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거의 로송, 김홍도의 산수화와 풍속도, 신사임당의 포도송이

 

솔거는 어릴 때부터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서당공부도 하지 못하였으나 그림그리는데 남다른 취미와 소질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자기스스로 그림그리기를 습득하여 후에는 화공재사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는 어릴 때 산에 나무하러 올라갔다가도 쉴참에 바위우에 올라 칡뿌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정신을 팔아 부모들의 노여움을 산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들에 나가 풀을 베고 김을 매다가도 그림그리기에 정신이 팔려 모래밭에 호미끝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날이 어두워지는것도 알지 못하여 집안사람들이 여러번 그를 찾아다니는 소동이 일어나군 하였다.

그는 그림그리는 법을 가르쳐줄 스승을 찾으려 하여도 집을 떠날수 없고 행장도 마련할 길이 없어 하루는 바위우에 누워 생각끝에 꿈속에 들었는데 한 성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너의 지성이 기특하고 감개하야 네 붓에 신비한 정기를 불어넣어주노니 정히 받아서 쓰면 스스로 알 도리가 있으리라.》고 하였다. 깨여나니 꿈인지라 허황하기 그지없었으나 성인의 훈계를 잊지 않고 붓을 신묘하게 쓰는 법을 익혀 끝내는 채필, 채색화에서 신통력이 발휘되여 그 소문이 산지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때 신라의 진흥왕은 불교를 숭상하여 도처에 사찰을 짓게 하였는데 경주(당시 신라 서울)에 큰 사찰 황룡사를 짓고 금동불상을 만들어 안치하게 하였다. 그래서 나라에 이름있는 장공인들이 다 모여들어 재주를 부리게 되였다. 이때 솔거의 신묘한 화필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여 그도 황룡사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리게 되였다. 그가 그린 로송은 굵은 줄기가 비늘같이 우둘투둘하며 가지와 잎이 얼기설기 굽어져서 푸르청청한게 뒤산의 소나무와 너무도 신통하기때문에 사람들도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림이 완성되여 자기 자태를 드러내자 아니나다를가 진짜 소나무인줄 알고 뭇새들이 날아들어 앉으려다가는 벽에 부딪쳐 수없이 떨어졌다. 그러자 거기 모여들었던 이름있는 장공들은 물론 조정의 관리들도 과시 놀라운 솜씨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황룡사는 로송벽화로 인하여 더 유명해지고 솔거의 화필이 신통력을 지니였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퍼져갔다. 그로부터 먼 후날 벽화가 퇴색되자 사찰에 있는 주지가 화공을 데려다가 다시 단청을 하였는데 다시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솔거는 세나라시기 명화가로서 신묘한 화법과 채색법을 가지고있은것으로 하여 명인재사로 널리 알려지고 전설화되였다.

물론 전설에는 신통력을 지닌 화필이야기와 같은 허망한것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재사들을 신비스런 인물로 부각시키고싶은 당대 사람들의 소박한 념원의 반영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리조 후반기의 대표적인 사실주의화가인 김홍도는 1745년에 서울에서 태여났는데 집이 너무 가난하여 끼니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그림을 매일같이 그리다나니 그가 그리는 생활령역과 화폭의 넓이도 커져 사가는 사람이 수없이 늘어나고 관청과 관리들속에도 그의 재능이 알려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20대전에 도화서의 화원으로 되였다.

그는 연풍현감의 벼슬을 받은적도 있으며 1789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그곳 지도를 그려 나라에 바침으로써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나라의 방비사업에도 이바지하였다.

김홍도는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에 접근하여 인물풍속화를 개척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 물론 그는 산수화도 적지 않게 그렸고 신선도며 지어는 왕의 초상을 그린 일도 있다.

그는 자기가 어렵게 살아오면서 그림을 익혀온것만큼 인민들의 생활세태와 풍속을 반영한 그림들을 그려 인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풍속도 《씨름》, 《대장간》, 《집짓기》, 《베짜기》, 《빨래터》, 《서당》 등은 사실주의적이고 세태풍속적인것이 진하게 배여있어 인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오래동안 전하여왔다.

그는 풍경화와 함께 동물들도 많이 그렸다. 이처럼 김홍도는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림으로 생계도 유지하고 그림으로 명화가로 단연 이름을 날려 리조 500년에 걸쳐 누구도 따를수 없는 명인재사로 널리 전설화되였던것이다.

신사임당은 16세기 녀류화가로서 당시 학자로 널리 알려진 리률곡의 어머니이다.

그는 관동의 명승지의 하나였던 강릉 경포대에서 평범한 시골선비 신명화의 둘째딸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기질을 가지고있어 글공부를 잘하여 경전을 통달하고 느낀바가 크면 자기의 감정을 시부에 담아 능숙하게 읊조리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자기 고장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에 옮겨보려고 노력하였으며 차츰 이에 크게 취미를 가지고 화법을 숙련시켜 마침내 이름난 녀류화가로 자라나게 되였다.

7살 되던 해부터 붓을 들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그를 대견하게 생각한 그의 부모들이 그에게 화구들을 갖추어주고 산수화와 화조화도 구해주었다. 그는 집안에서 열심히 여러 그림들을 본따 그리다가 일정하게 필법이 늘어나자 바깥에 나가 직접 화초나 나비, 풀벌레들의 생태를 살펴보고 그 신묘한 동작을 그대로 옮기느라 애쓰군 하였다. 특히 그는 풀벌레그림을 잘 그렸는데 하루는 다 그린 풀벌레그림을 말리우느라고 마당구석가에 놓았는데 닭들이 달려들어 진짜 풀벌레인줄 알고 쪼아주어 다시 그렸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은 못쓰게 된 벌레그림을 쥐고는 《어린것이 이렇듯 신통히도 그렸으니 닭인들 쫏지 않을수 있겠소이까. 진사어른은 참말로 재간둥이 금딸을 두었소이다.》 하고 모두 부러워하며 그의 장래를 축복해주었다.

그는 그림그리는 재간이 늘어나 하루에도 여러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어디에 견주어볼바가 없이 훌륭하였다. 성장함에 따라 문장보다는 그림그리는데 뜻이 깊어지고 재간도 날을 따라 익혀져 적지 않은 그림을 벽에 붙여놓았으나 그것으로써 자기 만족을 가지기에는 너무도 허전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유명하였던 화가 안견의 산수화를 보게 되였다. 그는 신통히도 방불하게 안겨오는 활달한 필치의 그림을 보고 이제야 스승을 찾았다고 못내 기뻐하였다. 그는 그후로 안견의 산수도를 배워 화법을 숙련시키고 필치를 세련시켜 산수와 전원생활을 그림에 담는데 여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그가 녀류화가로 자라나는것을 누구도 크게 알지 못하였으며 신사임당자신도 그것을 생업의 리념으로 마음을 굳히고있지도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신사임당은 일가벌 되는 집에 잔치보러 가게 되였다. 잔치집이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볶으며 한쪽에서는 음식을 만들고 고기를 볶아내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편을 저며 그릇에 담아 상을 차리느라고 모두들 뱅글뱅글 돌아쳤다. 그러던중 한 녀인이 《아이쿠, 이걸 어쩌나?》 하고는 국사발을 엎지르는통에 덞어진 비단치마를 걷어쥔채 울상이 되여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너무나도 속타하기에 알아보니 이 녀인은 자기 집에는 변변한 옷이 없어 겨우 사정하고 건너집 마님의 비단치마를 빌려입고 왔는데 이렇게 어지럽혀서 큰 변을 치르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신사임당은 덞어진 비단치마를 자세히 살펴보고나서 걱정할것 없다고 안심시키고는 《내가 그 덞어진 곳을 가리워 새 치마로 만들어봅시다.》 하며 붓을 들었다. 잠간사이에 덞어진 치마폭에는 탐스럽고 생신한 포도송이가 넝쿨을 타고 생동하게 펼쳐졌다. 드디여 포도송이로 장식된 새로운 비단치마가 생겨나게 되였다.

신사임당은 다 그린 치마를 그 녀인에게 내주면서 이것을 저자거리에 나가 팔면 본래 치마값보다 훨씬 더 받을테니 새 치마를 사서 돌려주라고 하였다. 그 녀인이 그길로 저자거리에 나가니 부자집 녀인들은 포도송이가 환하게 박힌 새로운 비단치마인지라 서로 다투어 값을 올려 사갔다. 그래서 돌려줄 비단치마를 살 돈만 내놓고 나머지 돈은 신사임당을 찾아가 내놓았더니 《나들이치마 한벌이 없어 남의 치마를 빌려입고 왔다가 수모를 당한 값이니 그 돈으로 새 치마를 한벌 사입으십시오.》 하고는 그 돈을 녀인에게 꼭 쥐여주었다.

이렇게 되여 그 소문이 삽시간에 널리 퍼져 신사임당의 그림그리는 솜씨와 함께 현숙하고 인자한 품성이 고을은 물론 나아가서는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였다.

그후에 사람들은 신사임당을 두고 잔치집에 갔다가 한 녀인의 덞어진 치마폭에 포도송이를 그려넣어 명성을 떨친 신묘한 녀류화가라고 널리 전설화하였다.

신사임당의 초기작품인 풀벌레그림과 오리, 기러기, 해오라기와 그후 유명해진 《산수도》, 《백로도》 등은 산수와 전원의 아름다움을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활달한 필체로 날리고 채색감이 생신하고 방불하여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자아냈고 녀류화공재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그의 명망이 높아지자 그림그리기를 배우려고 이웃에서는 물론 먼 고장에서도 적지 않은 녀인들과 소년들이 찾아들었다. 신사임당은 화가로서뿐아니라 가정살림을 꾸려가는 현모량처로서 네 아들을 학자(률곡), 성인으로 키워내는 바쁘고 쉴새없는 나날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의 재간을 틔워주기 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지성껏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신사임당은 녀류화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현숙한 부인으로서의 인덕과 문장에서도 조예가 깊은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는 산천경개 수려한 강릉에서 살다가 19살때 결혼하게 되였다. 그후 얼마 안있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를 집에 둔채 서울에 가서 시집살이를 한 그는 언제나 자기가 나서자란 고향과 어머니를 잊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오래간만에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반갑게 만나뵈웠으나 길지 않은 상봉의 나날에 리별의 시각이 다가왔다. 어머니와 울며 작별한 신사임당은 대관령에 올라 멀어져가는 고향집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

 

머리 흰 어머니

강릉에 외로이 계시는데

이 몸 서울 향하여

홀로 가는 마음이여

다시한번 머리돌려

옛 살던 마을 바라보니

흰구름 갈앉은 곳에

저문 산만 푸르르구나

 

신사임당은 이렇듯 시에도 조예가 깊고 현숙한 부인으로서 다재다능하였으며 자식들에 대한 교육교양에서도 엄정하고 절제가 있었다.

특히 종전에 4군자(매화, 란초, 국화, 대나무)에 매달려있던 수묵화의 화풍에서 벗어나 동물화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산수화인 경우에도 채색화의 사실주의수법을 능숙하게 씀으로써 독특한 창작적개성을 가진 16세기 유명한 녀류화가, 이름있는 재사의 한사람으로 전설화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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