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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조문길은 은연중 마음이 씌여 목장건설자들속에서 진애를 찾아보았으나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목장건설장에 나오던 진애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말했는지 남자들과 같이 통나무를 메나르던 오령감의 딸이 앓는다는 소식이 조문길의 귀에 닿았다. 그는 더럭 걱정이 들었다. 이날 밤 문길은 합숙방의 따스한 장판바닥에 드러누웠으나 마음이 산란해서 좀처럼 잠들지 못하였다. 곁에서는 낮동안에 큰 나무를 찍고 잡관목을 베면서 풀판을 조성하느라 피곤한 사람들이 비좁게 누워 씩씩 달게 자고있었다. 방구석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울었다. 비닐박막을 댄 출입문을 누군가 조심스레 두드렸다. 문길은 어둠속에서 머리맡에 놓아둔 웃옷을 찾아 걸치고 누운 사람들을 다치지 않으려고 발더듬을 해서 문께로 갔다. 문을 연 그는 달이 없어 캄캄한 마당가를 목을 빼들고 살펴서야 토방아래켠에 서있는 사람의 검은 형체를 발견하였다. 《날세.》 《누구라구요?!》 《오령감이라니.》 조문길은 의아쩍어 토방을 내려섰다. 검은 옷차림에 등이 구부정해가지고 마치 두발을 짚고선 곰을 련상시키는 오령감은 반가운듯 문길이한테 바투 다가섰다. 《마침 임자가 나왔구만.》 오령감의 입에서 술내와 담배진냄새가 물씬 풍겼다. 《무슨 일인가요?》 《우리 진애가… 앓네. 열이… 불덩이같아.》 《그래요?!》 불시에 처녀에 대한 사무치는 걱정이 문길의 가슴을 꽉 채웠다. 《목장진료소에 가봤어요?》 《갔댔네. 의사를 깨워 말했더니 해열제가루약봉지를 주더군. 아스피린두.》 《왕진두 가지 않고 어떻게 안다나요?》 조문길이 불안해서 말했으나 오령감은 어쩐지 그닥 급해하는 기색이 아니였다. 《감기가 맞는것 같애. 기침까지 하는걸 보면…》 오령감은 심드렁히 뇌이고서도 우물쭈물하며 그냥 서있었다. 그제야 문길은 딸이 감기정도 앓는것을 가지고 오령감이 왜 자기를 찾아왔을가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오령감이 지체하는 거동을 자기나름으로 해석하고 물었다. 《아바이, 내가 바래드릴가요?》 오령감은 반나마 삭은 이발을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난 무섬증이 나서 바래달라구 온게 아니야. 이 곰령감이 청풍덕산중에서 무얼 겁내겠나. 내 왜 왔는가 하니…》 오령감은 합숙방문쪽을 살피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문길이 임자를 데리러 왔어.》 《나를요?!》 《우리 집에 좀 가자구. 응?》 오령감은 간절히 속삭였다. 《임자가… 싫어하리란걸 알면서두 딸애정상이 불쌍해서 왔네. 딸애는… 밤이구 낮이구 임자를 보구파한다니…》 조문길은 입이 떵 얼어붙었다. 방금전까지 솟구치던 진애에 대한 련민의 정은 당혹감에 사그라들고 겁이 더럭 났다. 무엇을 훔치자고 끌려가기라도 하는듯 심장이 활랑거리고 아래도리가 매시시해났다. 《래일… 낮에 가보겠어요.》 《새까만 밤에 이 늙은걸 혼자 보내겠나?》 오령감은 의뭉스러운 눈을 번뜩이며 문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한순간 문길은 주저했다. 진애한테 가보고싶은 생각이 불같이 치밀었다. 그러나 오령감이 잡아끈다고 언턱삼아 대뜸 따라나서기도 멋적었다. 그는 마지못한척 웅얼거렸다. 《아까는 무섭지 않다구 하더니…》 《임자는 내가 강냉이밭에서 곰을 끈덕지게 붙잡고있었다는걸 알지? 오늘 밤엔 임자를 놓아주지 않고 기어이 끌구갈테네.》 《갈테면 가자요.》 조문길은 배심이 나서 목청을 돋구었다. 방금 산봉우리를 넘어온 쪼각달이 어둠속 고요에 잠긴 청풍덕에 엿물같이 누르끼레한 빛을 던졌다. 오령감은 젊은이를 데리고 앞에서 풀숲길을 찾아나갔다. 문길은 청풍덕을 벗어나 더욱 캄캄한 비탈길에 접어들면서부터 앓는 진애를 어떻게 만날가 하는 걱정에 차츰 발걸음이 떠지였다. 총각이라는게 밤중에 처녀의 집에 가서 어쩐단말인가? 처녀의 머리를 짚어주고 위로의 말이나 몇마디 해주고 오면 되지 않을가.… 문길은 궁리를 짜내여 자신을 위안하기도 하고 떠나온걸 은근히 후회하기도 하면서 허둥지둥 오령감을 따라갔다. 이제 바위투성이언덕을 넘어서면 오령감의 집근처인데 불쑥 어둠의 장막을 헤치고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오령감이 흠칫하고 기침을 깇는데 처녀의 기운없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세요?…》 《진애냐?! 왜 나왔니. 누워있지 않구…》 《열이 좀 내린걸요. 그런데 밤중에 어델 다녀요?》 《응, 저… 목장진료소에 갔댔다.》 오령감은 황급히 조문길의 눈치를 살피고는 딸한테로 바삐 다가갔다. 《감기라더라. 약을 타왔다.》 《같이 온 사람은 누군가요?》 문길은 멀찌감치에 못박혀 서있었지만 진애의 순진한 물음과 변명한듯 웅얼웅얼 주어섬기는 오령감의 나직한 말귀를 알아들었다. 《네가 앓는다니까… 가보겠다구서…》 《어쩌면 아버지는…》 진애는 말꼬리를 흐리였다. 조문길은 오령감이 자기 딸을 위해 억지를 부렸다는것을 알았지만 조금도 싫지 않았다. 일이 맹랑하게 되긴 했어도 진애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뻤다. 《에익! 그럼 너 하고픈대로 해라. 병문안을 온 사람을 쫓아보내려무나.》 오령감은 성이 나서 게두덜거리고 집쪽으로 가버렸다. 늦은 봄밤의 싸늘하고 신선한 대기가 흘렀다. 멀리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조문길은 용기를 내여 발걸음을 뗐다. 처녀쪽에서 더 빨리 다가왔다. 별빛을 담아 광채띤 처녀의 눈동자가 조문길을 면바로 쳐다보았다. 《정말… 미안해요.…》 《아버질 탓하지 마오. 아버지가 옹졸한 나한테 사내담을 주었습니다.》 《!…》 《아픈건 어떻소? 열이 높다고 하던데…》 《고마와요.… 이젠 많이 나았는걸요.》 진애의 목소리는 섬약하게 들렸다. 문길은 청풍덕목장건설에서 남자들 못지 않게 걸싸게 일하던 이 처녀에게 그렇듯 부드럽고 연약한데가 있다는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나은것 같지 않은데… 어디 봅시다.》 문길은 자기로서도 의식하지 못한 용기가 나서 손을 뻗쳐 처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순간 그는 흠칫했다. 처녀의 이마가 불덩어리처럼 뜨거운것이였다. 그는 가슴가득 치밀어오르는 격정에 선뜻 손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거 안되겠군요. 목장진료소에 갑시다.》 《일없어요. 약을 먹으면 나을거예요.》 처녀는 문길의 손을 조심히 잡아 내리우고서도 그 손을 그냥 잡고 놓지 않았다. 처녀의 손은 가늘게 떨렸으나 뜨겁고 다기찬 힘이 느껴졌다. 《저… 문길동무… 우리 아버지를 탓하지 마세요. 성미가 괴벽하구 술을 자주 마시니 그렇지 남을 위해 제걸 아끼지 않는 좋은 분이예요.》 《나도 그런 인정많은분으로 알고있습니다.》 《아버지는 문길동무를 자주 입에 올리군 해요. 칭찬이지요. 부모잃구 외롭게 살면서도 자기 앞길을 개척하겠다구… 의지가 굳센 사람이래요. 부업반로동자들을 집에 보내고 혼자 산막에 남아 고생하더니 장군님을 만나뵈웠다고… 부러워한답니다.》 《그런데 난 사람들의 신망을 얻을만큼 목장일을 잘하지 못하는걸요.》 《겸손하군요. 지휘부마당 속보판에 문길동무 이름이 비는 때가 없더군요. 염소우리 지을 때도 그렇구 풀판조성에서도 이젠 문길동무가 풀박사선생을 대신한다고 해요.》 《청풍덕에 오셨던 장군님의 뜻을 받들자면 아직 많이 배워야 합니다.》 서느러운 산바람이 불어왔다. 나무숲우에서 또랑히 여문 별들이 까닭모를 즐거운 희망을 속삭이는듯 반짝이고있었다. 《문길동무… 난 청풍덕목장이 완공되면… 방목공이 될가 해요. 좋을가요?》 처녀는 속생각을 조심스레 비쳤다. 《좋지 않구요. 우리 함께 일하기요.》 문길은 진애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았다. 처녀의 눈에는 행복감에 겨운 눈물이 가득 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