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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집을 뛰쳐나온 명구는 허름한 배낭을 걸멘채 다리살에 자개바람이 일도록 밤길을 내처 걸었다. 삼천강다리를 건너 함주를 지나 벌판길에 이르렀을 때에는 허기져 걸음발이 점점 떠졌다. 그는 애당초 함흥역에 가지 않았다. 려비도 한푼 없을뿐아니라 연착되여 언제 올지 모르는 렬차를 기다릴바에는 걷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아타고 가는편이 나은것이였다. 그러나 아직 자동차를 붙잡지 못하였다. 밤인데다가 함흥벌을 가로지른 곧은 신작로여서 드물게 다니는 차들도 속도를 내여 좀처럼 적재함에 매달릴수 없었다. 하긴 달리는 차의 적재함을 잡고 뛰여오르자면 힘이 세고 날래야 하는데 그한테는 걸음을 옮길 기력마저 모자랐다. 명구는 차츰 분별없이 집을 나온것을 후회했다. 령산에서 함흥에 올 때는 려비가 좀 있어 매점에서 꽈베기같은걸 사먹으며 그럭저럭 왔지만 지금은 주머니가 텅 비였고 배낭안에는 흰 작업복뿐이였다. 그는 아침을 굶었고 점심은 빵 한개로 설때렸다. 오후무렵에 집에 도착했으나 뜻밖에 조무래기들이 한구들 있어 어머니한테 배고프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었다. 쓰려나는 위주머니를 달래지 않고는 갈것 같지 못했다. 밤은 추웠다. 군데군데 작은 뚝밖에 없는 논벌인지라 산쪽에서 거침없이 불어오는 찬바람이 얼굴을 찌르고 솜옷자락을 들치며 여윈 몸을 얼구었다. 낮에는 양지쪽땅이 녹고 봄기운이 스민 바람이 불어올테지만 밤은 아직 겨울이였다. 어둠속 멀리서 불빛들이 가물가물 안겨왔다. 정평읍일것이였다. 도시가 있다는 생각에 기운이 나기는 했지만 그곳까지는 아득히 멀어보였다. 불시에 명구는 길옆에 세워둔 화물차적재함에 이마를 부딪칠번 하였다. 그는 불룩하니 짐을 싣고 방수포를 씌워 동여맨 적재함을 에돌아 운전칸쪽으로 갔다. 앞바퀴옆에서 마후라를 목에 돌려감은 녀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고깔불을 살구느라 연신 후후 불어대고있었다. 대충 얹어놓은 나무가지속에서 빨간 불찌가 날리다가 녀자의 애타는 노력에도 끝내는 죽어버렸다. 맥을 놓고 언땅에 주저앉은 그 녀자는 울음을 터칠것 같았다. 명구가 다가가자 그 녀자는 후닥닥 놀라 일어났다. 《누구예요?!》 《길가던 사람입니다.… 불피우는걸 도와줄가요?》 퍼그나 젊어보이는 그 녀자는 경계심을 갖추고 비실비실 물러났다. 《괜찮아요. 가던 길이나 가세요.》 《너무 차겁구만.》 명구는 음울히 대꾸하고나서 다리쉼이라도 해야겠기에 비위를 내대고 고깔불자리곁에 퍼더앉았다. 《언 땅바닥에 나무가지를 성글게 놓으니 불이 붙을게 뭐요. 나무가지를 두툼히 깔고 그우에 불을 살궈야 한단 말입니다.》 불이라면 자신이 있는 명구는 범상히 시까스르고 옆에 있는 마른 나무가지를 차곡차곡 쌓고 그우에 고깔모자처럼 덧놓은 다음 솜옷주머니에서 라이타를 꺼냈다. 《종이가 있으면 주시오.》 《없어요. 방금까지 다 쓴걸요.》 그 녀자가 마치 종이를 우정 없다고 안 주는것처럼 차겁게 말했으나 명구는 아랑곳 않고 움쭉 일어났다. 그는 길섶의 도랑뚝에서 마른 풀검불을 한웅큼 뜯어가지고 와서 나무고깔속에 밀어놓고 불을 붙였다. 풀검불이 눅눅해서 연기가 폈으나 잠시후에 소담스런 모닥불이 주위를 밝히며 타올랐다. 명구가 잠자코 혼자 불을 쪼이자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의 거동을 지켜보던 녀자가 안심되는지 모닥불곁에 다가앉았다. 불빛에 아릿다운 용모가 드러난 그 녀자는 이제 겨우 스물을 갓 넘겼을 처녀였다. 《난 동무가 불을 안 쪼일줄 알았구만.》 명구가 슬그머니 빈정대자 처녀는 도톰한 입술을 실쭉하고 툭 쏘았다. 《이건 내가 주어온 나무예요. 깜깜한 벌에서 나무가지줏기가 얼마나 힘든줄 알아요?》 《운전사는 어데 갔습니까?》 《차가 고장나 부속깎으러 정평에 갔어요.》 《어데 가는 찹니까?》 《가만… 동무는 무슨 렴탐군 같군요.》 《처녀동무가 로파처럼 의심이 많구만요. 난 차를 얻어타자구 그럽니다.》 《길손같지는 않은데요.》 《그럼 뭘 같습니까?》 《적재함쪽에 자꾸 눈길이 가는걸 보니 미덥지 못해요.》 《하긴… 적재함에 먹을거라도 있으면 훔칠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난 두어끼 굶었거든요.》 《떠돌아다니는 사람인가요?》 《너무 숙보는구만. 난 령산기계공장사람이요. 친척집에 얹혀살가 해서 함흥에 왔더랬소.》 《그런데 왜 도로 가는가요? 친척이 받아주지 않아요?》 《꽤나 끈덕지구만요. 그런건 묻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명구는 부아가 치밀어 몰풍스레 뇌까렸다. 그러나 인차 낯모를 처녀에게 화를 낸것이 무안쩍어 마른 삭정이를 모닥불에 덧놓으며 누그럽게 물었다. 《차를 수리하면 좀 태워주겠소?》 《우린 다 왔어요. 광포원료기지공사에 가는 차예요.》 《그럼 진작 말할것이지. 신분만 캐면서…》 명구는 락심해서 두덜거렸다. 《정평까지라도 태워줄게요.》 명구는 처녀의 말이 별로 고맙지 않았다. 《동문 광포에서 뭘하오?》 《돌격대원이예요.》 《듣자니 감탕우에 제방쌓기가 힘들다지요?》 《길손이 끈덕지게 별걸 다 묻는구만요. 갈길을 가면 될텐데.》 처녀가 여무지게 퉁을 주는 바람에 명구는 무안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싱겁게 굴지 말고 갈길을 가야 할텐데 엉치가 땅바닥에 굳어붙었는지 좀처럼 일어나게 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바치고는 불을 좀 더 쪼이고 정평에 가서 역대기실이든 어데든 잠자리를 마련하는것이 옳을것 같았다. 그는 길섶 도랑채기에서 마른 나무가지와 풀덤불가지를 한아름 가져다가 사그라져가는 모닥불우에 주섬주섬 놓았다. 다시금 불길이 타오르며 마주앉은 처녀의 아릿다운 자태를 비쳤다. 밤바람에 너울거리며 춤추는 불길로 하여 명암이 달라지면서 처녀의 아름다운 용모는 수시로 변하는것 같았다. 명구는 처녀의 얼굴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다. 모닥불에 눈길을 주었으나 연기 떠올리는 검붉은 불길너머에 그린듯이 앉아있는 처녀에게 마음이 쏠리는것이였다. 그는 처녀에게 속에 없는 허세까지 부려 가까스로 체면을 챙긴 구차한 처지면서도 한시바삐 처녀한테서 물러나 갈길을 가지 못하는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하였다. 배고픔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 불거진 자존심때문에 스스로 당하는 랑패, 령산에 다시 가야 하는 난처함으로 하여 그는 마음이 한없이 쓸쓸해지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길가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이런 처녀에게까지 의지하고싶어질 정도로 나약해지는것이였다. 명구는 불을 쪼여 온몸이 노그라들고 졸리는것을 겨우 물리치고 모닥불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돌격대원동무, 수고하오.》 《가겠어요?… 거기 좀 앉아요.》 처녀는 운전칸문을 열고 배가 불룩한 배낭을 끌어내렸다. 《몹시 힘들어하는것 같은데 뭘 좀 요기하고 떠나요.》 처녀는 종이꾸레미를 펼치고 삶은 닭알 몇알과 부풀어 터진 증기빵을 내놓았다. 명구는 코마루가 찡해서 주저앉았다. 먹을걸 보니 속이 뒤집어지는듯 했으나 체면이 목구멍을 졸라매여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였다. 《돌격대원의걸 먹어도 일없겠습니까.》 명구는 빵을 뜯어 그저 입에 넣기 면구해서 한마디 했으나 처녀의 사려깊은 담담한 표정을 보고는 인차 부끄럼을 느꼈다. 그런 허식을 챙기지 말고 솔직하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편이 나을것이였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빵쪼각을 우물우물 몇번 씹어 목이 아프게 넘기였다. 《물이 있으면 좋겠는데… 못 가져왔어요.》 《일없습니다. 빵이 만만해서…》 《그래도… 천천히 잡숴요.》 처녀는 왁살스레 먹어대는 그를 마음편하게 해주려는듯 따뜻이 말을 건넸다. 《부모님은 안계시나요?》 명구는 난처했으나 대답을 안할수 없어 빵쪼각을 문채 머리만 끄덕였다. 부모가 있으면 이러고 다니겠는가. 《이름이 뭐예요?》 《라명구요.》 《난 송옥화라고 해요. 우리 아버지한테 말해서 함흥에서 직장을 구해줄가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오?》 《시행정위원회에 있어요. 도움받을수 있을거예요.》 《고맙긴 한데… 난 함흥에서는 살지 않겠소.》 《함흥이 어쨌다고 그래요?! 지금은 형편이 어렵지만 이제 원료기지랑 건설하면 나아져요. 먼저 우리 광포돌격대에서 일하자요.》 《아니, 싫소.》 불쑥 인기척이 나더니 털모자를 눌러쓴 키가 작달막한 사람이 명구의 옆에 공구통을 집어던지고 모닥불가에 주저앉았다. 보매 화물차운전사인듯 처녀가 반겨맞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마흔살은 됐음직한 운전사는 공구통한테서 엄지손가락만 한 부속품을 꺼내들었다. 《에, 말말아. 요까짓 거르개볼트 하나 깎는걸 가지고 고생했다. 선반공네 집에 가서 통사정해서 겨우 데리고 공무작업반에 나오니 전기가 와야지. 전동기피대를 손으로 돌릴수도 없구. 안타까와서…》 운전사는 명구를 흘끔흘끔 보며 불을 쬐였다. 《수고했어요. 빵을 잡숴요.》 운전사는 옥화가 집어주는 빵을 어지러운 손가락으로 집어 한입 떼물고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광포지휘부에 전활 했더니 마침 동무 아버지가 받더라. 당장 사람들을 보내겠다는걸 전기만 오면 인차 깎아서 맞춰가지구 몰구 간다구 했지. 그랬더니 도당책임비서동지가 밤중에 광포에 나오겠다구 했다면서 빨리 오라는게 아니겠니.》 운전사는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빵 한개를 다 먹어치우고는 자동차기관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는 옥화더러 전지불을 비쳐달래고는 앞바퀴카바에 올라앉아 분해한 청정기에 거르개볼트를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웬 사람이야?》 운전사가 나지막이 묻는 말소리가 불가에 어정쩡해서 앉아있는 명구에게도 들려왔다. 《눈찌가 편안치 않아.》 《나쁜 사람이 아니예요. 함흥의 친척집에 왔댔어요. 부모랑 없어요.》 《그런데 왜 가지 않구있어?》 《정평까지라도 태워주자요.》 그다음은 조용하고 가벼운 쇠부딪침소리만이 고즈넉이 들렸다. 얼마후에 운전사는 부속품을 다 맞췄는지 차바퀴에서 뛰여내려 운전칸에 올라갔다. 점화전스위치를 넣고 발동을 걸었으나 몇번씩이나 부르릉거리다가는 멎군 했다. 화가 난 운전사는 차문을 후려닫고 다시금 기관수리에 달라붙었다. 《제길, 〈불도젤〉령감만 들볶지 않으믄 차수리를 온전히 해가지구 함흥에서 떠나는건데.》 《〈불도젤〉령감이 누구예요?》 송옥화의 호기심에 찬 물음에 명구도 귀를 강구었다. 《사람들이 도당책임비서를 〈불도젤〉이라고 하더구나. 신통한 별명이지. 광포에 쌓은 제방이 얼음장이 꺼지면서 감탕속에 쭐쭐 빠져들어가는데… 제방만 온전히 쌓재도 10년은 걸린다는데 이건 당장 봄철에 모내기하겠다고 냅다미니 들볶여 살겠어?》 《그래도 도당책임비서동지가 와서 우리 함흥사람들을 들볶구 냅다밀었으니 마그네샤립광 팔아 강냉이를 사왔구 장진감자도 실어내오지 않았는가요.》 《글쎄 그야 잘한 일이지. 안 그랬다면 숱한 사람들이 가만 앉아서 굶어죽을번 했지.》 《그러믄 〈불도젤〉이 좋은 별명이군요.》 《그때는 과학적타산이 서구 조직사업이 잘됐어. 하지만 광포제방공사는 그렇지 못해. 무턱대고 냅다밀거던. 뒤에서들 하는 말이 흐물거리는 감탕우에 제방쌓는 똑똑한 공법도 없다는것 같애. 그렇게 덤벼치다가는 무슨 일이 날지 모른다는거야.》 명구는 아버지의 뒤소리를 고통스레 더 듣고 있을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이고 본능적인 옹호심이 끓어올라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운전사와 한바탕 해보고싶었으나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우습강스러운 일을 빚어낼것 같아 그만두었다. 《처녀동무, 나 좀 보기요.》 그는 송옥화를 모닥불가에 데리고가서 흥분을 눅잦히지 못하며 거칠게 말했다. 《동무 아버지가 광포에 나와있소?》 《그래요. 원료기지공사를 책임졌어요.》 《대단하구만요. 좀 말해주지 않겠소? 날 광포돌격대에 받아달라구.》 《어마나, 생각을 달리했군요.》 어둠속에서 처녀의 놀란 눈이 저으기 빛을 뿜었다. 《정말 결심했어요? 우리 돌격대에 일단 들어오면 제방공사가 끝날 때까지 나가지 못해요.》 《알겠소.》 《도중에 힘들다고 나약하게 도망치진 않겠어요?》 《사람을 어떻게 보구 그러는거요?!》 명구가 대번에 어깨를 솟구고 눈을 부라리며 다가들자 처녀는 질겁해서 뒤걸음쳤다. 《사람을 잡아메칠 태세군요. 좋아요! 같이 가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