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승리

 

 

나는 《법정》에 《상고리유서》를 제출하였다. 3심이 형식에 불과한것임을 알면서도 굳이 상고한것은 결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식민지매국노들의 반민족적죄상을 까밝히고 꺾이면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을 나의 신념과 의지를 확고히 표명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상고리유서》에서 내가 통일혁명가가 된 리유, 우리 공화국의 조국통일방안의 정당성에 대하여 밝히고 력사와 민족앞에서 진정한 죄인은 미제의 하수인노릇을 하는 군부독재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법관》들이라고 단죄하였다. 끝으로 나는 비록 령어의 몸이 되여 통일의 날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투쟁을 계속해나가겠다는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때 내가 쓴 《상고리유서》는 력사의 진범인들과 굴함없이 싸울 의지를 밝힌 나의 첫 《공개장》이였으며 혁명의 선렬들처럼 혁명가, 애국자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갈 의지를 나자신의 가슴에 새겨넣은 나의 《투쟁리유서》였다.

내가 이미 예견했던바 그대로 《상고리유서》는 기각되였다. 이것으로 형기는 정식 확정되였다. 《상고리유서》가 기각되였다는것을 알리며 깨고소해하는자를 보느라니 고소를 금할수 없었다. 나는 어둠서린 뙤창을 바라보았다. 별무리에서 떨어진 별찌가 꼬리를 길게 끌며 떨어지고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리에서 떨어진 그런 별찌가 될수 없다고 생각하며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시를 지어보았다.

 

별찌 떨어지는 이밤

은하수 비낀 하늘을 보니

이 몸도 별이 된것 같아라

 

《직업》은 무기수, 《거주지》는 대전감옥 6사. 이것이 이제부터의 나의 《리력서》이고 생존조건이였다.

나는 6사에서 20사로 전방되였다. 여기에는 무기수 3명, 유기수 2명이 수용되여있었다.

1990년 1월이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놈들은 비전향장기수들을 수감한 15사를 철저히 격페시키고 얼마 안되는 운동시간마저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는 등 온갖 비렬한짓을 다하였다. 놈들의 이 졸렬한 처사에 격분한 우리들은 새해 첫날부터 21일간 단식투쟁을 벌리기로 하였다.

우리는 요구조건을 관철할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비장한 각오를 다지였다. 요구조건은 우리를 동지들이 있는 15사로 전방시키고 운동시간을 철저히 보장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허용할데 대한것이였다.

나이도 많은데다가 영양상태도 좋지 못한 조건에서 무려 21일간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는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였다.

우리는 새해 아침 북녘하늘을 우러르며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전사답게 싸울것을 맹세다지였다. 아침 첫 식사를 거절하는것으로 우리의 투쟁은 시작되였다.

나는 이미 선배들을 통하여 단식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막상 날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허기증과 통증, 허탈 등 각종 고통이 엄습해오자 은근히 두려움을 느끼였다. 제일 두려운것은 무맥한 죽음을 당하는것이였다. 차츰 의식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하나, 둘 손가락을 꼽아나갔다. 남은 단식기일을 계산해보려는것이였다. 마지막손가락을 접는 순간 나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지금까지보다 몇배나 더 긴 나날이 앞에 있었던것이다. 6일째부터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음식물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졌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 하루종일 내 생에 보았던 갖가지 음식들이 눈앞에 얼른거리면서 닥치는대로 먹고싶어졌다. 그야말로 육체의 극한점이였다. 이런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음식을 입에 댔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며칠후 나는 또다시 손가락을 꼽아나갔다. 감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뙤창에 비낀 별무리들을 바라보던 나의 눈앞에는 불쑥 전쟁의 포연을 뚫고 모진 고난을 헤쳐나가던 기나긴 행군의 로정들이 우렷이 떠오르는것이였다.

그 시절에도 우리의 머리우엔 무수한 별들이 비껴흘렀다.

수천만의 삶과 귀중한 조국의 운명을 건 행군대오의 병사들처럼…

별찌의 미는 별무리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화려해도 잊혀지고말 불행도 그 순간에 있다. 비록 하나의 작은 별이라도 서로서로가 빛을 더해주며 별무리를 이루어갈 때 영원한 우주의 세계에서 영원히 아름답게 빛나는것이다.

죽어도 투쟁의 대오에서 영생을 찾는 우리 병사들처럼…

그때 우리 병사들에게 육체의 극한은 있었어도 정신의 극한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시절을 되새겨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리가 하는 이 단식도 결국 조국을 위한 행군과 같은것이다, 이겨내지 못한다면 어찌 나를 키워준 조국앞에 머리들고 나설수 있단 말인가.

단식투쟁은 단지 굶주림의 고통을 이겨나가는것이 아니다, 혁명가의 존엄을 건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을 떳떳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자.

이렇게 생각하니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단식투쟁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나갔다.

적들은 우리앞에 굴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투쟁의 결과 우리는 교도소측으로부터 외부와의 서신거래며 운동시간 등 많은 문제에서 양보를 받아냈다. 그 실행여부는 아직 두고볼 일이였지만 놈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냈다는것만으로도 우리의 기쁨은 컸다. 성과중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교도소소장으로부터 15사에로 전방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것이였다. 이것은 우리가 이룩한 옥중투쟁의 첫 승리였다.

온 사동이 승리의 기쁨에 싸여있던 그때 나는 예순번째 생일을 맞게 되였다. 이날을 맞고보니 지나온 인생이 가슴쩌릿이 추억되였다.

어린시절 생일날에 밀개떡을 해달라고 조르다가 어머니를 울리던 일이며 결혼후 처음으로 안해에게서 푸짐한 생일상을 받고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눈물짓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의 추억은 어느때나 그러하듯이 또다시 대학시절로 이어져갔다. 대성산유원지건설장에서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던 순간, 대학구내에서 경애하는 장군님을 몸가까이 뵙던 영광의 순간이 떠오르고 다음은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시계표창을 받던 감격스러운 장면들이 연줄연줄 떠올랐다.

나는 불쑥 공화국의 품속에서 모든 영광과 행복을 다 받아안으면서도 그에 대하여 글로 써보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역시 행복이란 누리고있는 동안에는 그 귀중함을 다 알수 없는것이다. 나는 깊은 사색끝에 간수들의 눈을 피해가며 글을 써나가기 시작하였다.

제목은 《태양은 누리를 비친다》였다. 지나온 나날을 추억하며 글을 써나가느라니 어제날 버림받던 류랑소년에게 참다운 삶의 기쁨을 안겨주시고 오늘은 절해고도에서도 비관을 모르는 인간으로 키워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나는 글에서 우리 인민이 수천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높이 받들어모신 어버이수령님의 위대성과 천재적예지, 고매한 인간적풍모에 대하여 서술하면서 세상만물이 태양의 빛을 받아 생존할수 있듯이 인생도 삶의 행복과 보람도 오직 위인의 품속에 안길 때라야 비로소 찾을수 있다는 진리를 나의 실지체험을 가지고 론증해나갔다.

나는 이겨냈다. 고문의 고통도 죽음의 위협도…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성장을 이룩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날 밤에는 별들이 유난히 빛났다. 그 영원한 하늘의 세계에서 총총 여문 별들이 나를 보며 미소짓고있었다.

나는 정다운 벗을 향해 속삭이듯 별을 보며 속삭였다.

 

은하수 비낀 하늘을 보니

이 몸도 별이 된것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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