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조국의 품속에서
새로운 탄생의 시절
삶의 류랑기를 거쳐 드디여 보람찬 삶의 첫 기슭을 《편력》해온 나의 펜이 소년시절부터의 꿈이 실현된 대학시절에 이르렀다. 가슴이 환희로 뒤설레이기 시작한다. 이 환희는 어디서 오는것인가. 문득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이 있다. 몇해전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새 대학졸업증을 받던 날에 있은 일이였다. 조국보위와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초소에서 사업하는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들이 한날한시에 새 졸업증을 받던 이날 나는 20대 청춘시절에로 되돌아간 심정이였다. 그날 저녁 나의 대학동창들과 많은 사람들에게서 축하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 또한 연방 전화번호를 돌리며 동무들을 찾았다. 그런데 내가 이제는 만날 사람은 다 만났다고 생각하고있을 때 한 전우의 아들이 뜻밖의 소식을 보내왔다. 조국통일투쟁에서 희생된 자기 아버지도 새 졸업증을 받았다는것이였다. 그만 나자신도 잊을번 한 전우, 조국의 품으로 함께 오지 못한 전우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새 졸업증을 받았다는 소식은 나의 가슴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새 졸업증은 결코 큰 대학의 과정안을 마치였다고 주는 증서도, 특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문을 나설 때의 졸업증은 졸업생모두가 받을수 있겠지만 졸업후에 수여해준 새 졸업증의 의미는 혁명의 먼길을 걸어온 우리 로세대들에게 있어서 류다른것이였다. 대학교문을 나설 때 조국이 우리앞에 제시해준 새 과정안, 즉 신념, 량심, 헌신의 한생을 앞으로도 김일성종합대학의 졸업생답게 혁명가, 애국자, 충신으로 살기 바라는 기대와 믿음이 담긴 증서였다. 새 졸업증의 의미를 새겨보며 나도 이 영광의 증서를 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술을 잘 마시지 않았지만 그날만은 가족들과 동무들이 부어준 축배를 들며 지나온 나날들을 돌이켜보았다. 대학졸업후의 생활을 《제2의 대학과정》이라고 한다면 인생의 나날에는 한발을 잘못 짚은것으로 하여 그 과정을 《중퇴》나 《출학》으로 마치게 될 그런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이 시련의 고비들을 넘어 오늘의 영광을 맞이하였다. 그날 나와 축배를 들던 한 동무가 좌중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대학의 졸업생이라는 자각을 귀중히 간직한 사람은 인생의 과정도 훌륭히 빛낼수 있는거요.》 순간 가슴이 뭉클해났다. 옳은 말이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인생의 영광은 이미 대학시절에 마련된것이였다. 마음속에 새로운 삶의 리정표가 세워지던 대학시절을 떠나 어찌 오늘의 영광을 생각할수 있으랴. 대학시절은 과학적지식만을 배운 나날이 아니였다. 그 나날은 두분의 위대한 스승이신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인생의 정신적량식과 신념의 초석을 다지며 주체형의 혁명가, 지식인으로 새롭게 태여나던 잊지 못할 나날이였다. 하여 나의 추억속에서 대학시절은 언제나 새로운 탄생의 행복한 시절로 환희롭게 다가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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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포성이 멎은 조국강토에 삶의 기운이 약동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였다. 전쟁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은 파괴했어도 사람들의 삶의 의욕은 파괴할수 없었다. 오히려 전쟁의 상처를 가시고 파괴된 생활을 복구하여 더 아름답게 꽃피우려는 사람들의 의욕은 더욱 왕성하게 자라났다. 미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자부심은 인민들의 가슴속에 자기 손으로 보다 훌륭한 미래를 창조할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었다. 새들이 둥지를 틀었던 공장의 굴뚝들에서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고 제철소, 제강소들에서 쇠물이 폭포처럼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희망의 노래인양 복구건설의 마치소리가 조국강산에 메아리쳤다. 전선에서는 한해에도 수만명의 제대군인들이 복구건설장들을 향하여 떠나갔다. 이 활기에 넘친 새 생활의 분위기속에서 나의 배움의 열망은 세차게 불타올랐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찾아주시고 인민이 주인된 나라, 수령님께서 전쟁의 불길속에서 그 미래를 설계해주신 우리 조국건설에 지식으로 이바지하는 일군이 되고싶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부모님들과 나의 어린시절부터의 꿈을 실현하는것이였다. 하여 나는 군무의 여가시간을 수학과 외국어 등 공부에 바치였다. 그러던중 1956년 10월 제대명령을 받고 평양에 올라온 나는 한동안 평양제사공장 로동부 부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난생처음으로 해보는 일이라 모든 일이 생소했지만 열심히 배워 얼마후에는 까다로운 공업계획수행월보도 자체로 작성할수 있게 되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중구역에 있는 외국어강습소에 다니며 밤깊도록 공부하였다. 나는 그후 과분하게도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시험을 치게 되였다. 시험과목은 문학을 비롯하여 다섯과목이였다. 다른 과목은 그만하면 자신있게 쳤는데 문학과목이 제일 어려웠다. 몇개의 단어들로 글을 지어야 했는데 그때 나의 글솜씨는 말이 아니였다. 나의 시험지를 받아들던 선생님은 어이가 없는듯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것이였다. 나는 선생님에게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였다. 《선생님, 난 남조선에서 제대로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난 꼭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입학만 시켜주시면 꼭 최우등생이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자못 생각깊은 표정을 짓더니 《꼭 최우등 할테니 입학시켜달란 말이지. 하지만…》 하며 말끝을 흐리는것이였다. 시험이 끝난 후의 하루하루는 백날맞잡이였다. 앉으나서나 생각은 온통 거기에 가있었다. 어느 일요일에는 모란봉에 올라가 멀리 보이는 김일성종합대학교사를 바라보며 대학에 입학하는 공상에 잠겨보기도 하였다. 만약 이번에 입학하지 못하면 다음해에 또 응시해서 무조건 입학하고야말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동무들의 권고에 못이겨 당시의 모란봉경기장에서 진행하는 축구경기를 관람하려고 갔던 나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녀동무가 찾는 바람에 그와 마주섰다. 《이게 뭔지 알아맞춰보세요.》 나는 그가 쳐들어보이는 종이봉투를 보고 얼결에 《새 지령서인가?》 하고 되물었다. 그는 깔깔 웃음보를 터뜨리며 그것을 내 손에 덥석 쥐여주었다. 《아이참, 대학입학통지서란 말이예요.》 나는 순간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나 봉투속에 곱게 접혀있는 흰종이를 뽑아들었다. 《입학통지서》라고 쓴 글자들이 눈에 띄는 순간 나는 미처 고맙다는 인사말도 못하고 어디론가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경기장을 나와 도로를 건느고 숲을 지나고 강변을 따라서 달리고 또 달리였다. 그렇게 그냥 달리고싶었다. 물론 나에게는 나를 맞이해줄 집도, 함께 기뻐해줄 친혈육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아버지며 어머니, 형님, 누이들을 상상해보며 달리고있었다. 상상속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이 아들을 향해 두팔 벌려 마중오고있었다. 그 모습에는 어제는 나라없고 돈 없는탓에 소학교공부도 제대로 할수 없어 고향을 떠났지만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존엄높은 대학에서 공부하게 된 아들에 대한 끝없는 축복이 어리여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내가 대학생이 되였어요.》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리웠다. 눈물을 훔치고 머리를 드니 어버이수령님의 인자하신 영상이 어리여왔다. 태양처럼 환한 그 영상을 우러르며 나는 한생에 눈물밖에 남긴것이 없는 한갖 빈농의 자식에 불과한 나를 나라의 가장 큰 대학에서 공부할수 있게 해주신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 고마움의 큰절을 올리고 또 올리였다. 1957년 9월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력사과에 입학하였다. 나는 그날 난생처음으로 대학교복을 입고 오래동안 기숙사호실의 거울앞에 서있었다. 교복에서는 휘장이, 모자에서는 종합대학모표가 눈부시게 반짝이고있었다.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을 보느라니 소년시절의 어느날 교복입은 동무들을 보기가 부끄러워 나무단밑에 숨던 모습이며 학비를 벌기 위해 껌이며 담배가 든 목판을 메고 헤매던 모습, 몇푼의 신문대금때문에 뺨을 맞던 모습들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오늘의 내 모습을 고향의 부모형제, 이웃들과 동무들에게 보여주면 얼마나 좋으랴.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대학생들에게 베푸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이 얼마나 따사로운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있었다. 나라에서는 우리에게 장학금은 물론 교과서와 학습장, 지어 속옷과 양말, 장갑, 신발 등 학용품과 생활필수품에 이르기까지 부족한것 없이 보장해주었던것이다. 나는 친부모도 주지 못한 사랑을 다 안겨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은혜에 기어이 보답하리라 결심하고 피타게 공부하였다. 하여 내가 제일 어려워했던 과목을 한 학기동안에 학급적으로 제일 우수한 수준에로 끌어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1958년 3월 우리 대학생들은 평양의 아름다운 대성산지구에 훌륭한 인민의 문화휴식터를 꾸릴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대성산유원지건설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 나날은 내 인생에서 일생일대의 가장 크나큰 영광과 행복이 수놓아진 행운의 시절이였다. 이때 나는 여러차례에 걸쳐 유원지건설장을 찾으신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였던것이다. 내가 처음 수령님을 몸가까이에서 뵈온 날은 1958년 4월초의 어느날이였다. 이날 우리는 학급에 제시된 작업과제를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도를 토론하고있었다.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있는데 누군가가 《동무들! 수령님께서 오셨소.》라고 소리치는것이였다. 우리는 너무도 뜻밖의 일에 한순간 어리둥절해있었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하는 우리들의 흙묻은 손을 잡아주시며 일을 참 많이 하였다고 치하해주시는것이였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시였다는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삽시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의 건강과 식생활정형을 료해하시고 일군들에게 대학생들의 생활을 잘 돌봐줄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고나서 우리 대학생들은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싸움도 잘했고 오늘은 공부도 복구건설도 무엇이든지 잘한다고 하시면서 청년들은 누구보다 일을 많이 하여야 하며 그것은 나라의 번영과 중요하게 관련된다는 뜻깊은 믿음도 안겨주시였다. 그리고 대성산은 선조들이 남긴 귀중한 유적이 많은 유서깊은 곳으로서 인민들의 휴식터로서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는데도 좋다고 하시면서 때문에 이렇게 의의가 큰 대성산유원지건설공사를 종합대학학생들에게 맡기였다고, 앞으로 대성산을 찾는 우리 인민들은 이 유원지건설에 자기들의 온갖 지혜와 정력을 다 바친 종합대학학생들을 잊지 않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은 인민의 아들딸인것만큼 혁명을 위하여, 당과 조국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여야 한다고 따뜻이 고무격려해주시였다. 우리는 수령님께서 안겨주신 믿음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1211고지돌격조》, 《청년근위대돌격조》를 뭇고 치렬한 전투를 벌려 한달도 못되는 기간에 소문봉, 을지봉, 장수봉을 거쳐 옛성터를 감도는 40여리길을 건설하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로부터 얼마후 대성산유원지도로개통식에 나오시였다. 그이께서는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우리들에게 답례를 보내시고나서 도로입구에 서시여 학생들이 다리도 잘 놓고 길도 훌륭하게 닦았다고, 전문일군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날 개통식이 끝날무렵에 안개비가 내리였는데 수령님께서는 우산을 가져다드리는 일군에게 학생들이 비를 맞고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 우산을 쓰겠는가고 하시며 사양하시였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격정을 금치 못해하며 수령님을 우러르고있는데 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의 한결같은 소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평양시민들을 위한 유원지인데 개통을 선포하는 테프를 주인인 동무들이 끊어야지 자신께서 끊어서야 되겠는가고 하시며 끝내 시의 일군이 테프를 끊도록 하시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학생들이 땀흘려 닦아놓은 이 길을 어떻게 차를 타고 가겠는가고 하시며 우리 동무들의 손을 잡으시고 함께 걸으시였다. 한참이나 걸음을 옮기시여 소문봉기슭에 이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시며 우리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주시였다. 정녕 꿈같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붉은기를 들고 맨 앞에 앉아 사진을 찍는 영광을 지니였다. 그 사진은 1958년 5월 1일부 《로동신문》에 게재되였다. 그날 나는 온종일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보이는건 산과 뙈기밭이 고작인 벽촌마을에서 자라온 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분을 몸가까이에서 뵙고 분에 넘치게도 기념사진까지 찍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같이 이루어졌으니 이날은 내가 복중의 복을 받은 날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크나큰 사랑을 받아안은 우리들은 우리 인민들에게 행복한 삶을 안겨주시려 한평생을 바쳐가시는 수령님의 뜻을 기어이 실현하려는 열의를 안고 총돌격전을 벌려 많은 기일이 걸려야 한다던 작업과제를 나흘동안에 수행하는 놀라운 기적을 창조하였다. 여름방학때 우리 력사학부 학생들은 송도원해수욕장에서 즐거운 휴식의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아름다운 해수욕장에서 동무들과 마음껏 해수욕을 하느라니 나에게는 어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것이였다. 우리 고향에도 해수욕장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자들의 유흥장이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어느 구석에서 물장구나 치다가 부자집 아이들의 놀림을 받으며 누더기같은 옷을 걷어안고 쫓기듯 돌아오군 하였다. 나는 오늘의 이 행복을 고향사람들과 함께 누리고싶었다. 나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는 이 행복한 땅에서 우리 겨레모두가 함께 살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일을 하리라 다짐하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대성산유원지는 종합대학에서 맡아 훌륭히 건설할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계속 힘찬 투쟁을 벌렸으며 그 나날에 또다시 여러차례 수령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였다. 1960년 4월 어느날이였다. 그때 우리 학급은 중앙동물원 맹수사입구에서 정리작업을 하고있었다. 땀으로 온몸을 흠뻑 적시며 일에 열중해있던 나는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지는것 같은 느낌에 웬 일인가 하여 머리를 쳐들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태양처럼 밝은 웃음을 지으시고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는것이 아닌가. 건설장에서는 일시에 만세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나도 동무들과 함께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우리들과 허물없이 무릎을 마주하시고 사랑하는 자식들과 이야기하시듯 다정한 어조로 우리 당이 5개년인민경제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한데 기초하여 1961년부터 7개년인민경제계획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데 대하여서와 앞으로 우리 조국의 전망이 더욱 휘황찬란한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우리 대학생들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잘하여 모두가 민족간부로 튼튼히 준비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어 수령님께서는 당시 남조선정세와 나라의 통일문제에 대하여서도 밝혀주시였다. 그때로 말하면 남조선에서 4월인민항쟁이 거세차게 벌어져 리승만독재《정권》이 꺼꾸러진 직후였다.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그이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에 온 정신을 기울이였다.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강력한 투쟁에 의하여 리승만괴뢰도당이 거꾸러졌다고 하시면서 이것은 남조선인민들의 커다란 승리로서 미제의 식민지통치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제는 미국놈들이 총칼로도 조선인민을 절대로 굴복시킬수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을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아직도 투쟁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시면서 미제를 첫째가는 투쟁대상으로 삼고 놈들을 남조선에서 몰아내고 매국노들을 때려부시기 위하여 투쟁하며 북반부에서는 사회주의건설을 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동무들이 공부를 더 잘하여 민족간부로 준비되기를 바란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건설장을 떠나시는 어버이수령님을 바래드리는 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새없이 흘러내리였다. 실로 대성산유원지건설의 나날은 우리 조국을 인민들이 행복하게 잘사는 부강한 사회주의락원으로 일떠세우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원대한 뜻을 깊이 새겨안은 뜻깊은 나날이였다. 뿐만아니라 우리 종합대학학생들이 과학기술인재로서뿐아니라 나라의 민족간부로, 혁명의 역군으로 빈틈없이 준비해나가기를 바라시는 수령님의 기대에 기어이 보답할 결의에 넘쳐있던 무한한 열정의 시절이였고 잊을수 없는 성장의 나날이였다. 그런데 복은 홀로 온다지만 나에게 차례지는 행복우에 또 다른 행복이 겹칠줄을 누가 알았으랴. 1960년 9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혁명활동의 자욱을 김일성종합대학에로 옮기시였다. 모두의 관심이 그이께로 쏠리였다. 그이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백두의 천출위인에 대한 존경과 흠모심을 불러일으키는것뿐이였다. 입학하신지 얼마 안되였지만 그이의 사상리론적예지와 위인으로서의 품격과 자질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우리들속에서 전해지고있었다. 그이께서는 뛰여난 사상리론가, 령도자로서의 천품과 교원들도 따르지 못할 해박한 지식과 정치적식견을 지니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대학생활에서 특정한 대우를 바라지 않으시고 학습과 학교사업, 사회적활동에서 언제나 모범을 보여주시였다. 내가 그 많은 이야기중에서 특히 큰 감동을 받은것은 어느 한 나라의 한 일군이 경애하는 장군님께 자기네 대학에서 공부하시기 바란다고 청을 드렸을 때 자신께서는 동무들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하신 뜻깊은 말씀이였다. 이 말씀은 우리 학생들모두에게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더 크게 새겨주었고 조선을 위하여 배우려는 결의를 굳게 하여주었다. 누구나 그이를 몸가까이 뵙고싶어 하고 그이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나도 하루빨리 그이를 뵈옵고싶은 열망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대학 본교사로 가던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본교사와 화학부교사사이에 있는 공지에 여러명의 대학생들이 둘러서있었는데 그곳에서 범상치 않은분의 음성이 들려왔던것이다. 한발자국 두발자국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다가서던 나의 눈에 환하게 웃으시며 학생들과 담소하고계시는분의 모습이 비껴들었다. 순간 나는 나직이 탄성을 올리였다. 그이의 모습은 분명 어버이수령님모습 그대로이시였던것이다. 나는 그만 자신을 잊고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학생들의 물음에 명쾌한 대답을 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던 나의 머리에는 학급동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온 나라 전체 인민이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굳게 뭉쳐 천리마의 봉화를 높이 추켜들고 사회주의승리를 향해 질풍처럼 내달리고있던 혁명적대고조의 나날에 수령님의 혁명위업을 빛나게 계승해가실 숭고한 사명을 안으시고 김일성종합대학에 불멸의 자욱을 옮기신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대학에 첫 등교를 하신 날 그이께서는 아침노을 피여오르는 룡남산마루에 오르시여 마중나온 교원,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시고 대학의 전경을 굽어보시였다. 일제를 타승하시고 조국에 개선하신 수령님께서 이 땅우에 처음으로 건설해주신 대학이 바로 김일성종합대학이였다. 새 조국건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건만 나라의 국고는 텅 비다싶이 한 형편이였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민족간부양성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보시고 땅을 분여받은 농민들이 나라에 바친 애국미를 모두 종합대학건설에 아낌없이 돌려주시였다. 근로인민의 아들딸들을 나라의 역군으로 키워 이 땅우에 자주의 삶이 꽃핀 락원을 일떠세우시려는 우리 수령님의 사랑으로 솟아난 대학을 바라보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룡남산마루에 오르니 수령님의 높은 뜻을 배워 조선혁명을 책임진 주인이 되리라는 결심이 더 굳어진다고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조선혁명을 책임진 주인이 되시여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빛내여가실 맹세를 담아 시를 지으시였다고 한다. 그 시가 바로 오늘도 불후의 고전적명작으로 조국강산에 울려퍼지고있는 《조선아 너를 빛내리》였다.
해솟는 룡남산마루에 서니 삼천리강산이 가슴에 안겨온다 이 땅에서 수령님 높은 뜻 배워 조선혁명 책임진 주인이 되리 아 조선아 너를 빛내리 …
경애하는 장군님을 우러르며 시의 구절구절을 되새겨보느라니 우리 민족이 이제 또 한분의 위대한분을 모시게 되였다는 크나큰 긍지로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때 나에게는 해방후 한 시인이 위대한 수령님을 칭송하여 지은 시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는 수령님께서는 비록 조용히 오시였으나 사람들은 누구나 그이께서 오신것을 알았다고 하면서 《그이는 가리울수 없는 우리의 빛》이라고 격조높이 노래하였다. 과시 경애하는 장군님은 한없이 검소하시고 소박하신분이였어도 우리 수령님 그대로 우리 민족의 래일을 밝혀주는 찬란한 태양이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을 대학에 모신 남다른 행운속에 우리의 대학시절은 더한층 활기를 띠고 흘러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대학시절에 어버이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깊이 연구하시고 더욱 발전풍부화시키시였으며 우리들모두를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한 주체의 역군들로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록 대학생이시였지만 그이의 비범한 과학적예지와 통찰력에 한걸음한걸음 이끌려 주체과학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령마루를 향하여 전진해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그 위대한 학문의 세계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과학도라는 행복감에 넘쳐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대학생들이 탐구를 해도 환상을 해도 수령님식으로, 우리 식대로 해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한때 적지 않은 학생들은 고전의 명제에 포로되여 우리 민족의 형성시기와 같은 초보적인 문제에 대하여서조차 옳은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교조는 제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바보로 만드는 무지의 병이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은 명실공히 수령님의 혁명사상만이 꽉 들어찬 대학이 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대학생들속에서 《만페지책읽기운동》의 봉화를 지펴주시였다. 《만페지책읽기운동》은 모든 학생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따라배우고 수령님의 혁명사상을 깊이 체득하며 높은 학습목표를 점령하기 위한 운동이였다. 대학에는 어느 사이에 주체의 학습기풍, 경애하는 장군님식의 혁명적학습기풍이 청신한 새벽공기마냥 흐르기 시작하였다. 우리 학생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손길에 이끌려 민족간부로 자랐으며 하나를 배워도 조선혁명을 위해 배우며 주체과학의 령마루를 향해 오르기 시작하였다. 오실 때는 평범한 모습으로 조용히 오시였지만, 오시여서도 평범한 학생복을 입고계시였건만 그이는 결코 평범하실수 없었다. 조용히 떠올라도 그 빛을 감출수 없는 저 하늘의 태양처럼… 그이의 대학시절은 우리 인민의 미래를 밝혀주시고 인류의 행복을 마련해가시던 나날이였다. 지금도 나는 책읽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침이면 옛시절 대학구내의 어디서나 울려퍼지던 《만페지책읽기운동의 노래》를 부르며 서가에 다가가군 한다. 어찌 책읽기뿐이랴. 내가 한생토록 간직해온 많은 습관이 그 시절에 생겨난것이였다. 그것은 언제나 경애하는 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였던 행복한 그 시절처럼 살고싶은 애틋한 소원이기도 하다. 나는 조국의 품에 다시 돌아온 후 추억도 깊은 모교의 룡남산언덕에 다시 올라보았다. 대학교사들이며 놀라운 전변을 이룩한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며 옛시절에 내가 읊었던 그 시를 다시 읊어보았다. 위대한 수령님 그대로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여도 변함이 없고 가리울수도 없는 인민의 빛, 인민의 태양이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나의 삶의 원천에 대하여 묻는다. 그러면 나는 주저없이 대답하군 한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스승으로 모시였던 김일성종합대학시절이 나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다. 내 한생의 모든 의미를 거기서 찾아야 한다.》 나뿐만이 아니였다. 그 시절의 나의 학우들모두가 그랬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많은것에 망각의 그늘이 드리우고 세월의 이끼가 덮이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날들에는 한점의 망각의 그늘도 세월의 이끼도 덮이지 않고있다. 모든것이 나의 기억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그 추억속에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수령님의 혁명사상을 구현한 교수안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들의 모습도 있고 주체과학의 령마루를 점령하기 위하여 낮과 밤이 따로없이 공부하고 위대한 수령님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속에서 새시대의 역군으로 자라나던 학우들의 정열적인 모습도 있다. 그 나날 우리 학급에서만도 많은 동무들이 대학 전기간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나도 그들중의 한사람이였음을 긍지롭게 생각한다. 1961년 8월 25일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증을 받던 날 나는 모란봉에 올라 어머니와 형제들, 친지들이 있는 남녘의 고향땅을 그려보았다. 너무도 가난하고 궁벽하여 대학의 문전에 가본 사람이 한명도 없었던 우리 고향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나라의 가장 존엄높은 대학을 나온 첫 사람이 되였다. 나는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학비를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손성모가 오늘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대학을 졸업합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김일성종합대학의 존엄높은 이름에 욕됨이 없이 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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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에 대한 회고를 마치며 나는 대학시절에는 우리 대학생들이 인생의 먼길을 깨끗한 량심으로 이어가도록 이끌어주시고 새 졸업증을 수여받던 날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비전향장기수들을 영광의 맨 앞자리에 세워주신 우리모두의 자애로운 스승이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 다시한번 삼가 큰절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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