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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겨울해는 려명을 앞세운 다음에도 새벽추위를 털어버리는듯 오래동안 꾸물거리고서야 동켠산마루에 선홍빛의 둥근 얼굴을 드러냈다. 푸른 하늘자리에 거방스레 올라앉았으나 헌신의 본분을 잃지 않아 자기 몸을 아낌없이 불태운 생명의 따스한 빛을 잎새없는 나무숲과 눈덮인 골짜기와 얼어붙은 비탈지에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고 고루 뿌려주었다. 처마끝에 주런이 매달린 고드름이 먼저 봄의 기미를 알아챈듯 뾰족한 끝이 녹아내려 맑은 물방울을 촐랑 떨구었다. 뙤창문간살에 앉은 두마리의 참새가 어제 바른 문창호지에 말라붙은 강낭가루풀을 뜯어내려고 부리로 쪼아댔다. 쇠가마안에서는 산나물을 섞은 강냉이타개죽이 벌렁벌렁 끓어 푹 익은 구수한 냄새가 방안에 들어찼다. 림선미는 강낭죽을 뜸들이려고 아궁이안의 섶나무불담을 모서리가 깨진 화로에 담고 부삽뒤등으로 눌러다져놓았다. 비탈지의 풀밭에 거름을 펴러 간 최인섭이 점심참에 내려오면 화로불을 헤집어 몸을 녹이고 더운 산나물죽을 먹을수 있을것이였다. 선미는 달포나마 길건너편집의 뜨뜻한 정지방에서 마음씨 무던하고 인정깊은 늙은 내외의 도움을 받다가 어제 아침 최인섭의 집에 건너왔다. 그 시각부터 선미는 팔을 걷어붙이고 장판을 때붙였고 천정의 찢어진 곳에는 종이를 발랐다. 방안에 가득한 자루들마다 풀씨학명과 채종날자와 무게를 써붙였고 방구석 여기저기에 널린 채종포의 시험기술자료뭉테기들을 정리하여 아무때나 필요한것을 찾을수 있게 분류해서 선반에 얹었다. 땅이 얼어 흙을 파이길수 없어 군데군데 떨어진 벽체를 바르지 못했을뿐 집과 울안의 구석구석까지 녀자의 손길이 미쳐야 할 곳은 다 알뜰히 거두었더니 최인섭이 얼마나 좋아했던가.… 림선미는 깨끗이 빨아 말린 솜옷을 입고 털수건을 목에 둘렀다. 보퉁이조차 없어 길떠날 차비는 간단했다. 선미는 길건너집 내외한테 찾아가 신세를 갚지 못하고 떠난다고 눈물겨운 작별인사를 하고왔다. 잠시 서성거리던 선미는 까맣게 반질반질 윤기를 낸 가마를 다시한번 문대고 몇개 안되는 늄식기와 그릇가지를 부엌당반에 정히 얹어놓았다. 때다만 섶나무가지들을 부엌 한켠구석에 무져놓고 가랑잎이 널린 바닥을 쓸고나니 더 할일이 없는것 같았다. 이제는 떠나야 했다. 최인섭이 선미의 몸상태가 겉만 나아보이지 속에는 언독이 빠지지 않았다면서 여러날을 더 안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젊은 녀자가 혼자 사는 남자의 집에 하루라도 지체해서는 안되는 일이였다. 최인섭은 선미가 길건너편집에 누워있을 때 병구완하느라 땔나무를 그뜩 해다놓았고 옹노로 산토끼를 잡아오는가 하면 성춘이가 주는 닭알꾸레미와 쌀을 가져오군 했다. 단칸방의 낡은 집과 책들과 원고뭉테기, 풀씨자루들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마음은 얼마나 결곡하고 후더운가. 선미는 가마뚜껑을 열고 늄식기에 따끈한 산나물죽을 담았다. 비탈지의 풀밭에 올라간 최인섭이한데 가볼 작정이였다. 선미가 뜨락을 나서는데 퉁퉁거리며 달려오던 뜨락또르가 집앞에 멎어서고 유성춘이 운전칸에서 훌쩍 뛰여내렸다. 그는 강냉이송치를 실은 적재함귀퉁이에서 배가 차지 않은 마대자루를 끄집어내였다. 《선미아주머니, 받아요. 강냉이예요.》 쾌활한 유성춘은 마치 이 집의 주부에게 가져온것 같은 스스럼없는 태도였지만 선미는 무안이 섞인 웃음으로 넘기며 고맙게 받았다. 마음이 올곧고 동정심많은 순박한 젊은이였다. 《군에 가는가요?》 선미가 묻자 뜨락또르운전칸에 날렵한 동작으로 오른 유성춘은 상반신을 쑥 내밀었다. 《부탁할거라도 있어요?》 《군경영위원회에 들려보지 않겠어요?》 《삼촌한테요?!》 유성춘은 대뜸 깨닫고 침울해졌다. 《연구사선생의 일을 잘 말해보세요. 양지쪽엔 벌써 눈이 녹아요. 봄이 되면…》 《걱정말아요. 삼촌이 말은 그렇게 해도 정작 〈풀박사〉아저씨를 보내지는 않을거예요.》 선미는 유성춘의 말이 그닥 자신심이 없음을 불안스레 들었다. 《선미아주머니, 내가 뭘했는지 알아요? 우리 추성리의 〈풀박사〉아저씨를 온 도가 알게 해야겠다고 생각한걸요. 그래서〈풀박사〉아저씨에 대한 기사를 써서 도일보에 등기우편으로 보낸걸요.》 유성춘은 무슨 큰 일을 치른 사람처럼 의기가 돋쳐 뜨락또르를 몰아갔다. 림선미는 퍼석얼음이 덮인 개울을 건너 비탈진 오솔길에 들어섰다. 자기가 이곳을 떠나면 유성춘이 삼촌을 어떻게 설복하건, 엉뚱스레 신문기사를 써내건 자기와 통 상관없는 일로 된다는것을 알면서도 근심이 덜어지지 않았다. 유성춘이 기사를 썼으면 얼마나 잘 썼겠는가, 도일보에서는 그런 글을 쉽사리 내주지도 않을것이다. 산나물죽이 담긴 식기를 품에 안은 선미는 애타는 근심을 조금도 덜지 못한채 미끄럽지 않은 오솔길의 풀섶쪽을 골라가며 걸음을 짚었다. 한 삼태기에 마른 가루걸음을 담아 비탈지의 채종포고랑을 타고다니며 고루 뿌려주던 최인섭은 밭머리에 서있는 선미를 보자 어지간히 놀라서 삼태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밭머리에 나와 잡초덤불의 묵은 눈을 털고 앉았다. 《날이 찬데 왜 나와다니오?》 일에 지친 최인섭의 약간 퉁명스러우면서도 거치른 목소리에는 선미에 대한 념려와 온정이 푹 배여있었다. 단추를 풀어헤친 솜옷앞섶사이로 보이는 땀에 젖은 속내의와 무릎어방의 꿰진 바지혼솔을 보는 순간 선미는 떠나자던 결심이 단박에 무너지는것을 느꼈다. 며칠 더 남아서 그를 돌봐주지 못하는 괴로움이 아프게 저며들었다. 선미는 보자기에 싼 죽그릇을 눈우에 내려놓았다. 《따끈할 때 들어요.》 《고맙소.… 오늘은 일찌감치 끝내고 내려가려 했는데… 》 《이게 채종포… 풀밭인가요?…》 선미는 해빛에 겉눈이 반짝거리며 녹기 시작하는 비탈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소. 풀을 보겠소?》 최인섭은 선미가 풀밭을 관심하는것이 반가운지 움쭉 일어나 밭고랑에 들어섰다. 《선미동무, 여기 오오.》 최인섭은 이랑에 덮힌 눈을 조심조심 파헤쳤다. 꽛꽛이 언 눈을 파들어가자 솜처럼 보드라운 눈가루속에서 손가락마디만 한 뾰족뾰족한 파란 싹이 신비할 정도로 촘촘히 솟아나있었다. 《어마나?! 눈속에서 얼지 않고 자랐군요.》 선미는 무릎을 꺾고앉아 손으로 애리애리한 풀싹을 만져보았다. 《오리새라는 먹이풀이요. 영양가가 아주 높소.》 최인섭은 밭고랑을 대여섯개 타고넘더니 또 눈을 파헤쳤다. 떡가루같은 눈을 헤집자 이번에는 동글동글한 조그만 파란 잎새들이 드러났다. 《이건 자주꽃자리풀인데 다년생이요. 지난해 더덩구에서 봄이 오는줄 알고 벌써 싹이 돋는구만.》 최인섭은 마치 자기의 귀여운 아들애가 이발이 갓 돋아나기라도 한듯 기쁨에 겨워 말했다. 선미는 풀에 바치는 그의 섬세한 애착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집안을 거둘 때 풀씨자루들을 분류하고 학명을 써붙이면서 귀에 익은 풀이름이였지만 정작 눈밑에서 소담스레 싹이 돋은걸 보니 자기가 씨앗을 심고 가꾼것처럼 기쁘고 대견하게 생각되였다. 《이건 외국산풀이라지요?》 《유럽에서 가져온 우량종재배풀이요. 다 자라면 키가 허리를 넘소. 채종을… 씨를 받지 않을 때는 1년에 집짐승한테 두세번 베여먹여도 늦가을에는 무릎정갱이만큼 자란다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백암농촌에는 먹이풀이 많았어요. 달맞이꽃, 사라구, 냉이…》 정답게 추억을 다듬던 선미가 말문이 막히자 최인섭은 웃음을 저으며 받아넘겼다. 《민들레, 닭개비, 말굴레, 제비쑥, 길짱구, 솔장다리, 흰토끼풀…》 《옳아요. 생각나요.… 난 마을애들과 같이 싸리바구니에 그 풀들을 뜯어다가 토끼랑 먹이군 했어요.》 《우리 나라의 산과 들에는 그런 좋은 야생풀들이 많다오. 내가 저 비탈지 웃뙈기에 그 풀들을 몇이랑씩 심었소. 그것들은 이 눈속에서는 볼수 없지. 땅이 녹은 다음에… 봄에 가서… 한번 놀러 오오. 그땐… 산지와 들판을 다니지 않고도 싸리바구니에… 달맞이꽃과 사라구, 길짱구 같은 소녀시절에 낯익은 풀들을 가득 뜯을수 있을거요.》 최인섭은 그 녀자쪽을 보지 않으면서 나직이 뇌이고는 풀싹우에 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나무뿌리마냥 메마르고 꿋꿋한 손에 묻은 눈을 털고 일어났다. 《선생님은 내가… 떠나려 한다는걸 아셨군요.…》 선미는 잘못을 저지른 녀학생같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지 않구… 동무 눈에 다 씌여있지 않소.》 《함흥에 가서 애를… 찾아봐야 할것 같아요.…》 최인섭은 한숨을 쉬였다. 《가야지. 아들을 잃은 어머니마음이 오죽하겠소.》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어요.…》 《그게 무슨 신세겠소.… 어려운 때 돕는거야 응당한거지.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게 했을거요.》 《저 편지해도 될가요?》 《하오. 용철이라고 했지요. 애를 찾거든… 소식을 알려주오.》 가슴을 쿡 찌르는것 같은 아픔에 겨우 몸을 지탱한 선미는 소리없이 울음을 삼켰다. 《선생님은 여기 그냥 있게 될가요?》 《글쎄… 모르겠소.… 아마 있게 될거요.》 《여기선 선생님을 달가와하지 않는데… 함흥같은데 가서 사는게 낫지 않을가요?》 《함흥에?…》 최인섭은 선미의 마음을 가늠해보기라도 하듯 잠시 쳐다보다가 이윽고 추연한 눈길을 먼 산발쪽에 돌렸다. 《함남도에도 내 시험포전이 있었소.》 《우리 고장에 말이예요?!》 그 녀자는 놀라서 물었다. 《함흥에서… 함주를 지나 서쪽으로 200리남짓이 가면 청풍덕이 있는데…》 《검산령쪽이군요.》 《옳소. 평남도접경지대지. 거기 산등판이 해발고가 맞춤한 묵은 땅이여서 조수를 데리고 풀씨를 심었소. 내가 연구소를 떠나기 전 일이요. 이듬해 봄에 가보니 오리새와 자주꽃자리풀이 잘 자라댔는데… 함흥에서 부업지를 일구러 온 사람들이 자기네 밭을 차지했다는게 아니겠소.》 최인섭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묵은 땅이라도 남의 부업지자리니 내놓지 않을수 없었소. 허가없이 시험포를 차린것이 잘못이지. 그 사람들은 날더러 연구사가 맞긴 맞는가고 따졌소. 감자나 강냉이가 아니라 사람이 먹지도 못할 풀을 심었다는거요.》 최인섭이 한숨을 짓자 림선미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함흥에는 연구기관이 많은데 선생님이 가시면…》 《식물을… 그것도 풀을 전문하는 사람이 산골을 벗어나 도시에 가서 뭘하겠소. 애당초 난 각오하고 풀씨자루를 메고 추성리에 왔소. 이 비탈밭을 떼우면… 저 매운산너머 사람 살지 않는 산중에 가서 채종포를 일구겠소.》 최인섭의 드놀지 않는 결심은 그 녀자의 애달픈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럼, 선생님. 전…》 림선미는 눈물을 닦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작별인사를 했다. 《아니, 선미동무… 그대로야 어떻게 가겠소. 길량식이라도 마련하고 떠나야지. 집에 내려가기요.》 최인섭이 황황히 나서는것을 선미는 만류했다. 《집에는 선생님이 몇끼 어어나갈 식량조차 없지 않나요. 절 맘편히 떠나도록 해줘요. 이 고개를 넘어가겠어요. 큰길에 나서면 자동차를 얻어탈수 있어요.》 《정말 떠난다는거요?…》 최인섭은 목이 메여 혼자소리처럼 뇌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물기어린 눈에 손을 가져갔다. 녀자앞에서 눈물을 보이는것이 민망한지 손채양으로 눈언저리를 가리우고 해빛이 부서지는 비탈지쪽을 보았다. 《몸조심하오.》 《앓지 마세요.》 선미가 고개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가는데 죽은 나무처럼 서있던 최인섭은 별안간 허둥지둥 눈을 박차고 뛰여올라왔다. 다시 그 녀자의 앞에 섰으나 얼어붙은듯 한동안 말을 못했다. 《용철이를 찾으면… 꼭 데리고 오오.… 기다리겠소.》 《!》 림선미는 가슴을 찌르는 고마움에 참고참았던 눈물을 쏟뜨렸다. 최인섭의 떨리는 목소리뒤에는 무언가 억제되여 터놓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가 안타깝게 매달려있는것 같았다. 그것은 딱히 찍어 말할수 없는것이였지만 선미는 작별의 애달픔속에서도 남자의 진정이 밴 말마디와 거머퍼렇게 상하고 수염싹이 돋은 거치른 얼굴에서 생의 기쁨과 앞날에 대한 푸른 희망을 느끼였다. 선미는 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어떤 알수없이 용솟음치는 힘으로 고개길을 잔달음쳐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