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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나는 어린시절부터 노래를 무척 좋아하였다. 하지만 노래가 나에게 준것은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많았다. 한것은 노래를 듣기는 좋아하면서도 《음치》라고 불리우는 그런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였던것이다. 나에게는 몇가지 우스운 일화가 있었다. 어린시절 간이학교에 다니던 때의 이야기이다. 학교에 악기라고는 칠이 다 벗겨지고 음도 정확치 못한 낡은 풍금이 하나있을뿐이였는데 그마저도 고장이 나서 음악선생님이 입《풍금》을 불군 하였다. 이 선생님은 우리에게 노래를 배워주고는 매 학생이 부르는 노래소리를 듣고 잘못된 점을 타일러주군 하였다. 어느날 선생님은 또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교실을 빙빙 돌기 시작하였다. 그때 부른 노래는 흥겨운 민요풍의 노래였는데 나는 그만 제멋에 성수가 나서 있는 힘껏 목청을 뽑았다. 내곁으로 다가오던 선생님은 무춤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선생님이 내 노래소리에 무척 감탄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나는 어깨까지 들썩이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은 기가 막힌듯 입을 항 벌리였다. 《그… 그만! 성모, 넌… 넌 안되겠다.》 선생님은 안경다리를 붙잡으며 폭소를 터뜨리였다. 그후 선생님은 나의 그 남다른 열성에도 불구하고 음악과목에 《을》을 매기였다. 나는 국민학교 전기간 다른 과목은 모두 《갑》을 받았지만 음악만은 끝내 《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때부터 노래는 언제나 나를 괴롭혀왔다. 남의 노래를 듣거나 혼자서 부를 때는 늘 흥이 나군 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앞에서 부를 때는 늘 웃음거리가 되군 하였다. 나는 이 《숙명》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군사복무의 나날에는 이 약점을 메워보려고 손풍금강습을 받는 등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보았으나 좀처럼 해결할수 없었다. 부상을 입고 입원하였을 때 병원에서는 자주 오락회가 열리군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슬그머니 뒤문으로 빠져나가군 하였다. 그런데 간호원들은 나를 놀릴셈이였던지 아니면 실은 내가 노래를 잘 부르면서도 지내 겸손해서 그런다고 생각해서였던지 기어이 찾아내서는 무대에 세우군 하였다. 하지만 음악과목만은 늘 《을》에서 벗어나본적이 없는 내가 노래를 잘 부를리 만무하였다. 그런 연유로 나는 노래를 잘 부르는 동무들을 부러워하였고 그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전쟁시기에는 함께 병원에 입원했던 인민군협주단출신의 오동무와, 대학교원으로 있을 때는 안동무와 딱친구로 사귀였었다. 하지만 주관적욕망은 어떻든 노래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뿐아니라 사랑하면서도 제대로 불러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제나 랭정하기만 한것 같았다. 나는 음악에서 일생 《을》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오늘 마음속에 울리는 나의 노래, 넋으로 부르는 노래의 가치를 어찌 그 음을 가지고 따질수 있겠는가. 나는 더욱더 노래를 사랑하며 랑만에 넘쳐 무대에 나서군 한다. 노래가 나에게 주는것은 다만 즐거움만이 아니다. 인생의 값높은 시절에는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찾아오는 친근한 벗이고 동지였으며 오늘은 지나온 인생의 추억을 안고 찾아와 영원히 그 시절처럼 삶을 빛내이라고 속삭여주는 참된 길동무이다. 하다면 내가 어떻게 그처럼 노래와 영원히 잊지 못할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던것인가. 그것은 내 인생에 가장 어려웠던 감옥투쟁의 나날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나의 심장이 언제나 혁명적랑만에 넘치도록 하여준것이 바로 노래였기때문이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철창속에서 울려퍼지던 노래의 선률이 귀전에 쟁쟁히 울려온다. 실로 노래와 함께 시작하여 노래와 함께 흘러온 나날들이였다. 그 시절 우리의 일과는 언제나 혁명적인 노래로 시작되군 하였다. 제일 많이 부른 노래는 물론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나의 눈앞에는 가지가지 추억의 장면들이 안겨오군 하였다. 처음에는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이 노래를 배우던 시절이 떠오르고 이 노래를 부르며 함께 행군해가던 전우들의 모습이며 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주던 인민들의 모습이 안겨왔다. 노래의 선률을 따라 추억은 끝없이 이어져갔다. 그 시절 우리는 혁명가극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노래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도 많이 불렀다. 이 노래의 구절구절을 불러볼 때면 노래의 선률을 타고 김일성종합대학청사에서 처음 뵈옵던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안겨오군 하였다. 노래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행복한 시절의 가지가지 즐거운 추억을 싣고 가슴속에 파고들군 하였다. 전국의 모든 학생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선물교복이 일제히 공급되던 어느해 4월 15일이였다. 그날은 아이들뿐아니라 온 나라가 기쁨에 설레이였다. 그날 저녁 내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4남매의 자식들이 기다렸던듯 환성을 올리며 달려와 내 손목을 이끌었다. 왁작 떠드는 아이들에게 이끌려 책상앞에 다가서니 거기에 빛갈고운 교복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때 교복에서 물씬 풍기던 새옷냄새가 얼마나 상쾌하던지… 《옷이 꼭 맞아요.》 《아버지, 나 좀 봐요. 참 곱지요.》 새옷을 갈아입은 아이들이 내 팔목에 매달리며 떠들어댔다. 그날 저녁 오락회때 어느 애가 선창을 떼였던지 우리 온 가족은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노래 《세상에 부럼없어라》를 불렀다. 노래의 선률은 활짝 열려진 창문밖으로 흘러나가 공장과 마을의 지붕들을 스치며 날아올라 별무리 반짝이는 밤하늘 멀리로 끝없이 퍼져갔다. 그밤부터 이 노래는 우리 가정의 지정곡이 되였다. 랑만에 넘쳤던 그 봄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내 마음속에 언제나 행복의 청사진처럼 남아있었다. 그밖에도 우리가 감옥에서 부른 노래는 수없이 많았다. 세월은 노래의 선률속에서 흘렀다. 《사향가》, 《눈이 내린다》, 《적기가》, 《결전의 길로》, 《전호속의 나의 노래》, 《젊은 기관사》, 《문경고개》, 《강선의 노을》 … 나에게 있어서 기상후 2시간동안이 제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였다. 감옥생활 전기간 나는 새벽 일찍 깨여나 조용히 노래를 부르는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하군 하였다. 이렇게 하면 고독감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음이 흥겨워지군 하였다. 감옥안에서는 새로운 노래가 계속 보급되군 하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우리가 감옥에서 어떻게 당생활도 하고 노래도 보급해 불렀는가 묻군 한다. 아마 잘 믿어지지 않을것이다. 사실 육체적 및 정신적인 자유가 전혀 없는 감옥에서, 더우기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사동에서 노래보급이란 말처럼 수월한 일이 아니였다. 사람들의 머리속에 쉽게 전파될수 있고 가장 쉽게 침투해들어갈수 있는것이 노래이다. 그래서 고대의 정치가들은 《치세의 음》이요, 《란세의 음》이요 하면서 노래에 사상의 의미를 부여하려 하였으며 진보를 두려워한자들은 언제나 혁명적인 사상과 함께 혁명적인 노래를 가장 두려워하며 빈번히 《금곡령》이란것을 내리기도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노래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아름다운 노래를 위하여 목숨도 바친다. 노래를 목숨과도 바꾸는 그런 사람들을 정복할 힘은 없다. 당시 우리의 노래보급은 자신들의 혁명적신념을 더 굳게 하기 위한 투쟁인 동시에 적들과의 심각한 정치적대결이였다. 지금 우리가 조국의 품에 돌아와 목청껏 부르는 노래는 대개 그 시절에 즐겨부르던 노래들이다. 그 나날에 우리는 노래 한곡을 부르기 위해 치렬한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는 우선 최하층간수들을 쟁취할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그들과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리였다.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면서 남조선《정권》의 식민지적성격에 대하여 현실과 결부하여 론리적으로 납득시키였다. 또한 우리 민족은 결코 갈라질수 없는 단일민족이며 미제가 남조선에서 물러가고 조국이 통일되는것은 력사의 필연이라는것을 설명해주었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전주교도소에 새로 온 어느 한 간수는 우리가 모임을 위해 감방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어느때든 서슴없이 열어주었으며 지어 망까지 서주군 하였다. 내가 있던 방은 사동에서 제일 끝방이였으므로 우리는 자주 여기에 모여 회의, 학습, 노래보급을 진행하군 하였다. 한번은 보안과장이 불의에 순시를 나온적이 있었다. 4사의 순시가 끝나면 곧 우리가 있는 5사에 들어올 차례였다. 그 시각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위대한 수령님의 로작학습과 노래공부에 열중하고있었다. 이 사실을 눈치채고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도 다름아닌 그 간수였다. 우리를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사람들도 우리의 동정자, 보호자로 되였던것이다. 우리가 가까이 대상했던 직원들이나 일반수인들은 모두 우리를 무서운 《정치범》으로 꺼린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대하며 도와주기도 하였다. 하여 우리는 차츰 모든 활동을 비교적 자유롭게 진행해갔다. 1990년대 중엽 《동지애의 노래》가 입수되고 보급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보다 이 노래의 가사와 절절한 그 곡자체로서 설명될수 있다고 본다. 수령에 대한 뜨거운 충실성, 동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세계, 바로 그것이였다. 악보를 보고 시창도 할수 있었던 김창원동지는 이 노래를 접하자 재빨리 가사와 곡을 익혀두었다가 밤새워 련습을 한 후 동지들에게 보급하였다. 우리는 이 노래의 가사와 선률을 듣는 첫 순간에 아예 그 심원한 세계에 심취되고말았다. 부르면 부를수록 혁명의 한길을 따라 끝까지 걸어갈 각오가 가슴속에서 세차게 솟구쳐올랐다. 몸은 비록 철창속에 있었어도 우리의 넋은 노래의 세계속을 날고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긴급한 정황이 생기였다. 회의, 학습, 지어 노래보급까지 진행하는것을 눈치챈 한 재소자가 이를 보안과에 신고하였던것이다. 《빨갱이령감들이 매일 저들끼리 모여 쑥덕공론을 벌리고 <불온가요>까지 마구 부르고있다. 감옥당국은 어째서 이것을 묵인하는가.》 이 사실은 즉시 우리에게 전달되였다. 조금도 두려울것은 없었지만 한바탕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처할 방책을 토의하였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후에 알고보니 신고를 받은 조사관은 신고한자에게 서면제출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신고한자는 아주 약은 놈이였다. 그는 만일 서면으로 신고하면 그것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증거로 되는것은 물론 사람들의 배척을 받을것을 타산하고 서면신고를 하지 않았던것이다. 그 사실이 교도소내의 수인들속에 알려지자 그자는 사람들의 눈길이 두려워 얼굴도 쳐들지 못하고 다니였다. 얼마후 그 비렬한 신고자는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여갔다. 우리는 남의 뒤를 캐다가 모두에게서 개처럼 버림받은 그 가련한자에게 랭소를 보냈다. 그 가련한 인간이 이감된 날 저녁 우리 사동에서는 또다시 노래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김창원동지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나의 조국 영원하라》였다. 죽음보다 가혹한 악형속에서 자신을 지켜낸 우리의 신념이 노래의 선률이 되여 울리고있었다. 육체와 넋의 죽음을 강요당하는 현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이룩해낸 혁명가들의 승리의 노래였다. 《나의 별》, 《나는 알았네》,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와 같은 노래들도 그 시절에 우리가 즐겨부르던 노래들이였다.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노래를 빼앗지 못하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감옥은 노래가 끝나는 곳이 아니라 더 아름답고 훌륭한 선률이 창조되는 곳이였다. 그 어떤 취미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운명을 위해 우리는 노래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노래는 심장의 울림이다. 넋의 부름이다. 나는 오늘도 그날의 동지들과 그리고 조국의 동지들과 함께 그 시절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른다. 이렇듯 나는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한다. 나이 팔십이 되여오건만 노래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 어느때보다 더 뜨거워진다. 노래의 진정한 가치는 아마도 참된 인생이 가르쳐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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