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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남녀의 사랑과 의리를 반영한 전설
우리 나라 인물전설중에는 청춘남녀의 의리와 사랑을 보여주는 전설들이 많아 구전으로 전해지고있을뿐아니라 력사책과 패설집들에도 적지 않게 서사화되여 내려온다. 온달과 평강공주, 호동왕자와 락랑공주, 서동과 선화공주처럼 기이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랑이야기를 담은 전설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우릉과 소미처럼 나라지킬 무술을 익혀가는 과정에 꽃피운 사랑의 전설도 있다. 그리고 백운과 제후처럼 어떤 불행이 닥쳐와도 맺은 사랑을 변치 않고 꽃피워간 전설도 전해지고있다.1 온달과 평강공주
전설은 실재한 사실에 기초한것으로서 처음엔 《삼국사기》 권45 렬전6에 《온달》로 기사화되여 내려오다가 각종 사화집, 전기작품, 명인전들에 실려 윤색되여 소설화되기까지 하였다. 온달은 당시 평양성밖의 어느 산간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일찌기 아버지를 잃고 눈먼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릴 때부터 가난에 쪼들려 풀죽으로 때식을 에우며 근근히 살아가고있었다. 산전을 일구어 낟알을 얻어 풀죽을 쑤어먹는것도 그에게는 다행이였다. 흉년이 들면 그것도 없어 느릅나무껍질과 칡뿌리로 때식을 이어나갔고 어머니를 봉양하느라고 쌍욕을 먹어가며 밥을 빌러 다니기도 하였다. 해진 옷에 다 꿰진 신발을 끌며 큰 나무단을 진 온달이 장마당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측은하여 혀를 차며 동정하는가 하면 남달리 허우대큰 그의 신상을 살펴보고는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바보인가보다 하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철부지애들까지도 그를 보고 《바보 온달》이라며 떠들썩 따라다니군 하였다. 온달이가 높이 쌓은 나무단지게를 메고 평양성안의 장마당에 나타나면 작은 다락집채가 움직이는듯 하여 모두들 《바보 온달》이 나무팔러 온줄 제꺽 알아보고 모여들어 수군대군 하였다. 관속들까지도 말을 시켜보고는 정신은 온전한것 같은데 거지행색으로 장마당에 드나드니 장사같은 그 기골이 아쉽다고 혀를 찼다. 한입 건너 두입 건너 《바보 온달》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덧 온 평양성에 퍼지게 되였고 나중에는 궁중관리는 물론 평강왕의 귀에까지 그 소문이 닿게 되였다. 마침 어린 공주가 너무도 잘 울어 성가시던차라 왕은 공주를 달래다못해 롱말삼아 《네가 늘 울어서 나의 귀를 솔게 하니 커서도 점잖은 사람의 안해가 되지 못할진대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야 하겠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롱담으로 한것인데 그후에는 입버릇처럼 어린 딸이 보채고 울 때면 매번 그 말을 곱씹어하였다. 그래서 어린 공주도 그 말이 어느덧 귀에 인박히게 되였다. 세월의 흐름속에 공주는 예쁘게 자라 꽃나이 16살에 이르렀다. 평강왕은 공주에게 이제는 짝을 얻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두루 수소문한 끝에 상부 고씨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공주가 그 혼사자리를 마다하면서 부왕에게 이렇게 여쭈는것이였다. 《부왕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안해가 되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변경하시나이까? 보통사람도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사온데 하물며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찌 거짓말을 할수 있사오이까. 옛적부터 <임금은 롱담이 없다.>는 말이 있는줄로 아오이다. 부왕의 이 령은 그릇된것이므로 소녀는 받들수 없나이다.》 평강왕은 공주가 애써 주선한 혼사자리를 단호히 거부해나설뿐아니라 도리여 거짓말을 하려 한다고 핀잔까지 하니 그만에야 성이 독같이 나서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도저히 내 딸이라고 할수 없으니 어찌 한집에서 살겠느냐? 정 소원이라면 너 갈데로 가거라.》 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어쩔수 없게 된 공주는 자기가 간수하고있던 얼마간의 금팔찌며 은가락지 등속들을 싸들고 온달을 찾아 궁을 나섰다. 공주는 사람들에게 물으며 여기저기 헤매이다가 퍽 늦게야 온달이네 집에 찾아들게 되였다. 공주가 눈먼 늙으신 어머니에게로 다가가 절을 올리고나서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더니 온달의 어머니는 손더듬하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루추하여 귀인이 가까이 할만 한 사람이 못된다오. 그대의 냄새를 맡으매 꽃다운 향기가 보통이 아니며 그대의 손을 만지매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에 귀인인데 누구의 허튼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찾아왔을고? 내 자식은 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껍질을 벗기러 산속으로 간터이니…》 하고는 눈물이 글썽하여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기다리다 못해서 집을 나와 좁은 산길을 따라 나무가지를 헤치며 가던 공주는 한참만에야 느릅나무껍질을 지고오는 온달이를 만날수 있었다. 대번에 그의 람루한 차림과 장대한 기골을 알아본 공주는 자기가 찾아오게 된 사연과 심회를 사실대로 터놓았다. 그러나 온달이는 믿기 어려운 불의의 봉변을 당한지라 《여기는 어린 녀자들이 다닐데가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로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 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장달음으로 달아나버렸다. 공주는 쓸쓸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천천히 뒤따라와서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사립문바깥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온달모자에게 자세한 사연을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온달은 그제야 귀신이 아니라는것을 느꼈지만 공주라니 마음을 다잡을수 없어 이럴가 저럴가 뜻을 결정하지 못하고있는데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지리 못나 귀인의 짝이 될수 없고 내 집은 이렇게 험상하여 귀인이 있을 곳이 못되니 그런 생각 아예 말고 돌아가시오이다.》고 하였다. 공주는 자기를 념려하는 모자의 진정을 헤아려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말의 곡식도 찧어서 함께 먹을수 있고 한자의 베도 기워서 같이 입을수 있다.>고 하였으니 마음만 맞는다고 하면 어찌 꼭 부하고 귀하여야만 같이 살수 있겠나이까?!》 그리고는 자기가 가지고온 금은패물들을 내놓으며 이것을 팔아 살림을 꾸리자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온달과 평강공주의 기이한 인연이 맺어지게 되였다. 온달의 생활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람루한 차림에 나무단을 지고 장마당에나 다니던 온달이 새옷을 떨쳐입은 의젓한 모습으로 글도 배우고 무예도 닦으며 장부다운 생활을 하게 된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말을 사려고 길을 떠날 때 공주가 다정히 이르기를 저자거리사람들의 일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쓰던 병마로서 못쓰겠다고 파는 말중에서 골라 사오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비록 산중속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집을 번듯하게 꾸려놓은 온달이 산판에 말을 타고올라 활과 창을 쏘고 던지며 사냥에 흥취되여 하루해를 보내다가 저녁에 산짐승을 메고 집으로 돌아오면 공주가 살뜰히 맞아들이군 하였다. 공주와 온달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져갔다. 온달은 나라의 큰 장수가 되라는 공주의 당부를 잊지 않고 사냥술과 함께 창과 칼을 쓰는 무술과 병법도 착실히 익혀나갔다. 공주는 말을 룡마로 키우는 한편 온달이와 때로는 산에 같이 오르기도 하고 무장다운 용맹과 슬기를 키워가도록 고무하고 각별히 시중들면서 위안하였다. 남다른 기골에 투구와 무사복까지 입혀놓으니 온달이의 기상과 풍채는 과시 어느 한다하는 무장도 따를상싶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바뀌여 삼월삼질(음력 3월 3일)이 왔다. 고구려사람들은 이날이 오면 왕을 비롯한 5부의 장졸들이 락랑언덕에 다 모여 사냥경기를 크게 벌리군 하였다. 이 사냥경기에 온달이도 무사차림으로 나섰고 전에 공주와 혼사말이 났던 상부 고씨의 아들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한다하는 수많은 무사들이 출발선에 대기하고있었다. 사냥경기가 시작되였다. 바람을 일구며 질주하는 무사들을 보며 누가 장원할것인가 하고 모두들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고있었고 공주 역시 구경군들속에 몸을 숨기고 가슴을 조이고있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가 수많은 명궁장졸들을 멀리 떨구어놓고 많은 짐승을 잡아가지고 선참으로 들어서는 장수가 있었다. 경기판정을 맡아보던 판정관이 그를 맞아 1등으로 등록하고 《오늘 장원은 평양성밖 서민 온달로 아뢰오.》 하고 허리굽혀 왕에게 아뢰였다. 왕은 그 이름이 신통히도 같은지라 1등으로 장원한 그를 가까이 불러 《네가 그 소문난 <바보 온달>은 아니겠지?》 하고 물었다. 온달이 공손히 《소인이 그 <바보 온달>임을 아뢰나이다.》고 하자 왕은 너무도 놀랍고 기특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그 기골과 장대한 신상을 살펴보며 자기 처사를 몰래 한탄하였고 공주의 영특함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였다. 그후 외적이 침노하여 고구려땅에 쳐들어오자 왕은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전장에 나서게 되였다. 이때 온달이 적을 맞받아 선봉으로 달려나가 수십명의 적병을 삼대베듯 하니 뒤따르던 고구려군사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하여 달려드는 적병을 모조리 소멸하고 큰 승리를 안아왔다. 전쟁의 승리와 함께 전투공로를 평가하게 되였는데 장졸들이 한결같이 온달장수의 공로가 제일이라고 찬탄하며 그를 으뜸으로 천거하였다. 왕은 그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바라던바여서 온달의 손을 들어 《이 사람이 나의 사위로다.》 하고는 례의를 갖추어 영접하고 그에게 《대형》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이렇듯 미천한 온달이는 사냥경기에서 우승하여 장수로 등용되고 나라방위에서 큰 공훈을 세움으로써 마침내 온달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고 전설화되였다. 그후 온달장군은 고구려가 잃은 남쪽땅을 회복할것을 왕에게 간절히 청원하면서 백성들이 자기의 군현을 잃은것을 통분히 여기고있사오니 자기를 믿고 군사를 맡겨준다면 우리 땅을 꼭 회복하겠노라고 다짐하여나섰다. 왕은 온달의 용장다운 기개와 애국충정을 깊이 헤아려보고 그에게 군사를 떼여주어 출전케 하였다. 평양성밖의 산골에서 나무단이나 지고다니던 걸인장사가 나라의 어엿한 장수로 수만 장졸을 이끌고 출전의 길에 오를 때 평강공주는 손흔들어 멀리까지 바래우며 승전하고 돌아오기를 축복하였다. 국토회복의 싸움은 저항세력이 강하여 생각과는 달리 매우 치렬하였다. 그러나 용맹한 고구려군사들의 세찬 진격앞에 성을 지켜낼수 없게 된 적들은 남으로 도주하여 은거하여버렸다. 온달장군은 적이 도사리고있는 마지막지탱점까지 완전히 짓부시고 돌아가리라 결심다지고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나를 따르라고 웨쳤다. 최후결전인지라 적군은 성벽에 의지하여 련속 화살을 날리였다. 온달장군은 선봉에서 말을 달리며 날아오는 화살을 칼을 휘둘러 련속 꺾어버렸으나 너무도 많은 화살이 날아오기에 맨 앞장에서 그것을 다 막아낼수 없었다. 하여 용장은 말우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게 되였다. 수하장졸들은 너무나도 분통이 터지고 복수심이 치솟아 적진에 비호같이 날아들어 적들을 완전히 소멸하고는 장군의 시신을 에워싸고 울음을 터치였다. 싸움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전사한것을 애통히 여기며 장졸들은 저저마다 자기들이 선두에서 달리며 장군을 호위하지 못한 죄책으로 하여 더욱 서럽고 안타까와했다. 모두가 그렇듯 명성이 높았던 평민장수의 생이 짧음을 애통해하며 눈물을 쏟았다. 장례식을 끝마치고 발인하려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자 공주는 관에 손을 얹고 살뜰히 애무하며 《삶이 끝났사오니 아, 어이하랴. 부디 돌아가시오이다.》 하고 목메여 울음을 터치였다. 공주의 말을 듣고서야 관이 움직이였다. 하여 양지바른 산중턱에 곡성과 눈물로 흙이 다져져 큰 성묘가 이루어지고 자리잡게 되였다. 온달장군의 끓어넘치는 애국충정과 쌓아올린 군공은 력사의 갈피에 그대로 아로새겨져 세세년년 내려오면서 전설화되여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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