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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냐 투쟁이냐
투쟁은 곧 삶이다. 이것은 내가 옥중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하게 되는 말이다. 이 말에는 옥중생활 전기간의 체험이 비껴있었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옥중생활은 결코 자유를 유린당한 인간의 절망의 삶이 아니였다. 1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된 후 4개월 지나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재판이 벌어졌다. 나는 재판 전기간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적들은 끝내 무기형을 선고하고야말았다. 나는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관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나는 이 재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활동은 명백히 민족의 통일을 위한 성업이였다. 오늘의 이 <재판정>은 매국이 애국을 <징벌>하는 범죄의 현장이다. 력사는 당신들과 당신들의 전도된 세계관에 대하여 재판하게 될것이다. 나는 무죄를 주장한다.》 《재판정》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였다. 잔뜩 틀을 차리고 앉아 짐짓 엄엄한 표정을 짓고있던 재판관들이 《발언 중지!》 하고 연방 고함치는가 하면 망치를 다급히 두들겨대는 모양이 참 가관이였다. 남조선의 재판제도는 3심제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한갖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한것으로서 나의 형기는 이미 확정된것이나 다름없었다. 2심재판이 끝난 후 나는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였다. 나를 태운 호송차가 대전교도소에 도착한 순간 눈앞이 아뜩해졌다. 뒤에서 감옥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길 때는 나를 지탱해온 마음의 기둥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는것만 같은 허탈감이 엄습해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투쟁을 떠난다면 나는 이미 존재의미가 없는 인간이였다. 내가 처음 수용된 곳은 일반수징벌사동이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을 일반수들과 함께 가두는것은 심리적인 고통을 주면서 전향여부를 타진해보려는 놈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였다. 감옥에 들어온 얼마후 나는 운동권학생들을 통하여 15사에 수십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부터 나의 온 신경은 그리로 쏠리였다. 하지만 그곳은 엄격히 격리되여있었으므로 그들과 만나는것은 아직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뜻밖에도 15사동지들이 파견한 《특사》가 나에게 닿았다. 놈들이 아무리 비밀에 붙여보려고 해도 나의 이감에 대한 정보가 이미 15사에 입수되였던것이다. 《특사》는 나의 형편에 대하여 료해하고 대전감옥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신심을 잃지 말라. 감옥은 새로운 투쟁무대이다.》 이것이 감옥의 동지들이 나에게 보내온 첫인사였다. 그때의 기쁨은 무어라 형언할수 없는것이였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난파선우에서 뭍을 본 심정이라고 할가. 나는 이 지옥같은 곳에도 의지할 동지들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아직은 이름도 얼굴도 알수 없는 고마운 동지들에게 마음속으로 거듭 감사의 인사를 보내였다. 혁명가는 절해고도에서도 혁명적신념과 절개를 굽히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이 되새겨졌다. 새로운 결의가 마치 봄을 맞은 대지에 움터오르는 새싹마냥 내 마음속에 자라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사면이 두터운 벽체와 전기철조망으로 둘러막힌 감옥안에서 무엇을 할수 있겠는지 알수 없었다. 나는 우선 운동시간에 나와 산보하는 같은 사동의 수인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기에 들어온 후 내가 그들에 대하여 세웠던 견해는 《천하의 악당무리》라는것이였다. 그들은 흉악범(살인범, 강도 등), 파렴치범(소매치기, 절도범 등)들로서 감옥안에서도 상식이하의 너절한 행위를 아무 거리낌없이 하고있었다. 그들을 보니 대전교도소의 유래가 떠올랐다. 옛날 풍수에 능한 로승이 이곳을 보고 후날 큰 절이 설 자리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대전감옥이 일어선 후 사람들은 여기서 청의삭발한 《승》들이 《고행수도》하는 모습을 보고 《가히 큰 절은 큰 절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이곳은 《도적골》로 불리운 곳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유래는 알수 없지만 어쨌든 여기에 동양최대의 교도소가 일어서 각지의 망나니들이 수백, 수천이나 모여들고있으니 참 력사의 묘한 익살이라고 해야 할것이였다. 수인들의 행위는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 남을 누르려고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주먹패가 있는가 하면 감형받겠다고 남의 뒤를 캐며 고자질하기에 이골난 작자들이 득실거렸다. 한마디로 이 일반수징벌사동은 사회의 구석구석에 널려있던 잡다한 쓰레기들을 쓸어모은 오물통같은 곳이였다. 게다가 이 무지한 수인들은 교도소측의 악담에 속아 우리에 대한 감정이 매우 적대적이였다. 그들은 우리의 일거일동을 살피다가 조금이라도 류다른 기미가 느껴지면 잔뜩 불구어 밀고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입에서는 《과연 추물들이로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오군 하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인간들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들이 그렇게 된데는 일정한 원인이 있었다. 그들의 행태는 그들이 몸담고 살아온 사회륜리의 표출이였으며 일종의 반항형태라고도 할수 있었다. 이른바 《경제발전》을 자랑하는 나라들에서 골치거리로 되고있는 《히피족》이니, 《펑크족》이니 하는것이 다 그런것이 아닌가. 사실 계급적처지로 볼 때 이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이끌어준다면 얼마든지 우리와 손잡을수 있는 대상들이였다. 이들은 대개가 젊고 정열적인 사내들이여서 출옥후에 조국통일이나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나선다면 한몫 단단히 할수 있는 사람들이였다. 나는 나의 첫 포섭대상을 누구로 할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어느 집단에나 그 집단을 움직이는 핵심이 있기마련이다. 어느날 운동시간에 나는 얼핏 한 젊은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내가 공안수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그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있었다. 그는 폭력범이였다. 간수들은 주먹이 센 그를 운동권학생들을 억누르는데 리용해먹군 하였다. 그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나의 머리속으로는 《바로 저 젊은이다.》 하는 생각이 펀뜻 스치는것이였다. 얼핏 보기에는 감때사납고 무지막지해보였지만 그늘이 비낀 음울한 그 눈에서 나는 총명함과 깊은 고뇌를 보았다. 정말 악한 인간이라면 인간, 인생, 운명과 같은것에 대한 고뇌가 있을수 없다. 고뇌란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는것이다. 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들사이에는 고향과 부모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에게 나의 고향에 대해서와 전쟁시기 의용군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공화국으로 들어간 사실과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교단에 섰던 내가 어떻게 되여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되였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차츰 그는 경계심을 풀기 시작하였다. 알고보니 그는 고아였다. 인정없는 세상에 구걸의 손을 내밀기엔 너무도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린색한 이 세상을 향해 주먹을 쳐들었던것이다. 그 대가로 21살에 《법정》에서 5년형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굴욕을 참아내는것은 고역중의 고역이였다. 형기를 마치게 되였을 때 그는 끝내 참아내지 못하고 못된 간수 하나를 일격에 꺼꾸러뜨렸다. 《법정》은 이 자존심 강한 사나이에게 또 5년이라는 《적중한 보상》을 해주었다. 《살기 위해선 자존심마저 버려야 하는겁니까?》 청년의 눈에서 진득한 눈물이 번뜩이였다. 누구에게도 보인적 없는 눈물이였을것이다. 나와 그의 사이가 가까와지자 이곳 사동의 재소자 대부분의 태도와 언행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운동시간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를 향해 머리를 꾸벅하며 인사하는가 하면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하였다. 그 청년은 후날 나에게 자기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몇번 대상해보았는데 그들이야말로 사람다운 사람들이라는것, 그들의 말은 한마디한마디가 다 진실이며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것이였다고 말하였다. 그해 12월 출소를 앞둔 그는 나에게 앞으로 폭력집단과 결별하고 선생님들처럼 정의의 싸움에 몸바치겠다고 하면서 자기를 지켜봐달라고 하였다. 그와의 사업을 통하여 나는 일반재소자라도 경원시하지 말고 교양만 잘한다면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이끌어갈수 있다는 경험을 얻게 되였다. 나와 재소자들과의 관계가 저들이 목적한바와는 다르게 번져가자 놈들은 악에 받쳐 날뛰였다. 그후 나는 6사로 전방되였다. 6사에는 《정치범》들과 일반범들이 함께 수용되여있었다. 일반범들은 적들의 《반공》교육에 물들어 《정치범》들의 면전에서 《빨갱이》라는 폭언을 마구 내뱉는 무뢰배들이였다. 하지만 나와 동지들은 이들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차근차근 일깨워주었다. 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은 우리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가 혈육처럼 느껴진다고 하며 기회가 생길적마다 공화국의 실상에 대하여 이야기해달라고 간청하군 하였다. 그들중에는 40대 초반의 한 사형수도 있었다. 일반범들의 범행은 대다수가 돈과 관련된것이였는데 그 역시 그랬다. 처음엔 사람을 죽인 사형수라기에 꺼림직했었는데 차츰 알고보니 그도 남쪽사회가 만들어낸 불행한 희생자였다. 그는 화물자동차를 세내여 남새장사를 하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자에게 돈을 꿔주었다가 1년이상 받지 못하게 되자 화김에 한대 때린다는것이 그만 급소를 다쳐 화근이 되였다는것이였다. 결과 사형을 선고받게 되였다. 그 역시 부모없이 자라다나니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조차 변변히 쓸줄 몰랐으나 남새장사요령에 대해 말하는것을 보면 머리가 상당히 비상하였다. 사리도 밝고 처자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나는 그와 접촉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우리 공화국의 조국통일방안에 대하여, 또 공화국의 현실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그런 과정에 《반공》교육에 쩌들었던 그도 우리 공화국에 대하여 옳바른 견해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일반범들과 대상하는 과정에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감옥이란 모든것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보다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투쟁무대이며 또 그 투쟁은 참된 혁명가라면 누구나 스스로 맡아나서야 할 의무라는것을 새롭게 자각하게 되였다. 절망속에 들어왔던 감옥에서 나는 또다시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되였다. 그 희망은 비록 감옥안일지라도 나에게 투쟁의 미래가 있고 삶의 보람이 있다는 확신에서 오는것이였다. 나는 감옥생활 전기간 그 미래가 보다 락관적으로 다가오는것을 보았다. 날이 갈수록 남조선인민들의 의식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특히 동유럽사회주의진영이 붕괴된후 남조선인민들은 의연히 주체의 사회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유일초대국》이라 자처하는 미국을 쥐락펴락하는 우리 공화국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북이 그 어떤 대국들의 《위성국》인듯이 력설하던 위정자들의 궤변이 얼마나 위선적인것이였는가를 똑똑히 알게 되였던것이다. 더우기 그후 우리 공화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반공》선전의 허위성이 더욱 적라라하게 드러나게 되였다. 남조선인민들의 의식변화는 력사의 필연이였다. 반미자주화, 반파쑈민주화를 위한 인민들의 줄기찬 투쟁과 감옥안에서의 피어린 싸움은 서로의 지지와 고무속에 적지 않은 열매를 맺게 되였다. 비록 엄격한 검열 등 심한 제한을 받는것이긴 해도 외부와의 서신교환, 도서구매 등을 실현할수 있은것은 결코 저절로 찾아든 《복》도 아니였고 위정자들의 《선의》의 결과는 더욱 아니였다. 파쑈와 독재에 굴하지 않았던 혁명가들과 인민들이 투쟁속에 흘린 고귀한 피의 값높은 전취물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로서는 먼 앞날의 일이였다. 아직은 1980년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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