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안해

 

 

내가 결혼한것은 1961년 12월이였다.

어려서 고향을 떠난 후 늘 홀로 살아온 나로서는 결혼문제에 대하여 심중히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동무들은 나에게 배우자선택의 중요성을 력설하면서 마음씨 곱고 리지적이며 사랑이 가는 대상을 골라야 한다, 누이나 어머니처럼 정이 드는 녀인을 택해야 한다고 조언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벗이 되고 동지가 되여줄 그런 녀성을 만나고싶었다.

나에게 드디여 선택의 날이 오고야말았다.

대학시절 늘 가까이 지내던 한 동무가 자기의 외사촌누이동생 방희동을 소개하여주었다. 6남매의 막내이고 나이는 20살인데 독학으로 농산기수시험에 응시하였다고 한다. 8과목중 6과목은 이미 합격하였으니 이제 2과목만 응시하면 전문학교졸업정도라는것이였다.

그후 인차 처녀를 만나보았다. 특별한 미모를 갖춘것은 아니였지만 그에게는 나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순박하고 성실해보이는 얼굴에 떠오르는 부드러운 미소에 나는 정이 들었고 결국 그와 일생을 약속하게 되였다.

나는 오늘도 내가 어째서 그 미소에 대번에 반해버렸던것인지 딱히 알수가 없다. 여하튼 분명한것은 내가 사람을 잘못 만나지 않았다는것이다.

결혼후에도 안해는 언제나 그 웃음비낀 모습으로 나를 대해주었다. 내가 결혼후 첫 생일을 맞던 밝은 달밤의 미소는 영원히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새겨졌다. 남녘의 감방에 있을 때도 가정에 대한 나의 추억은 늘 그 미소로 시작되여 그 미소로 이어지군 하였다.

우리는 나라에서 배정해준 2칸짜리 새 집에서 첫 살림을 시작하였다. 처음 얼마동안은 부족한것이 많았다. 밥상도 없이 신문지를 깔아놓고 식사해야 하였다. 하지만 난생처음 가져본 새 집에서의 생활은 이를데 없이 행복하였다. 젊고 정열에 넘쳐있던 우리 부부에게 그까짓 살림살이도구 같은것은 문제로도 되지 않았다. 부족한것은 많아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나를 도와주는 안해가 나에게는 정말 어머니같기도 하고 누이같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그날 저녁 안해는 나에게 전에없이 푸짐한 식사를 차려주었다.

웬 일인가 하여 물으니 그날이 바로 내 생일이라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수저를 들지 못하였다. 안해는 음식을 들 대신 자꾸만 눈굽을 훔치는 나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것은 지난날의 가슴아픈 추억때문이였다. 풍성한 생일상을 대하고보니 불쑥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것이였다. 나에게는 우리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녀인이였다고 생각되였다. 어머니는 집안의 무남독녀였다. 무남독녀라면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것이 보통이지만 어머니는 사랑보다도 가난한 집 자식에게 차례지는 온갖 설음을 다 겪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15살에 자기보다 20살이상이나 우인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일년 열두달 제사가 없는 달이 없었다. 제사는 그야말로 《고역의 늪》이였다. 이날에는 반드시 쌀밥을 지어야 하므로 어머니는 쌀 한되를 얻기 위해 부자집에 가서 며칠간 밭김을 매주었다. 우리 집 밭에는 호랑이 새끼칠 정도로 풀이 무성해도 부자집 밭김부터 매주어야 하였다. 그러다보니 젊은 어머니의 몸에서는 늘 땀내가 지독하게 풍기였다.

그토록 어려운 세월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의 생일만은 잊지 않고 무엇이든 색다른 음식을 해주군 하였다. 바다에 나가 바지락을 캐여 죽을 쑤어주기도 하고 그것마저 할수 없으면 밀개떡을 쪄주군 하였다. 밀개떡이란 밀기울로 만든 떡이다. 지금이라면 누가 그런것을 먹으랴만 그때 나에게는 으뜸가는 별식이였다. 내가 그 떡 아닌 《떡》을 좋아라고 먹을 때 어머니는 피눈물을 삼키였다. 어느때인가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아주며 《성모야, 명년엔 꼭 네가 좋아하는 시루떡을 쪄주마.》 하고 울먹이며 말하였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를 위로해주고싶었다.

《엄마, 왜 울어? 난 엄마가 쪄주는 밀개떡이 제일 맛있어.》

어머니는 언제 한번 음식을 밥상에 놓고 드신적이 없었다. 음식그릇을 부엌바닥에 놓고 대충 들군 하였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스러움에 후날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광목천을 사서 조선옷 한벌을 해드린적 있었다. 무명옷도 제대로 입어보지 못한 어머니에게 광목천은 부자들의 비단에 비길바가 아니였다.

한평생 고생만 해오신분이였기에 나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대학생이 되였을 때 어머니에게 대학생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드리고싶었고 우리가 건설한 대성산유원지에서 함께 들놀이를 해보고싶기도 하였다. 그러면 어머니가 춤을 추실것만 같았다. 아니, 시루떡 한번 실컷 먹이는것이 소원이였던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을 나온 기쁨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릴것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대학을 나온것도 대학교단에 선것도 안해를 맞은것도 모르고있을것이다.

분렬의 세월을 끝장내지 못한다면 어머니는 생사여부도 모르는 이 아들을 부르며 눈물속에 여생을 마칠것이였다. 그래서 울었다. 안해가 고맙고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 나는 울었다. 안해는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듯 술을 한잔 권하였다.

《오늘은 기쁜 날인데 이것저것 생각지 마시고 유쾌한 마음으로 한잔 드세요.》

나는 그날 안해에게 밤새도록 나의 어머니와 나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당한 수난의 력사를 이야기하면서 조국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자고 말해주었다.

안해는 그날 나에게 안해로뿐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을 동지로 되여줄것을 약속하였다.

생활과정에 안해에게는 하나의 지론이 생겼는데 그것은 《살림하는 녀자는 한시도 손발이 쉬는적이 없어야 한다.》는것이였다. 녀자의 손발이 편안하면 생활에 뭔가 빈구석이 생긴다고 안해는 늘 말하였다. 안해의 말없는 수고의 대가로 나는 가정사에 신경쓰는 일이 없이 자기 사업에 전념하였고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소년단조직생활에서도 언제나 모범이였다. 하지만 안해는 거기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피복공장에서 녀맹분초급단체위원장사업을 하면서도 공장대학공부까지 하였다. 공장에서 대학이 있는 본궁화학공장까지는 멀었기때문에 강의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안해는 일이 끝나면 늘 달리다싶이 하였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두 강의가 끝난 다음 집에 와서는 또 부랴부랴 밥을 짓고 부엌일을 하였다. 어찌 그뿐이였으랴. 남편과 아이들 시중이며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하면서도 안해는 낯빛 한번 흐린적이 없었다. 나와 만났을 때의 그 웃음비낀 첫 모습이 다난한 가정생활속에서도 흐려지지 않았다. 안해는 생활속에서 더 강해졌다. 웃음비낀 안해의 모습은 자신을 이기며 성장해가는 강한 녀인의 모습이였다.

내가 적구의 감방에서 투쟁하던 긴긴 나날에 안해는 기약없는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야 하였다. 언제인가 내가 읽은 어떤 소설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그래. 기다린다는것은 어려운 일이야.》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 말의 깊이를 결코 헤아릴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겪을수 있는 어려운 일중에 가장 어려운 일인듯싶다. 안해는 기다렸다. 만약 참고 견디는것이 기다리는 일의 전부라면 결국은 참아내지도 견디여내지도 못하고말았을것이다.

내가 조국에로 돌아온 후에 알게 된것이지만 안해는 아들딸 4남매를 내가 바라던대로 당에 충실한 자식들로 키워나가는데 온갖 정력을 다 바치였다. 한번은 맏이가 놀음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한적이 있었는데 안해는 가차없이 매를 들었다고 한다.

《네 아버지가 알면 무엇이라고 하시겠느냐?》

매를 안길 때 사실 눈물을 흘린것은 안해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맏이는 아예 딴 사람이 되였다고 한다. 공부도 잘하고 조직생활도 잘하여 사로청중앙위원회(당시)의 표창도 받았으며 자기의 모범으로 동생들을 이끌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다른 집 아이들보다 일찌기 철들어갔다. 둘째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재학시절 학습에서 첫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으며 동평양제1고등중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막내는 평양의학대학에 가서도 공부를 잘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상업대학에서 공부하였는데 역시 학습에서나 조직생활에서 누구에게 뒤진적이 없었다고 한다.

당의 은정속에 우리 아들딸 4남매는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로동당원으로 자라났다. 지금 그애들은 사회의 어엿한 일군들로 자라났으며 한가정의 가장이 되고 주부가 되였다. 나는 지금도 끌끌하게 자라난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 땅의 천만자식을 다 맡아안아 키워주고 그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보살펴주는 우리 당의 고마움에 대하여 생각하군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식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오직 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한 한길로 곧바로 걷도록 키워온 안해의 그 수고에 마음속으로부터 감사를 드린다.

세월은 흐르고 모든것은 변하기마련이다. 인생에는 나이가 얹혀지고 백발은 어차피 찾아오고야만다. 하지만 영원한것이 있다. 그것은 참다운 사랑이다. 내가 조국의 품에 다시 안기던 날 안해는 예전처럼 그렇게 웃고있었다. 비록 머리에는 흰서리가 내리였어도 나를 바라보는 안해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가 조국을 위해 한생을 바쳐갈 약속을 하던 달빛밝은 그밤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내가 오랜 세월 상상을 초월하는 모진 고통을 이겨낼수 있었던것은 죽음의 힘보다 내 마음의 사랑이 더 강했기때문이며 그 사랑은 안해의 웃음이 나의 마음속에 심어준것이기도 하였다. 그 웃음에는 조국에 바쳐가는 나의 인생에 대한 사랑이 비껴있었고 격려가 비껴있었다. 내 만일 그 웃음의 진정한 의미를 잊었더라면, 하여 가면쓴자들의 거짓미소에 눈길을 돌리였더라면 안해의 얼굴에는 가장 쓰라린 슬픔의 눈물이 흘렀으리라. 나는 한 녀인의 남편으로서 안해의 그 웃음을 지켰다. 나의 삶전체가 그 변함없는 사랑의 미소에 비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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