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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투쟁의 마지막해에
1900년대의 마지막해가 다가왔다. 그해의 봄은 일찌기도 찾아왔다. 대지우에서는 겨울이 때이르게 다가온 봄과 소리없는 다툼을 시작하였다. 봄의 완강한 공격에 겨울은 별수없이 서둘러 자리를 거두었고 겨울이 떠나간 곳에서는 봄빛이 활개치고있었다. 하지만 교도소의 담장안에서만은 의연 겨울이 주인행세를 하고있었다. 겨울은 옥담을 최후의 보루로 삼은것 같았다. 겨울과 봄이 이제는 옥담을 사이에 두고 싱갱이를 벌리였다. 봄이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겨울은 최후의 역습을 시도하였다. 늘 보게 되는 겨울의 비틀린 심사였다. 이미 때를 잃은 낡은 겨울이 끝장나는것은 당연한 리치였지만 성급히 옷깃을 헤치던 꽃잎들이며 봄내에 취해 휘청거리던 잠깬 생명들의 운명이 문제였다. 하지만 생명은 자기의 강인함을 증명해보이였다. 잠시 물러서는듯 하던 봄은 한치한치 다가와 끝내는 옥담을 넘어 겨울을 몰아내고야말았던것이다. 겨울이 아무리 영악스러워도 생명의 이 끈질긴 노력앞에서는 굴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따뜻한 봄볕에 창가의 고드름이 녹아떨어졌다. 고드름이 무지개빛을 뿌리며 부서질 때 옥뜰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파란 봄싹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그곳에서 애어린 새싹들이 파랗게 고개를 쳐드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것이였다. 결국 봄이란 끝끝내 이 땅우에 아름다운 망울을 터치고야말 희망을 버리지 않는 생명의 모질디모진 그 노력이였다. 1900년대의 마지막해이며 나의 옥중생활의 마지막해인 1999년에 대한 추억은 늘 이렇게 겨울을 도고하게 이겨나가던 봄의 정경으로부터 시작되군 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30년이상의 복역자들이 석방되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출옥대상은 70살이상의 로인들로 한정되였다. 량심을 지켰다는 죄아닌 《죄》로 한생의 귀중한 시절을 감옥에서 다 흘러보내고 옥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느끼게 되는것은 기쁨보다는 절통함이였다. 옥담안에 새파란 젊음을 고스란히 놓아둔 머리흰 로인들이 넓은 대지를 향해 첫걸음마 떼는 아이들마냥 휘청거리며 나서고있었다. 문닫기는 소리가 울리고 또다시 지긋지긋한 적막이 무겁게 깃드는 속에 1999년이 다가왔다. 이해에 들어와서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옥고를 혁명적신념으로 이겨낸 19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옥문을 나서게 되였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산인간으로, 신념을 지켜낸 승리자로 감옥문을 나설수 있게 된것은 우리 전사들 한사람한사람을 천금과도 바꿀수 없는 혁명동지로 여기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석방과 귀환을 위한 투쟁을 진두에서 이끄시며 무려 수십차례의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고 온갖 조치를 다 취해주시였다. 하여 공화국정부와 사회단체들의 꾸준하고도 다양한 활동들이 전개되였고 최장기수들인 함세환, 김인서, 김영태동지들의 자녀들이 해외에 나가 남조선의 감옥실태와 잔인성을 국제사회앞에 폭로하고 비전향장기수들의 귀환을 호소하였다. 결과 전향하지 않은자는 나갈수 없다던 감옥문이 열리고 19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석방되는 사변이 일어난것이였다. 비록 나는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수십년의 옥고를 치른 동지들이 감옥문을 나서는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작별을 앞두고 우리는 앞으로도 어디에서든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변치 말고 끝까지 싸울것을 다짐하였다. 하지만 깊은 밤 텅 빈 사동의 감방에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나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짐을 금할수 없었다. 비록 한방에서 살지는 않았어도 늘 동지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자체가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여왔던것인가. 고독이라는 새로운 고통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밤이면 나는 잠들지 못하였다. 싸늘한 감방바닥에 뼈가 앙상한 잔등을 대고 누워있느라면 겨울의 마지막 몸부림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온 겨울 감방들의 창문마다를 쑤시고다니던 저주로운 바람이 이제는 이 하나의 생명을 노리고 몰려오는것만 같았다. 한순간 우울한 심경에 싸여있던 나의 눈앞에는 김창원동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창원동지는 감옥에서 만 5년동안이나 서로 돕고 이끌며 온갖 난관을 함께 헤쳐온 혁명선배이며 전우였다. 매해 여러차례 진행되던 단식투쟁때마다 그와 함께 투쟁구호와 투쟁날자, 전술적문제들을 토의하며 밤을 새우던 일, 편지 한통을 받아도 화선의 병사들마냥 함께 보고 서로 조언을 주던 일, 몸이 불편할 때면 그에게서 침이며 지압치료를 받던 일들이 매일 밤 나의 눈앞에 떠올랐다. 마음이 괴로우니 아무것도 입에 대고싶지 않았고 운동시간에도 줄곧 괴로운 상념에 잠겨있기가 일쑤였다. 몸은 날로 더 여위여가고 지칠대로 지쳐 운신조차 하기 어려웠다. 바로 이런 때 또 한번 충격적인 일이 생기였다. 적들은 감옥에 남은 마지막 비전향장기수인 나와 다른 동지를 각각 대구와 광주교도소로 분리이감시켰던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심리적고통을 주어 마지막까지 전향시켜보려는 적들의 도덕적저렬성을 드러낸 처사였다. 이것은 감옥투쟁의 전기간 나에게 가해지던 고통중의 가장 어려운 고통이였다. 이때처럼 나라는 존재가 동지들을 떠나서 얼마나 허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깊이 느껴보기는 처음이였다. 동지적뉴대는 혁명가의 존재방식이였다. 그런데 내곁에서 마지막 한 동지마저 떠나갔으니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나는 1999년 3월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였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끌려갔다. 나는 분노하였다. 말끝마다 《인권》을 운운하는자들의 비렬한 처사를 반대하여 끝까지 싸울것을 결심하였다. 나는 이감된 그날 단식투쟁을 선포하였다. 지금까지 근 수십차례 해온 단식투쟁이였지만 단독으로 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이번 단식의 목적은 놈들의 야만적행위에 대한 항의인 동시에 적들의 기도를 만천하에 폭로하는데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단식 4일째 되던 날 《한겨레》신문에는 《두명의 비전향장기수 분리수용을 반대한다!》, 《<보안법>을 철페하라!》, 《량심수 전원 석방하라!》는 구호와 함께 나의 단식투쟁소식이 실리였다고 한다. 그 기사를 보고 김창원동지가 면회를 왔었지만 허락되지 않아 편지만을 남기고 돌아가고말았다. 나는 나의 건강을 념려하여 출소후의 바쁜 속에서도 대구로 달려왔던 그의 동지적사랑에서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되였다. 나는 비록 철창속에 홀로 있어도 이렇듯 동지들의 사랑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감옥에 남은 마지막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겠다는 각오가 더욱 굳어지는것이였다. 마지막이란 불행이 아니였다. 나에게는 동지들이 목숨을 바치며 걸어온 옥중투쟁력사의 마지막종지부를 훌륭히 찍어야 할 력사적사명이 지워진것이였다. 흥분에 싸여 밤늦게야 잠들었던 나는 대구교도소의 귀익은 새벽종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도소의 가장 고급한 문화인 새들의 우짖음소리가 새벽천지를 흔들며 울려왔다. 창밖으로는 종소리에 놀란 새들이 작은 날개로 창공을 가르며 날으는 모양이 바라보였다. 인간을 억제의 규률속에 얽어매는 교도소의 종소리가 울리는 속에서 나는 내 마음의 종소리를 듣고있었다. 그것은 력사가 나에게 울려주는 종소리였다. 나는 단식투쟁에서 승리하였다. 인차 온몸이 개운해지고 건강은 오히려 더 나아지는것 같았다. 대구교도소는 1992년 6월부터 약 3년간 수감생활을 한적이 있는 곳이여서 더러 알만 한 사람들도 있고 건물구조며 질서까지 이전과 거의 같았기때문에 인차 익숙해질수 있었다. 단식투쟁이 끝난 후 나는 곧 6사의 운동권학생들과 접촉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적들의 항시적인 감시를 받고있는 상태에서 그들과 만나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나는 전방투쟁을 벌려 끝내 학생들이 있는 6사로 자리를 옮기였다. 방은 서로 달랐지만 여러가지 방법으로 진지한 대화도 나눌수 있게 되였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출신도 비슷하고 정의감도 강했으며 매우 진취적이고 용감하였다. 내가 감옥에서 생활하는 과정에 느낀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어떤 사상보다는 삶의 조건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는것이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람들은 감옥에 들어오면 머리를 깎을 때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도덕도, 렴치도, 교양도 다 버리고마는것이 상례이다. 그렇게 해서 감옥이라는 타락의 《문화권》에 편입되는것이다. 금방 고급관저에서 끌려나와 넥타이를 푼 신사도 야생적인 감옥생활에 제꺽 적응해버린다. 사상이 삶의 조건에 의존한다는것은 물론 건전한 목적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한정된 《진리》이다. 사실 이것은 위선의 도포속에 가리워졌던 그들의 잠재의식이 실재화된것일뿐이였다. 그러나 내가 사귄 청년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부귀보다도 이 땅우에 정의의 세상을 일떠세울 포부를 안고 살아온 훌륭한 청년들이였다. 나는 인생의 선배로서 그들을 옳게 이끌어주고싶었다. 먼저 그들에게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얼마나 위대한분이신가에 대해서와 우리 나라 사회주의교육제도와 보건제도 등에 대하여 알기 쉽게 해설해주었다. 그들의 성실성과 진취성에는 나도 감동될 정도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 5년이 되는 때 나는 그들에게 추도모임을 열것을 제안하였는데 모두가 찬성하였다. 그들은 나와 함께 추도형식과 방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나는 그들앞에 1996년의 추도모임때 리용하였던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화를 내놓았다. 잡지 《말》지에 모셔졌던 초상화였다. 한 학생이 기발한 착상으로 훌륭한 액틀을 만들어왔다. 당일에는 7사에 있던 2명의 학생도 추도모임에 참가하였다. 우리는 조국을 해방하고 민족의 통일위업에 모든것을 다 바치신 어버이수령님의 업적을 되새겨보며 앞으로 수령님의 유훈을 받들어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한몸바칠 결의를 다지였다. 뜨거운 손과 손들을 꽉 움켜잡았다. 지금도 그들의 순진하고도 열정에 넘쳐있던 모습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그들이 대구교도소에서 다진 맹세와 서로 맺은 정을 잊지 않고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한몫 단단히 하고있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1999년 8월 나에게도 출옥할수 있다는 소식이 왔다. 그 소식을 들은 날 나는 드디여 엄혹한 시련을 이겨냈다는 기쁨,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전사로서 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는 긍지로 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나는 그동안 사귀였던 학생들과 일반수들을 만나 작별인사를 나누며 출옥준비를 갖추었다. 8월 15일전까지도 사람들은 당국이 공개적으로 선포한만큼 출옥을 기정사실로 믿고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일이 되자 출옥은 취소되였다. 이 사건은 나의 출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사람들을 아연케 하였다. 어떤 사람은 교도소측에 항변을 들이대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철창밖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있기만 하였다. 그것을 본 누군가는 나에게 《선생님은 분하지도 않습니까?》 하고 안타까이 묻는것이였다. 왜 나라고 분하지 않았겠는가. 10년이면 꿈마저 징역산다는 감옥살이이다. 삶과 함께 꿈마저 2중의 벽속에 갇힌 사람에게 자유는 천금보다 귀한것이였다. 그것이 귀중할수록 출옥취소는 나에게 아쉬움과 허무감보다도 적들과 끝까지 싸워 이겨야겠다는 결심이 더 굳어지게 하였을뿐이였다. 벽속의 생활은 또다시 이어져갔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나와 새로 온 간수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감옥살이가 몇년째인가요?》 《2천년이요.》 이것은 실언이 아니였다. 자유의 넋이 깃든 심장에는 자유없는 백년보다 자유의 하루가 더 귀중하다. 나에게 있어서 조국은 참다운 자유의 삶이였다. 그러니 나의 마음속에서 세월은 벌써 2천년이나 흐른셈이였다. 이날 나는 내가 만약 조국에 있었다면 무엇을 했을것인가 상상해보았다. 환상은 미래를 위한 꿈이라지만 나의 환상은 흘러간 세월에 대한 꿈이였다. 조국을 위해 바쳐진 그 모든 날과 달들이 눈앞에 어리여왔다. 생각은 또 조국의 꿈으로 이어져갔다. 미제가 아니였다면 우리 인민은 조국의 지난 세월을 또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어왔을것인가. 그 귀중한 세월을 우리는 민족의 삶을 빼앗으려는 미제침략자들과의 투쟁에 바쳐왔다. 나는 귀중한 민족의 자유의 삶, 통일조국의 하루하루를 그려보았다. 나는 그해 1999년 12월 31일에야 정식 출옥하였다. 결국 나는 사연많은 1900년대의 마지막날에 출소한 비전향장기수였다. 나는 현대자동차 전 로조위원장과 함께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출소하는 날 나는 교무과에서 20년전 투옥될 때 입었던 옷을 받았다. 곰팽이가 끼고 아주 못쓰게 된 옷을 보니 마음이 별스러웠다. 어떤이들은 감옥에서 먹은 나이를 세지 않는다고 한다.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지꿎은 애착때문이다. 나도 그러고싶었다. 하지만 나이는 버릴지라도 귀중한 체험만은 버리고싶지 않았다. 나는 옷을 입어보았다. 물씬 풍겨오는 젊은 날의 체취에 이끌려 나는 금시 20년전에로 되돌아가는것 같았다. 드디여 감옥문을 나서는 뜻깊은 날이였지만 아직은 넘어서야 할 고비들이 있었다. 하나는 그동안 감옥에서 각계 인사들과 나눈 편지들을 무사히 가지고 나가는 일이였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뒤문으로 내보내려는 놈들의 기도를 짓부시고 당당하게 큰문으로 나가는것이였다. 거기서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모여온 수백명의 군중이 기다리고있었다. 나는 우리의 짐을 검열하려는자들을 단호히 밀어버리였다. 그러자 놈들은 강권을 행사하려들었다. 이를 목격한 현대자동차 전 로조위원장은 《매일 검방하고도 무슨 부정품이냐. 우리는 오늘 못 나가는 한이 있어도 당신들에게 가방을 보여줄수 없다.》고 소리치며 놈들을 막아나섰다. 그러자 교도관들과 그사이에 긴장한 분위기가 조성되였다. 자칫하면 몸싸움이 벌어질 기세였다. 나는 공안주임에게 《가방속에 위험한 물건이 든것도 아닌데 기왕에 나가는 날까지 사람을 괴롭히면 당신들에게 좋지 않을것이다.》 하고 위협조로 말하였다. 금방까지도 눈을 부릅뜨고 씨근거리던 공안주임은 그 말 한마디에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듯 하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것이였다. 로조의 거물을 건드리는것이 여러모로 좋지 못하다고 타산한 모양이였다. 이번에는 어느 문으로 나가는가 하는것이 문제였다. 나는 다시 교도소측에 들이대였다. 《우리를 대문으로 내보내라. 우리는 민족의 통일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지 죄수가 아니다.》 우리를 기다리며 옥문밖에 서있던 400여명의 군중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대문으로 내보내라!》 하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전 로조위원장의 출소를 환영하러 온 현대자동차의 백수십명 로동자들과 나를 마중하러 온 서울과 대구의 《민가협》성원들과 종교단체 성원들 그리고 동지들과 친지들, 친척들이였다. 당장 문을 부실것만 같은 군중의 기세에 바빠맞아 어쩔바를 몰라하던 놈들은 별수없이 굳게 닫긴 철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맑고 푸른 하늘과 해빛에 반짝이는 흰눈을 떠인 나무들과 철문앞에 미소를 짓고 둘러선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20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정겨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였다. 나는 가슴을 쭉 펴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군중이 우리를 둘러싸는 순간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두손을 높이 쳐들며 《조국통일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400여명의 군중도 일제히 이에 화답하였다. 뽀뿌라나무며 전나무가지에서 눈가루가 떨어져내리며 머리우며 눈섭이며 어깨우에 반짝거리며 내려앉았다. 만세소리, 환호소리는 그칠줄 몰랐다. 그것은 조국통일을 위해 한생을 다 바쳐온 우리의 고귀한 삶에 대한 축복의 환호성이였다. 정문앞에서는 우리 두사람의 출소를 축하하는 환영식이 있었다. 적들은 교도소가 생긴이래 이처럼 많은 인원이 교도소앞에서 출소자, 그것도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환영회를 열기는 처음이라고 하면서 아연실색하였다. 이 모임을 중지시키려고 출동했던 수백명의 경찰은 군중의 기세에 눌려 경비병들처럼 빙 둘러서서 구경이나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사회자의 발언이 있은 후 서울 《민가협》 전 회장과 현대자동차 로조원 한명이 우리의 출소를 환영하는 연설을 하였다. 환영사가 끝난 후 내가 군중앞에 나섰다. 나는 《민가협》과 사회단체들이 우리를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지지성원해온데 대하여 사의를 표시하는 말로 서두를 뗐다. 그리고 지금도 이 땅의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 투옥되여 부당하게 옥고를 치르고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하고 나의 남은 여생을 변함없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바쳐갈 결의를 다지였다. 군중속에서 또다시 환성이 터져올랐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만세를 합창하였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이렇게 웨치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걸어왔던가. 나의 눈에 소나무 한그루가 비껴들었다. 어느해 봄 인상깊게 바라보았던 소나무였다. 그때 나는 새풀이 돋는것을 보고싶어 양지쪽의 들판을 살펴보다가 새삼스럽게 놀랐었다. 언덕우에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눈보라와 맞서온 억센 소나무의 솔잎에 연초록 봄빛이 물들고있었다. 소나무는 겨울에도 봄을 자래워왔던것이다. 그 소나무가 통일을 위해 온갖 시련을 이겨낸 유명무명의 애국자들의 군상처럼 엄숙하게 안겨왔다. 겨울을 이기는 생명이 있어 봄은 언제나 아름답다. 봄은 굴할줄 모르는 생명의 노력이 안아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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