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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승을 자랑하는 루정과 관련한 전설
절승경개를 자랑하며 우리 인민의 뛰여난 재능과 건축술을 보여주는 련광정은 현재 평양시 중구역의 대동강기슭에 자리잡고있다. 이 정각에서 산수를 바라보면 옆으로는 대동강 푸른 물이 감돌아흐르고 강웃쪽으로는 꽃망울을 활짝 펼친듯 한 모란봉이 바라보이며 그아래로는 청류벽, 그 맞은편에는 릉라도가 비단필처럼 펼쳐져 일만경치를 한눈으로 바라볼수 있는듯 하다 하여 《제일루대》 또는 《만화루》라고도 불러왔다. 련광정은 전망경치가 아름답고 루정이 웅장화려한것으로 하여 《관서8경》의 하나로 일러왔으며 여기에 깃든 전설도 적지 않다. 이 루정은 대동강으로 몰려드는 외적을 물리칠 때엔 군사지휘처로 리용되였으며 임진조국전쟁시기 계월향의 애국적소행이 깃들어있다. 그런가 하면 이 루정은 대동강의 풍치와 모란봉의 절경을 안고있는 큰 루정으로서 평양감사를 비롯한 봉건관료들의 놀이터, 유흥장으로도 많이 리용되여왔다. 련광정이 안고있는 전설들중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을 전하고있는것도 있다. 리조 19대왕인 숙종때 있은 일이라고 한다. 한고향에서 소꿉시절부터 같이 뛰놀고 공부도 같이하면서 과거시험에도 함께 장원급제하자며 서로 고무해주던 두 친구가 있었다. 한사람은 부유하고 세도있는 량반집의 자식 유몽룡이고 다른 한사람은 가난한 집의 자식인 리청렴이였는데 그는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공부에 전심하여 같이 과거시험을 보게 되였다. 그런데 약속과는 달리 세도집 유몽룡이는 과거에 급제하고 몇해후에는 그 벼슬이 고을원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작은 벼슬자리라도 얻어보려던 리청렴은 락방되는 바람에 약속을 어기게 되고 유몽룡이와 아쉽게도 헤여지게 되였다. 세월은 퍼그나 흘러 두 친구간의 처지는 크게 달라져 리청렴은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고 그대신 유몽룡은 평양감사자리에까지 앉게 되였다. 어린시절 딱친구인 유몽룡이 평양감사가 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리청렴은 그간 생활난으로 하여 과거시험도 다시 치르지 못한것을 한탄하며 그를 찾아가 말직자리라도 얻어볼가 하는 한가닥 희망을 안고 길을 떠났다. 평양까지 걸어서 오다나니 량식은 다 떨어지고 돈 한푼 남은것이 없는데다가 그 행색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되였다. 평양에 올라오니 때마침 평양감사 유몽룡이 련광정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아전들에게 받들려 기생들을 거느리고 놀이를 한다는것이였다. 그를 만나기에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그가 련광정입구에 이르렀을 때였다. 수위를 맡고있던 한 병정이 길을 가로막아서면서 어데로 함부로 들어가려 하는가고 팔을 잡아끄는것이였다. 그래서 그에게 감사와 어린시절 막역한 사이였던 리청렴이 왔다고 말해달라고 하였다. 리청렴의 행색을 아래우로 훑어보고난 병정은 지나가던 거지가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감사나으리의 기분을 잡쳐놓지 말고 당장 사라지라면서 막무가내로 떠밀치며 박대하였다. 리청렴은 다시 자기 이름을 곱씹어 이르면서 감사에게 이름이라도 올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러자 병정은 할수없이 감사에게 조심히 다가가서 《웬 지나가던 거러지가 감사어른을 만나겠다고 하온데 명함은 리청렴이라고 하옵니다.》고 여쭈었다. 한창 취중에 올라 기생을 끼고 놀던 유몽룡이 그 소리를 듣고 련광정상좌에서 먼발치로 내려다보니 리청렴이 틀림없었으나 병정이 아뢰인대로 거러지행색이니 감사의 체면이 깎일것 같아 대번에 불호령을 내리였다. 《이놈, 거러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이 놀음판을 흐리게 하려드느냐? 당장 잡아다 대동강에 처넣고 맛을 보여라.》 평양감사의 엄한 호령이라 병정은 달려와서 무작정 리청렴을 거적에 싸서 련광정아래 나루터에 처넣었다. 그는 가까스로 거적을 헤치고 솟아나와 사람 살리라고 소리쳤다. 때마침 대동강의 늙은 배사공이 그 참상을 목격하고 배를 몰아 구원해주고 초라한 막집이지만 데리고갔다. 배사공은 며칠간 그를 구완해주면서 평양감사 유몽룡의 못된 행실과 죄상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리청렴은 배사공로인과 작별하고 고향에 돌아와 공부에 일심전력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에 다시 응시하여 높은 벼슬을 얻고 꼭 유몽룡을 복수하리라 마음을 굳게 다지였다. 그후 3년세월이 흘러 리청렴은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였고 나중에는 왕의 령을 받고 암행어사가 되여 출도하게 되였다. 그는 먼저 지방의 여러곳을 순시하여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평양에 입성하여 생명의 은인인 배사공로인장을 찾아보고 사례하였다. 그리고 그간 평양감사의 죄행과 3일이 멀다하게 련광정에서 놀이판을 벌리는 날자도 알아냈다. 암행어사출도의 날이 다가왔다. 리청렴은 자기가 거느리고다니는 역졸들에게 《련광정!》이라는 군호로 출도령을 내리고 무작정 놀이장에 뛰여들어가 《유몽룡아! 아직도 리청렴을 모르겠느냐?》고 불호령을 내리였다. 유몽룡은 죽었으리라고 여겼던 리청렴이 유령처럼 다시 나타난지라 《저 미친놈을 죽이라 하였거늘 아직도 살아서 관장에게 이처럼 욕을 뵈니 내 보는데서 당장 잡아다 물에 처넣으라.》고 소리질렀다. 리청렴은 유몽룡을 불을 뿜는듯 한 눈초리로 쏘아보며 그만으로도 네 죄는 죽어 마땅하다고 소리치고는 암행어사패쪽을 들어 내보이며 《저놈을 당장 꿇어앉혀라.》 하고 명령을 내리였다. 그러자 수십명의 장정역졸들이 달려들어 유몽룡을 결박하여 목에 칼을 채우고 암행어사 리청렴앞에 꿇어앉혔다. 리청렴은 휘하관졸들이 다 들으라는듯 《네놈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쳐도 나라의 정사를 받들어 좌기할 대신 사흘이 멀다하게 기생들을 끼고 배은망덕하게도 놀이판을 벌리니 정사는 안중에도 없고 나라와 백성도 모르는 개보다도 못한 역적이니 죽어 마땅하다.》 하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후로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관리들은 놀이판을 벌리다가도 암행어사의 출도령이 내릴가 두려워 잠시 놀고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암행어사가 련광정에서 탐관오리 유몽룡을 보기 좋게 처단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전하여왔다. 련광정이 《관서8경》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다면 부벽루는 모란봉의 명승을 자랑하는 루정의 하나이고 《부벽완월》은 《평양8경》의 하나이다. 모란봉은 대동강을 끼고도는 청류벽과 그우에 높이 떠있는 부벽루가 있어 한층 조화를 이루며 절승경개를 자랑한다. 부벽루는 원래 고구려시기에 영명사의 부속건물로 지은 루정으로서 《영명루》로 부르다가 12세기초부터 거울같이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흐르는 청류벽우에 둥실 떠있는듯 한 루정이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부르게 되였다. 리인로는 《파한집》에서 부벽루의 유래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쓰고있다. 옛날 고려의 16대왕인 예종이 서도를 행차하였을 때 앞이 탁 트이고 큰강이 감돌아흘러내리는 이곳의 경치가 하도 절경이기에 연회를 베풀고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지어 흥을 돋구었다고 한다. 그때 읊조린 시편들이 적지 않으며 그 어느것이나 흥겨운 악곡으로 되지 않은것이 없어 악부의 시가로 전해온다고 하였다. 리인로는 자기 할아버지(리오)도 궁중신하로 왕을 따라 그곳에 간 일이 있었는데 하도 경치가 좋아 루각이 대동강의 푸른 물우에 떠있는것 같다고 했다 하였다. 그는 당시 경치로 이름난 이웃나라의 정각(척석정)에 비등하나 산수가 아름답고 화려한 점에서는 그보다 월등하다고 평하였다. 그후 이 루정에 오른 숱한 문사며 명인들마다 시를 지어 현판으로 걸어놓았다. 어느해 여름 어느날 나라의 명승지들을 유람하던 고려의 시인 김황원이 평양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모란봉 부벽루에 올랐다. 청류벽과 평양성을 감돌아흐르는 맑고 푸른 대동강의 경치에 심취되여 한동안 넋을 잃고 감탄을 금치 못하고있는 그를 보며 몰려온 관리들과 선비들이 평양의 절경을 노래한 명문장을 하나 남겨달라고 청하였다. 김황원은 부벽루의 기둥과 천정에 어지럽게 걸려있는 글들을 훑어보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개탄하였다. 그것은 어느 하나도 평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방불하게 그리지 못하였기때문이였다. 그는 옆에 있는 관리들과 선비들에게 자기가 평양의 절경에 대한 시를 남길터이니 저런 어지러운 글들은 모두 떼여버리라고 하였다. 이윽토록 부벽루기둥에 의지하여 시상을 고르던 그는 드디여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보는 가운데 붓을 쥐고 휘둘렀다.
장성일면 용용수 대야동두 점점산
(긴 성 한면에 강물이 늠실늠실 큰 들 동쪽머리엔 산들이 우뚝우뚝)
단숨에 이렇게 쓰고난 시인은 붓을 쥔채로 부벽루아래를 한참 내려다보다 다시 비단폭우에 쓰려 했으나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새로이 안겨오는 평양의 경치를 몇련의 시구로는 도저히 옮길수 없었던것이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조용한 부벽루에 홀로 앉아있게 된 시인은 그만 붓을 꺾어버리고 마루바닥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 평양의 절경을 그려내기에는 내 재능이 모자라누나!》 시인은 이렇게 한탄하며 밤늦게까지 울다가 그곳을 떠나갔다. 그후 평양사람들은 그가 쓰다만 두 구의 시를 부벽루의 기둥에 걸어 전해오다가 오늘은 련광정의 기둥에다 옮겨놓았다. 그것은 쓰다만 두 구의 시가 잘되여서만이 아니라 이름난 시인도 시어가 모자라 못다 노래한 평양의 아름다움을 길이길이 자랑하기 위한 념원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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