이 캄캄하였다. 아버지의 모습만이 눈앞을 꽉 메우며 다가왔다. 8살까지 변변한 옷가지 하나 없이 자란 나에게 어느날 나무를 해다 판 돈으로 새까만 목세루를 사서 솜옷을 만들어주시던 아버지, 짚신이 다 닳으면 하루종일 고된 일을 하시고도 등잔불밑에서 새 짚신을 삼아주시던 아버지, 학교에서 늦어올 때면 등불을 들고 멀리까지 마중나오시던 아버지, 나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것을 한생의 제일 큰 꿈으로 삼고 살아오신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가 영영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아 나는 봉분을 허비며 《아버지!》 하고 목메여 불렀지만 무정한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만 들릴뿐이였다. 그날 초저녁부터 내리던 비는 다음날 새벽녘에야 멎었다. 누리에 해살이 퍼지기 시작할 때 나는 앞산에 무지개가 비낀것을 보았다.

《너는 저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무지개가 비끼면 내 손을 잡고 앞산에 올라 부모님들이 하시던 말씀이였다. 거기에는 자식의 미래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깃들어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희망의 상징으로만 안겨오던 무지개가 그때는 한없이 쓸쓸하게만 안겨왔다.

과연 나의 미래가 저 무지개처럼 아름다울수 있을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사내란 나 혼자뿐이였으니 기둥없는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날 형님에게 편지를 보내였다. 그때는 글모르는 사람이 많아 편지 같은것도 동네의 글아는 사람에게 써달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나의 국문수준은 말이 아니였다. 막내누님의 동무가 누님에게 가르쳐주는것을 귀동냥해들으며 배운것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10살때부터 형님과 국문으로 서신교환을 하고있었다. 형님이 고향을 떠날 때 나에게 만년필을 주며 왜놈의 글이 아니라 꼭 우리 글로 직접 편지를 쓰라고 부탁했던것이다. 그것이 알려져 어떤 사람들은 밥이나 떡 같은것을 가지고 찾아와 편지를 써달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별세에 대한 소식을 받고 보내온 형님의 편지는 눈물로 얼룩져있었다. 지금도 그 편지의 머리글이 기억에 생생하다.

《성모야, 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셨단 말이냐. 우리에게 아버지가 없단 말이냐.》

눈물없인 읽을수 없는 글이였다. 나의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은 편지를 축축히 적셔버리였다. 그후 간이학교를 중퇴하고 집일을 도우며 날을 보내던 나는 겨우 얼마간의 돈을 마련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였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그리고 방학때면 산에 올라가 부지런히 나무를 해야 하였다. 그런 속에서 나는 간이학교 2년을 마친 후 국민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그때 제일 어려웠던것은 아버지의 제사를 치르는 일이였다. 설날부터 나 혼자 상을 치르었는데 그 일이 간단치 않았다. 동무들은 세배를 다니며 설놀이를 하는 동안 나는 하루종일 제상앞에 마주앉아있어야 하였다.

그리고 손님이 오면 술잔에 술을 부어주고나서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을 하고있어야 하였다. 그러느라면 돌아가신분에 대한 슬픔이나 경건한 마음은 어느결에 사라지고 제사란것이 다시 없는 《고역》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고역》을 보름 남짓이 지난 후 소상때 다시 치르어야 하였다.

국민학교졸업후 나는 가정사정으로 상급학교에 갈 생각도 못하고 다시 가사에 전념할수밖에 없었다.

어느날이였다. 그날도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짐 해지고 내려오던 나는 산기슭에 이르러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마을앞을 지나 격포리쪽으로 난 길로 왁작 떠들며 걸어가는 한패의 아이들이 눈에 띄웠다. 흰테를 두른 모자를 쓰고 교복을 산뜻이 차려입은 그 아이들은 농업학교며 중학교들에 입학한 국민학교 동창생들이였다. 방학때인지라 상급학교에 간 아이들끼리 모여 어디론가 놀러가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 아이들이 갑자기 내가 있는쪽으로 일시에 고개를 돌리는것이였다. 순간 나는 지게를 황황히 벗어내리고 그밑에 주저앉았다. 부끄러운 생각에 머리를 수그리는데 흙이 게발린 짚신이 눈에 띄웠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혼솔이 다 닳아빠진 무명바지, 껑충한 옷소매, 송진이 어지럽게 게발린 거칠은 손…

나는 동무들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길에 내려서서 그들의 뒤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고요한 골짜기를 흔들며 울려왔다. 눈물이 쿡 솟구쳤다. 그들은 어느덧 아득히 먼곳에서 아물거리고있었다.

또다시 지게를 지고 터벌터벌 걸어가느라니 굵은 눈물이 발치에 뚝뚝 떨어져내리였다.

정녕 나는 배울수 없단 말인가.

그 길은 바로 내가 간이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가 나를 바래워주기도 하고 마중나오기도 하던 길이였다.

《너를 공부시킬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슴을 허비며 울려왔다. 만약 아버지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땅속에서도 통탄하실것이였다.

그런데 그 시절 나에게 《귀인》이 나타났다.

진정한 덕이란 그 어떤 자선이 아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것이 덕이다. 그리고 그 덕을 지닌 사람이 참으로 《귀인》인것이다.

내앞에 나타난 《귀인》은 나에게 또다시 배움의 희망을 북돋아준 신선생이였다. 그는 자기 누이네 집이 우리 마을에 있어 가끔 찾아오군 하였다. 한때 일본에서 고학을 하고 돌아와 식민지지식인의 불행을 통탄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던 그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직령도하신 보천보전투소식을 비롯한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소식에 접하면서 그이에 대한 무한한 흠모심을 간직하게 되였다고 한다.

해방후 부안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그는 적들의 탄압을 피해 누이네 집을 찾아갔다가 매부(해방후 《국회의원》을 지낸 우익인물)가 자수하라고 위협하자 그길로 우리 집에 왔었다. 그때 내가 그를 둘째누님네 집으로 피신시켰다가 다시 정읍에 있는 그 선생의 처남댁으로 안내해주었었다. 당시 페병을 심히 앓던 그는 처남과 우리 누이의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인차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나는 그의 인정미 넘치는 모습에 대번에 반하였었다. 언젠가 나는 선생에게 어떻게 하나 배우고싶은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았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선생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공부를 하고싶다는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락심하는것은 사내답지 못한 일인걸.》

《하지만 별수 없지 않습니까? 나에게 귀인이라도 나타난다면 몰라도…》

나는 우울하게 대답하였다.

심중히 생각에 잠기였던 선생은 중학교교재를 구해서 자습할수도 있고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도시에 가서 고학할수도 있다며 고무해주는것이였다.

그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에 대하여,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의 죄행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못사는것은 나라가 없기때문이라는데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성모야, 희망을 버리지 말아. 어찌 보면 살아있다는것은 희망이 있다는것이기도 하지. 네가 바라는 그런 귀인이 계신다. 그이는 너나 나만이 아닌 우리 조선민족모두의 운명을 구원해주실 귀인이시다.》

나는 만주에서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일제를 반대하여 무장투쟁을 벌리고있으며 일제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에 귀가 번쩍 트이는것이였다. 나의 머리속에 펀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내가 10살때의 일이였다.

밤이면 동네어른들이 우리 집에 모여와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군 하였다. 어느날 어른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해듣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내 인생에 등대빛처럼 새겨진 백두산전설이였다.

김일성장군님군대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왜놈군대를 무찌른다.》

김일성장군님군대는 가랑잎을 타고 강을 건는다.》

《서울 세브란스의과대학병원에 입원했던 청년이 퇴원하면서 명함장을 남기였는데 거기에 <김일성>이라고 씌여있어 소동을 피우며 찾아보니 이미 연기처럼 사라졌다더라.》

그리고 또 이런 통쾌한 이야기도 있었다.

《왜놈군대는 장개석군대와 싸우러 가라면 왜왕이 하사하는 담배를 피우며 <무공>을 장담하지만 김일성장군님 군대와 싸우러 가라 하면 <고고와 고구니데 난뱌쿠리> (여기는 고국에서 몇백리)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흘린다.》

나는 그때 신바람이 나서 그 이야기를 동네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아래동네, 웃동네로 편을 갈라 군사놀이를 하였으며 앞으로 크면 항일유격대를 찾아가자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신선생은 해방이 되면 건국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나라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 집에 은거해있을 때 나에게 중요한 련락임무를 맡기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보면 나에 대한 믿음이 컸던것 같다. 여하튼 나는 그를 존경하였다. 그리고 그가 우리 마을을 떠나면 다시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군 하였다. 그와 함께 있을 때가 제일 좋았다.

무엇때문이였던가. 그와 만날 때마다 듣게 되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의 가슴에 아름다운 희망을 새겨주는 그때문이였다.

이 나라를 해방시켜주시고 행복한 인민의 나라를 세워주실분은 오직 김일성장군님뿐이시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시는 그이를 마음의 기둥으로 바라보며 꿋꿋이 살아나가리라.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의 마음속엔 희망이 밝아왔으며 배움의 열망은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그것은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걸으며 《까치 작》, 《사슴 록》 하고 글을 익히던 그 시절의 막연한 희망과는 전혀 다른것이였다. 반드시 오고야말 미래에 대한 굳은 믿음에서 시작되는것이였다. 나의 희망은 신선생이 말한것처럼 김일성장군님께서 찾아주실 조국의 찬란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순박한 시골소년이던 나는 이렇게 조국과 민족을 알고 수령에 대한 그리움을 안은 인간으로 성장해가고있었다. 나의 앞길에 눈부신 미래가 다가오고있었다.

참으로 나에게 있어서 그 시절은 절망의 어둠속에서 찬란한 희망의 빛을 맞이한 시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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