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김생과 한석봉

 

김생과 한석봉은 다같이 서예로써 이름을 날린 명인재사이다. 그들의 글씨가 얼마나 유명하고 소문이 났던지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져 그를 따를만 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와 그후의 사화전설집들은 서예가, 명필로 대절찬을 받으며 서예를 익혀간 고심참담한 이야기들을 전설로 전하여온다.

김생은 신라의 미천한 가정에서 태여났으나 어릴적부터 글씨를 잘 써서 칭찬을 받게 되자 그것을 기화로 하여 다른 학문은 공부하지 않고 80살이 넘도록 붓을 놓지 않고 서예에 온갖 정열과 재능을 발휘하여 예서와 행초의 글체에서 그 어느것이나 다 막힘없는 신묘한 필법을 숙련시킨 우리 나라의 이름있는 서예가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필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붓과 벼루, 먹통을 지고 깊은 산속 석굴에 들어가서 오랜 세월 집에 내려오지 않고 오로지 글씨를 익히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너무나 긴 세월 글씨를 익히다나니 한때는 종이가 다 떨어져 가랑잎을 모아 거기에다 한자한자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는 글씨를 익힌족족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내물에 던져보낸지라 마을에 다달은 강물은 먹이 배여 거멓게 흐려져있었다고 한다.

김생의 글씨가 이렇게 유명해지자 글씨를 배우려는 초학도는 물론 문서를 다루는 한다하는 관리들까지 찾아들어 그의 신묘한 서예를 배우려 하니 온 나라에 김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글씨를 배우러 가거나 그를 만나보고 헤여질 때면 의례히 몇자씩 써달라고 하였고 붓을 들어 달필로 써주면 보물처럼 간직하겠다며 사례하였다.

한때 김생이 쓴 행서와 초서를 묶은 책을 송나라의 학자들이 보게 되였는데 그들은 옛날 중국에 널리 알려진 서예가 왕희지의 필적인줄로만 알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왕희지의 친필을 얻어볼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당신이 어떻게 이것을 간수해왔는가고 물었다.

당시 송나라에 사관(사신)으로 갔던 홍관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것은 400년전의 우리 나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하자 그들은 잘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 《천하에 왕희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글씨를 쓸수 있겠는가?》고 도리머리를 쳤다.

홍관이 재차 타이르듯 김생의 글씨체를 여러모로 설명해주고 어느 한 비문에 김생이 자기 이름을 쓴 대목을 펴보여서야 그들은 납득이 가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들은 《김생의 필치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천하에 더 견줄만 한이가 없는 이런 서예가가 당신네 나라에 있다는것을 아직 모르고있은 우리가 수치입니다.》고 하며 저저마다 값을 후히 주겠으니 책을 달라고 청하였다.

이처럼 김생은 한생을 글씨로 재간을 익히고 행서와 초서 등 가림없이 능하여 나라에서는 물론 타국에까지 명망이 높아 그의 글체를 본따려고 하였으나 그 누구도 따를 길 없어 단연 첫번째가는 서예가로 이름을 남기였으며 명필재사로 널리 전설화되게 되였다.

한석봉은 리조시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소문이 났던 명필이다.

그는 개경성밖의 어느 한 농가에서 태여났는데 집안이 몹시 빈곤한데다가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슬하에서 자랐다.

한석봉이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그의 아버지는 아들만은 공부시켜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이웃동네를 찾아다니며 그에게 글을 배워주게 하였는데 글씨를 재간스럽게 잘 썼다. 그래서 아버지는 석봉이를 손꼽히는 명필가로 키워보겠다고 마음다지였다. 그러던 아버지가 일찌기 세상을 뜨자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을 새기고 큰 명필가가 되기를 바라여 얼마 안되는 가산을 다 팔아 돈을 장만하여 10년 기한으로 먼곳에 있는 외가친척벌 되는 글방훈장에게 9살 되는 한석봉이를 떠밀어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떡장사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아들의 글공부를 뒤바라지하였다.

한석봉은 홀어머니의 고생속에 외지에 나와 글공부와 함께 글쓰기를 힘껏 배웠다. 어느덧 7년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도 16살이 되였다. 이제는 어머니의 고생도 덜어주고싶어 그는 10년을 다 채우지 않고 고향길에 올라 집에 들어섰다. 그러자 어머니는 왜 10년을 채우지 않고 벌써 왔는가고 캐여물었다. 한석봉은 자기의 스승이 《이젠 그만큼 배웠으면 충분하니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잘 모셔드려라.》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나서 《충분히 배웠다면 나하고 그 재주를 겨루어보자.》 하고는 불을 끈 캄캄한 방안에서 나는 함지의 떡을 다 썰고 너는 이 종이우에 글을 가득 써서 누가 더 잘 썰고 잘 썼는가를 판결해보자고 하였다.

어머니의 단호한 요구인지라 불을 끄고 모자의 경기시합은 퍼그나 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그래서 광솔불을 켜고 비치여보았더니 글쎄 어머니가 썬 떡은 한결같았는데 한석봉의 글씨는 어두운데서 손더듬질하며 붓끝을 대고 다시 먹을 묻혀 다음획을 찾아 긋다나니 들쑹날쑹하고 획들이  맞물려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노하여 《이렇게 쓰면서도 충분히 배웠다고 기한전에 왔느냐? 오늘중으로 당장 떠나 3년을 마저 채우고 돌아오거라.》고 엄하게 타일렀다.

한석봉은 어머니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하소연하듯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제 또 어떻게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떠난단 말입니까?! 어머님의 곁에 있으면서 글씨공부를 계속할터이니 자식된 도리를 다하게 하여주십시오.》

아들의 간절한 소원을 다 듣고난 어머니는 석봉이가 자기 뜻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지라 《자식의 도리라는건 제 부모를 고생하지 않게 하는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것이다. 네 아버지가 너를 명필로 키우기를 그렇듯 소원했는데 오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네가 어떻게 나를 기쁘게 해줄수 있단 말이냐?》 하고는 길차비를 하라고 독촉하였다.

이튿날 한석봉은 글씨를 마저 익히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의 뜻을 기어이 성취하리라 결심다지며 시골훈장이 아니라 서울로 올라가 스승을 찾아보려고 남행길에 올랐다.

한석봉이 찾아간 스승은 당시 명필로 이름있던 병조참의 신희남이였다. 그는 그 집 사랑방에 묵어있으면서 밤낮으로 정력을 쏟아부어 글씨를 배우고 독특한 필체를 익혀나갔다. 3년을 더 채워 10년이란 긴 세월 글씨를 익혔더니 마지막해에 들어서서는 서울장안에 《한석봉의 글씨가 오묘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아전관리들과 수많은 서생들이 그에게서 써받아 가지고가서 소문을 퍼쳐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길새 없었다. 그리하여 높은 벼슬자리를 하는 관리들도 족자를 가지고와 명필체를 벽에 걸어보자고 허물없이 찾아들었다. 그리하여 재상의 집 족자에는 물론 지어 대청안의 병풍들에도 그의 글체가 나붙게 되였다.

명필의 소문과 함께 한석봉은 3년만에 다시 개성에 있는 어머니한테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날 밤 한석봉은 어머니에게 불을 끄고 다시 겨루어보자고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번엔 자신이 있는가고 웃으며 물었다.

한석봉은 그전에는 붓끝으로 재주를 익히려 하였다면 오늘에 와서는 글체가 몸에 배여들어가니 어두운 방안이나 달없는 그믐밤에도 대낮처럼 붓을 다루고 여기로 오기 전날밤만 하여도 대감의 집 족자를 불이 없는데서 써주어 밤귀신도 놀라 달아나겠다고 소문을 내고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면서 나도 서울에서 들려오는 풍문을 들은바 있거니 어떤 공부이든 손끝이나 혀끝으로 재주를 부리려 해서는 안되고 몸에 배도록 익혀야 성공하는 법이라고 하면서 10년 도를 닦았으니 어서 과거시험에 나가 세상사람들을 놀래워보라고 하였다. 그후 한석봉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처음엔 한 고을 군수로 있다가 그의 명필됨이 크게 알려져 당시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무원 사자관이 되였으며 서예로 널리 이름떨치게 되였다. 뿐만아니라 한때 이웃나라에 글쓰는 직책을 맡은 사신으로 따라간 일이 있었는데 그가 쓴 세련되고 활달한 글체를 보고 모두 놀라하며 명필재사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