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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소나기는 번개없는 우뢰를 꾸릉꾸릉 울리며 한바탕 쏟아붓고나서 기운이 진했는지 부슬비로 변했다. 바람은 청풍덕우의 어딘가 허공에서 불고 묵은 솜뭉치같은 비구름이 산봉우리를 스칠듯 낮추 떠갔다. 희벗해지는 구름쪼각사이로 새파란 하늘귀퉁이가 열리면서 한묶음의 은실타래같은 해살이 안개가 걷히는 청풍덕에 흘러내렸다. 산릉선에 있는 오령감의 부대기밭초막에 웅크리고 앉은 조문길은 비를 그은 사람들이 괭이와 삽 같은 연장을 메고서 점심먹으러 줄레줄레 산아래로 내려가는것을 침울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오전내껏 산릉선의 잡관목을 베고 풀밭을 일구었지만 별로 힘들어하는것 같지 않았다. 조문길은 잡풀뿌리를 뽑고 돌을 춰내느라 허리가 뻐근하게 맥이 나고 배가 고팠지만 점심을 먹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 며칠째 풀판을 만드는 일에 돌려진 다음부터 더욱 소외감을 느끼고 말수더구가 적어졌다. 함흥에서 왔던 부업지사람들중에 자기 혼자 청풍덕에 아주 떨어져 낯선 함주군사람들과 같이 일하다보니 서먹서먹하고 외로운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 침울하게 하는것은 청풍덕과 주변산지에 멋진 염소목장을 꾸리고 풀판을 조성하는 이 사변적인 일에서 남들이 알아줄만 한 뚜렷한 자기 몫이 없는것이였다. 방목길을 내고 염소우리와 살림집, 합숙, 젖가공실을 짓는데서도 그렇고 풀판을 만드는 일에서도 그는 아는것이 없고 경험도 없어 그저 설계자와 시공기술자가 시키는 일을 할뿐이였다. 산아래 안개걷힌 청풍덕의 이랑진 풀밭에서는 어저께 풀씨자루들을 자동차에 싣고온 연구사가 사람들에게 풀씨심는것을 가르치고있었다. 최인섭이라는 그 연구사는 일생동안 풀과 풀씨를 연구해서 나라에 공헌하고 얼마전에는 로력영웅이 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부지대의 깊은 산중에서 고생하며 살고있던 그 풀연구사를 장군님께서 찾아주시고 애국자로 온 나라에 내세워주신것이였다. 장군님께서 먼 산골길을 걸어 연구사의 비새는 집에 가셨을 때 그한테는 풀씨자루밖에 아무런 재산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최인섭연구사가 오랜 세월 사람들의 몰리해와 배척을 받으면서 그리고 눈비를 맞으며 산속의 비탈밭을 일구어 풍토순화시킨 그 집짐승먹이풀씨종자를 나라를 부흥시키는 귀중한 재부라고 높이 평가하시였다고 한다. 그리고 넓은 풀판정원과 실험실을 갖춘 멋있는 기와집을 지어주셨다. 숱한 사람들의 축복속에 새집들이 한날 최인섭연구사와 안해는 눈물을 흘리면서 경애하는 장군님께 감사의 편지를 올렸다고 한다. 연구사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할만 한 훌륭한 사람이다. 박식하고 성실하고 헌식적이다. 오늘만 해도 그는 혼자서 이른 새벽에 풀판을 만들 산을 다 돌아보고 문길이네가 아침밥 먹고 올라왔을 때는 종이에 풀판설계를 초벌 다 해놓았다. 그는 풀판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이 괭이질을 해서 잡관목과 잡풀, 독풀들을 매모조리 제거해치우려는것을 보고 방법을 차근차근 일깨워주었다. 그는 산길을 온통 벌거벗기지 않고 정수리에는 잡관목모자를 씌우고 군데군데 있는 침엽수들을 용재로 자라게 그대로 남겨두어 풀뜯어먹은 염소들이 새김질할 그늘을 줘야 한다고 했다. 등고선에 따라 풀판띠를 40~50메터 폭으로 만들고 잡관목을 포함한 나무띠를 6~10메터 폭으로 엇바꾸어 형성해준다. 그래서 큰 나무들과 잡관목숲이 함수림, 그늘림, 토양보호림, 방풍림역할을 하면서 풀판을 보호해준다. 풀판구획의 잡관목은 뿌리채 뽑지 말고 밑그루에서 한뽐되게 올리 벤다. 그래야 흙이 씻겨내리지 않고 풀씨를 안전하게 싹틔울수 있다. 3년쯤 잡관목을 돋는족족 베치우면 더 자라지 못하고 그러느라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땅에 든든히 더덩구가 앉을수 있다. 산등성이와 비탈면, 골짜기생김새에 따라 풀판형태를 정방형, 또는 원형으로 쪽무늬해서 여러가지 재배먹이풀띠를 만들면 앞으로 풀의 질을 갱신하기도 수월하다고 한다. 조문길은 우리 나라 산지에서 풀판을 조성하는 그 방법이 최인섭연구사가 오래동안 직접 풀을 심고 채종하면서 경험으로 체득한것이라는것을 알고 그를 더욱 존경하고 부러워하였다. 청풍덕염소목장에 풀씨처럼 뿌리를 내려야 할 자기는 이제 겨우 연구사가 소유하고있는 풀판조성에 관한 풍부한 지식의 한모서리에 접근한것이였다. 그마저도 얼추 배운 지식이지 풀박사처럼 한알의 풀씨와 한줄기의 가는 풀대를 살붙이처럼 사랑하고 조국강산에 리로운것으로 키워내는 불타는 애국심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였다. 갑자기 그가 올라앉은 초막의 덕대가 무너질듯 움씰움씰 흔들리고 고삭은 새초이영이 뒤켠으로 찌불어졌다. 문길은 떨어질가봐 질겁해서 덕대에 납작 엎드려 자라목을 빼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밀짚모를 쓴 오령감이 갈퀴손으로 초막의 기둥을 잡고 우악스레 흔들어대는것이였다. 《아바이! 왜 그래요?! 이거 사람죽겠어요.》 《엉?! 덕대에 사람이 있었어?! 남의 초막엔 왜 올라가 있나?》 오령감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화를 냈으나 사다리를 타고 덕대에서 엉금엉금 기여내려오는 조문길을 보자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임잔가?… 큰일날번 했구만!》 《비를 긋느라 올라갔댔어요.》 문길은 엉댕이에 묻은 새초부스레기를 툭툭 털며 게두덜거렸다. 《임자가 있는줄 모르구 초막을 허물자구 했네.》 《초막은 왜 허물어요?》 《이제야 부대기밭도 다 풀판을 만드는데 초막이 무슨 쓸모가 있겠나.》 《앞으로 염소방목공들이 나처럼 비를 그을수도 있잖아요.》 《그럼 놔둘가?》 오령감은 괴벽스런 성미에 어울리지 않게 너그럽게 응대하며 누그러들었다. 그리고는 비젖지 않은 초막기둥옆에 퍼더앉아 담배쌈지를 꺼냈다. 문길은 오령감이 자기를 살갑게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고싶어 하는 눈치인것을 보고 그냥 가버릴수 없었다. 그는 담배쌈지를 잡아당겨 마라초를 큼직히 말아주었다. 오령감은 고마운듯 밭고랑처럼 패인 입귀로 웃음지으며 머리를 끄덕하고는 무릎이 나온 바지주머니에서 구식휘발유라이타를 꺼내여 솜씨있게 불을 붙였다. 《임잔 안 피우던가?》 《예.》 《여기 좀 앉게. 요즘 왜 우리 집에 한번도 들리지 않나?》 《신세를 너무 져서…》 문길은 강냉이를 한자루나 가져다 먹은것이 지금도 미안스러웠다. 그때 그는 풀을 뜯기려고 부업지산막에 가져왔던 오령감의 염소들을 인차 돌려보냈던것이다. 청풍덕에서 벌어지는 목장공사로 해서 언제 염소를 돌볼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장군님께서 좋은 사료풀이라고 하신 그 풀들은 듬뿍 자래워 씨를 받아야 하는것이였다. 《사람이 옹졸하다는건… 어려울 땐 도움을 받을줄도 알아야 해.》 오령감은 구새통같은 코구멍이 메게 잎담배연기를 물씬물씬 내보내며 혀를 찼다. 푹 젖은 섶나무단에 불을 지르기라도 한듯 그의 얼굴주위에는 독한 마라초연기뭉치가 감돌았다. 《솔직히 터놓으믄 내가 염소를 길러달라구 한건 딸가진 사람으로서 임자가 맘에 있었기때문일세.》 오령감은 부슬비가 멎고 개이는 청풍덕하늘쪽에 눈길을 돌리는척하면서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는 젊은이의 표정을 슬쩍 훔쳐보았다. 문길은 점직해서 대답을 못했으나 속에서는 진애에 대한 생각이 고패쳤다. 처녀는 장군님께서 청풍덕에 다녀가시고 도농촌경리위원회에서 숱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염소목장건설을 벌리자 매일처럼 지원나왔다. 자기 집 염소들을 청풍덕에 접한 산기슭에 매고는 염소우리와 살림집기초를 파는것을 도왔고 방목길 닦는 사람들속에 섞여 밤늦도록 곡괭이질을 세괃게 해댔다. 사람들은 꽃보자기로 얼굴을 감싼 처녀가 남자들도 메기 힘겨워하는 통나무를 혼자서 씽 메여나르는것을 놀랍게 쳐다보군 하였다. 염소목장건설자들이 궂은 일이 몸에 밴 농촌처녀인 오진애를 좋아하고 근면한 성품을 칭찬했으나 문길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남자들처럼 헌걸차보이는 진애가 먼발치에 나타나면 슬슬 피했다. 《아바인 정말 내가 맘들어 강냉이를 퍼주구… 염소를 맡겼는가요?》 문길은 미심쩍어 물었다. 오령감은 량미간을 찌프렸다. 《우리 청풍덕사람들은 거짓말을 몰라.》 문길은 은연중 감동되면서도 어쩐지 오령감부녀의 손탁에서 놀아난것 같은게 반발심이 났다. 《오아바인 아주 의뭉스럽군요. 따님도 그런가요?》 《곰을 붙들고 닦아세울라니 왜 의뭉스럽지 않겠나. 허지만 우리 진애는 제 어미를 닮아 그렇지 않아. 그때도 딸에는 내가 염소를 주라고 자꾸 눈짓해서야 줬어.》 문길은 할말이 궁해서 멋적게 앉아있었다. 오령감은 한동안 조문길을 곁눈질하며 써레기만 태우더니 참을성을 잃고 젊은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문길이… 내 렴치없이 묻네만… 우리 딸한테 장가들지 않겠나?》 《장가요?!》 조문길은 눈이 휘둥그래졌으나 오령감의 너무도 진지한 기색에 눌려 시선을 떨구었다. 마음에 들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처녀에 대한 종잡을수 없는 감정속에서도 머리를 쳐든것은 우월감과 함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각이였다. 문길은 이 청풍덕부업밭에서 장군님을 만나뵈웠을 때를 돌이켜보았다. 그때 자기는 몸도 온전히 거두지 않고 산막에서 할일없이 빈둥거리고있었다. 그런데도 장군님께서는 젊은 사람이 함흥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산중에 와서 고생한다고 하시며 염소목장을 지으면 고향사람들을 위해 염소젖과 고기와 빠다를 생산하는 보람있는 일을 하라고 고무해주시였다. 하지만 자기는 염소목장을 꾸리는데서도 능력이 부족하고 풀판과 염소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너무도 없다. 《아바이, 고마와요. 그렇지만 난 그럴 겨를이 없어요.》 그는 마음속에 고패치는 유혹을 물리치고 조용히 대답했다. 《겨를이… 있어야 장가드나?》 《난 할일이 많은 사람이예요.》 조문길이 고집스레 웅얼거리자 오령감은 마라초끄트머리를 뱉아버리고 한숨을 지었다. 《그러니 마음에 없는 모양이구만. 하기야 임자가 우리 진애같은 산골처녀를 마음에 둘 탁이 없지. 이제 풀박사가 되고 큰사람이 될테니까.》 오령감은 어처구니없어하는 문길을 선망의 눈길로 쳐다보며 담담한 어조로 뇌이였다. 《이 심심산골에서 장군님을 만나뵈옵구 가르침을 받았으니 임잔 정말 행복한 젊은이야.… 그렇구말구. 청풍덕이 생겨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여기에 직접 찾아오셔서 개척할 길을 열어주신분은 우리 장군님뿐이시네. 저걸 보라구. 염소우리와 살림집을 멋지게 짓는걸… 장군님께서 찾아주신 풀이 오리새와 자주꽃자리풀이라지. 그런 먹이풀들이 무성해지면 사람못살 고장이라던 이 청풍덕에 염소떼 흐르구 천지개벽할걸세. 쭉정이강냉이와 감자깡이 같은건 돼지사료로나 쓰겠지. 그때면 임자는 목장에서 분장장쯤 한자리 할게 아니겠나. 너무 으시대진 말라구.》 《아바인 오늘 기분이 떴구만요. 술을 마셨어요?》 《점심참이니 버릇대로 도토리술 한고뿌 걸쳤네. 허지만 난 술이 아니라 청풍덕이 변모되는게 흐뭇하구 취해서 노상 말을 하구싶네. 그래서 이 부대기밭초막을 헐어버리자구 온거네. 난 염소목장이 다 꾸려지는 날에 집에서 기르는 염소 아홉마리를 모두 목장에 바치구 방목공이 되겠어. 로친네도 찬성했어. 딸애는 더 말할것두 없구.》 오령감의 주름패인 얼굴에 보기드문 희열의 빛이 떠올라 그를 젊어보이게 하였다. 조문길은 오령감이 갈구리손으로 헤집는 담배쌈지에서 마라초를 큼직이 맡아주고서야 자리를 떴다. 산등성이길을 내린 그는 합숙쪽이 아니라 최인섭연구사가 사람들을 데리고 풀씨를 심는 둔덕의 풀밭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산골사람인 오령감의 가식없는 진정이 넘치는 말마디가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령감일가의 정신생활변화는 장군님의 말씀을 받들고 청풍덕에 염소목장을 건설하러 온 모든 사람들의 심중을 그대로 비친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는것이였다. 산골사람들까지 청풍덕에 장군님의 뜻을 꽃피우기 위해 가산을 아낌없이 바치는데 자기는 무엇으로 헌신한단 말인가. 앞으로 장군님께서 또 오시기라도 하면 그 사이 무슨 일을 해놓았다고 말씀드릴것인가. 장군님께 오리새와 자주꽃자리풀을 많이 심겠다고 했지만 자기는 고작 잡관목이나 치고 독풀이나 뽑고있는것이다. 비가 내려 진창이 질벅거리는 좁은 길로 꽃보자기를 머리수건처럼 쓴 진애가 보꾸레미를 손에 들고 바삐 오고있었다. 처녀를 피하지도 못하고 어쩔수없이 맞다들린 문길은 풀섶에 비켜섰다. 《저의 아버지를 못보았어요?》 진애는 서글서글한 오목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처녀는 꽃수건의 가장자리로 흩어져내린 머리모숨을 쓸어올리며 기다렸으나 문길이가 옹졸스레 대답을 안하자 상긋 웃었다. 《초막을 허물겠다고 이쪽으로 오셨는데…》 《초막에 있을거요.》 문길은 덜퉁스레 대꾸했으나 상냥하고 활달한 처녀의 실팍한 몸집앞에서 위압되기라도 한듯 그냥 돌아서 가지 못했다. 《점심전이지요? 가시자요. 저의 아버지랑 같이 식사를 해요.》 《난 합숙에 가서 먹겠소.》 조문길은 등뒤에 진애의 서운한 눈길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처사를 비난하기라도 하듯 신발에 달라붙은 진흙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쯤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처녀는 그 자리에 굳어진듯 서있는것이였다. 문길은 불시에 죄를 지은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령감은 내가 마음드니까 구실삼아 염소를 길러달라고 했다는데 왜 진애를 차겁게 대하는가.… 데릴사위로 오령감네 집에 들어가는것도 좋지 않은가. 장작을 패다가 자기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면서 물을 떠다주고 아버지몰래 언감자떡을 내다주던 인정미 후더운 처녀를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았더란 말인가. 문길은 자존심에 차마 돌아서지 못하고 진창에서 힘겹게 발을 뽑으며 허청허청 걸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