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류시인 허란설헌과 황진이

 

녀류시인 허란설헌(이름은 초희)은 1563년 강원도 강릉의 문인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허엽은 이름난 학자였고 그의 오빠들인 허성, 허봉과 남동생 허균은 당대 이름있는 문장가들이였다. 이런 문인가정에서 자란 허란설헌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시도 짓고 그림도 잘 그려 사람들을 경탄케 하였으며 당시 시인으로 유명하였던 리달에게서 시문을 배워 오빠들보다 훨씬 많은 시들을 썼다. 그는 처녀시절에는 물론 결혼하여 가정생활을 하는 기간에도 붓을 놓지 않고 시창작을 활기있게 하여 녀류시인의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였으며 가난한 집 녀성의 간고한 생활과 사화당쟁의 후과 등에 대하여 숨김없이 느낀바 그대로 정갈하고 섬세하게, 갸륵하고 여운있게 노래하였다.

당시 남존녀비의 페풍은 완고하였는바 일찌기 시창작에 뜻을 두고 쉬임없이 느낀바를 시줄에 옮겨놓은 그의 문집들이 집안에 가득 쌓이였으나 그 누구도 알길없었다.  왕성한 정력으로 창작에 몰두하던 허란설헌은 림종에 이르자 자기 시문이 집안의 화근을 더해줄듯싶어서였던지 한방에 가득찬 시원고를 자기 손으로 불태워버리고 20대의 애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후 그의 남동생인 허균이 자기가 간수하여두었던 시문과 친정에 남아있던 원고를 찾아내여 시집 《란설헌집》을 묶어냈는데 그가 짧은 생애에서 쓴 그 많은 시들에 비하면 몇분의 일에 지나지 않은것이였지만 도합 210여편이나 되며 7언 절구, 률시, 고시 등 각종 시체가 다 들어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후 허균이 다른 나라 사신을 인도하는 직무를 맡고 그와 자주 이야기도 나누고 글짓기도 즐겨하였는데 사신이 허균의 글재주에 감탄을 금치 못하여 그가 쓴 글 몇편을 기념으로 달라고 하였다.

허균은 자기에게 변변한 글이 없으나 누이가 쓴 시문이 있으니 그것을 보라고 하였다. 사신은 녀성이 쓴것이니 더욱 귀한것이라고 하며 며칠사이에 다 읽고나서 이런 녀류문인이 조선에 있었는가고 거듭 치하하고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인차 시집으로 묶어냈다. 그리하여 그 나라 문인들속에서도 《란설헌집》이 애독되게 되였고 전설에서 보는바와 같이 허경란과의 시문적인 인맥관계가 맺어지게 되였다.

허경란은 선조때 번역관으로 이웃나라에 들어가 살게 되였던 허지의 딸이였다. 그는 어려서 영특하고 총명하여 7살때부터 시를 짓고 시문에 능하여 자라남에 따라 많은 시들을 짓고 시풍과 운을 익혀나갔다. 그러던중 《란설헌집》을 구독하게 되였다.

그는 이국땅에서 조국의 흙냄새가 풍기는 시문에 접한데다가 그 시들에 녀류시인의 얼굴이 뚜렷이 드러나있는지라 이제야 스승을 찾은듯 공경하면서 그 시풍과 운을 따라 시를 짓는데 열중하였다. 그러니 어찌 허란설헌의 글체가 다시 살아나고 이어지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그는 자기스스로 이미 세상을 떠난 란설헌의 환생으로 자처하면서 자기의 호도 《경란》이라고 하였다.

그는 허란설헌이 26살에 죽었으니 그의 환생인 자기도 26살이 되는 올해에 꼭 죽을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해에도 다음해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

허경란은 《그럼 내가 허란설헌의 환생이 아니라 범상한 태생이였단 말인가?》 하고 되뇌이군 하면서 몹시 실망했다고 한다. 그만큼 허경란은 시문을 배우고 익히면서도 녀류시인 허란설헌을 마음속으로 따르고 공경하였을뿐아니라 문인녀걸로 숭상하고 그의 시풍과 운, 시체를 본받기에 진정을 다하여 린접전설을 더욱 이채롭게 하였다.

녀류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재사중에는 《송도3절》 황진이도 있다.

자존심이 강하였던 그는 고루하고 위선적인 량반관료들과 사대부들을 경멸하고 조소하였으며 자신을 당대의 이름난 철학가 화담 서경덕, 개성의 명승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3절로 자부하였다.

황진이는 1516년 개성에서 태여났다. 그는 황가성을 가진 진사의 첩으로 있었던 어머니 진현금의 딸이다.

황진이는 용모가 아름다운데다가 어릴 때부터 예술적소양이 뛰여나 비록 천한 첩의 소생이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속에 있었으며 이로 하여 여러가지 일화들을 남기였다.

어느해 화창한 봄날 송도의 연경궁 남쪽에 있는 병부교아래 개울가에서 풍성한 몸매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한 녀인이 빨래를 하고있었다. 이때 다리우로 지나오던 한 젊은 미남자사나이가 걸음을 멈추고 빨래하는 미녀를 살펴보고 마음이 동하였던지 노래 한곡조 부르고나서 다가와 물을 마실수 없겠는가고 청하였다. 그래서 물을 떠서 주었더니 마시고나서 맛이 참 좋다고 하고는 그릇을 내여주는데 거기에는 물이 반쯤 남겨져있었다. 녀인이 물을 버리려 하자 그 물을 마셔보라고 재촉하여 권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받아들고 마셨더니 그것은 놀랍게도 술이였다. 그리하여 취정끝에 마음이 통하여 그날밤 인연을 맺게 되였는데 후에 알고보니 본처를 둔 황진사였다. 벼슬길에도 나서지 않은 진사의 첩의 딸로 황진이가 태여났으니 그에게 남다른 사연과 함께 만사람의 이목이 돌려진것도 사실이다.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잘하여 유교경서인 《4서3경》을 통달하고 시도 잘 짓고 노래도 잘 부르고 서예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녀인이였다.

그는 특히 문학에 재능이 출중하였는바 시조와 한시에 막히는바가 없었다.

황진이가 기생으로 된것은 이웃에 사는 한 청년이 아름다운 그를 한번 보고나서 마음이 몹시 동하여 부질없이 짝사랑을 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은 뒤였다고 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백 한마디 못한 그 총각이 하도 가엾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기생으로 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첩의 딸로 태여난 자기의 불우한 신세와 부당한 봉건축첩제도에 대한 반발의 감정도 깔려있는것이다.

기생이 된 그는 맑고 아름다운 성대로 노래를 잘 부르는 명창으로, 재능있는 녀류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풍류생활로 일생을 보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내 언제 신이 없어》 등 대부분 남녀간의 애정에 관한 상사곡들을 지은 그는 기생이였으나 고결하고 소탈한 품성을 가진 녀성으로서 당시 량반선비들과 교제하면서도 방탕하지 않았으며 자기 눈에 차보이는 인물이 없어 나중에는 승려인 지족선사며 이름난 유학자 화담 서경덕의 사람됨을 견주어보았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이처럼 수많은 일화를 남긴 송도의 명기 황진이는 노래명창일뿐아니라 시가창작가로 활동함으로써 리조 전반기 민간음악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음악가였다. 그는 호색한 사나이들은 대상도 하지 않았으며 시와 곡, 문장으로 자기 심정을 토로하고 그를 벗으로 삼아 명승지 박연폭포도 유람하고 자연을 즐겨 쾌활한 성격과 자존심이 강한 인격을 굳혀나가게 되였다.

그는 산수를 즐기고 련모의 감정을 노래한 수많은 시조들을 창작하였으며 종전의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고 호방하게 내면세계를 터쳐보임으로써 시적형상의 진실성과 생동성을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여 이채를 띤 개성적인 녀류시인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남녀간의 애정을 노래하는 경우에도 진실로 마음속으로 련모하는 깨끗한 사랑을 찬양하였으며 비루하고 저속한것은 질시하고 순정으로 자리잡은 련정의 세계를 섬세하고 자유분방하게 노래하였다.

그는 자신을 변함없이 푸르싱싱한 청산에 비기고 님의 정은 흐르는 물에 비겨 변치 않을 자기의 지조를 노래하였다. 그는 남을 속여먹는 험악한 세상에서도 신의를 중히 여기는 인걸을 찬미하고 존경하였다. 그는 권세만 부리면서 쾌락을 일삼는 관료들을 한낱 유혹에 빠진 버러지로 보았으며 자기의 고상한 인격과 도고한 성품을 허실하지 않고 살려나갔다.

그는 비록 리조봉건사회에서 가장 《천한》 계층이였던 기생이였지만 중세유물론철학자였던 서경덕의 학식과 고결한 인품에 탄복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고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한때 황진이는 량반선비들과의 한담끝에 내기를 걸고 서화담의 인끔을 가늠해보고저 그를 찾아갔었다고 한다. 서화담에게서 글을 익히느라고 밤늦게까지 있다가 피곤이 몰려 그만 잠든척 하면서 황진이 스승의 다리우에 다리를 슬쩍 올려놓았더니 서화담은 그의 다리를 정히 내려놓으며 잠을 갈개잔다고 혼자소리를 하는것이였다. 황진이 재차 신다리를 얹어보았으나 서화담은 그의 육체미에 끌리지 않고 다시 내려놓고 자리를 옮길뿐이였다고 한다.

서화담의 고결한 인품에 황진이는 크게 탄복하게 되였고 이후로 《송도3절》이야기가 나오게 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당시 송도에는 불경에 《도통》한 《지족선사》로 불리우는 도승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색을 멀리하라는 불경을 새겨 자기는 그 어떤 미녀가 곁에 있어도 거기에 빠지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산중 사찰에서 30년동안 불교의 계률을 지켜온것을 늘 자랑삼아 외우군 하였다. 그러던 도승이 하루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박연폭포에 들려 산천구경 겸 다리쉼을 하였는데 넙적바위에 앉아 거문고를 타며 곡도 하고 시조도 류창히 읊조리는 절색미녀를 보게 되였다. 결국 살아있는 부처라고 자처하던 도승도 황진이의 미색과 계교에 말려들어 《파계승》으로 되여버렸다. 그후로 이 지방에서는 파계승을 풍자해학하는 《만석승놀이》와 같은 풍자인형극이 생겨나게 되였다고 한다.

이처럼 황진이는 비록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의 녀성이였지만 예술에 능할뿐만아니라 시조에도 조예가 깊어 주옥같은 명시들을 남긴 16세기 우리 나라의 유명한 녀류시인이였다.

황진이가 지은 시들은 생동하고 진실한 감정을 반영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속에 널리 애송되였으며 비유가 신통하고 여운이 오래도록 새겨져 오늘까지 수많은 전설과 함께 전해질수 있었다. 황진이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에 유명한 문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처럼 적지 않은 일화와 전설적사연을 남긴 문인은 많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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