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나날

 

 

나는 2000년 새해를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락성대 《만남의 집》에서 맞이하였다. 이 아담한 2층벽돌집은 이미전부터 우리 비전향장기수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있던 김지연녀성이 마련해준 집이였다. 그는 출옥한 우리 동지들을 통일을 위해 한생을 바친 로인들이라고 존경하며 병원에서 검진도 받게 해주고 생활조건을 보장해주는 등 온갖 성의를 다해준 마음씨 곱고 의리심이 깊은 녀인이였다.

오래간만에 동지들과 함께 맞는 설날이여서 내 마음은 천진란만한 어린아이들마냥 한껏 들떠있었다.

리종, 김석형, 류운형, 홍경선, 김선명동지들도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마당도 쓸고 집안정돈도 하면서 분주히 돌아갔다.

1층 부엌에서는 김재원녀성이 설음식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자출신인 그는 《남민전》사건으로 사형당한 애국인사의 미망인이였다. 그가 오기 전에는 이곳에 지리산빨찌산의 마지막대원이였던 정순덕녀성이 있었다고 한다. 청소며 정돈을 마친 우리들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초상화를 모시고 새해 설인사를 드리였다.

순간 나에게는 집에서 처자들과 맞이하던 설날아침들과 감방에서 맞이하던 설날의 아침들이 떠오르며 눈굽이 쩌릿이 젖어들었다.

이어 《만남의 집》에서 사는 우리 8명의 식구는 떠들썩하며 설음식상에 마주앉았다. 음식상은 비록 소박하였지만 진수성찬에 비할바가 아니였다. 김재원녀성이 술잔마다에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잔마다에 가득찬 맑은 술이 불빛에 반짝이며 찰랑거렸다. 그 잔은 1990년대를 보내는 송별의 잔이였으며 새로운 희망을 안고 다가오는 2000년대와의 상봉의 잔이기도 하였다.

술잔을 바라보는 나의 눈앞에는 이제 이 한잔으로 작별해야 할 지난날들이 환영처럼 흘러갔다. 조국통일을 위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조국통일을 위해 해놓은 일은 너무도 적었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축배!》 하는 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여나 무거운 마음으로 잔을 들었다. 다른 동지들의 얼굴에도 나름의 사색이 비끼여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깃든것은 다만 자책이 아니였다. 아직 다하지 못한 자신들의 맹세를 기어이 실천하고야말 새로운 결의가 가슴속에 차오르고있었다.

우리는 2000년 새해벽두부터 각종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비록 황혼의 나이에 이른 우리였지만 마치 광활한 미래를 앞에 둔 젊은이들마냥 활기에 넘쳐있었다.

물론 김지연녀성을 비롯한 많은 벗들은 우리에게 남은 여생이라도 편히 보내라고 권고하고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가 제일먼저 시작한 일은 수십년간 납부하지 못한 당비를 마련하는 일이였다. 이 과정에 우리는 남조선사회의 최하층인민들속에 들어가 그들의 생활형편과 동향 등을 깊이 료해하게 되였다. 또 각종 활동에 참가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또 뛰였다.

《한총련》, 《민주로총》, 범민련, 《전국련합》 등 진보적인 사회단체들에서는 앞을 다투어 자기들의 모임에 초청하였다. 우리가 모임장소에 나타나면 분위기가 순간에 달라지군 하였다. 비전향장기수 아무개선생이 참석했다고 알리면 모두 환성을 올리며 우리들의 손을 꼭 잡고 놓을줄을 몰랐다.

남조선사회의 《법》이 《적》으로, 《죄인》으로 규정한 우리들을 친혈육과도 같이 반기며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조국의 품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군 하였다. 조국은 우리에게 삶을 준 어머니품이였고 우리의 가슴에 민족을 위한 큰뜻을 심어준 스승의 품이였으며 우리의 삶을 존엄높이 빛내여주는 영광의 품이였다. 그 품으로 돌아가고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막연한 꿈이였다. 그런데 사람의 욕망이란 참으로 끈질긴것이다. 이룰수 없는 꿈일수록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다. 이룰수 없기에 단념하는것이 아니라 그때문에 더욱 소중한 념원으로 간직하는것이다.

그런데 이때 전혀 뜻밖의 사변이 일어났다. 온 서울시내가 력사적인 북남수뇌상봉이 있게 된다는 충격적인 소식으로 들끓었으며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경모의 열풍이 세차게 일어번지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경복궁앞에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영상을 모신 특대형벽화가 걸려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후 평양에서 분렬 55년만에 처음으로 되는 북남수뇌분들의 력사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천지를 진감하는 환호성이 터져오르는 속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해빛같은 미소를 지으시고 비행장에 나오신 그 순간은 력사가 달라지는 순간이였다.

이 력사적인 평양상봉의 2일째 되는 날 우리는 전주의 한 려관에서 몇몇 지식인들과 함께 TV를 시청하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 어느 위인도 따르지 못할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인적풍모에 넋을 잃고말았다.

어느 한 대학교수는 연방 탄성을 올리며 말하였다.

《정말 대틀이시다. 매혹적이시다. 저분이 계시여 민족의 미래는 창창하다.》

50대의 한 녀성은 《내 한평생 저분처럼 사람의 마음을 틀어잡는분은 처음 보았다. 저분은 위인중의 가장 뛰여난 위인이시다.》라고 격찬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인적풍모에 매혹된것은 비단 전주의 지식인들만이 아니였다. 지난날 《반공》의 아성이였던 서울에도 평양상봉 첫날부터 《김정일열풍》이 세차게 일어번지고있었다. 정치인들속에서는 《김정일식즉단즉결》에 대해 말하면서 경애하는 장군님의 《통이 큰 정치》를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울려나왔으며 대학생들속에서는 《김정일식주체필법》을 배우려는 풍조가 휩쓸고있었다.

어느 한 신문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응답자들의 97%가 《북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남녘민심의 전환을 의미하는것이였으며 위대한 태양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남녘인민들의 간절한 념원을 말해주는것이였다.

이날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은 누구보다 크나큰 격정에 휩싸이였다. 비전향장기수들을 공화국으로 돌려보내는 문제가 북남공동선언의 한 조항으로 명기되였던것이다.

정녕 이것은 혁명전사들에 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이였다. 사실 비전향장기수귀환문제는 혁명전사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계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오래전부터 조직하고 이끌어주신 문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생사여부가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초부터 우리의 귀환을 위한 통이 큰 작전을 펴시였다. 1993년 3월에는 리인모동지의 귀환을 성사시켜 그 돌파구를 열어주시였다.

조미대결이 한창이던 1994년 2월에는 세계에 옥중투쟁을 하여 소문난 사람들이 있지만 남조선의 감옥에서 옥중투쟁으로 인생의 전부를 보낸 비전향장기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며 이런 이야기는 오직 우리 당에 의해 교양육성된 혁명가들속에서만 나올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며 자신께서는 그들을 데려오는 문제를 우리 당을 받들어 싸운 동지들에 대한 혁명적의리로 여기며 혁명의 령도자가 전사들에게 베풀어야 할 고귀한 사랑으로 간주한다고 하시였다.

1997년 5월 김인서동지가 34년간의 옥중투쟁과정에 얻은 병세의 악화로 고생한다는 보고를 받으신 그이께서는 그의 건강회복에 필요한 고급약들을 마련하시여 그 약들이 본인에게 가닿을수 있도록 온갖 조치를 다 취하여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공화국의 사회단체들은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조속한 귀환을 요구하여 성명, 담화들을 련속 발표하였으며 국제인권단체들과 기구들, 정당단체들에 편지들을 보내였다.

한편 남조선과 해외동포들속에서도 서명운동, 기자회견, 항의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귀환운동이 벌어졌다. 또한 국제사회계와 세계각국의 진보적인 정당단체들도 이 운동에 련대성을 표시하며 광범히 참가하였고 결국 우리의 귀환문제는 20세기 최대의 인권문제, 인도주의문제로 부각되게 되였다.

2000년초에도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빨리 데려올데 대한 가르치심을 여러차례나 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시 북과 남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수없이 많았건만 북남공동선언에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모두 조국으로 송환할데 대한 조항을 명문화하시여 우리들모두를 그토록 그리던 조국으로 불러주시였다.

비전향장기수들의 조국에로의 귀환!

얼마나 바라고바라왔던 우리들의 소원이였던가.

차디찬 남녘의 철창속에서 온몸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보다도 마음속에 먼저 떠올린 조국이였건만 분렬과 대결의 심연속에 살아서는 다시 돌아갈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우리들이였다.

그러나 이것은 꿈도 전설도 아닌 현실이였다.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은 혁명전사모두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시는 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

우리는 어린아이마냥 울고울며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불렀다.

그 다음날부터 더 많은 시민단체들로부터 초청장들이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일정을 짜기에 바빠졌다. 초청이 겹치는 때도 있어 방법을 탐구해야 하였다. 례하면 경북출신고등학교 동창생들의 초청과 우리를 적극 후원해준 한 사회단체 부위원장부부의 초청시간이 겹쳐진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때 부위원장부부를 경북출신고등학교 동창생들의 모임장소로 오게 하여 이야기도 나누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모임장소마다에서 우리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성과 그이의 조국통일의지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으며 통일은 당면한 지상의 과제로서 6.15북남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투쟁에서 청년들이 한몫 단단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군 하였다. 그후에도 서울에 있는 전라북도인사들의 초청, 《민가협》, 《고난모임》, 《전국련합》, 《한림교회》, 《전국고백교회》 등의 초청이 끊임없이 잇달았다.

그 나날 나는 꿈속을 헤매이는 심정이였다. 영원한 꿈일것만 같던 조국에로의 귀환이 현실로 다가왔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우리는 그날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우리는 수시로 제기되는 각 운동단체들과의 사업에 필요한 조절기구를 내오기로 하였다. 그리고 여러 인사들의 도움으로 자그마한 사무실을 내오고 명칭을 달기로 하였다. 그때 내 머리속에 떠오른것이 《통일광장》이였다.

머지않아 경애하는 장군님을 높이 모시고 남북겨레가 얼싸안고 모여들 그날을 그려보며 지어본 이름이였다.

내가 몹시 흥분하여 그 안을 제기하려는데 이미 누군가가 그 이름을 제기한 뒤였다. 나는 그때 서로 다른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한것이 참 신기하게 여겨졌다. 이것을 보고 나는 조국통일의 투쟁대오에 선 사람들은 생각도 언제나 한곬으로만 흐른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였다. 이때부터 모든 문제가 《통일광장》에 집중되였다. 초청강의, 특강 등이 제기되면 《통일광장》에서 인원을 선발하고 장소와 시간을 선택하는 등 모든 사업을 통일적으로 조직해주었다. 초청만 받은것이 아니였다. 우리를 많이 도와준 사회단체, 종교단체의 인사들과 개별적인사들을 《통일광장》의 이름으로 초청하여 이야기도 나누고 소박한 식사도 함께 나누었다.

《통일광장》에서는 내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이며 대학교단에 섰던것을 고려하여 많은 과업을 주었다. 그때 나는 칠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동지들의 기대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젊은이들처럼 기백에 넘쳐 걷고 또 걸었다.

강의에서 특히 많이 제기된것은 우리 장군님의 위대성, 주체사상의 독창성,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에 관한 문제들이였다.

한번은 남강원도 강릉에서 30여명의 청년들과 환담을 나눈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상봉이였다. 이들은 모두 대학졸업생들로서 조국통일위업에 한몸바칠 각오는 높았으나 바른길을 찾지 못해 모대기고있는 좋은 청년들이였다. 나는 그들과 하루밤을 지새우며 우리 당의 조국통일방침을 진지하게 해설해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힘이 생깁니다. 선생님, 우리가 조국통일투쟁에서 선봉이 되겠으니 지켜봐주십시오.》

청년들의 얼굴마다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치고있었다.

그후에도 많은 사람들앞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일방적으로 강의만 한것이 아니라 물음에 대답해주는 방식으로도 진행하였다.

그런데 그런 식의 강의가 늘 좋기만 한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경남 울산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갑자기 한 처녀가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 엉뚱하게 물었다. 나는 사랑이란 순수 이성간의 감정이라고만 볼수 없다고 본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조국에 대한 사랑속에 맺어지는 고상한 감정이며 그것이 조국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질 때 참으로 아름다운 감정으로 되는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날 나는 무려 5시간이나 서있었는데도 전혀 그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였다.

우리 공화국이 승승장구하는 힘의 원천, 우리 나라 사회주의교육제도의 우월성, 북녘대학생들의 생활, 6. 15북남공동선언의 의의 등 수많은 문제들이 제기되였다.

나는 그 질문들에 대답해주고 내가 종합대학에 다니던 시절 어버이수령님을 여러번 만나뵙고 경애하는 장군님을 몸가까이 뵙는 영광을 지닌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청강자들은 열심히 듣고 쓰고 록음도 하며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종이장을 돌려가며 무엇인가 쓰더니 헤여질 때 내 손에 쥐여주는것이였다. 숙소에 돌아와 펼쳐보니 그것은 강의에 대한 소감을 적은 글이였다.

《솔직히 말해 저는 강연회장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항일혁명이나 주체사상, 사회주의, 이북인민들의 높은 자주의식, 이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남이 식민지라는 사실이 가슴아프게 와닿고 북녘동포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하루빨리 통일조국에서 살고싶습니다.》

《통일을 이루는 주체세력으로 항상 선봉에 서있겠습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의 뜻을 받들어 투쟁하리라 생각하니 너무너무 가슴 벅차오릅니다.》

《혁명적선배님들따라 열심히 투쟁하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7월에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 6돐 추도모임을 조직하였다. 나는 《통일광장》의 위임에 따라 추모보고를 준비하여 랑독하였다.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하여 어버이수령님 그대로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를 높이 받들어 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을 관철하기 위하여 끝까지 싸워나갈 결의를 굳게 다지였다.

우리들의 활동은 여전히 적들의 감시속에 있었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남강원도 강릉과 경상남도 울산을 비롯하여 남조선전역을 활동무대로 삼고 적극적으로 전개해나갔다.

이런 나날속에 드디여 조국의 품에 돌아갈 시각이 다가왔다.

마지막날 밤 우리는 판문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텔에 모이였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가족친척들, 그동안 우리와 맺은 깊은 정을 잊을수 없어 달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호텔을 에워싸고있었다.

밤이 새도록 노래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그 노래마다에는 이제 헤여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리별의 아픔을 달래이려는 절절한 마음들이 비껴있었다.

 

백두에서 한나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여져서 얼마냐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여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남녘동포들의 울음섞인 그 노래소리에 우리의 가슴은 찢어지는듯 아파났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 헤여짐은 통일조국의 래일을 향해가는 걸음이다, 영원한 상봉의 길이다, 멀지 않아 통일조국에서 쌓이고쌓인 회포를 나누게 될 날은 오고야말것이다라고…

호텔안팎이 이처럼 형언할수 없는 감격에 설레이는 때 한쪽에서는 차거운 눈초리가 우리를 향해 비수처럼 날아오고있었다.

적들은 우리의 짐을 샅샅이 검사했다. 그렇게 세밀검사를 계속하면 다음날 판문점도착시간을 지킬수 없었다. 하여 우리는 또다시 투쟁을 벌리였다.

일시에 호텔을 나온 우리는 뻐스를 타고 시내로 되돌아왔다. 죄인취급을 받으며 공화국의 품으로 돌아갈 우리가 아니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전사로, 가장 떳떳한 공화국공민의 자격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이였다.

급해맞은 놈들은 분주탕을 피우며 이 사실을 당국에 보고하였다. 이윽고 짐을 검열하던 놈들이 헐레벌떡 우리를 찾아와 돌아가자고 사정하였다.

《정중한》 검열이 형식적으로 진행되였다. 시간이 갈수록 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일의 열기속에서 드디여 아침이 밝아왔다.

공화국의 품에 안길 그 아침이 온것이다. 호텔주변의 마당에서 밤샘을 한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쁨의 환성, 흐느낌소리들이 한데 섞여 서늘한 아침공기를 타고 울려왔다. 수십년세월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려온 이 아침인가. 바로 이 아침을 위해 먹방속의 기나긴 어둠속을 웃음으로 밝혀온 우리들이였다.

모두 떠날 차비를 서두르고있었다. 거울앞에 서서 옷매무시를 바로잡는 사람, 무엇인가 수첩에 써넣는 사람, 시계를 들여다보며 방안을 오락가락하는 사람…

나 역시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다가는 불쑥 일어서며 안절부절 못하고있었다.

《도대체 모두 비전향장기수들 같지 않군그래. 이제 보니 세계최장기수들이 세계에서 제일 성미급한 사람들이였구려. 하하…》

한 동지가 침대에 걸터앉아 셈평좋게 웃으며 하는 소리였다. 그 말에 모두 즐겁게 웃었다. 롱담같은 그 한마디에 우리모두의 인생이 비껴있었다. 전향을 강요하는 무리들의 그 모든 악형과 회유에는 천연바위같고 산 화석같았어도 조국에로 달리는 마음은 뜨거운 용암같았던 우리들이 아니였던가.

우리는 조국에 대한 사랑의 정열로 살아온 사람들이였다. 우리 생의 모든 순간순간은 바로 조국에 뜨거운 심장을 바쳐온 정열의 순간순간이였다.

판문점을 넘기 전에 한 기자가 나에게 감상을 물었다. 그때 나의 대답은 그립던 조국을 눈앞에 둔 감격의 토로였으며 남녘동포모두에게 남긴 마지막말이였다.

《오매에도 그립던 공화국의 품으로 돌아가는 기쁨의 크기를 하늘의 높이에 비기고싶다. 한편 그간 정들었던 친지들, 혈육들과 헤여지려니 가슴이 아프다. 이 희비의 력사가 더이상 지속되지 말아야 한다. 떠나면서 다시한번 남북겨레모두가 힘을 합쳐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통일의 날을 앞당기기 위해 투쟁할것을 호소한다.》

판문점을 지나 북녘땅에 들어서는 우리의 눈앞에는 환영나온 북녘동포들의 모습이 안겨왔다. 순간 나는 눈앞이 흐려져 앞을 가려볼수 없었다.

아, 어머니 나의 조국!

나는 조국을 이렇게밖에 달리 부를수 없었다. 우리가 이날까지 적구에서 한 일이 있다면 우리에게 참다운 삶을 안겨준 조국에 대한 량심과 의리를 지킨것뿐이였다. 지금껏 통일을 위해 싸웠다고 하지만 별로 해놓은 일이란 없어 항상 조국앞에 떳떳치 못한 마음으로 살아온 우리들이였다.

그런데도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전사들을 탓할 대신 온 나라의 축복을 안겨주는 조국의 고마움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부지중 우리 인민모두가 세월을 이어가며 부르고 또 부르는 시의 한구절이 떠올랐다.

 

조국이여!

너는 무엇이기에

가만히 네 이름 부르면

가슴은 터질듯 긍지로 부풀고

눈굽은 쩌릿이 젖어드는것이냐

 

어찌하여 때로 이국의 거리를 거닐다가도

문득 솟구치는 그리움에

마음은 한달음에 달려와

너를 안는것이냐

 

언제인가 나는 남도 조국, 북도 조국이 아닌가고 하는 남조선의 한 정치활동가에게 이렇게 대답한적이 있었다.

《나는 조국이란 인간의 자주적인 참된 삶을 후손만대에 길이 보장해줄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은 오직 외세가 없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공화국의 사회주의사회에서만이 보장될수 있다. 이 사회주의사회는 탁월한 수령의 령도밑에서 탄생하고 건설된다. 위대한 수령을 떠난 조국이란 있을수 없다. 바로 이런 리유로 나는 수령은 곧 조국이고 조국은 곧 수령이라는 등식이 형성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어느 책의 문구를 옮긴것도 아니고 론리적인 설명도 아니였다. 인생의 체험속에서 얻은 절대의 진리였다.

조국!

불러볼수록 긍지로, 고마움으로, 행복으로 가슴 벅차오르는 그 부름…

나는 지금 신념으로 첫걸음 뗀 그 길을 신념으로 걸어 비전향장기수, 신념과 의지의 화신, 통일애국투사로 다시 태여나 조국의 품에 돌아가고있었다.

나에게 신념을 안겨준 품, 그 신념으로 삶을 존엄높이 빛내이도록 하여준 품은 다름아닌 조국의 품이였다.

나의 모든것, 나의 삶인 나의 조국, 이는 우리 인민모두를 값높은 삶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이였다.

꿈결에도 그립던 조국의 산과 강, 푸르른 들판이 차창밖으로 흘러갔다. 뜨거운 눈물에 젖은 조국인민들의 손과 손들이 다가오고 또 다가왔다.

나의 두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옷섶을 흥건히 적시고있었다. 나를 향해 펼쳐든 어머니조국의 다정한 손길인양 조국의 길과 길들이 다가오고 또 다가왔다. 조국이 다가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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