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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적인 행적을 남긴 문인들
우리 나라에는 명망이 높은 문인들이 적지 않고 그들이 남긴 우수한 작품들이 많지만 크게 인물전설화되여 전하여오는 작가들은 얼마 안된다. 따라서 문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작품으로 명성이 알려지고 재사의 얼굴이 비쳐진것으로 하여 인물자체에 대한 전설화는 극히 적고 일화적인 범위내에서 한정되여 전하여왔다고 볼수 있다. 실지 따져놓고보더라도 그들의 생애사와 창작행적은 밝혀져내려오지만 하나의 옹근 인물전설로 전할만 한것은 적다. 최치원은 후기신라 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이며 재능있는 문필가이다. 857년에 경주 사량부 량반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868년부터 16년간 외국에 가서 류학하면서 과거에 급제하여 그곳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885년에 귀국하여 한림학사, 병부시랑 등을 거쳐 벼슬등급이 아찬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시국이 소란해지고 집권자들의 다툼질과 박해가 심하여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오래동안 방랑생활을 하면서 백성들의 생활과 고통을 자기 체험으로 받아들이고 시 《강남녀》, 《붓길 가는대로》, 《소박한 생각》 등 인민을 동정하는 진보적인 시작품들을 적지 않게 써냄으로써 재능있는 문인으로 알려지게 되였다. 말년에 그는 가야산에 들어가 창작생활을 하다가 여생을 마치였다고 한다. 최치원의 작품집으로는 《계원필경》(20권)을 비롯하여 수십권의 문집들이 있다. 그가 창작해놓은 시들과 문집에는 근로하는 인민을 동정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멀리하는 기운이 배여있으며 도리를 귀중히 여기고 산수에 의거하여 여생을 깨끗이 살아보려는 의협심도 엿보인다. 리규보는 고려시기의 대표적인 문인이며 서사시 《동명왕편》의 작자이다. 그는 1168년에 경기도의 한미한 량반가정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탐구심이 강하였으며 9살때부터 시를 써서 신동으로 떠받들렸다. 그는 청년기에 리인로, 림춘 등 《해좌칠현》문인들과 사귀면서 당시 무신정권의 부패상을 알게 되였다. 그는 늦게야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무신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천마산에 들어가 은거생활을 하면서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을 주몽전설에 기초하여 방대하고 호방하게 엮어나갔다. 그외에도 《천보영사시》, 《3백2운시》 등 랑만주의적 경향이 짙은 시들을 많이 써서 사람들을 놀래웠으며 단연 두각을 나타내게 되였다. 최자는 《보한집》에서 리규보에 대해 전하면서 《그의 시문을 보면 해와 달도 오히려 무색》할 정도였다고 하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썼다. 문순공(리규보)은 젊었을 때부터 붓을 달려 즉흥시도 잘 썼는데 모두가 새롭고 창발적이였으며 옛 시체와 음조를 고스란히 따르지 않고 자유분방하여 한번 붓을 들면 백장이라도 휘둘러썼을뿐만아니라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일이 없 었다고 하였다. 이런데로부터 주몽전설에 기초한 장편서사시 《동명왕편》도 모색되였고 훌륭한 결실을 맺을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리규보는 중년기에 들어서 낮은 급의 지방관리를 하다가 점차 중앙급의 높은 벼슬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나중에는 귀양살이까지 하면서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그 과정에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처지와 불우하고 무권리한 정상을 페부로 느끼고 그들을 동정하고 수탈자들의 포악성을 폭로하는 진보적인 시작품들을 적지 않게 써냈다. 하기에 최자가 《문순공 리규보는 정직하고 공명정대한 인물이다. 그가 좋은것은 칭찬하고 나쁜것을 질책하는것은 그의 천성에서 말미암은것이다.》고 한것은 그의 문인다운 인격이 고상하고 정직함을 말하여주며 따라서 작품도 그의 품격을 닮은것이라고 볼수 있다. 김시습은 15세기의 이름난 문인으로서 가난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여났지만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시를 잘 지어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김시습의 자서전》이란 표제하에 어린시절 그의 영특함과 글재주에 대하여, 그의 글재주를 시험하고 감탄한 세종왕으로부터 장차 크게 등용할 인재라는 칭찬과 함께 상까지 받은 사실 그리고 그후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자기가 어린시절부터 스승으로 섬기며 배워오던 성삼문, 박팽년 등을 단종의 지지자들이라고 하여 무참히 살륙한 수양대군(후에 세조)의 집권야욕에 분노를 품은채 벼슬길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승복을 입고 지낸 사실, 뒤이어 정처없이 방랑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시문과 산문들을 써낸 사실 등 문인의 행적을 간략하여 짧은 글에 담아 자서전적으로 펼쳐보여주고있다. 김시습의 행적에서 인물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일화에는 어린시절 글재주를 보여주던 이야기와 함께 수양대군이 왕위를 탈취한 후 그에 분노하여 산중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시와 산문을 쓰게 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시습은 후에 세조의 부름을 받고 왕궁에 들어갔다가 모욕을 받고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섰다가 말년에 산중으로 다시 들어가 《금오신화》를 비롯한 산문과 시작품을 남기고 58살에 세상을 원망하며 생을 마쳤다. 전설에 의하면 김시습이 세상에 태여난지 여덟달만에 벌써 혼자서 능히 글을 보았다고 하여 그의 외할아버지벌 되는 사람인 최치운이 그의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세살때에 벌써 그는 글도 잘 읽고 정서가 짙은 시구도 어렵지 않게 읊었으니 그 감수력과 재능을 두고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루는 당시 정승으로 있던 사람이 글방에 찾아와서 시습이 영특하다는 말을 듣고 《늙을 로(老)》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보라고 하였다. 시습이 구를 맞추어 제창 읊조려 대답하니 정승은 너무도 기특하여 《이거야말로 참, 신동이로다.》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세종왕은 정승에게서 이 말을 듣고 어린 신동 김시습을 승정원에 불러다가 도승지에게 시험쳐보라고 하였다. 도승지는 어린 시습을 자기 무릎우에 앉히고 벽에 걸려있는 산수화를 보고 시구를 만들어보라고 하였다. 5살 난 시습이 산수화속에 그려진 정자를 두고 하도 신통한 시구를 지었기에 여러번 다시 글귀를 내보았는데 여전히 막힘이 없었다. 시험정형을 듣고나서 세종왕이 말하기를 《내가 친히 좀 보고싶으나 공연히 떠들썩하게 하는것이 재미적다. 은근히 잘 키우고 가르쳐서 나이들고 학업도 성취하거든 크게 등용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한다. 김시습은 13살때 대사성 김반(金泮)의 문하에 가서 《론어》, 《시경》, 《춘추》, 《상서》 등을 배우고 그후에는 《주역》과 《례기》 등 력사책들도 환히 꿰뚫었다. 이렇게 문장가로 성장해가던 그는 1455년에 수양대군 세조가 자기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자리를 빼앗은데 분개하여 벼슬살이를 단념하고 일생동안 승려의 차림으로 방랑생활을 하다가 경주 홍산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김시습은 방랑과정에 모순에 찬 사회현실을 보고 느낀대로 수많은 시와 기행문에 담았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한지 9년만에 서울 한복판에 원각사라는 사찰을 짓고 거기서 큰 연회를 차렸는데 여기에 이름있는 승려들도 청하도록 하였다. 이때 서거정이 왕에게 유명한 시재 김시습에 대하여 아뢰여 그를 불러오라는 령이 내려졌다. 세조의 부름이 달갑지 않았던 김시습은 방랑할 때 입었던 거덜이 난 장삼에 해진 짚신을 신은 초라한 행색으로 나타났는데 그를 본 세조가 왕앞에 저런 몰골로 나타난것을 보면 미친 거지승인게 분명하다고 하며 만나보지도 않고 내쫓았다고 한다. 그후 시습은 서울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경주의 금오산에 들어가 6년간 계속 창작생활에 몰두하여 력사에 널리 알려진 단편소설집 《금오신화》를 내놓았다. 이외에도 그가 방랑생활 10년동안에 쓴 대표적인 시집 《사유록》이 있다. 그는 방랑과 산중에 은거하여 창작으로 해를 보내였는바 그의 호를 단 《매월당집》(6권)과 단편소설집 《금오신화》가 유산으로 전해지고있다. 림제는 16세기 문인으로서 호는 백호이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고 재능도 있었다. 그는 1549년에 절도사의 가정에서 태여났지만 커가면서 불의를 미워하고 권력과 세도에 아부굴종하는것을 치사스럽게 여기였다. 한때 그가 시를 잘 읊조리는것을 보고 한 재상이 그대는 어느 가문의 자제인가 하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러자 림제는 거침없이 《나는 이름없는 평민의 아들이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28살이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자리를 거쳐 나중에는 례조 정랑을 지낸적도 있다. 당시 봉건통치배들의 권력다툼에서 환멸을 느낀 그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나라의 방방곡곡을 방랑하면서 산수와 력사유적들을 답사하고 비참한 인민들의 생활도 목격하게 되였다. 그후로는 속리산에 들어가 글을 익히고 수양하면서 창작에 뜻을 두고 거기에 전념하였다. 또한 많은 학자들과 대상하고 문인들과도 접촉하였으며 봉건관리, 벼슬아치들과도 상대하였다. 그 과정에 그들이 파쟁에 젖어 서로 시기하고 남을 헐뜯으며 지어는 류혈적인 참극까지 빚어내는것을 보면서 시세를 한탄하였으며 제 리속만 채우는 탐관오리들과 고루한 선비들을 더없이 증오하였다. 그래서 그런 시정배무리들과는 휩쓸리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였으며 깨끗한 산수를 사랑하고 순진한 서생소년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어느날 소년들이 모여서 화전놀이를 하면서 운자를 내여 시짓기를 하고있었다. 림제는 가까이 다가가서 나도 놀이판에 끼워보자고 청하였다. 서생아이들이 그의 행색을 보니 시를 지을줄 알것 같지 못하여 방해하지 말라고 하자 나는 한시는 지을줄 모르나 우리 말로는 류창하게 읊을수 있으니 너희들이 운을 맞추어 절구를 만들어보라고 하였다. 그러고나서 류창히 한 절구를 읊어내려가니 절로 글자와 운률이 맞아떨어져 훌륭한 한시 절구 한수가 되였다. 깜짝 놀란 소년서생들은 그제야 림제를 알아보고 반겼다. 뿐만아니라 유명한 짝짝이신발일화도 림제의 신랄한 풍자솜씨가 낳은것이다. 그가 탐관오리 등을 의인화의 수법으로 풍자해학하는 《서옥설》(재판받는 쥐)을 정력적으로 쓰다가 머리쉼을 할겸 말을 타고 번화한 거리로 나와 어느 술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안에서 여럿이 왁작거리며 술에 취하여 서로 시비질하는 소리들이 그칠새없이 흘러나오고있었다. 그래서 돌아설가 하다가 무슨 싱갱이질인지 호기심이 동하여 아래방에 찾아들어 술을 청하였다.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 대궐에 드나드는 량반네들이 권력다툼으로 동인이요, 서인이요 하면서 늘 옥신각신이더니만 오늘은 그 꼴그대로 젊은 놈들이 술집에까지 당파시비마당을 펼쳐놓은것이였다. 시간도 퍼그나 지난데다가 젊은 량반나부랭이들의 주정소리를 듣고있으려니 울화가 치밀어 자연 취기가 올랐다. 답답한 속을 겨우 달래며 밖으로 나온 림제는 제 신발을 찾는다며 이 신, 저 신 마구 집어던지던 끝에 짝짝이신발을 신은채 말에 올랐다. 말구종이 뒤늦게야 알아보고 《술에 취하셨나보오이다. 갖신과 짚신을 짝짝으로 신었소이다.》 하며 황급히 도로 벗기려 하자 림제는 《대낮에 길을 가더라도 길 오른편으로 가는 사람은 나더러 갖신을 신었다 할것이고 길 왼편으로 가는 사람은 나더러 짚신을 신었다 할것이니 누가 제 짝아닌 신을 신었다고 할것이냐.》며 만류하였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일화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도 당시 통치배들이 제나름으로 자기 당파를 내세우고 남을 시비중상하며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편협하고 저속한 추태에 대한 림제의 신랄한 해학이 은닉되여있는것이다. 김만중의 호는 서포이며 일찌기 어릴 때부터 공부에 힘쓰고 영특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대제학에 이르고 판서로까지 승진하게 되였다. 그는 17세기 대표적인 문인으로서 기구한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구운몽》을 쓰게 된 동기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남기였다. 김만중은 1637년에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유복자로 태여났다. 어머니 윤씨는 아버지없이 자라는 그를 대바르고 글재간있는 장부로 키우기 위해 남다른 왼심을 썼다. 그리하여 그가 어릴적부터 공부에 전심하고 다른데 눈을 팔지 않도록 여러가지 책들을 구해다가 읽을 량을 날마다 한정하여주고 안할 때에는 서당훈장처럼 회초리로 치며 받아냈다. 김만중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 어릴 때부터 고전은 물론 재미나는 소설들 그리고 각종 패사와 전기 등을 읽었으므로 그 지식의 폭이 넓고 깊어 막히는데가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구차한 살림살이에도 혼자 애쓰며 자기를 공부시키느라고 온갖 뒤바라지를 할 때면 눈물이 글썽하여 어머니의 일을 착실히 도와나섰다. 어머니 윤씨는 그때마다 내 일은 걱정말고 공부나 직심히 하여 이름난 학자가 되라고 아들을 타일러주었다. 그래서 생각끝에 자기가 읽은 재미나는 고사와 패설들을 두루 이야기하여주니 어머니는 그것을 무척 좋아하며 읽은 글을 받아낼겸 저녁마다 이야기해보라고 하였다. 이렇게 밤을 보낸 때가 적지 않았는데 미처 이야기를 준비하지 못했을 때면 이야기를 꾸며가며 류창하게 엮어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마을에 퍼져 저녁마다 만중을 찾아 옛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게 되여 아직 젊은 총각인 그에게 《옛말을 잘하는 글할아버지》, 《문효공》(文孝公)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였다. 김만중은 다방면적인 지식을 체득하여 그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정치생활은 당쟁의 영향으로 하여 순탄치 못했다. 그는 강직한 성격으로 하여 왕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죄를 쓰고 선천에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놓여나왔으나 두달이 못되여 숙종이 왕후 민비를 페하고 장씨를 왕후로 삼은데 대하여 상소한것이 또다시 왕을 노엽혀 남해에로 류배되였다. 그는 홀로 늙으신 어머니가 자기때문에 걱정하며 수심에 잠겨있을것을 그려보며 마음썼으나 위로해드릴 길이 없었다. 그러던중 어머니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김만중은 어머니에게 한달음에 달려가고싶었으나 류배살이를 하는 수인인지라 어쩔수 없었다. 마음만 괴롭고 쓰리였다. 전설에 의하면 김만중은 자신이 직접 갈수 없게 되자 어린시절 자기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그토록 즐겨듣던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때부터 붓을 들어 소설 《구운몽》을 쓰기 시작하였고 하루밤사이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인편을 통하여 앓는 어머니에게 보내여 소설로 위로하였다고 한다. 전설적내용으로 일관된 환상적이며 랑만적인 소설 《구운몽》은 이렇게 창조되여 작가의 재능과 개성을 뚜렷이 드러내보였다. 그는 류배지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많은 작품과 비평을 써서 문집 《서포집》, 《서포만필》을 남기였다. 김삿갓은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풍자시인으로서 이름은 김병연이다. 그는 한생을 삿갓을 쓰고 방랑생활을 하면서 당대 어지러운 사회현실과 봉건통치배들의 죄상을 풍자, 조소, 야유한 재치있는 풍자시인으로 명성을 날리였다. 김병연은 원래 량반집태생이였으나 할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할수없이 곡산에 와서 숨어살았다. 그는 공부를 잘하고 지혜로웠지만 과거시험에는 응시하지 않고 더러운 세상을 보지 않을 결심으로 삿갓을 쓰고 방랑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풍자시를 쓰다가 생을 마치게 되였는데 그렇게 된것은 원한서린 가정적곡절과 관련된다. 김병연이 어렸을 때에 선천부사로 있던 그의 할아버지가 홍경래농민군에게 투항한 《죄》로 사형당하였고 그 루가 일가에까지 미치게 되였다. 이때 병연은 형과 함께 머슴군의 도움을 받아 당시 심산인 곡산땅에 가서 숨어살았다. 어릴적부터 정의감과 의협심이 남달리 강했던 그를 사람들은 어른스럽게 대해주었고 마을에서 의롭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에게 알려주군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동네 고자리령감이 대대로 물려오는 대통을 그만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고자리령감이 먹골에 사는 친척의 맏손자 돌잔치에 갔다가 밤에 산을 넘어오며 취중에 담배생각이 나서 괴춤에 간수했던 담배를 꺼내피우려 하였는데 그때에야 대통이 없어진줄 알았다는것이였다. 고자리령감은 자기가 그 집을 떠나면서 분명히 괴춤에 넣었다면서 의심스러운것은 재등길을 넘어설 때 스치고 지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알수 없다고 하였다. 온 동네로인들은 물론 이웃동네사람들도 고자리령감의 대통으로 담배를 피우면 담배맛이 확연히 다르다고 하면서 피워보군 해서 그 대통에 대해 모두 잘 알고있었다. 그들은 이제 대통을 꼭 찾게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고자리령감을 위로해주었다. 그후 얼마간 지나서 이웃마을 오생원에게 잃어진것과 꼭같은 대통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자리령감은 한달음에 달려가 대통을 보고나서 자기것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오생원은 이 대통은 자기가 오래전에 소 한짝값과 맞먹는 200냥을 주고 사온것이거늘 무슨 당치않은 소리를 하는가고 하면서 정 그러면 관가에 고소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결국은 고자리령감과 오생원이 판결받기 위하여 좌수령감앞에 나서게 되였다. 아무리 심문하여야 서로 자기것이라고 고집하는데 그렇다고 오생원이 훔치거나 사는것을 본 사람도 없는지라 좌수령감도 판결하기가 난처하였다. 이런 때 김병연이 그곳에 나타나서 《제가 한번 흑백을 갈라볼가 합니다.》 하고는 좌수령감에게 귀속말로 여쭈고는 두 령감을 량쪽에 갈라앉히였다. 이어 두사람의 눈을 검은 천으로 보이지 않게 든든히 매놓고 먼저 고자리령감에게 대통을 내주어 담배를 다져넣게 하고는 손에 불꼬치를 쥐여주면서 붙여보라고 하였다. 고자리령감은 3대째 손때 묻혀온 대통인지라 눈을 싸매고도 대번에 붙여물고 새맛인듯 맛스럽게 담배를 피웠다. 관중들은 마치 자기가 피우는듯 한 흡족한 기분에 휩싸여 과시 대통이 주인을 알아본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오생원의 손에 대통을 들려주었다. 오생원은 손에 잘 익지 않아서인지 더듬거리며 대통에 담배를 담았다. 이어 불꼬치를 쥐여주었더니 대통끝이 어디쯤인지 가늠하지 못하여 손더듬질하며 한참이나 쩔쩔매다가 끝내는 한모금도 제대로 빨지 못한채 화만 벌컥 내였다. 그러자 그것을 살펴보던 사람들이 대통이 손에 선것을 보니 오래전부터 써온 대통이 아닌것 같다고 좌수에게 일렀다. 김병연은 웅성거리는 좌중을 둘러보며 《다들 보셨지요? 대통도 제 주인을 알아보는데 어찌 죄인을 가려 못보겠나이까!》 하고 말했다. 그리하여 좌수령감도 어린 병연을 보고 과시 곡산의 명관이라며 어리지만 관청의 통인으로 쓰려고 그의 래력을 알아보더니만 《역적》의 운을 탄지라 더는 그를 찾지 않았다. 그후 병연은 정처없는 류랑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그후 죄를 짓고 숨어사는 친족들을 살려준다는 조정의 지시가 내리자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 살면서 공부하여 19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고생끝에 빛을 보는가 했건만 《페족》당한 량반자손이라 하여 끝내는 취소당하고말았다. 김삿갓은 벼슬길에 오르기를 단념하고 일생동안 방랑생활을 하면서 량반들의 허장성세와 위선, 무지몽매와 탐욕, 부정부패를 신랄히 야유, 조소하고 풍자해학하였다. 그는 방랑시인으로서 발이 닿는 곳마다에서 량반통치배들의 득세와 허례허식, 탐욕과 린색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였으며 그때마다 가차없는 폭소와 야유, 조소를 보내였다. 그는 풍자시 《량반의 아들을 조롱함》에서 몸에 어울리지 않는 큰 관에 긴 담배대를 물고 우쭐대는 꼴을 갓 생긴 원숭이에 비유하였는가 하면 경을 외우는 소리를 개구리울음소리에 비유하였다. 그는 풍자시인으로서 짧은 생애에 수많은 시작품을 썼는바 착상이 기발하고 익살과 해학이 신랄하고 개성적이여서 사람들속에 구전화된 시작품과 일화들도 적지 않았으며 방랑시인으로서 많은 구전설화들을 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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