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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들에 새겨진 전설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황룡사와 그 사찰에 안치된 장륙불상과 관련된 기록은 너무도 특이하여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사화되여 전하여온다. 553년(진흥왕 14년) 남쪽에 터를 잡고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황룡이 나타나므로 재앙을 피하기 위해 거기에 사찰을 세우고 그 이름도 《황룡사》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사찰건설은 그 둘레에 담장까지 축조하다나니 3년만에야 끝을 보고도 불상은 앉히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쪽바다로부터 큰 배 한척이 기슭에 와서 닿기에 올라가보니 첩문(알리는 글)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인디아의 아육왕이 황동 5만 7 000근과 황금 5만푼을 모아 석가의 세 불상을 부어 만들려다가 성취하지 못하고 배에다 실어 띄워보내니 원컨대 인연있는 땅에 닿아 장륙(불상의 키가 6자 됨을 말함.)의 존귀한 모습이 되여달라고 씌여져있었다. 아울러 석가모니상과 두 보살상(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견본이 실려있었다. 배가 닿은 그 고을의 관리가 이 사연을 자세히 국왕에게 아뢰였는데 왕이 령하기를 그 고을 성의 동쪽켠 깨끗한 터에 동축사를 세우고 견본으로 보내온 세 부처를 잘 모시고 실어온 금과 동을 서울로 실어다 석가모니의 장륙불상과 두 보살상을 주조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한다하는 주조재사들과 주지들이 모여 몇해 신고끝에 장륙불상(3만 5 000여근)과 두 보살상도 완성하여 세 불상을 모두 황룡사에 안치하였다. 그리하여 황룡사에 처음으로 황금철로 주조한 장대한 석가모니의 불상과 보살상이 안치되여 불교의 발상지인 인디아는 물론 그 주변나라와 멀리에 있는 대소국에도 소문이 자자했고 그 주조술이 높이 찬양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런 사실을 전하면서 석가모니불상을 만들게 된 동기에 대하여서도 전설적으로 전하고있다. 옛날 인디아 아육왕은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하고 불경을 전파시키던 생존당시에 공양하지 못한것을 한스럽게 여기여 금과 동을 모아 그의 불상을 세번이나 주조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시 왕의 태자도 주조에서 실패하자 우리 힘만으로는 성사시키기 어렵다고 부왕에게 여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 결심하고 황금과 동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린방의 큰 나라들과 멀리의 중소국들에 보내여 성사시키려고 하였는데 그것이 우리 나라에 와서 주조되여 그제야 인디아의 아육왕도 한시름을 놓았다고 전하여오고있다. 전설은 우리 인민들의 재능과 기술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있었는가 하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충청남도 론산에는 그리 크지 않은 관촉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그 앞마당에는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세운 큰돌불상 미륵불이 세워져있다. 《미륵불》이란 일명 《미륵보살》이라고도 하는데 현재는 이른바 낮은 하늘세계인 도솔천에 머물러있으나 앞으로 현실세계에 내려와 《부처》가 된다고 하는 보살의 이름이다. 여기에 세워진 미륵불은 큰 돌 두개를 다듬어 상하반신으로 붙여서 만든 높이가 18.12m, 귀의 길이가 약 2.7m, 두눈섭사이가 약 1.8m, 머리우에 씌운 관의 높이가 약 2.4m인 돌불상이다. 이것은 유명한 돌불상의 하나로서 신비한 전설을 안고있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해 봄날 론산지방에 사는 한 녀인이 산에 올랐는데 서쪽켠에서 갑자기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나기에 달려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돌 하나가 땅우로 솟아나왔다. 녀인이 당한 이 사실은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금이 이게 무슨 조짐인가고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한 신하가 고하기를 《범상치 않은 일이오니 그 돌로 부처를 만들어세우는것이 어떠하오리까?》고 하였다. 그래서 왕의 어명을 받고 혜명이란 승려가 석공을 골라 100여명의 인부를 데리고 땅에서 솟아오른 돌을 다듬어 불상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런데 현지에 가보니 돌이 통은 크나 높이가 낮으면서 땅에 굳건히 박혀있는지라 그 돌로는 옹근 미륵불을 만들수 없었다. 맞춤한 돌을 수소문한 끝에 려산에 웃도리를 할 돌이 나타났다는 통보를 받고 그 두 돌을 각각 가공하여 하나의 불상이 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난사로 되는것은 불상의 밑돌우에 웃부분의 돌을 올려세우는것이였다. 돌이 너무도 크고 웅장하여 어떤 힘으로도 들어올릴 방책이 서지 않았다. 승려 혜명은 경을 외워 올릴수도 없는 일이고 하여 머리쉼도 할겸 산아래 강기슭을 거닐며 생각을 더듬는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두 어린이가 진흙으로 미륵불 웃부분과 아래부분을 각각 빚어놓았다. 그들이 모래우에 아래부분을 놓고 거기에 산처럼 모래를 쌓은 다음 그우에 웃부분을 올려놓고 쌓았던 모래무지를 파제끼니 미륵불이 하나의 불상으로 세워지는것이였다. 아이들이 하는것을 지켜보고있던 승려는 육중한 돌불상도 저렇게 세우면 되겠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며 웃음어린 소리로 중얼거리자 방금까지 놀던 아이들이 어데론가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승려는 문수보살(지혜를 맡아보는 부처)이 그 아이들을 보내여 방도를 가르쳐준것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승려 혜명은 아이들이 하던 방법대로 밑단에 흙과 모래를 쌓아올린 다음 웃부분을 끌어올려세우고 밑부분에 쌓은 흙을 깨끗이 파내고 털어버림으로써 웅건하고 장중한 미륵보살상을 세워놓았다. 그리하여 고려의 불상조각술을 자랑하듯 산마루에 큰 미륵보살이 생겨나고 그후에는 불상을 지키는 작은 사찰인 관촉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미륵불의 한쪽모서리가 떨어져 다시 붙여놓은 흔적이 있는데 거기에도 여러가지 전설이 깃들어있는바 그중 하나를 간단히 본다면 다음과 같다. 고려에 침입한 외적의 무리가 어느 강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적들이 강의 깊이를 알수 없어 망설이고있는데 갓쓴 웬 승려가 다리만 걷어올리고 강을 쉽게 건느는것이였다. 적장은 그것을 보고 병졸들을 내몰았는데 모두 강물속에 빠져 죽어버렸다. 적장이 승려에게 속았다는것을 알고 분개하여 뒤쫓아가 칼로 내리치자 갓의 한쪽모서리가 떨어져나갔을뿐 승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후에 전한데 의하면 이때 론산의 미륵불이 승려로 변신하여 적들을 유인하였는데 그때 적장의 칼에 맞아 갓깃이 떨어진것이 미륵불의 귀모서리였다고 한다. 금강산 만폭동 웃골짜기 절벽바위에 새겨진 묘길상도 조각술에서나 그 유래에 있어서 전설적으로 유명한 불상의 하나로 전해진다. 묘길상의 본래이름은 아미타여래상인데 18세기말에 이 조각상 오른쪽아래에 누군가 《묘길상》이라고 새긴 후부터 그렇게 전하여온다. 묘길상은 자연바위벽에 새긴 부처상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상이라고 볼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이름난 승려 나옹이 아미타불을 숭상하면서 천당에 갈 념원을 안고 거의 반생동안 새긴것이라고 한다. 묘길상이 조각된 다음 그밑에 돌로 축대를 쌓고 암자를 세웠으며 그앞에 석등을 세웠는데 그것 역시 고려시기 유물로서 유명하여 만폭동을 찾는 사람들은 금강산의 일만경치와 함께 이 조각상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금강산의 표훈사로 가는 길가에는 3각형모양의 큰 바위에 새겨진 세 불상이 있다. 세 부처의 조각은 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미로 두드러지게 표현한 능숙한 수법과 균형이 잘 째이고 조화로우면서도 장중감을 느낄수 있게 형상되여있다. 전설에 의하면 3각형모양의 이 바위가 먼 옛날에는 없었는데 사찰들에서 석가상과 그 량옆에 보살상을 놓게 되면서 세 불상을 새길수 있게 땅에서 솟아났다고도 하고 하늘에서 떨어졌다고도 전한다. 세 불상을 새긴 바위라고 하여 바위이름을 《삼불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바위의 앞면에 세 불상이 크게 새겨지자 사람들은 길가에서 그 앞면에 새겨진 부처상을 보고 표훈사로 올라갔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뒤길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한 조각가가 사람들이 표훈사에 올라왔다가 되돌아갈 때 각이한 부처상을 볼수 있도록 바위돌 뒤면에 60개의 작은 부처를 새겨넣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3각형모양의 큰 바위의 앞면에는 세 불상을 새겨넣고 뒤면에는 60개의 작은 불상을 새겨넣게 된 사실과 관련하여 《삼불암과 울소》라는 전설이 전하여진다. 전설에 의하면 앞면의 세 불상은 당시 유명한 석공이였던 하달이란 사람이 새긴것이고 뒤면 60개의 불상은 부처를 새기는데 기술이 능한 표훈사의 역승이 새긴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표훈사 주지의 령을 받고 부처를 새겼는데 주지가 이르기를 정성을 다하되 한날한시에 끝내야 하며 부처앞에서 이에 대하여 서약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만약 이를 어기는 사람은 죄를 쓰고 스스로 장안사로 내려가는 길목의 검푸른 소에 몸을 던져 속죄하여야 한다는것이였다. 앞면을 맡은 하달은 자기는 명석공이니 부처 셋을 쉽게 새기고 이길것이라고 단정하고있었다. 이러한 때 뒤면을 맡은 역승 역시 자기가 맡은 60개의 작은 불상에 대한 상이 련달아 떠오르니 뒤지지 않을 확신이 생겨 정을 부지런히 놀리였다. 앞면을 맡은 하달이 사흘만에 마지막정대를 칠 때 뒤면을 맡은 표훈사의 역승이 다 새겼다고 소리쳤다. 결국 하달은 한발 뒤진것으로 하여 부처앞에서 다진 서약을 어긴데 대한 속죄로 돌가루도 미처 털지 못한 몸을 소에 던졌다. 며칠후 그의 시신이 기슭에 나타났는데 너무도 많은 돌가루를 뒤집어쓴 시신은 차츰 길다란 바위로 굳어지게 되였다. 이것은 후날 《시체바위》라고 불리워졌다. 이 비극적인 소식이 그의 집에 전해져 불원천리 달려온 하달의 세 아들이 시체바위를 붙안고 오열을 터쳤는데 그때로부터 밤이면 이 소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군 하여 《울소》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삼불암과 관련된 명석공 하달에 대한 비극적사연을 전하는 《삼불암과 울소》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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