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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의 당생활
내가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첫 당생활을 시작한것은 가렬한 전화의 시기였던 1952년이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가슴은 환희로 뒤설레이군 한다. 인간이하의 처지에서 방황하던 내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건하시고 이끄시는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의 당원이 된다는 기쁨에 눈물흘리던 일을 잊을수 없다. 1970년대는 나의 당생활과정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절이였다. 그때 나는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새겨진 시계표창을 수여받게 되였다. 그후 어느날 한 당일군과 마주앉게 되였는데 그는 내가 차고있는 시계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숭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영광입니다.》 그의 이 짤막한 한마디의 말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있다. 사실 그랬다. 그것은 너무도 큰 영광이였다. 수령님심장의 박동, 수령님의 발걸음, 수령님의 시간에 맞추어 흐르게 되는 내 인생의 너무도 큰 영광이였다. 그때가 엊그제같은데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인생에는 곡절과 시련이 많았지만 어버이수령님을 따르는 당원의 시간에는 순간의 정지도 없었음을 긍지롭게 자부한다. 나는 한생의 많은 나날을 적구의 감옥에서 보내였다. 하다면 이것이 당원으로서의 내 인생에 공백기라고 할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물음에 《아니다.》라고 명백히 대답할수 있다.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있었어도 당은 언제나 나의 심장속에 있었으며 당원으로서의 나의 시간은 순간도 멈춤을 몰랐다. 적구에 홀로 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당조직앞에 세우고 자신의 생활을 총화해보군 하였다. 감옥생활이 오래 지속될수록 나날이 커가는 고통은 배고픔과 추위가 아니라 당생활을 할수 없는 그것이였다. 당원으로서 자기의 생활을 당원동지들앞에 털어놓고 또 서로 충고와 조언도 주는 그러한 생활이 없는 고독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것이 아닐수 없었다. 그때 내가 있던 사동에는 당원이란 나를 포함하여 두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감옥안에서 자체로 당생활을 하기로 하고 여기에 조직은 없다 할지라도 서로가 세포비서가 되여 의견도 주고 방조도 주면서 변함없이 당원답게 보람있게 살아가자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둘중 누구에게든 기회가 생기면 우리의 옥중투쟁과 당생활에 대하여 당에 보고드리자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감옥에서 두사람이 세포비서이자 세포당원이기도 한 이례적인 당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와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생활하게 되니 외로움도 가셔지고 끝까지 투쟁할 각오도 더 굳어지게 되였다. 그런데 그해말 전방이 시작되였다. 그것은 1월에 있은 단식투쟁의 결과였다. 그런데 놈들은 비렬하게도 유기수들만을 15사로 보내고 우리 두사람은 다른 사동으로 전방시켰는데 그마저도 2층과 3층으로 따로따로 분리시켜놓았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어 어떻게 하나 전향시켜보려는것이였다. 우리는 이 처사에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1991년 3월경 나는 한방에 있는 동지와 토의하고 15사에로의 전방을 요구하여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 5일만에 적들은 끝내 우리에게 굴복하고말았다. 우리는 드디여 그리도 그립던 동지들이 기다리는 15사로 가게 되였다. 15사든 어디든 감옥인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동지들이 있는 곳은 사랑, 희망 등 인간의 온갖 정과 행복이 있는 곳이였다. 우리가 전방되여오자 동지들은 마치 오래 헤여졌다 돌아온 친혈육을 만난것처럼 기뻐하였다. 어떤 동지는 여기저기서 구해들인 솜으로 손수 솜저고리를 만들어주었으며 또 어떤 동지는 두툼한 장갑을 만들어주고 또 누군가는 나의 발을 재여 덧보선을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제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할 전우였으며 우리에게 힘을 주며 이끌어줄 혁명의 선배, 조선로동당원들이였다. 15사의 동지들은 20년, 30년, 지어 거의 40년이나 옥중투쟁을 해온 동지들이였다.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하였다. 나도 과연 그렇게 할수 있을가. 나는 나의 이 속생각을 신인영동지에게 털어놓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신인영동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이미 혁명의 길에 나설 때 3대각오를 한 사람들이다. 무엇때문인가. 우리의 위업이 정당하고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한목숨바쳐 싸우는것이 우리들, 조선로동당원들의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믿었기때문이다. 세월이 문제가 아니다. 이 믿음에 변함이 없을 때 우리는 몇십년이고 끝까지 혁명적지조를 지켜 싸울것이며 설사 죽는다 해도 당과 조국의 기억속에 영생할 때 우리는 행복할것이다. 나는 손동무도 그렇게 살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그때 신동지의 근엄한 모습을 보며 인생의 먼길을 혁명가로서, 당원으로서 가장 아름답게 빛내여가리라 마음다지였다. 그날 밤 나는 독감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자기 인생을 돌이켜보았고 당원으로서 지금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다음날 운동장에서 잠간 만났던 한 동지가 나에게 귀중한 조언을 주었다. 《손동무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다니 참 부럽소. 게다가 교원생활도 했다지요? 》 그는 나의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오래동안 조국과 떨어져있은 동지들에게 날로 강화발전되는 우리 공화국의 참모습에 대하여 알려주어 그들이 진보적인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사회의 각이한 사람들이 모여든 이 감옥에서 우리 혁명의 동정자, 지지자들을 더 많이 전취하도록 하는것이 지식인당원으로서의 본분이 아니겠는가고 말하는것이였다. 순간 나는 눈앞이 환히 트이는것 같았다. 일단 목적이 정해지자 수많은 계획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단조롭고 고독한 감옥생활에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봄이였다. 나는 어느 무정한 손에 뽑혀 딩굴던 이름모를 풀 한포기가 뿌리를 이악하게 토양속에 박으며 몸을 일으켜세우는 모양을 기쁘게 바라보았다. 4월의 명절이 다가왔다. 이때 나는 동지들의 제의에 따라 옥중투쟁을 벌리는 모든 당원동지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담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삼가 올리는 축하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적들의 서슬푸른 감시의 눈초리가 시시각각 뒤따르는 조건에서 이것은 사실 위험천만한 일이였다. 나는 초고를 완성하고 비밀리에 동지들에게 돌리였다. 그후 다시 그들의 의견을 받아 편지를 완성하였다. 그 한 문장 한 문장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드리는 우리들의 심장의 맹세였다. 우리는 편지의 앞머리에서 30년, 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온갖 악형을 이겨온 통일애국투사들과 단두대우에서도 혁명적절개를 굽히지 않은 유명무명의 렬사들이 어떻게 수령의 위업에 충실하였는가에 대하여 썼다. 이와 함께 혁명가들은 절해고도에서도 투쟁을 멈출수 없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명심하고 감옥안에서도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잘 가꾸어나갈것과 자신들의 혁명적세계관을 부단히 공고화하여 통일의 광장에 어버이수령님을 높이 모시는 그날 영광의 대오에 기어이 들어설 결의를 적어나갔다. 그리고 끝으로 조국통일의 승리를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부디 건강하시기를 삼가 축원하였다. 편지가 완성되던 날 나는 다시한번 마음속결의를 다지였다. 《어버이수령님! 경애하는 장군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이며 변함없는 혁명가, 조선로동당원인 손성모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자신이 선택한 혁명의 길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것입니다.》 그후 나는 수십년동안 조국과 떨어져서 생활해온 동지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인적풍모와 우리 공화국의 현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이것을 나에게 맡겨진 당적분공으로 여기였다. 물론 어려운 일이였지만 그때마다 나는 잊을수 없는 대학시절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숭고한 당조직관념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군 하였다. 감회도 새로운 그 시절 장군님께서는 평범한 당원이 되시여 대학 전기간 당생활에 적극 참가하시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당적분공을 무조건 수행하군 하시였던것이다. 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은 위대한 수령님과 꼭같으신분이시며 천재적예지와 탁월한 령도력, 장군다운 담력과 배짱, 해박한 지식, 인자한 풍모를 지니신 위인중의 위인이심을 생동한 실례를 들어가며 이야기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우리 동지들이 수십년간 멀리 떨어져 살아온 조국의 현실을 알게 하고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을 더 굳게 가지도록 하는데 적으나마 기여할수 있었다. 그해의 어느날 우리는 우리를 존경하며 동정해주던 어느 한 간수를 리용하여 당원들의 모임을 가지였다. 비록 짧은 순간이였지만 우리의 감옥투쟁력사에서 가장 의의깊은 순간이였다. 모임에 참가한 동지들은 지난 시기의 자기 생활을 심각히 총화하였다. 성근한 자기비판도 있었고 동지들의 결함에 대한 따뜻한 비판도 있었다. 그 비판이 아무리 가슴아픈것이라 해도 누구나 그에 깃든 참다운 동지적사랑을 느끼며 모두 허심하게 접수하였다. 또한 지금까지의 투쟁성과와 교훈을 총화하고 앞으로의 투쟁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조직적으로 과감히 벌려나갈데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 모임이 있은 후 우리는 동지들사이의 사상의지적단결을 강화하고 보다 단결된 힘으로 적들과 맞서싸울수 있게 되였다. 우리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우리는 극히 제한되여있던 외부와의 서신교환도 남조선인민들에게 우리의 조국통일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고 반통일분자들의 죄행을 폭로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이 사실을 눈치챈 공안당국은 교도소에 지시하여 우리를 분리시키게 하였다. 적들은 우리의 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는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던것이다. 우리를 자주 이감시킨 리유의 하나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적들은 또한 우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옥중의 고독속에서 변화되기를 바랐다. 그때 나는 대구교도소로 이감되였다 하지만 우리는 적들의 잦은 이감책동속에서도 진보적인 청년학생들과 사회의 량심적인 인사들속에 우리 당의 조국통일사상을 선전하고 그들을 투쟁에로 고무추동하는 일을 한시도 중단하지 않았다. 후날 나는 또다시 전주교도소에로 이감되게 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비전향장기수들은 더 조직적으로 결속되여있었다. 당원은 4명이였는데 《방》이 1명 있었다. 《방》이란 동지들의 투쟁과 생활상문제를 통일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하는 책임자를 가리켜 쓰는 말이였다. 처음에는 《방》을 6개월에 한번씩 교대로 맡다가 후에는 그중 젊고 감옥생활년한도 오랜 김창원동지에게 고정적으로 위임하였다. 그는 그때부터 출옥할 때까지 《방》의 역할을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는 이미 대전교도소에서 《방》을 해본 경험을 가지고있는 동지였다. 감옥안에서의 당생활은 활발히 진행되여나갔다.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정치학습과 당적분공이 조직되고 어김없이 집행되군 하였다. 뿐만아니라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탄생일, 당창건기념일, 공화국창건기념일이면 은밀히 기념일의 성격에 맞게 학습도 진행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입수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로작들에 대한 학습도 진행하고 위대한 수령님의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장편소설로 형상한 《피바다》, 《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혁명소설들과 《봄우뢰》, 《1932년》 등 소설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학습을 심화시켜나갔다. 학습시간에 수령, 당, 대중의 호상관계문제를 비롯하여 혁명과 건설에 관한 우리 당의 사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학습하던 수인복차림의 머리희슥한 동지들의 모습을 오늘도 잊을수 없다. 옥중투쟁이 끝나는 그날까지 우리의 당생활은 계속되였으며 순간의 공백도 없었다. 조선로동당원의 넋이 살아있는 한 당원은 어디에서도 결코 외로움을 모르며 당원의 마음속에는 고독이 깃들 자리가 없다. 그 넋이 있어 눈보라가 세찰수록 더 거세게 머리쳐드는 푸른 소나무처럼 우리 당원들의 신념은 가혹한 그 시련의 나날에 더 굳세여진것이 아니겠는가. 옥중에서의 당생활, 그것은 살아도 죽어도 오직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만을 믿고 따르는 우리 당원들의 신념과 의지가 낳은것이였고 조국을 떠나 멀리 적구에서도 우리들의 정치적생명을 빛내여나갈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였다. 내가 조국의 품에 돌아왔을 때 맏아들이 가보로 간수해온 시계를 내놓았다. 자애로운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뚜렷이 새겨진 그 시계였다. 그동안 단 한번도 세우지 않았는데 1초도 틀려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시계는 내 젊었던 그 시절처럼 규칙적으로 힘차게 돌아가고있었다. 절해고도에서도 변함없이 수령님과 당을 받들어온 우리 심장의 맥박이 순간도 멈춤을 몰랐던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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