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 력사개관 (고대 - 근대)

 

- 동해와 울릉도, 독도를 개척한 고대조선사람들

 

조선사람들이 울릉도, 독도를 처음으로 개척한것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인 고대시기부터였다.

고대조선사람들은 울릉도의 원시림을 찍어 농사짓기 좋은 땅으로 개간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가꾸면서도 주로 어로활동을 벌리였다. 그리고 울릉도주변의 물고기를 잡는데 머무르지 않고 봄, 여름, 가을에 독도로 건너가 일정한 기간 머무르면서 오징어, 멸치, 고래, 곱등어, 물개를 잡고 전복과 미역을 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

고대시기부터 우리 선조들이 여기에 진출하였다는것은 19세기말 왕족인 리규원이 봉건정부의 지시로 울릉도를 답사, 조사하고 남긴 일기에 울릉도의 여러곳에 고인돌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여있는데서도 알수 있다.

고인돌은 고조선의 지배계급이 쓰던 무덤으로서 수도인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의 넓은 령역은 물론 우리 선조들이 세운 진국과 같은 국가들의 지역에서도 나타나고있는 고대조선시기 독자적인 무덤이다.

고대시기에 대체로 고조선은 강원도, 함경도지역을, 진국은 경상도지역을 차지하고있었고 강원도와 경상도지방경계선의 앞바다가 한류와 난류가 부딪치는 곳으로서 울릉도, 독도로 가는 해로의 하나였다고 볼 때 울릉도에 삶의 터전을 꾸려나가면서 고인돌을 남긴 주민들은 고조선과 진국을 비롯한 고대조선사람들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동해바다가의 고대조선주민들은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울릉도를 차지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어로활동을 벌리는 한편 그와 가까운 독도에도 자주 나가 물고기잡이를 하고 해산물들을 채취하였다.

울릉도 검찰일기

특히 B.C. 4∼3세기경에는 고대조선주민들의 해상활동이 더욱 활발히 벌어졌는데 이 시기 고대조선사람들이 조선동남해를 따라 일본렬도에로 진출하여 조선동남해와 접한 일본의 북규슈를 비롯한 서부지방에 발전된 조선의 문화를 전파하였다.

 

이것은 일본에서 발견된 야요이문화(B. C. 4∼3세기부터 A.D. 3세기경)가 고대조선주민들이 전달한 당시로서 높은 기술을 요구하는 논농사와 금속문화를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실례로 고대조선사람들이 쓰던 좁은놋단검(청동단검), 청동창(동모), 청동과(동과), 청동방울(동탁) 등의 금속유물들이 야요이문화가 발전하였다는 일본의 북규슈를 비롯한 서부지방에서 계속 출토되고 벼농사도 이곳에서부터 처음 시작되였다는것은 이 문화의 전달자, 창조자가 다름아닌 고대조선주민들이였다는것을 증명하고있는것이다.

고대조선사람들이 울릉도, 독도를 경유하여 일본렬도에로 진출하였다는데 대해서는 일본학자들도 인정하고있다.

《일본서기》의 이즈모신화에는 야요이문화시기 진국의 진한사람들이 경상북도 영일만에서 조선동해의 흐름을 타고 이즈모지방(시마네현 동북부)에 진출한 사실을 전하고있다. 이것은 진국의 주민들이 조선동해를 거쳐 대체로 울릉도, 독도의 바다길을 따라 갔다는것을 보여준다.

 

  고대조선사람들의 독도개척과 일본렬도에로의 진출

 

이처럼 고대시기 조선동해를 거쳐 울릉도, 독도로 진출하고 개척한사람들은 고조선, 진국사람들을 비롯한 고대조선사람들이였다.

우리 선조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하였을뿐아니라 이를 발판으로 일본렬도에까지 진출하여 선진문명을 보급하였던것이다.

 

 

 

-고구려, 신라사람들의 울릉도, 독도에로의 진출과 활동의 적극화

 

봉건사회의 첫 시기인 삼국시기에 들어와 조선동해와 특히 울릉도, 독도로 진출하여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우리 겨레의 활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벌어졌다.

B.C. 277년에 주몽에 의해 성립된 고구려는 주변소국들에 대한 통합사업을 다그쳐 A.D. 1세기에는 령토를 크게 확장하였는데 남쪽으로는 대동강계선까지, 동쪽으로는 남연해주와 함경도, 강원도앞바다까지 차지하였다.

1세기초 중엽에 성립된 신라는 주변소국들에 대한 정복사업을 단행하여 2세기에는 락동강동부의 경상도지역과 바다가까지 령토를 확대하였다.

이 시기 신라사람들의 일본렬도에로의 진출과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실례로 일본의 시마네현 북쪽의 오끼제도 서쪽의 작은 지부리섬은 경상북도 경주 동쪽 해안가지방의 영일현과 언양현의 신라주민들이 울릉도-독도의 바다길을 따라 이곳에 많이 건너가 지어준 옛 이름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일현의 옛 이름은 《근오지》이라고 하였는데 근오지의 《오지》는 오기로도 발음되여 일본의 오끼섬의 이름으로 되였다. 또한 언양현의 옛 이름은 본래 《거지화》인데 《지화》는 지부리라고도 발음되며 이것은 지부리의 이름으로 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학자들도 인정하고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영일현과 언양현의 신라주민들이 일본의 이즈모지방으로 갈 때 주로 동해의 울릉도, 독도 바다길을 리용하였으며 지부리섬을 포함한 오끼제도에 진출, 정착하여 자기의 고장이름을 남겼다는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 신라주민들은 이즈모지방에 소국까지 세우고 선진문명을 보급하였다.

 

삼국시기 고구려, 신라사람들의 울릉도, 독도진출

 

삼국시기 조선사람들의 일본렬도진출

《삼국유사》에 신라의 조선동해바다가 주민이였던 연오랑과 세오녀가 157년에 바다길로 일본렬도에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울릉도-독도의 바다길을 따라 이즈모지방에 가서 소국왕을 한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신라주민들이 일본렬도에로 진출하면서 울릉도, 독도길을 많이 리용하였으며 이 섬들에서 살면서 창조적활동을 벌리였다는것을 보여준다.

 

 

특히 4∼5세기에 들어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나라와 가야사람들은 조선동해, 남해를 거쳐 일본렬도에로 진출하여 자기들의 발전된 문화를 보급하면서 일본의 서부지방에 조선계통소국들을 수많이 형성하였다.당시 나라들의 위치와 해류방향으로 보아 대체로 고구려, 신라사람들은 조선동해를, 가야, 백제사람들은 남해를 거쳐 일본렬도에 진출, 정착하여 소국을 형성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중에서 고구려사람들은 5세기에 동해의 울릉도-독도의 바다길로 일본렬도의 노도반도부근에 대대적으로 진출하고 계속하여 내륙지대인 나가노현을 비롯한 그 주변일대에 들어가 큰 세력을 이루었고 나아가서 봉건소국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은 이곳에 수천개나 존재하고있는 고구려고유의 돌각담무덤을 통하여 알수 있다.

나가노현일대의 고구려돌각담무덤의 대량적분포는 울릉도-독도의 해로를 통한 고구려사람들의 일본렬도진출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아울러 울릉도, 독도지역을 차지하고 활동한 사실의 일단을 엿볼수 있게 한다.

고구려가 이 시기 울릉도, 독도는 물론 일본렬도에로의 진출을 강화하게 된것은 삼국통일을 위한 적극적인 남방진출로 5세기말∼6세기 초엽에 청하(경상북도 포항시)지방까지 진출하여 조선동해바다가지방을 장악한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5세기말∼6세기초에 울릉도, 독도는 고구려사람들의 거주지, 활무대였다.

신라의 우산국통합

울릉도에서 고구려술잔이라고 인정되는 고배(高盃)가 발견된것은 우연치 않다. 그리고 《고려사》에 강원도 울진군이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이였다고 하였고 우진야현의 이름으로부터 울릉도와 우산국, 우산도의 이름이 파생되였다고 볼 때 더욱 그러하다.

5세기말∼6세기 초엽 고구려사람들의 울릉도, 독도에로의 적극적인 진출과 활동정형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기 형성된 우산국의 주민들과 우두머리들이 고구려사람이였다고 볼수 있다. 우산국은 당시 주변의 넓은 바다와 산세가 험한 자연지리적조건으로 하여 만만치 않은 존재로 되여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512년에 우산국을 자기의 령토에 편입시키였다.

우산국이 신라에 편입된 후 울릉도, 독도주민들은 주로 신라사람들로 꾸려졌다.

 

발해는 698∼926년까지 존재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동남쪽으로 남연해주와 함경도지방을 차지한 후 일본과 사신왕래와 문화교류를 가지였다.

발해사신단과 개별적상인들은 남경남해부(함경남도 북청부근), 동경룡원부(함경북도 청진시)에서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한류흐름을 따라 일본렬도로 갔는데 많은 경우 곧바로 갔으나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울릉도-독도의 바다길을 리용하기도 하였다.

15세기말 함경도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로 왔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고려하면 이 시기 이 지역을 차지하고있던 발해사람들도 울릉도-독도의 해류길을 리용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후기신라 발해사람들의 울릉도, 독도진출

당시 발해와 후기신라주민들의 울릉도, 독도에로의 진출과 리용은 그 이전 삼국시기보다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 고려의 섬으로 된 울릉도, 독도

 

918년에 성립된 고려는 930년대 중엽에 국토를 통일한 후 봉건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켜 11세기에는 대외적지위를 훨씬 높이였다.

고려인민들은 민족의 힘과 지혜를 하나로 합쳐 외래침략자들을 성과적으로 물리쳤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고려자기와 같은 우수한 걸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발전속에서 조선동해와 울릉도, 독도를 개척하기 위한 고려인민들의 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

울릉도와 독도를 비롯한 그 주변의 섬들을 망라한 우산국은 처음에는 고려에 속한 조공국으로 되여있었으나 12세기 중엽이후에는 고려의 울진현에 소속되게 되였다.

《고려사》지리지에는 고려시기 《우산, 무릉은 본래 두개의 섬으로서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은 날이면 바라볼수 있다.》고 하면서 우산도인 독도와 무릉도인 울릉도가 서로 다른 두 섬이면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것을 명기하고있다.

고려봉건국가는 930년 8월 우산국(울릉도)이 백길, 토두를 보내여 공물을 바치자 그들에게 정위, 정조라는 벼슬과 작위를 주었고 1018년 11월 우산국이 동북녀진의 침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였을 때는 관리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보장하는 등 적극 도와주게 하였다.

그리고 1019년 7월에 우산국백성들이 녀진의 침략을 받고 뭍으로 찾아오자 그들을 다시 고향에 돌려보내여 섬을 비우지 않게 하였으며 1022년 7월에는 뭍으로 찾아온 주민이 늘어나자 섬이 비지 않는 조건에서 경상도 례주(녕해)지방에 안착시켜 식량과 생활밑천을 보장해주는 한편 본토의 백성들을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고려의 이러한 우대정책은 울릉도, 독도의 우산국이 자기의 신성한 령토이고 속국이였기때문에 취한 응당한 조치였던것이다.

12세기 중엽부터 우산국이 점차 조락됨에 따라 고려는 울릉도, 독도를 울진현에 소속시켜 직접 통치하였다.

1141년 7월 명주도 감창사 리양실은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여 진귀한 토산물을 왕에게 바치게 하였으

1157년 5월에는 땅이 비교적 넓고 비옥한 울릉도에 군, 현을 두려는 의도에서 내급사 김유립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조사하게 하였다.

고려의 령토와 독도

12세기말∼13세기초에도 울릉도를 보강하고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밑에 륙지의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273년 2월 추밀원사 허공을 울릉도 작목사로 임명하여 울릉도의 나무찍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울릉도를 군, 현에 편입시켜 고려말까지 통제를 계속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고려봉건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와 보호속에서 울릉도의 주민들은 계절에 따라 독도에 자주 나가 물고기잡이를 하면서 생산활동을 벌리였다.

 

 

- 시종일관 울릉도, 독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한 리조

 

리조의 령토와 독도

1392년에 성립된 리조는 국호를 우리 민족의 첫 국가였던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조선》이라고 하였다.

리조시기에 와서도 독도는 의연히 울릉도와 함께 당시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된 섬이였다.

리조는 전반기와 후반기에 정책상 울릉도, 독도에 대한 《공도정책》을 내놓고 주권을 행사하였으며 근대시기에는 적극적인 《개척정책》을 내놓고 그 령토를 굳건히 지키였다.

리조 초기에 울릉도, 독도에 대한 《공도정책》, 즉 섬을 비워두고 령유권을 행사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것은 고려말부터 끊임없이 감행되는 왜구의 침입과 략탈로 하여 동, 서, 남해의 해안가주민들은 물론 울릉도, 독도주민들이 커다란 재난을 입고있었던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그리고 각종 조세와 공물, 부역을 피하려고 울릉도, 독도로 피해가는 주민들이 늘어나는 조건에서 그들을 본토에 끌어들여 통제하려는 리조봉건정부의 의도와도 관련되였다.하지만 리조봉건정부는 섬주민들을 소환하고 섬을 비워두었으나 몇해에 한번씩 조사관을 파견하여 조사를 진행하고 대책을 세우는 등 이곳에 대한 주권을 여전히 행사하였다.

몇가지 관련력사자료를 본다면 1416년 김린우를 《무릉등처(울릉도, 독도)안무사》로 파견하여 《류랑민》들을 데려오도록 하였으며 1417년 2월에는 관리들속에서 섬주민들을 소환시키지 말고 식량과 농기구를 보장하면서 안착시키자는 의견이 제기되였지만 결국 섬을 비워두기로 결정하고 섬주민소환조치를 실행하였다. 이와 함께 리조봉건정부는 몇해에 한번씩 조사관을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순찰하고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사관들은 임무를 수행한 후 왕에게 보고하면서 토산물들을 바치였다.

리조 후반기에도 봉건국가는 독도에 대한 《공도정책》을 실시하였지만 그 령유권을 계속 행사하였다.

이 시기 리조정부의 《공도정책》을 악용하여 울릉도를 타고앉으려는 일본의 침입행위가 빈번했지만 리조봉건정부와 인민들은 그때마다 그것을 추호도 묵과하지 않고 단호하고도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1614년 일본사무라이들이 공개적으로 사람을 조선에 파견하여 《의죽도》(울릉도)를 탐사하려 한다는 강도적인 요구를 제기하였을 때 리조봉건국가는 즉시 동래부사 박경업을 시켜 왜인들에게 《의죽도》는 곧 조선의 《울릉도》이며 조선의 《공도정책》은 결코 《타인이 함부로 들어와 사는것을 허용한것이 아님》을 선포하고 섬에 드나드는 왜인을 해적으로 다스릴것이라고 단호히 선포하였다.

리조봉건정부뿐아니라 인민들속에서도 울릉도, 독도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활발히 벌어졌다.

17세기말 동래어민 안룡복의 투쟁이 그 대표적실례이다. 울릉도, 독도에 대한 왜인들의 침입과 략탈이 강화되자 안룡복은 1693년 직접 배를 타고 일본의 호끼(돗또리)번주를 찾아가 담판을 벌려 우산도(독도)가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인정시키였다.

그후 안룡복은 독도에 왜인들이 와 산다는 말을 듣고 《독도는 곧 우산도이며 우산도는 우리의 땅》이라고 하면서 1696년 울릉도와 독도에 건너가 놈들을 모조리 쫓아낸 다음 또다시 호끼(돗또리)번주를 찾아가 두번째 담판을 하였다. 이때 그는 《울릉, 우산(독도)량도감세관》이라고 자칭하면서 일본의 침범행위에 대하여 항의하고 호끼(돗또리)번주의 사죄를 받아냈다.

안룡복을 비롯한 인민들의 투쟁에 고무된 리조봉건정부도 1697년 4월 령의정 류상운의 제의에 따라 울릉도, 독도에 대한 순시제도를 재확정한 후 이를 강화하여 왜인들의 침입과 략탈을 엄격히 다스리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그후 울릉도, 독도에 대한 침략과 략탈을 거의 감행할수 없게 되였다. 이것은 리조 중기에도 봉건정부가 《공도정책》속에서도 울릉도, 독도의 령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것을 보여준다.

1868년 《명치유신》후 해외침략에 나선 일본은 《정한론》을 부르짖으며 1876년 총칼을 앞세워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강압체결하고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일본침략자들은 울릉도와 독도에 또다시 기여들게 되였다.

1881년 7명, 1882년에는 78명, 1900년에는 144명의 왜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자원략탈을 감행하였다 .

리조봉건국가는 왜인들의 울릉도, 독도에 대한 무모한 재침입과 관련하여 1880년대초에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개척정책》에로 이행하였다.

1882년에 일본명치정부에 항의문을 보내고 리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하는 102명의 현지조사단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조사하게 한데 이어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 륙지의 인민들을 울릉도로 이주시켜 농경지를 개척하였으며 울릉도의 행정관으로서 도장을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리고 1883년 3월 개화파의 중심인물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로 임명하여 울릉도, 독도개척사업을 맡아보게 하고 당시 울릉도에 와서 비법행위를 하던 일본인 254명을 전부 쫓아버리게 하였다.

또한 1900년에는 울릉도를 울릉군으로 승격시키면서 그 관할구역에 독도를 포함시키였다. 리조봉건정부의 이러한 적극적인 개척장려정책으로 동해바다가주민들, 특히 전라도지방 주민들이 많이 울릉도로 건너가 이곳과 독도에서 생산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게 되였으며 1900년에는 울릉도에 사는 조선주민이 1 700명(400호)으로 크게 늘어나고 경작지도 7 700마지기로 확장되였다.

울릉도가 개척되면서 그 부속섬인 독도에 대한 이곳 주민들의 진출과 활동도 적극화 되였다.

1904년 11월에 일본군함 《쯔시마》호가 독도를 비밀리에 측량하고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매해 여름이 되면 울릉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섬에 건너와서는 섬우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부근에서 어업에 종사한다.》고 기록한것은 그 일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울릉도, 독도개척사업이 추진되는 가운데 리조봉건정부는 일제의 재침책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1900년 10월 25일 칙령 41호를 공포하여 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세계에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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