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국인지휘관에게 베푸신 은정
강 위 룡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일혁명투쟁시기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련대성을 백방으로 강화하시면서 그들과 진실하고 혁명적인 동지관계를 맺으시였으며 그들에게 은정깊은 사랑과 뜨거운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간고한 투쟁의 나날에 그들과 맺으신 인연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계시면서 회고록의 갈피갈피에도 감회깊은 추억과 함께 그 이름들을 빛나게 아로새겨주시였다. 그가운데는 중국동북항일련군의 지휘관이였던 위증민의 이름도 있다.
위증민은 원래 중국의 내지태생이였지만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면서 그곳 당과 항일련군지휘부에서 책임적인 사업을 맡아한 지도적인물의 한사람이였다. 그런 관계로 위증민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 일이 누구보다 많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나시는 때마다 그에게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혁명적단결과 우의를 두터이하시였으며 그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사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항일전의 전구에서 어깨겯고 함께 싸우던 준엄한 나날 중국공산주의자들에게 베푸신 고귀한 은정과 숭고한 의리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이 많고많지만 그가운데서도 위증민에게 베푸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는 각별히 사려깊고 뜨거운것이였다.
그 이야기들가운데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위증민의 건강을 따뜻하고 세심하게 돌보아주신 한가지만을 여기에 적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에서 위증민에 대해 쓰시면서 그를 중국혁명에 대한 《위증민식》의 충실성을 지닌 혁명가로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을만큼 그는 중국혁명에 심혼을 다 바친 견실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런데 몸이 허약하여 늘쌍 고생이였다. 페도 나쁘고 심장도 약했다. 그가 모스크바에 가서 국제당 제7차대회에 참가한 후 인차 돌아오지 못하고 이듬해 2월에야 나오게 된것도 병때문이였다.
그는 그때 치료를 받은 덕인지 그해 여름에는 별로 앓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겨울에 접어들면서 다시 병이 도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1936년 겨울 무송의 만강으로부터 백두산일대에서 활동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기 위하여 장백으로 나왔을 때 그의 병세는 보통이 아니였다. 몸이 축갈대로 축가고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서 운신하기조차 힘들어하는 그를 사령부로 안내하면서 우리는 모두 그가 어떻게 그 먼길을 쓰러지지 않고 왔는지 놀랍기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앓는 몸으로 사령부를 찾아온 그를 뜨겁게 포옹해주시면서 《이 몸으로 그 험한 길을 왔단 말입니까.》라고 하시며 말씀을 잇지 못하시였다.
그처럼 병약한 몸으로 백두밀림의 눈길을 헤쳐온 그의 심정이 헤아려지시였기때문이였다.
…위증민이 몹시 앓으면서도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령부를 찾아오게 된 거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위증민은 그때 배타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하여 교하에 나갔던 관계로 주력부대를 따라나오지 못한 2, 3중대와 함께 사령부를 찾아온것이였다.
그는 떠날 때 앓는 자기를 보고 다른 부대의 밀영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고하는 우리 동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요. 내가 꼭 가야 하오. 내가 직접 김일성동지앞에서 자기비판을 하고 잘못을 빌겠소. 내가 이 길에서 죽는대도 나는 두렵지 않소. 사람이 의리를 지키다가 죽는것은 떳떳한것이요.》
조선인민혁명군의 새 주력부대편성사업에 지장을 준 배타주의자들의 책동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를 한품에 안으시고 따뜻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이야 피를 함께 나누며 싸우는 형제들인데 이러지 않은들 뭐랍니까.》
그 말씀에 위증민은 이렇게 말씀올리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가슴은 크나큰 격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얼마후인 1936년 11월 바로 곰의골어귀전투직후의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를 부르시여 후방밀영의 재봉대에 올라가서 적당한 곳에 밀영을 하나 지으라고 하시면서 거기에 위증민을 보내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환자가 여기에 있으려면 불편할터이니 우선 그를 데려다가 재봉대에 림시 있게 하고 빨리 집을 지어 그가 들게 하라고 하시였다.
위증민의 병치료를 위해서 안전한 곳에 집까지 따로 짓도록 조치를 취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면서 나는 그이의 뜨거운 동지애와 숭고한 의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나는 그길로 대원 한명을 데리고 후방밀영의 재봉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로 갈 때 위증민을 안내해주고 사령부의 지시대로 림시 재봉대의 한 병실에 그가 자리를 잡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바람받이를 피해서 잠풍한 곳에 두칸짜리 귀틀집을 한채 지었다. 집을 지을 때 물림을 잘하고 문짬을 잘 메우는 등 방안온도보장에 특별히 품을 들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따로 말씀이 계시였던것이다.
나는 귀틀집이 다되자 뜨끈뜨끈하게 불을 때서 집안을 덥혀놓은 다음 위증민이 그곳에 옮겨들게 하였다. 그날 위증민은 우리를 불러 식사를 같이하였다. 그자리에서 위증민은 김일성동지의 덕분에 자기는 목숨을 건지고 이해를 넘길수 있게 되였다고, 그이를 찾아 눈길을 헤치며 백두산으로 나올 때 자기는 그것을 자신의 마지막행군으로 생각하고 결사의 각오로 천리길을 걸었다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뜨거운 경모의 정을 표시하였다.
다음날 나는 그곳을 떠나 사령부로 와서 위대한 수령님께 임무수행정형을 보고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몹시 기뻐하시면서 집을 빨리 지었다고 치하하시였다.
나는 그이께 위증민이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에 감격해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한데 대해서도, 그가 진심으로 고마와하면서 마음놓고 병치료를 잘하겠다고 다짐한데 대해서도 그대로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면 됐다고 만족해하시면서 나에게 새로운 임무를 하나 더 주겠다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말씀하시였다.
이제는 집이 다되였으니 위증민의 약과 영양보충을 할 식료품을 보장해야겠소. 그는 병이 아주 중한데 잘 보살펴주어야겠소. 동무가 대원 한사람을 데리고 지방에 나가서 그에게 필요한 약과 식료품들을 구해들여와야 하겠소.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선 약으로는 《인조자라혈》을 구해야 하는데 이것은 보통 농민에게는 팔지 않으니까 19도구의 돈냥이나 있는 어느 집에 부탁하여 사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증민의 영양보충에 쓸 식료품도 어떤것을 얼마 사라고 품명과 수량까지 친히 찍어주시였다.
우유통졸임 얼마, 밀가루 얼마, 배추와 양념감 얼마…
이렇게 일일이 구체적인 지시를 주시던 그이께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그가 좋아하는 전병을 꼭 구해오라고 다심하게 이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압록강연안 어느 마을에 가면 독립군에 다니다가 땅을 사서 지주가 된 사람이 있는데 그를 찾아가서 잘 해설하여 자금방조를 받으라, 그의 재산이라는것이 독립군시절에 인민들로부터 모아들인 군자금으로 장만한것이니 그것은 응당 조국광복을 위한 사업에 씌여져야 한다고 하시면서 자금해결방도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리하여 나는 장백으로 나가서 많은 량의 약과 식료품을 구해오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에도 일을 잘했다고 거듭 치하하시면서 나에게 또다시 새로운 임무를 주시였다.
동무는 구해온 물자를 가지고 위증민에게로 빨리 들어가오. 이제는 물자를 구했으니 환자를 잘 보살피는것이 중요하오.
위대한 수령님께서 위증민을 위하여 벌써 세번째로 주시는 임무였다. 혁명동지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뜨겁게 넘쳐나는 임무를 다시금 받아안은 나는 벅찬 심정을 억제할수 없어 《알았습니다, 사령관동지! 명령을 집행하겠습니다.》 하고 힘차게 말씀드리였다.
그러는 나를 눌러앉히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그곳에 가면 동무들에게 내가 설을 앞두고 그리로 들어가겠다고 일러주오. 금년설을 우리 같이 쇠기요.
나는 그 말씀을 들으니 사령부와 떨어져 설을 쇠게 되지 않겠는가 하던 한가닥 위구가 씻은듯이 가셔지면서 날듯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지체없이 후방밀영으로 달려가 위증민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병문안인사를 전하고 그이께서 보내주신 약과 물품들을 전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보내주신 귀한 약과 많은량의 후방물자를 받은 위증민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뜨겁게 부르면서 말없이 격정을 터뜨리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 위증민은 부대에서 홀로 떨어져 설을 맞는 자기를 생각하시여 그이께서 우정 먼길을 오신다는것을 알고는 더구나 진정을 못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오신다는데 솜씨를 다 내여 준비를 잘합시다.》
이러면서 위증민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영접준비를 지휘하였다.
그는 우리 동무들이 위대한 수령님께 국수를 대접해드리기 위하여 국수분틀을 만드는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김일성동지께서 국수를 좋아하시는데 동무들이 참 잘 생각하였다고, 국수를 누를 농마는 자기가 구해오겠다고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해 설을 계기로 백두산최후방밀영에 가시여 위증민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농마국수도 달게 드시면서 항일련합군사업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시였으며 그의 건강에 대하여 더욱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그리고 적들이 목재채벌로 싸다니다가 밀영통로를 발견하게 되였을 때에는 시급히 자리를 옮기도록 친히 긴급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시였다.
1939년 10월 량강구에서 중요한 회의를 마치시고 떠날 때에는 위증민의 병치료와 안전을 위하여 사령부의 전령병을 포함하여 한개 소대를 떨구어주시였다.
위증민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기에게 돌려주시는 이 고귀한 은정을 잊지 못하여 생의 마지막순간에도 우리 수령님의 존함을 부르며 모두 그분을 찾아가라고 유언을 남기였다.
그는 흐려지는 의식을 다잡으면서 사령부로 찾아가는 비밀통로를 알려주고 이렇게 말하였다.
《김일성동지를 다시 뵙자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소. 김일성동지를 뵈옵게 되면 나의 마지막인사를 전해주오.
동무들! 김일성동지를 잘 모셔주기 바라오.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잘 싸우시오.
중조 두 나라 인민의 반일항전 만세!
중국혁명 만세!
조선혁명 만세!》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시였던 대원들을 그이께서 계시는 사령부로 떠밀어보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위증민의 최후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고 그는 우리 인민의 가까운 벗이며 전우였다고, 그는 중국혁명을 위하여, 두 나라 인민들의 반일공동투쟁의 승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고 하시면서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 중국인공산주의자를 동지로, 전우로 믿어주시면서 숭고한 사랑과 은정을 부어주시던 그 준엄한 시절의 사연깊은 이야기는 오늘도 어제런듯 잊혀지지 않는다.
정녕 우리 수령님은 혁명동지로 일단 인연을 맺으시면 국적도, 다른 그 무엇도 가리지 않으시고 사랑과 은정을
끝없이 베풀어주시는 혁명적동지애와 공산주의적의리의 최고화신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