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나의 추억은 뼈속깊이 스며들던 추위 그리고 무덤속같은 적막, 이런것으로 이어진다. 어느날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나는 온몸이 쑤셔나는 아픔과 추위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인지, 아니면 밤인지 전혀 알수 없게 밀페된 작은 공간이였다. 나는 그 공간의 여기저기에 얼룩진 피자욱들을 보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적들의 《대공수사반》에 끌려온것을 의식했다. 그러자 내가 며칠사이에 겪은 일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내가 여기로 이송되여오자 즉시 심문을 들이대기 시작하였다. 세놈의 수사관이 교대로 심문하였다. 자기들은 해방후부터 수많은 혁명가, 애국자들을 심문하고 처형한 경험이 있다고 자랑삼아 뇌까린 놈들은 나를 한잠도 재우지 않고 고통을 주었다. 나는 그자들에게 처자들의 본명조차 말하고싶지 않았다. 어찌 이 손으로 사랑하는 처와 자식들의 이름을 그 더러운자들의 문건에 써넣는단 말인가. 나는 비록 체포되였어도 조국의 통일을 위한 길에 나선 혁명가라는 긍지와 자부심에 넘쳐있었다. 적들은 나의 진술이 모두 허위라는것을 알자 리성을 잃고 날뛰였다. 그자들은 나를 건장한 세놈의 폭력경관들에게 넘기였다. 세상살이를 하느라고 배웠다는것이 사람을 치는 일밖에 없는 그 가련한 망나니들은 일거리가 생긴것이 만족한듯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순간에 나에게 일격이 가해졌다. 내가 앞으로 엎어지자 놈들은 나의 등을 딛고 올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리고는 다시 일으켜세우더니 련속 치고 받고 하면서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이봐, 여기선 죽어서 나가든가 아니면…》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서 한마디 대답도 들을수 없었다. 또다시 군화발이 등으로, 머리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바로 그때 나는 정신을 잃었던것이였다.… 나는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오늘이 며칠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하나, 둘 손을 꼽아보던 나는 이날이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탄생일이라는것을 알았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들은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충실성이 누구보다 높아야 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던 장군님의 영상이 눈앞에 어려왔다. 그리고 해마다 이날이 오면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칠 결의를 다지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통일의 길에 나선 혁명가의 지조를 굽히지 않으리라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때 경상북도 경찰국장이라는자가 수사관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나를 보자 마치 뜻밖이라는듯이 수사관들에게 몇마디 추궁을 하는것이였다. 《당신은 어차피 우리 요구에 응하게 될거요. 그럴바엔 차라리 순순히 말을 듣는게 낫지 않겠소?》 그자는 내가 요구한다면 북으로 보내줄수도 있다고 하며 생각을 잘해보라고 하는것이였다. 《그저 그 손으로 글만 한장 잘 쓰면 되는건데…》 나는 말없이 나의 오른손을 꽉 틀어쥐였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 손을 바라보았다.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놈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나의 마음속에서 동요가 일어나고있는것으로 짐작한 모양이였다. 그자가 나간 후에도 나는 오래도록 그렇게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동요때문이 아니였다. 그 손과 이어진 뜻깊은 추억이 가슴에 파도쳐오고있었다. 대성산유원지건설장에서 우리 대학생건설자들의 흙묻은 손을 허물없이 잡아주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안겨왔다. 나는 그날 수령님께서 건설장을 떠나실 때까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꽉 틀어쥐고있었다. 수령님의 그 따뜻한 체취를 영원히 간직하고싶었던것이다. 그로부터 얼마후 또다시 건설장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나는 그 손에 붉은기를 들고 서있었다. 그후에는 교단에서 수령님의 사상과 리론을 제자들에게 새겨주기 위해 쳐들던 손, 회의장들에서 당의 로선과 정책을 지지관철하자고 엄숙히 쳐들던 손이였다. 그 손을 결코 변절로 더럽힐수 없었다. 며칠후 나는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압송되였다. 여기에서 수많은 남조선의 애국자들이 가혹한 고문과 심문끝에 죽거나 병신이 되여 검찰에 송치된다. 서울대학교의 박종철학생이 무참히 고문당하던 끝에 학살된 곳도 바로 이곳이였다. 내가 전혀 전향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놈들은 또다시 고문을 들이대였다. 고문대에 반듯이 눕혀놓고 온몸을 꽁꽁 묶은 다음 젖은 수건을 코에 올려놓았다. 숨을 쉬려고 입을 벌리자 놈들은 물주전자의 물을 마구 쏟아부었다. 마시지 않으려고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였다. 련일 귀축같은 고문이 가해졌다. 나는 하루의 고문이 끝날 때마다 적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이제 또 어떻게 싸울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군 하였다. 그럴 때면 나의 눈앞에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이 어리여왔다. 수령님께서 적과 싸우는 전사에게 힘을 주시는것만 같았다. 나는 끝내 고문을 이겨냈다. 적들은 할수없이 나를 검찰에 넘기였다. 그리하여 나는 서울교도소로 옮겨졌다. 이곳은 서대문형무소의 후신으로서 이 나라 수난의 력사, 통한의 력사, 투쟁의 력사가 새겨진 곳이였다. 이 교도소의 력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1907년에 이른다. 《정미7조약》이 날조된 후 경시총감으로 서울에 부임되여온 마루야마라는 왜놈의 첫 《실적》이 바로 서대문형무소를 만든것이였다. 그놈은 온 조선땅을 감옥으로 만들고 저항하는 조선사람들을 모두 그 감옥에 넣고싶었던것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혁명가들과 애국자들의 붉은 피가 스며있었다. 항일투사 권영벽, 리제순동지들이 《조선혁명 만세!》를 부르며 최후를 마친 곳이였으며 그후 김종태, 최영도동지들이 영생의 길을 걸어간 곳이였다. 《3. 1의 꽃》으로 불리우는 나어린 류관순이 체포된 순간부터 최후의 날까지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는 곳도 바로 이곳(당시는 서울감옥)이였다. 일제는 패망하였으나 미제의 수족으로 변신한 친일역적들이 감옥의 열쇠를 넘겨받았다. 이 마루야마의 《상속자》들은 저자신들이 들어가야 했던 이 감옥에 또다시 애국자들을 가두며 범죄의 력사를 이어왔다. 남조선의 감옥들이야말로 세계에 다시 없을 민족적수치의 상징이였다. 나는 2사의 죽산 조봉암선생이 갇혀있던 방에 감금되였다. 고즈넉한 정적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있느라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수많은 애국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올듯싶고 거무죽죽한 벽체를 어루쓸며는 금시 그들의 붉은 선혈이 축축히 배여나올듯만싶었다. 그리고 깊은 밤 자리에 누우면 오래전에 떠나간 그들이 모두 모여와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며 자기들의 몫까지 합쳐 끝까지 싸우라고 속삭이는듯싶었다. 나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수령님의 공명정대한 애국애족의 사상을 받들어 조국통일의 길에 나선 혁명가로서 《법정》에 떳떳이 나설것을 결심하였다. 검사를 만나기 전에 놈들은 또다시 말하였다. 《재판에선 형이 확정되오. 공손히 대답만 잘하면…》 나는 이때 《그저 그 손으로 글만 한장 잘 쓰면 되는건데…》 하던 경상북도 경찰국장의 말을 떠올렸다. 쓴웃음을 짓고 검사를 만난 나는 처음부터 주도권을 틀어쥐고 그를 대하였다. 엄중한 범죄니 뭐니 하는 그의 말에 나는 조국통일은 누구도 외면할수 없는 민족의 숙원이며 우리 공화국이 내놓은 조국통일3대원칙은 당신들도 지지하였다, 나의 활동은 오로지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한것이였던것만큼 범죄로는 될수 없다고 단호히 반박하였다. 대답할 말이 궁했던지 검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였다. 나는 미제의 주구가 되여 통일을 위한 인민들의 투쟁을 가로막는것이야말로 가장 엄중한 범죄이며 민족적량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조국통일을 위한 인민들의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검사는 미국식《민주주의》와 소위 《자유민주주의》에 대하여 떠들며 우리 공화국을 비방중상하기 시작하였다. 너무도 상대가 안되는 가련한 인간이였다. 나는 멍청한 그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련속 공세를 들이대였다. 당신은 판단력도 없는 가련한 인간이다. 나의 활동은 응당 민족의 통일을 위한 애국적활동으로 평가되여야 한다. 오늘은 당신들이 부당하게도 나를 심문하고있지만 이제 머지않아 민족이 당신들을 심판하게 될것이다. 잔뜩 기가 질려 두눈만 껌벅거리던 그 사나이의 얼굴에 붉은 반점들이 돋아났다. 이윽고 침방울을 튕겨가며 바보처럼 괴성을 질러댔다. 《당치않은 소리. 난 <법관>이다. 내가 … 사형을 언도할테다.》 드디여 재판의 날이 왔다. 그때 나의 마음은 평온하였다. 온 겨레가 바라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목숨바쳐 싸울 각오를 다지였던 나로서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나는 태연히 《재판정》을 향해 나갔다. 방청석을 둘러보던 나는 흠칫 놀랐다. 나의 재판날자를 어떻게 알았는지 둘째누님이 조카와 함께 방청석에 앉아 수십년만에 나타난 동생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철이 들기 전에는 업어주고 입혀주고 먹여주면서 어머니처럼 돌봐주었고 출가후에도 내가 어려운 고비에 들 때마다 헌신적으로 도와주군 하던 누님이였다. 그 누님의 은혜를 입기만 하고 조금도 보답하지 못한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은 또 누님의 가슴에 큰 상처를 안겨주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나는 누님과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누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동생은 누님과 우리 온 겨레가 통일된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 그날을 위해 이 어려운 길을 걷고있다는것을 리해해주세요.》 나는 그날 《법정》에서 소위 《법관》이라는자들을 향해 그들이 어리석은 기대를 안고 바라보았던 그 손을 쳐들고 추상같이 선언하였다. 나자신으로서도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것인지 알수 없었다. 내가 손성모 개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의 존엄이, 사랑하는 조국이 나에게 이 《법정》을 력사의 진범인들에 대한 심판장으로 만들도록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아래에 그날 나의 최후진술내용을 요약하여 적으려 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나에게 자유를 달라. 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는것은 조선민족이라면 누구에게나 응당한 권리이며 의무이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녘땅을 강점한 미제는 민족분렬의 장본인이다. 민족을 분렬시키고 나라의 절반땅에 식민지통치를 실시한 미제에 의해 강요된 불행과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수 있겠는가. 이 땅에 태여난 남아로서 만고의 이 죄를 어찌 용납할수 있단 말인가. 하여 나는 정의의 총을 잡고 미제와의 싸움에 나섰으며 전쟁이 끝난 후 공화국에 영주하게 되였다.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여 배움의 꿈을 이룩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되였다. 행복이 커갈수록 미제의 발굽밑에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짓밟히는 나의 동포들의 고통을 외면할수 없었다. 이것이 어찌 죄로 되겠는가. 당신들도 아다싶이 김일성주석께서 제시하신 조국통일의 3대원칙은 북과 남이 합의한 가장 공명정대한 조국통일방침이다. 그러므로 당신들, <법관>들이 자신을 조선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응당 나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나에게 죽음을 달라.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없다. 나는 비록 죽는다 해도 미제는 불피코 이 땅에서 쫓겨나고 조국은 통일될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내 비록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해도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통일의 원쑤들과 싸울것이며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통일 만세!>를 부르며 나의 생을 아름답게 장식할것이다. 당신들은 그때 나의 얼굴에서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 놈들은 끝내 나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살이 유들유들한 군턱을 부르르 떨며 《사형!》 하고 소리치는 《재판장》의 행위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재판은 하나의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사형은 이미 기정사실이라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다만 그때 내가 가장 통분하게 생각한것은 통일의 날까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전사로 싸우려던 맹세를 더는 지킬수 없게 되였다는것뿐이였다. 이때 방청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님이 졸도하였던지 조카가 《어머니-》 하며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조카에게 마음속으로 이야기하였다. 《이 삼촌은 죄인이 아니다. 너도 이 부정의의 현실을 반대하여 싸워주기 바란다.》 나는 《재판정》을 떠났다. 주위에서 술렁거리던 소음이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이어 경관들의 구두발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나는 끝없는 적막의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내 인생에 지금껏 경험해본적 없는 미지의 세계가 다가오고있었다. 참다운 자유와 삶을 위하여 내가 선택할 다른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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