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렬녀문에 깃든 전설

 

충렬사비와 함께 유교적도덕륜리를 찬양한 효자와 렬녀에 대한 기념문도 적지 않게 세워졌다.

효자렬녀문은 교훈으로 삼을만 한 효자, 효녀의 덕행이나 안해로서의 절개를 지킨 렬녀의 아름다운 소행을 전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문이다.

정문을 세워서 표창하는것은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효행이 기특하여 널리 소문나고 찬양되는 사람은 효자 아무개의 문이라고 이름을 달아 세워주었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그의 안해는 종신토록 수절하는것이 보편적인것으로 되여있었는데 정절한 이후 그의 갸륵한 소행이 널리 소문나거나 교훈으로 삼을수 있을 때 렬녀 누구의 문이라고 이름을 붙여 세워주었다.

적지 않은 문헌기록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효자렬녀문이 세워지게 된것은 그 특이한 행실이 널리 알려져 전설화되였거나 유교도덕륜리를 교훈으로 삼을수 있을 때 정문을 세워 그 소행과 미덕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나라에는 효자와 렬녀의 미덕과 관련된 인물 및 지명, 지물전설이 적지 않게 전하여오고있지만 그것이 모두가 문비로 세워졌거나 새겨진것은 아니다.

효자렬녀문을 세우는것은 당시 조정이나 봉건관청에서 유교도덕륜리를 찬양하여 《공신》칭호와 같이 상으로 하사하여 세우게 한것이 다수를 이룬다.

때문에 이런 효자렬녀비문은 전설화되였을뿐아니라 이렇게나 저렇게나 력사기록으로 남게 되였고 현재까지 유물로 보존된것은 없어도 그 사실여부는 전해오고있는것이다. 그런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같이 기록되여 내려오는 효녀 지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설화는 가난한 집 딸인 지은이가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나라 녀성들의 아름다운 품성을 보여주었다.

설화의 주인공 지은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며 나이 30이 넘도록 시집도 가지 못하였다.

그는 늘 어머니곁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었으며 품팔이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오기도 하여 어머니를 정성으로 섬기였다.

그러나 가난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서 혼자의 힘으로는 어머니의 끼니조차 제대로 마련할수 없었다.

괴로움과 안타까움으로 모대기던 지은은 어머니 몰래 부자집에 가서 종노릇을 하기로 하고 쌀을 얻어왔다.

지은은 이른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자집에 가서 갖가지 고역에 시달리다가도 집에 와서는 기쁜 마음으로 밥을 지어 어머니에게 드리군 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어머니는 밥상곁에 딸을 불러앉히고 《전에는 밥이 험해도 맛이 좋더니 이즈음에는 밥은 좋으나 맛이 전과 같지 않으며 마치도 배속을 칼로 찌르는듯하니 이것이 웬 일이냐?》고 물었다.

딸이 자기가 종이 된 사연을 더는 숨길수 없어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나때문에 네가 부자집 종이 되였으니 차라리 빨리 죽는것만 못하다고 하면서 목놓아울었다.

그바람에 딸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슬피 울었는데 그 광경을 본 길가던 사람들이 모두 그들모녀를 애처롭게 여겼다.

후날에 그가 살던 마을을 《효양방》이라고 하고 표말도 세우도록 나라의 표창이 내려졌다.

설화는 길지 않은 이야기를 통하여 당시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와 고난속에서도 서로 아끼고 위해주는 따뜻한 인정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진실하게 보여주었다.

고려때 낮은 벼슬자리를 한 황수라는 사람의 형제들이 부모공양과 효도로 명망이 높았고 자손들도 그 미덕과 인륜을 따랐기에 부모들은 자식복을 받아 70살을 넘게 살았다고 한다.

그 소문을 들은 조정의 한 관리가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늙은 부모들이 마당에까지 나와 례의를 표하는지라 그도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관리는 《지금 세상에 사대부간에도 효자가 드문데 성안에 이같은 효자가문이 있을줄이야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하고는 서사더러 글을 지어 임금에게 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극한 효도를 찬양한 정문이 마을입구에 세워지게 되였다.

《고려사》의 《효우》항목에서는 권거의란 사람의 소행과 관련하여서도 특이한 문을 세워준 사실을 전하고있다.

권거의는 여러 관직을 거쳐 부령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당시 례법대로 고스란히 3년간 묘막에서 거상하였는데 그 효도가 남달리 극진하였다고 한다.

당시만 하여도 3년간 묘막에서 거상하는 사람이 별반 없었고 100일이 되면 상복을 벗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그의 소행을 가상히 여겨 교훈으로 삼으려고 려문에 정표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의 《렬녀》항목에서는 당시 부녀의 미덕의 하나로 일러온 정절을 찬양하여 여러 녀인들의 소행을 전기식으로 옮겨놓고있다.

그에 의하면 진주의 호장인 정만의 안해 최씨는 4남매를 둔 현숙한 녀인으로서 용모도 아름답고 도덕의리에서도 밝고 깨끗한 녀인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을에 왜구가 침노하여 재물을 략탈하고 부녀자들을 끌어다가 협박하고 강간하였다.

하기에 최씨부인은 자식들을 데리고 급히 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종시 왜놈들에게 잡히고말았다.

놈들은 최씨부인에게 순순히 응하면 살려주고 반항하면 자식들까지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최씨부인은 나무를 붙안고 저항하면서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 더러운 놈들아, 몸을 더럽히고 사는것보다는 차라리 절개를 지키고 죽겠다.》고 하면서 덤벼드는 왜놈을 차버리자 악에 받친 놈들은 최씨를 살해하고 두 자식을 랍치하여갔다.

어린것은 어머니의 시체를 붙안고 울고 갓난애는 기여가 어머니의 젖을 빨다가 솟아나는 피가 입으로 들어가 결국은 죽고말았다.

목격한 현실이 너무도 비참하고 원통스러워 마을사람들은 왜놈들의 죄행을 고발단죄하고 최씨부인의 의로운 소행을 표창하여 정문을 세워주고 살아남은 아들을 고을부역에서 면제해주었다고 한다.

《고려사》의 《렬녀》항목에서는 최씨부인의 소행과 비슷한것으로서 애국적지조를 지켜 왜적과 맞서싸운 배씨부인의 소행에 대하여 전하고있다.

왜적이 침노해왔을 때 소박한 농촌녀인인 배씨부인은 왜적과의 싸움터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집에 남아있었다.

왜구가 그가 사는 마을에까지 달려들어 략탈과 강간만행을 벌려놓기 시작하자 이를 피해 배씨부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급히 강가로 내달렸다.

강물이 몹시 불어 헤염쳐 건너갈 형편이 못되였으나 배씨부인은 붙잡혀 욕을 보기보다는 죽을지언정 강을 건너볼 판이라고 결심하고 사품치는 강물속에 들어섰다.

이윽고 배씨부인네를 발견한 왜적무리가 그들을 뒤쫓아 달려오면서 돌아서면 죽이지 않겠노라고 회유하는 한편 활에 화살을 메워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왜적의 흉심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배씨부인은 《이놈들아, 왜 나를 빨리 죽이지 않느냐. 죽으면 죽었지 내 어찌 원쑤들에게 몸을 더럽힐소냐.》고 주저없이 맞서 웨쳤다.

왜적이 날린 화살에 두 자식이 쓰러지자 배씨부인은 분노에 치를 떨며 놈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왜적무리는 연방 화살을 쏘아 끝끝내 배씨부인마저 쓰러뜨리고야말았다.

그후 배씨부인의 의로운 소행과 대적기풍을 표창하여 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전설은 죽을지언정 꺾이지 않는 조선녀성의 굳은 절개와 원쑤에 대한 증오를 감명깊게 보여주면서 침략자들이 감행한 야수적만행에 대하여 폭로하고있다.

《고려사》의 《렬녀》항목에는 또한 회양부의 한 마을에서 한밤중에 범이 달려들어 권가성을 가진 남정을 물어가는것을 보고도 여러명의 장정들이 무서워 달려들지 못하고있을 때 그의 안해가 필사적으로 범에게 다가가 남편의 허리를 끌어안은 다음 문지방에 발을 버티고 소리쳐서 범을 쫓아버린 전설같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을앞에 그 안해의 용맹과 부덕을 찬양하여 정문을 세워주었다는것을 기록하고있다.

《조선전설집》에는 《초계의 염씨렬부》라는 제목으로 전설과 함께 비각과 정문이 세워진 유래를 밝혀주고있다.

경상남도의 초계지방에 가면 염씨부인이 정절을 굳세게 지켜 나중에는 자결까지 한 소행을 표창하여 세운 비각과 정문이 있었다고 한다.

염씨는 가난한 집 사람에게 시집을 와서 넉넉하게 살지는 못하였지만 부부간에 위하는 마음이 크고 마음씨와 함께 외모도 아름답고 단정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런데 이웃동네에서 부자티를 내며 거들먹거리는 윤씨라는자가 눈독을 들이고 염씨부인을 탐내게 되였다. 그러나 남편이 있는 부녀자인지라 함부로 덤벼들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마음이 무던한 그의 남편을 불러 동정이나 하듯 그렇게 남의 소작살이를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서울로 가서 장사를 하는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의 남편은 장사를 하자면 밑천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그자는 선심이나 쓰듯 내가 돈을 대줄테니 서울에 가서 금새를 알아보고 마음나는 장사를 펴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사이에 집에서 먹을 쌀도 가져가라고 하였다.

염씨 남편은 윤부자의 《동정》에 허리굽혀 여러번 사례하면서 장사를 잘하여 꼭 갚아주겠노라고 하고 기분이 좋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가지고온 쌀을 안해에게 넘겨주고 다음날 서울로 장사길을 떠났던것이다.

염씨부인은 남편의 뜻인지라 말리지도 못하고 윤부자가 왜 자기 집안을 도와주느라고 그렇게 왼심을 쓰는지 의심쩍어하였다.

남편이 서울로 떠난지 사흘만에 윤부자가 집에 와서 안팎을 돌아보고는 듣던바와 다름이 없이 궁색하게 살고있다면서 장사길은 내가 주선한것이니 이제 잘살게 될것이라고 그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는 부족한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시형처럼 믿고 말하라며 한담까지 하다가 늦어서야 자리를 떴다.

이렇게 친척처럼 《돌봐주》고 날이 저물면 인차 자리를 뜨군 하니 염씨부인은 그를 더욱 인사성있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마을의 이웃집들에서는 윤부자가 남편도 없는 염씨댁을 별스레 자주 찾아들군 한다고 걱정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였다.

윤부자는 술에 취하여 염씨부인을 찾아들어 횡설수설하다가 오늘은 집에 갈것 같지 못하니 어서 자리를 펴달라고 염씨부인을 달래였다.

염씨부인은 이래서는 안된다며 남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고 애걸하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였다.

윤부자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이제는 내가 남편없는 이집을 드나들며 《사통》한것을 동네방네 다 알고있으니 쏟아놓은 물을 퍼담기가 아닌가고 하면서 달려들어 염씨부인을 욕보이려 하였다.

가까스로 윤부자를 뿌리쳐 쫓아낸 염씨부인은 자신을 후회하며 당장 물에 빠져죽고싶었지만 남편이 돌아온 다음에 결판내기로 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며칠후 먼길 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그간 소식을 묻는 남편에게 염씨는 윤부자놈이 한짓과 그 음흉한 속심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남편은 안해의 말을 듣고 분하여 온몸을 떨었으나 그자의 돈을 얻어쓴데다가 이제 떠들어야 소문만 흉하게 날테니 어찌할바를 몰라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한편 윤부자는 남편이 돌아온지도 3일째 되는데 조용하니 그의 안해 염씨가 남편에게 부정한 사실을 숨겼거나 아니면 남편이 알고도 소문이 날가바 모르는체 하고있는상싶어 그 진속을 알아보려고 자기 집에 불러 속을 떠보았다.

애써 참고 지내던 남편은 그제야 자기에게 장사밑천을 대준것은 고마운 일이나 그것을 턱대고 남의 안해를 욕보이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자 윤가는 염씨 남편에게 그가 나와 살자고 《간통》한것이니 자네는 다른 색시를 얻어 재미나게 살아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리고는 동네방네 소문을 놓기를 염씨부인이 그전부터 나를 좋아하여 《사통》까지 하였는데 이제는 나와 살기로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염씨부인은 너무도 기막히고 억울하여 관가에 고소하였다.

그 기미를 안 윤가는 고을원을 찾아가 돈냥을 찔러주고는 염씨가 본래부터 자기를 따르기에 《사통》했으니 첩으로 맞아들이게 해달라고 졸라 끝내는 승낙을 받아냈다.

다음날 염씨부인을 관가로 불러낸 고을원은 염씨에게 말하기를 너는 처음부터 윤부자의 재산을 탐내여 남편 몰래 《사통》하다가 이제 와서 고발하니 이미 《부정한 행실》에 익은 네게 무슨 창피라는것이 있겠는가 하면서 염씨를 희롱하려들었다.

염씨부인은 너무도 분하여 라졸이 차고있던 장도칼을 빼내여 그자리에서 자결하였다.

일이 이쯤되자 그 소문이 경상도전역에 퍼져나가 염씨의 억울함을 동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결과 고을원을 파직시키고 윤가는 잡아들여 죄를 엄하게 다스리라는 감사의 령이 내려지게 되였다. 그리고 정절을 지켜 자결한 염씨부인의 집앞 길가에 정문을 세워주고 이어 렬녀비도 세우게 하였다고 한다.

그후 염씨의 렬녀다운 소행과 방탕한 윤가와 원의 치사한 죄행이 전설로 전해지게 되였다.

그런데 하루는 과부집에 들었던 어떤 난봉군이 지나가던중 렬녀비에 욕질을 퍼부으며 오줌을 누다가 갑자기 중풍을 만나 그자리에 쓰러지는 봉변을 당하게 되였다.

며칠후 겨우 소생한 난봉군은 자기 잘못을 빌고 돈을 내여 비각을 중수하고서야 편안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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