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사들에 대한 전설

 

재사라고 하면 특출한 재간을 가지고 사회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음악가, 화가, 서예가, 문인과 함께 장공, 명기 등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우리 민족은 오랜 력사발전과정에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재사들을 많이 가지고있는것으로 하여 찬란한 문화예술을 동방일각에 빛내여왔다.

재사들에 대한 설화들은 전설과 함께 민화, 재담, 소화들에도 적지 않게 반영되여있으며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재능을 한폭의 그림이나 일화를 통하여 충분히 엿보게 한다. 1

 

우륵의 가야금과 왕산악의 《현학금》, 백결의 《방아타령》

 

우륵은 6세기 중엽 가야국 사람이였다. 그는 타고난 음악적소질을 가지고있어서 노래를 업으로 삼다싶이 하였다. 그가 만들어낸 악기가 바로 가야금이였다.

그는 가야금창제와 함께 수많은 곡들도 창작하였다.

당시 가야국의 정사는 매우 어지러워진데다 왕까지도 악곡을 저들의 음탕한 놀음에 써먹을수 있게 지으라고 우륵을 강박하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우륵은 자기가 창제한 가야금을 가지고 망할 징조가 확연한 가야땅을 떠나 신라로 가버렸다.

신라왕(진흥왕)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이고 안착시킨 다음 음악재사로 명성높은 그에게 여러 악공들(주지, 계고, 대사, 만덕)을 붙여주어 가야금을 배워 숙련시키게 하였다.

우륵은 그들에게 성의껏 음악을 배워주고 좋은 곡을 만들어 편곡도 하고 익숙시킨 다음 왕과 궁중대관들앞에서 연주하게 하였다.

왕은 여러 관리들과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가야금의 독특한 음률과 곡상에 감동하여 기쁨을 감출길 없어하였다.

그러자 우륵의 연주회를 시기하여 아니꼽게 생각해오던 한 관리가 간사하게도 왕에게 《저 가야금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은 가야를 망친 음악이오니 장려할수 없는가 하나이다.》 하고 아뢰였다.

왕은 그것이 가야의 음악이라 하여 덮어놓고 흉질을 하는 간사한 관리의 언동인지라 《가야왕이 음탕하고 란잡하여 저절로 망한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그를 조절억제하도록 한것인바 나라가 태평하고 어지럽고 하는것은 음률과 곡조에 관계되는것은 아니다.》고 일축해버렸다.

우륵은 왕의 말에 사의를 표시하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옛사람들이 음악을 만든것은 사람들이 말로나 행동으로 다 표현할수 없는 기쁨이나 슬픔을 전하거나 토로하자 한것이였으니 그것이 어찌 나라의 쇠락의 근원으로 되겠나이까? 음악이 나라의 쇠락과 멸망의 근원으로 된다면 이 세상에 성하는 나라엔 음악이 없고 쇠락하는 나라에만 음악이 있어야 할것이오이다.

신의 생각에는 음악에 나라의 흥망이 달려있는것이 아니라 음악을 어떻게 쓰는가에 달려있다고 보나이다. 흥하는 나라에선 음악을 바로 쓰고 망하는 나라에선 음악을 바로 쓰지 못하는줄 아오이다.》

우륵의 말이 끝나자 왕은 과히 음악재사의 론거가 지당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제소한 관리는 얼굴이 벌개서 아무 말도 못했다.

왕은 연주회를 마치면서 우륵이 창제한 가야금을 더욱 널리 보급하고 장려할데 대한 어지를 내리였다. 그리하여 우륵과 가야금에 깃든 사연은 널리 알려져 책들에 기록되고 전설화되게 되였다.

왕산악은 고구려때 사람이다. 어느해인가 이웃나라에서 고구려에 칠현금이라는 악기를 선물로 보내여왔다. 칠현금의 생김새나 그 연주수법이 우리 나라의 현악기와 달라 당시 궁궐의 악공들이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있었다. 그래서 버림을 받다싶이 되자 왕은 그것을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면 후한 상을 주겠다고 방을 놓았다.

그러던중 당시 의례관계를 맡아보던 재상인 왕산악이 칠현금을 가져다 자세히 살펴보고 우단점을 찾아내여 우리 나라 곡을 탈수 있게 완전히 개조하여 내놓았다.

왕산악은 일찌기 벼슬길에 나서 재상에 이르렀지만 특이한 감수력과 출중한 음악적소질로 하여 시문은 물론 곡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가창까지 하였다.

왕산악은 악기를 개량하면서 이미 전해오던 노래를 현금에 담아보고 새로운 노래 100여곡을 창작하여 연주하여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왕산악이 자기가 지은 곡으로 타는 악기소리가 얼마나 청아하고 아름다왔던지 하늘에 날아가던 검은 학들이 내려와 춤을 추며 사라질줄 몰랐다.

그래서 그 악기의 이름을 《현학금》이라 부르며 전설화하였다. 개량악기에 이런 전설이 붙게 된것은 왕산악의 음악재사로서의 뛰여난 재능을 보여준다.

백결은 경주의 랑산밑에서 가난하게 살아온 음악재사이다.

그는 살림이 하도 가난하여 때식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고 옷이 꿰여지면 그때마다 누덕누덕 기워입다보니 백가지 천오리를 매여 기운것 같다고 하여 《백결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가난에 쪼들리고 생활이 어려워도 상심하지 않고 거문고를 타는것을 락으로 삼았다. 기쁘고 즐겁거나 슬프고 성나거나 불평스러운 일들을 모두 음률에 담아 음악재사의 넋을 키워갔다.

어느해 설명절을 앞둔 날이였다. 설명절준비로 이웃집들에서는 쌀찧는 방아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설차비도 못하고 방안에서 쓸쓸하게 남의 집 방아소리를 듣고있던 안해가 참다 못하여 백결에게 푸념질했다.

《남들은 명절을 맞느라 방아를 찧고있는데 우리만 곡식이 없어 빈방에 앉아있으니 무엇으로 설명절을 쇠겠나이까?!》

백결선생은 넌지시 웃고나서 안해곁에 다가서며 조용히 이렇게 달래였다.

《남의 집에서 들려오는 방아찧는 소리가 그렇게도 부러우면 내 그대를 위해 방아노래를 지어 위로하리다.》

백결이 거문고를 튕기여 《쿵덕쿵 쿵덕쿵 쿵-》 하고 방아찧는 소리를 내니 온 동네에 삽시에 방아소리가 널리 퍼지였다.

방아소리를 거문고로 흉내내였다고 하여 후에 《대악》(방아타령)이라 하였으며 후날 항간에는 전설과 함께 수많은 방아타령이 생겨나게 되였다.

전설은 음악명인 백결선생의 가난한 살림형편을 통하여 당대 천민재사의 사회적처지를 여실히 보여주고있으며 세월의 흐름에도 묻혀지지 않은 그의 재능에 대하여 오늘까지 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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