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과 성문에 깃든 전설

 

우리 나라는 땅면적은 크지 않지만 도읍과 고을마다에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산성이 쌓아져 위용을 떨치고 루정이 있는 성문이 각 방면에 세워져 성곽으로서의 장쾌함을 드러내보이고있다.

도읍지의 큰 성들인 평양성과 대성산성 등이 력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는가 하면 고을을 중심으로 하여 험준한 산세에 맞게 세워져 외적을 막아내는데서 위용과 군세를 떨친 평안북도 피현군의 백마산성과 구성시의 구주성, 녕변군의 철옹성도 철벽의 성새로 이름이 높다.

뿐만아니라 임진조국전쟁시기 이름을 날린 행주산성과 연안성도 있다.

또한 옛날부터 황해금강으로 널리 알려진 장수산성과 구월산성이 있으며 경치아름다운 정방산성도 이채를 띤다.

이외에도 지방과 고을마다에 크고작은 산성들이 수다하다.

평양성은 고구려가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쌓은 성으로서 성둘레가 무려 40여리에 달하는 큰 성이였다.

평양성의 성문으로는 주로 성의 6개 방면에 크게 세워졌는데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동쪽에 장경문, 서쪽에 보통문, 남쪽에 함구문, 북쪽에 칠성문, 정동쪽에 대동문, 정남쪽에 정양문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성의 정동쪽에 세워진 성문인 대동문은 대동강을 앞에 끼고 강건너 멀리 펼쳐진 넓은 벌판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는 망루로서 여러 전란들, 특히는 임진조국전쟁당시 평양인민들이 왜적을 맞받아 용감하게 싸운 위훈을 간직하고있는 력사가 오랜 큰 성문이다.

평상시 대동문은 동남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상거점이였으며 문루우에 종(평양종)을 걸어놓고 인경파루(새벽 4시에 치는 종을 파루, 저녁 10시에 치는 종을 인경이라고 한다.)로 시간을 알리고 평양성의 6개의 대문을 같은 시각에 여닫게 하였다.

대동문 다락에 오르면 강과 어울려 멀리로는 대성산, 가까이로는 모란봉과 릉라도, 반월도가 한눈에 안겨오며 대동강아래쪽으로 양각도와 그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벌판, 점점이 아물거리는 산야를 굽어볼수 있다.

하기에 《읍호루》라는 전설적인 별칭도 붙게 되였다. 대동문 문루의 란간에 기대여서면 대동강의 맑고 정갈한 푸른 물을 두손으로 움켜담아 떠올리고싶은 생각이 난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상징적으로 달아 전하였던것이다.

문루에는 16세기 시인이며 명필인 양사언이 쓴 《대동문》이라는 현판과 함께 그 옆면에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박위가 쓴 《읍호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동문은 문루를 규모가 크고 수법이 뛰여나게 건설함으로써 우리 선조들의 건축기술과 예술적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준 자랑스러운 유적유물의 하나이다.

하기에 평상시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련광정과 함께 명소의 하나로 손꼽히였으며 지방관리들은 물론 평양성에 사는 청춘남녀들도 이곳을 돌아보고서야 대동강가에서 련정의 시작을 떼군 하였다고 한다.

보통문은 6세기에 평양성을 쌓을 때 함께 세웠는데 지금의 건물은 여러차례 보수개건되여오다가 1473년에 고쳐 지은것이다.

사람들은 이 문루에 오를 때마다 저녁해와 함께 아침해를 다시 보는듯 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고 하여 처음엔 《우양관》이라고 불렀고 그후로 보통강의 성문이라 하여 《보통문》이라고 일러오게 되였다.

옛날부터 보통문 문루에 올라 보통강으로 드나드는 나루배를 살펴보며 손님들을 손저어 바래워주는 모습이 너무도 황홀하고 정겨워 《평양8경》의 하나로 《보통송객》을 일러왔다.

보통문에는 평양성과 함께 왜적을 반대하는 평양인민들과 명장들의 애국투쟁사적도 깃들어있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왜적이 평양성을 일시 강점하였을 때 이곳 인민들과 군사들은 보통문과 함구문(남문)을 통하여 성안에 도사리고있는 왜적들을 일제히 공격하여 무리죽음을 주었다.

이때 살아남은 적들이 성안의 건물들에 불을 달아놓고 도망쳤는데 보통문만은 무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바다속에서도 살아남은 보통문을 보고 신통력을 지닌 문이라고 하여 《신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칠성문은 평양성의 북문으로서 보통문과 함께 서북쪽 의주방면으로 통하는 성문이다.

칠성문은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운 후 고려때에 고쳐짓고 리조에 들어와서 문루를 성벽지형에 어울리게 다시 고쳐지었다.

칠성문은 모란봉의 서남쪽 등마루에 위치한것으로 하여 옛날부터 군사진이 배치되여있었으며 이 문을 통하여 드나들었다고 한다.

평양성에 사는 장정치고 칠성문으로 드나들며 무술을 익히지 않고서는 청장년대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옛날 보통강기슭에 억대우같은 청년이 살았는데 나루배를 타고 나드는 길에서 우연히 칠성문아래 가까이에 사는 처녀를 알게 되여 혼사문제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처녀도 총각이 마음에 들었으나 아버지를 찾아뵙고 승낙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총각은 어느날 처녀의 아버지를 찾아뵙게 되였다.

로인장은 대뜸 칠성문을 드나들며 무술을 익힌적이 있는가고 총각에게 물었다.

청년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있기에 생활이 여의치 못하다보니 미처 무술을 익힐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고 솔직히 말하였다.

로인장은 그럴만도 하다만 평양에 사는 청장년치고 아침저녁으로 칠성문을 드나들며 달음박질이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없거늘 총각치고는 한가지 크게 모자라는 점이 있는지라 허우대좋은 그 청년을 두루 살펴보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우리 딸애를 귀히 여긴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칠성문으로 드나들며 무술을 익혀보게.》

청년은 로인장의 그 참뜻을 깨닫고 그후부터 칠성문으로 드나들며 무술을 익힌 다음에야 로인장을 찾아가 동의를 얻어 성례를 치르었다고 한다.

이처럼 칠성문은 평양성의 천연군사요새로서 침노하는 적을 요진통에서 막아낸 성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대성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처음으로 대성산앞에 안학궁터를 잡고 궁궐을 세운 다음 그것을 옹위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대성산은 옛날 아홉 룡이 살며 지키고있다고 하여 《구룡산》이라고도 불러왔다.

평양성과 더불어 력사가 오랜 대성산성은 중요한 군사기지로, 젊은 장수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연습장으로 널리 사용하던 곳이다.

뿐만아니라 남녀장수가 서로 경쟁하며 도술을 익히고 련정을 속삭이던 사연도 안고있다.

산성으로 력사에 자취를 남긴것은 평안북도 피현군에 있는 백마산성인데 이 산성에는 1636년 외적이 침입해오는것을 림경업장군의 지휘하에 일망타진한 통쾌한 전투담이 전설화되여 깃들어있다.

평안북도 녕변군의 남산과 진망산, 모란봉과 약산의 험준한 지세를 리용하여 철벽의 요새로 쌓아진 철옹성에도 전설이 깃들어있다.

전란과 결부되여 널리 알려지고 전설화된것의 하나로 994년 평안북도 구성시에 쌓았던 구주성을 들수 있다.

이 성은 이름그대로 산줄기들이 시내로 가로세로 내리뻗은 모양이 마치도 거부기잔등과 같다고 하여 《구주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구주성은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영웅적위용을 떨친 성새이다.

외적의 침입때 적군을 수세에 몰아넣고 일망타진하는 큰 공로를 세운 강감찬, 양규, 김숙흥장군에 대한 애국명장전설과 함께 애어린 처녀의 몸으로 남복차림을 하고 선봉장이 되여 적진에 뚫고들어가 침략군을 전률케 한 설죽화의 애국충정의 위훈을 전하는 전설들이 바로 이 구주성에 깃들어있다.

따라서 구주성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많은 력사문헌과 명장전기들에 올라있는 력사적인 성새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있다.

이외에도 명승지로 널리 알려지면서도 산성으로 둘러싸여있는 고장이 수없이 많다.

구월산성은 황해남도 안악군 구월산의 험하고 날카로운 지세에 의거하여 쌓아진 돌성의 하나이다.

구월산은 옛날부터 뛰여난 경치와 명소들이 많아서 명승지의 하나로 손꼽힌다.

여기엔 기묘하게 생긴 여러가지 형국의 바위들이 솟아있는가 하면 못과 폭포도 장관이여서 봉우리마다 전설적사연이 깃들어있는것이 적지 않다.

옛날 구월산성은 황해도 5개의 주요성들중의 하나로서 성안에는 큰 무기고와 량식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변고을들에 배치된 군사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공급해주군 하였다.

16세기 중엽에는 림꺽정을 위시한 농민폭동군이 구월산을 근거지로 하여 맹렬한 활동을 벌렸고 그후 일제침략을 반대하는 반일의병투쟁도 힘차게 벌어졌다.

이외에도 임진조국전쟁시기 이름을 날린 행주산성은 권률장군의 지휘밑에 성내 녀성들이 치마폭에 돌을 날라다 왜적을 쳐없앴다고 하여 행주치마전설과 함께 그 이름이 불리워지게 되였다.

연안성도 임진조국전쟁시기 리정암장군의 지휘밑에 왜적을 속여넘겨 《연안대첩》의 승리를 안아온 갖가지 지략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있다.

이외에도 《홀어머니산성》전설을 들수 있다.

전라북도 순창에서 전라남도 담양으로 가는 큰길옆에 인공적으로 쌓은듯 한 산성이 있는데 그것을 《홀어머니산성》이라고 불러온다.

옛날 전라북도 순창읍에 신씨성을 가진 현숙한 부인이 있었는데 그는 시집온지 얼마 안되여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였다.

사람들은 부인의 현숙함과 절세의 미모에 감탄하며 그의 꽃다운 나이가 아까워 좋은 혼처자리라도 다시 나섰으면 하고 은근히 마음을 써왔다.

그러던중 같은 동리 설씨라는 젊은 선비가 세도도 있고 가문의 평판도 좋은데 그만 안해를 잃고 젊은 홀아비로 살아가는지라 신씨부인과 짝이 맞는다고 하면서 한사람이 중매군으로 팔걷고 나서게 되였다.

하루는 중매군이 신씨부인을 찾아가 이보다 좋은 자리는 다시 없을거라며 빨리 승낙하라고 하였다가 그만 거절당하고말았다.

설씨는 자기 집안이나 자신의 인격으로 보아 짝이 기울지 않으련만 거절당하고 속에 불이 일어 술과 글로 마음을 달래다가 자신이 직접 부인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는 면구스럽지만 찾아왔노라고 례의를 표시하고 그저 거절하기보다는 내기를 해서 내가 지면 다시는 청혼 안할테니 자기의 마지막소원을 들어주어 이 마음의 불을 꺼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토로하였다.

신씨부인은 선비홀아비의 마지막청원마저 거절할수 없어 마음을 다잡고 무슨 내기인지 말해보라고 하였다. 선비는 의외로 승낙을 받아낸지라 《내가 굽이 석자 되는 나막신을 신고 서울로 갔다올 사이에 부인은 이곳 서쪽에 있는 작은 산에 널려있는 돌로 산성을 석자 높이로 쌓아놓기로 하되 만약 여기서 내가 지면 다시는 청혼하지 않고 물러서리다.》고 하였다.

이렇게 내기가 시작되여 그 이튿날부터 신씨부인은 자신만만하게 성을 쌓아갔다. 그것은 아무리 장사라도 나막신을 신고 서울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는것은 무척 어려운 일로 되겠는데 설씨가 한낱 선비이고보면 승산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마침내 마지막돌을 쌓아놓은 그가 《후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주저앉아 쉬려고 할 때 설씨가 불쑥 앞에 나타났다.

신씨부인은 《자, 이렇게 성을 다 쌓고 쉬는 참이오니 제가 이겼소이다.》 하며 웃어보였다.

그러자 설씨선비는 신씨부인의 치마를 가리키며 《아직 치마에 묻은 흙도 털지 못하고 앉아있으니 내가 이겼소이다.》고 하였다.

미처 치마의 흙을 털어버리지 못한것은 사실인지라 산성을 다 쌓아놓고도 진것이 너무도 분하여 신씨는 그 산성밑 수백척 되는 물속에 몸을 던지고말았다.

그때부터 신씨부인이 쌓은 이 산성을 《홀어머니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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